우리들은 구주희 놀이를 하는 사람
그리고 우리 자신들이 공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멸망하는 공이다.
천둥이 치는 구주희 놀이란
바로 우리들의 가슴이다.
- 볼프강 보르헤르트 「구주희 놀이」 중에서




   우리는 야만적이었다.


   태초에


   그들은 갓 눈을 뜬 상태였다. 그들 위로는 불이 일고 있는 검은 구름이 떠 있었다. 구름은 침을 흘리듯 불똥을 떨어뜨렸다. 살기를 띤 구름. 그들은 모로 누워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어느 순간 눈을 떴을 뿐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표정을 일그러트리곤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다른 목소리를 냈다. 그것은 그들 안에 있던 어떤 생각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불은 그들의 외침과는 별개로 뚝뚝 떨어졌다. 그들은 거세게 소리쳤다. 아쉽게도 그들 중 몇몇은 떨어지는 불에 타버렸다. 탄 자리에 그윽한 연기가 일었다. 매캐한 냄새가 났다. 결국 그들은 형제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깨달았다. 일어나야만 한다. 한쪽으로 몸을 엎드려 팔로 땅을 짚었다. 힘겹게 일어섰다. 하지만 그들은 걸을 수 없었다. 뒤뚱거렸다. 그들은 두 쌍의 다리와 팔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형체는 마치 두 명의 인간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꼭 붙어있었다. 불이 쿵, 하고 떨어질 때마다 놀라서 네 개의 팔을 휘적거렸다. 불로 인한 사상자는 늘어갔다. 그들은 비정했다.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한쪽 목을 숙이고 두 팔을 땅에 짚었다. 그리고는 물구나무를 서듯이 거꾸로 몸을 세웠다. 동시에 반대쪽에 있던 몸이 넘어가 다른 두 팔이 땅에 닿았다. 그것을 반복하다보니 구를 수 있었다. 남은 이들도 따라 구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불이 떨어지지 않는 숲을 향하여 굴렀다. 먼지가 일었다. 땅에 난 돌 때문에 구르던 그들의 몸에는 이따금 상처가 나기도 했다. 따가웠다. 그러나 굴러야만 했다. 살아야 했다.
   그들은 나무 밑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멈출 수 있었다. 나무를 등받이 삼아 일어섰다. 그들은 볼 수 있었다. 비처럼 떨어지는 불과 그것을 품은 구름. 그리고 형제들의 시체를.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릿한 냄새가 전역에서 풍겼다.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죽은 형제들보다 더 많은 이들이 살아남아 있었다. 그들 뒤로는 안개에 가려 끝이 보이지 않는 숲이 있었다. 그들은 생각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들은 두 개의 머리에서 동시에 사고했다. 홀로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나의 생각이 이것은 저주라고 말하자, 다른 하나는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가로막았다. 결국 그들은 말할 수 없었다. 결론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확실한 건 없었다. 그들 중 어떤 이가 허기가 졌는지 두 팔로 나무 잎사귀를 뜯어 먹었다. 우물거렸다. 그들은 따라서 잎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때, 그들 중 누군가가 불이 떨어지고 있던 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모두가 그곳을 쳐다봤다. 불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가랑비가 내렸다. 그들이 있는 곳에도 비가 내렸다. 한두 방울씩 그들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나무 사이로 어둠이 자라나고 있었다. 불의 흔적은 여전했다. 몸이 타서 사라진, 얼굴만 남은 시체도 보였다. 그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고개를 돌리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쪽에 난 얼굴은 그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재앙이었다.
   그들은 언제까지고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비를 피해야만 했다. 그들 중 한 명이 일어나 구르자, 모두 따라 굴렀다. 축축한 땅에 양팔을 돌려 짚으며 굴렀다. 그들은 제법 구르는 것에 익숙해졌다. 가장 앞서가던 이가 숲 주위를 구르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모두 동굴 안으로 모여들었다. 그곳은 빼곡했고 어두웠다. 그들은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겹쳤다. 그들은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안정을 찾아갔다. 이곳이야말로 그들이 도달해야 했던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손바닥에 난 상처를 얼굴에 닦았다. 그들은 숨죽이고 있었다. 누워있거나, 앉아있거나 기대서서.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들에게 미래는 없었다. 생존. 오직 생존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생후 첫날이 지나갔다.
   그들 중 하나가 눈을 떴다. 동굴 바깥쪽에 누워 있던 자였다. 그자의 인기척에 그들 중 몇 명도 따라 일어났다. 새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밖으로 굴러 나와 풀을 뜯어먹었다. 그러다 서로를 쳐다봤다. 그 순간 각자 몸의 생김새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이들은 형제였고, 남매이기도 했으며, 자매이기도 했다. 신기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들은 다시 나무 사이에 앉아서 풀을 뜯어 입에 넣고는 자근자근 씹었다.
   그들의 모방은 곧 습관이 됐다. 어떤 이가 앞장서서 뭔가를 하면 그 즉시 따라 했다. 한 번은 자매가 앞장서서 그들이 처음 태어났던 곳을 향해 갔다. 목을 집어넣고, 굴러서. 시체와 불의 흔적이 있긴 했으나, 그것이 그들의 형제였다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뼛조각을 집었다. 입에 넣고 깨물었다. 고개를 저었다. 자매는 더 나아갔다. 자매에게 있어 도달해야 할 곳은 동굴이 아니었다. 자매의 호기심은 그들이 새로운 광경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들은 굴렀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자매가 멈추자, 따라오던 이들도 멈췄다. 자매는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나는 곳을 쳐다봤다. 솨악 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 소리에 다른 이들이 웅얼거렸다. 소란스러웠다. 자매는 다시 굴렀다. 다른 이들도 따라 굴렀다. 까끌까끌한 모래가 그들 몸에 닿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수평선 너머로 덩그러니 떠 있는 시커먼 태양을 볼 수 있었다. 그 밑으로는 푸른빛을 두른 바다가 반짝였다. 그들은 환호했다. 두 개의 생각이 하나로 통일을 이뤘을 때만 나오는 기쁨의 포효였다. 바다 앞에 서서 네 개의 눈을 끔뻑거리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회고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생각한 걸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섬에서의 나날을 그렇게 회고했다.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위대한


   블라디미르가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었던 건 단 한 장의 흑백사진 덕분이었다. 그 사진 한 장으로 하여금 어느 식민지 전투기 조종사에 불과했던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자회견 비슷한 걸 열 수 있었다. 그는 사진을 공개하기 직전에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의 본명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가무잡잡한 피부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건장한 흑인이었다. 블라디미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왜 이름을 개명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블라디미르는 자신을 위선자라고 답했다. 덧붙여 위선이 세상을 바꿀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기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 흑인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잠자코 있기로 했다. 이 사진 한 장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모를 일이니까. 블라디미르는 기자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머쓱해졌는지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보던 기자들은 한숨을 쉬었다. 블라디미르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이제 사진을 보여드릴까 한다고 말했다. 어서 보여줘요. 기자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었으므로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블라디미르는 오케이, 라고 말하고는 뒤에 있는 스크린에 사진을 띄웠다.
   사진을 본 기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잠시 말을 잃었다. 한 기자가 사진 속 괴물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 질문을 시작으로 기자들은 어디서 촬영된 것이냐는 둥, 괴물들은 본인이 직접 본 거냐는 둥 쉴 새 없이 질문을 해댔다. 블라디미르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투명한 글라스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내는 플래시 때문에 약간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는 입을 열어야 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기원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기자들은 짜증 나니까 좀 알아듣게 답해달라고 말했다.
   알아듣게요? 어차피 당신들은 내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겁니다. 왜냐고요? 당신들은 이미 나와 사고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진 속 네 팔과 네 다리를 가진, 발가벗은 이들을 보면서 당신들은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겠죠. 여러분은 신의 자식들이니까요. 저들이야말로 우리의 기원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없어요. 모두 거짓말일 수도 있다고요. 저들은 우리와 닮아있습니다. 두 사람이 모여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는 것 말고는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요. 제 말이 아무도 설득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자리를 뜨지 말아 주세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남아있으니까요. 블라디미르는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진을 판매하겠습니다. 이 사진이 우리의 기원이라고 믿는 분들은 그에 적합한 가격을 제시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블라디미르는 기자석에서 날아온 구두에 머리를 맞고 기절했다. 기자들 중에 일부는 기절한 그에게 달려가 발길질하는 이들도 있었다. 블라디미르가 들고 있던 사진은 누군가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기자회견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그는 타박상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입원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종적을 감췄다. 블라디미르가 사라졌기 때문인지, 며칠간 사진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그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사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것은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겠죠. 블라디미르의 자국 상황을 담은 퍼포먼스 말입니다. 붕괴감은 곧 증오로 연결되니까요. 실제로 이 괴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이들도 있었다. 인도양 어느 섬에서 이런 괴물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세계는 넓어요. 글쎄, 아직도 이를 닦을 줄 모르는 나라도 있다니까요. 불결하게. 하지만 며칠 가지 않아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자, 그와 사진은 잊혀져갔다.
   그리고 삼십여 년이 흘렀다. 그사이 전쟁은 끝나있었다. 해마다 식민지들이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던 중에 우간다 출신의 어느 학자가 블라디미르를 재조명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블라디미르가 세계를 향해 내민 사진 한 장은 역시 행위 예술로 간주할 수 있으며, 그야말로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시대에 그것을 깨부수기 위한 선구적인 아티스트였다고 칭송했다. 학자는 블라디미르로 개명한 이유에 대해서는 세간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만일 그의 이름이 오투아였다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겁니다. 논문이 화제가 되자, 학자는 삼십여 년 전 블라디미르가 회견장에서 했던 말들과 사진에 대한 해석을 엮은 책을 냈다. 책의 내용을 참고하자면, 블라디미르가 연설 말미에 사진을 판매했던 행위에 대해서는 퍼포먼스로 간주할 수 있는데, 두 가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봤다. 이는 블라디미르 자국의 불우한 환경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자본주의 시장으로 넘어가고 있는 세계의 형국을 그는 사진 판매로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풍자죠, 풍자. 학자가 이렇게 출판한 책은 독립을 맞이한 여러 식민 국가에서 변역돼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학자는 직접 그 나라들에 초청을 받아 블라디미르에 대한 강연을 나가기도 했다. 더불어 그는 미국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한 대학에서 교수직 제안도 있었지만, 좀 더 편리한 환경에서 블라디미르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혹자들은 블라디미르에 대해 무엇을 더 연구해야 하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다. 학자는 그 질문에 대해서 단호하게 답했다. 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평생을 바쳐도 모자라요. 당신들은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아쉽게도 학자의 미국 생활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어느 봄 날, 블라디미르의 후견인이라고 주장하는 백인이 학자의 연구실로 찾아왔다. 학자는 막 점심으로 베트남식 쌀국수를 먹을 참이었다. 그의 앞에서는 하노이에서 데려온 베트남인 요리사가 면을 삶고 있었는데, 비서가 누군가 찾아왔다고 말한 것이다. 누구야. 좀 기다리라고 해. 밥은 먹어야지. 블라디미르의 후견인이라는데요. 그 말을 듣고 학자는 뒤통수가 싸했는데, 그건 어쩌면 본능적인 감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태초에 그들이 허기가 져서 풀을 씹어 먹었듯이. 학자는 요리사에게 이따 먹겠다고 하며 치우라고 말했다. 요리사는 두 시간 뒤에 비행기를 타고 베트남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죄송해요. 가야 해요. 그러면서 그는 그릇은 선물로 드리겠다고, 면이 불 수도 있으니 되도록 빨리 드시라고 조언했다. 알았으니까 빨리 가지고 나가요. 학자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요리사가 요리 기구를 치워서 나가자 연구실은 조용해졌다. 학자는 생각했다. 블라디미르의 후견인이라니. 블라디미르는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십 년 전에 종적을 감췄고, 아마 이집트의 어느 사막에서 백인들에 의해 사살당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후견인이라니. 제기랄. 학자는 어찌 됐든 빨리 일을 처리하고 쌀국수나 먹고 싶었다. 곧이어 비서의 안내를 받은 백인이 들어왔다. 노란 머리에 말끔한 정장 차림의 신사였다. 그는 미소를 띠우며 학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학자는 백인의 손을 잡으며, 그 미소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백인은 소파에 앉자마자 콜라를 요구했다. 콜라요? 네. 여기가 아프리카도 아니고 너무 덥네요. 콜라는 없는데, 커피는 어때요. 어떻게 콜라가 없죠. 그럼 냉커피로 주세요. 네. 학자는 비서를 시켜 냉커피를 가져오게 했다. 백인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학자는 백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요. 블라디미르님의 후견인이시라고요? 그런 셈이죠. 저, 그런데 박사님. 네. 그 콧수염은 일부러 기르신 거예요? 네? 백인은 학자의 콧수염을 가리키며 물었다. 박사님의 책 표지에 찍힌 사진에는 콧수염이 없었잖아요. 그건 무슨 권위의 상징이라도 되나 보죠? 백인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봐요. 대체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셨어요. 아, 다름이 아니라. 이걸 보시죠. 백인은 학자에게 서류를 내보이며 자신과 블라디미르는 법적으로 증명된 관계라고 말했다. 그런데요? 백인은 커피를 다시 한 모금을 들이켜고 말했다. 블라디미르는 이미 병으로 죽었어요. 그렇게 말한 뒤 백인은 양손을 모아 기도했다. 학자는 뭐 하자는 건가 하며 가만히 있었는데, 그런 그를 보고 백인이 말했다. 뭐하세요. 네? 애도의 시간을 가져야죠. 아, 네. 학자도 백인처럼 양손을 포개어 기도했다가, 나는 신을 믿지도 않는데 왜 이런 기도를 하고 있나 라는 생각에 그는 다시 손을 풀었다. 마침 백인도 기도를 마친 상태였다. 백인은 들고 온 가방에서 캠코더를 꺼냈다. 여기 좀 붙으시죠. 왜요? 블라디미르의 유언이자 조언입니다. 잘 들어봐요. 백인이 버튼을 누르자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 학자가 그토록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 사람, 블라디미르의 모습이 보였다. 민머리에 흰 와이셔츠를 입은 그는 해변가의 모래사장에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있었으며, 뒤로는 파도가 치고 있었다.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블라디미르는 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을 시작했다.
   당신의 해석은 모두 틀렸어요. 거짓말쟁이. 해석 중 유일하게 맞는 점이 있다면 괴물이 가짜라는 것밖에 없어요. 제국주의? 조국의 상황?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헛소리입니다. 나는 궁핍했고 부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에 우연히 괴상한 사진 한 장을 얻게 된 겁니다. 나는 그걸 얻자마자 팔려고 했어요. 회견을 열기 전까지 제 상사가 힘을 써줬죠. 이름을 유럽식으로 바꾸고, 기자들을 모이게 하기 위해 정보를 흘렸습니다. 하긴, 미련한 제 머릿속에서 어떻게 그런 아이디어들이 나왔겠습니까. 난 돈을 벌고 싶었어요. 지긋지긋한 이 땅에서 벗어나 남들처럼 풍족하게 살고 싶었다고요. 당신이 살고 있는 미국 같은 곳에 가서 말입니다. 뭐, 이제 와서 밝히기 좀 쪽팔리군요. 어쨌든 사설이 길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부탁 하나 하겠습니다. 당신이 낸 책들을 모두 파기해주세요. 이건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겁니다. 난 당신의 해석대로 기억되고 싶지 않습니다. 난 당신의 노리개가 아닙니다. 당신에게 질문할 권한은 없습니다. 당신은 거짓말쟁이니까요. 모두 파기해주세요.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상입니다.
   영상 속 블라디미르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뭔가를 더 말하려는 순간 영상은 끝나버렸다. 학자는 콧수염을 한 번 매만지더니, 눈을 굴렸다. 그가 급히 머리를 써야 할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가장 먼저 의문이 드는 점은 저 사람이 블라디미르가 맞는지에 대한 사실 여부였다. 수상한 측면이 많았다. 이전까지 블라디미르로 공개된 사진은 단 한 장뿐이며, 그것도 연설 당시에 기자가 실수로 찍은 것이다. 사진 속 블라디미르와 영상 속 블라디미르의 모습은 닮아있기는 하나, 저렇게 닮은 사람을 찾아내는 것쯤은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생뚱맞게 그가 해변에 있다는 점과 영상 말미에 블라디미르의 표정도 미심쩍었다. 아마도 그는 아직 할 이야기가 더 남아있는데, 누군가가 중단해버린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학자는 자기도 모르게 부정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막대한 재산과 명예를 얻게 해준 블라디미르라는 존재를.
   이봐요. 백인이 말했다. 네. 콜라는 정말 없는 거죠? 네. 그럼 어떻게 할 작정이시죠? 뭘요. 이봐요. 네. 이래 봬도 저도 바쁜 사람입니다.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많아요. 백인은 다리를 꼬고 앉아 학자를 노려봤다. 저 사람이 정말 블라디미르가 맞아요? 네. 제가 장난치겠습니까. 믿을 수 없군요. 촬영은 당신이 한 건가요? 아니요. 그럼 누가 했어요. 그 부분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죠. 말씀드릴 수 없으니까요.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촬영한 곳은 어디예요. 저기요. 네. 책들을 파기할 건가요? 네? 빨리요. 뭘요. 아, 이 사람 참 답답하네. 뭐가요. 딱 잘라 물을게요. 파기해요, 안 해요. 전 할 수 없습니다. 어쩔 건데요. 학자는 법적인 재판까지 치를 것을 각오하고 말했다. 기나긴 싸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학자의 생각과는 달리 백인은 하하거리며 웃더니, 그럼 안녕히 계시라고 말하고는 일어났다. 학자는 문으로 걸어가고 있는 백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 사람도 내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몰라 당황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자는 그 생각에 입꼬리를 살짝 올렸는데, 그 순간 백인이 뒤돌아 가방에서 총을 꺼내 그의 이마를 향해 쐈다. 학자는 그대로 즉사해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요리사의 충고를 무시한 셈이다. 별실에 둔 쌀국수는 이미 불어 터져있었으니까.
   이후로 블라디미르의 존재는 다시 역사 속에 파묻혔다. 발간된 책들은 모두 파기됐다.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그 어떤 누구도 약속이나 한 듯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후일에 그는 완벽히 잊혀졌다. 영상 속 블라디미르가 원했던 대로.


   구주희 놀이


   게임이 시작된 건 식사가 끝난 뒤였다.
   나는 도착하고 나서 줄곧 속이 좋지 않아 점심도 거른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장시간의 비행에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휴가를 떠난다는 설렘 비슷한 게 남아 있었는데, 비행시간만 열두 시간이 넘어가자 얼굴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지금까지 내게 있어 비행기는 학교 운동장에서 날리던 고무동력기가 전부였다. 거짓말도 많이 해본 사람이 잘한다고, 머리가 어지러운 건 어쩌면 당연한 증상이었다.
   호텔의 열린 창문 틈으로 가벼운 바람이 불어왔다. 밖에서는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가끔씩 중국인들의 대화 소리도 들려왔다. 참 웃긴 일이다. 불과 반나절 전만 해도 나는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반지하에 누워 어머니의 코 고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멀미는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나를 제외한 사물들이 빙그르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 입술을 깨물고 침대의 양 모서리를 붙잡았다. 한참을 눈감고 있다 보니 어지러운 증세가 약간 사라졌다. 어느 정도 괜찮아지자 출발하는 날 아침까지 잔소리를 해댔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캐리어 앞주머니에 키미테를 넣어 뒀으니 비행기에 타면 꼭 하는 걸 잊지 말라고 말했다. 내가 고개만 끄덕이자, 그녀는 의사 표현을 똑바로 하라고, 그런 식으로 하다가는 천사장님의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알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한숨은 왜 쉬어? 내 말 듣는 게 싫어?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죄송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근래에 들어 어머니는 걱정을 일부러 만들어내면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뒤로, 그녀는 하나 남은 자식인 나까지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미래에 벌어질 모든 일을 두려워했다. 한번은 밤중에 치킨을 먹고 있던 나를 보더니 정말 그렇게 먹으면 지방간 수치가 높아져 숨쉬기가 곤란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날은 금요일 밤이었고, 치킨은 한 달 만에, 그것도 서비스를 받아 삼천 원 할인된 금액으로 시킨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번 휴가에 대해서도 우리 형편에 무슨 해외여행이냐며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천사장님이 모든 경비를 다 대주신다고 했잖아요. 그래? 네. 아니, 그럼 남들 다 가는 하와이나 동남아 같은 곳에 가지 뭐하러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섬에 가? 어머니. 저도 이제 다 컸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분명 그녀는 내가 이렇게 두 다리 쭉 뻗고 침대에 누워 있는 이 시간에도, 양손을 포개고 아들의 무사 귀환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이제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나 휴가를 함께 보내자는 천사장의 말은 무척 낯설어 거짓말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천사장은 내 고객 중 한 사람으로 중국인이다. 그가 한국에서 무슨 사업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천사장이 말하길 죽을 때까지 쓸 돈은 이미 다 벌어놨으며, 은호씨에게 소설 창작을 배우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취미생활이라고 했다. 즐기는 거죠. 그러니까 너무 까지 말라고요. 천사장은 유창한 한국어로, 은어까지 적절히 섞어가며 말했다. 나는 무척 넓어서 고요하기까지 한 그의 집을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왠지 모르겠지만 저는 은호씨가 마음에 들어요. 천사장은 자신의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듬직한 체구에 딱 달라붙은 와이셔츠를 입은 그가 나도 그리 나빠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일 년이 넘도록 마당에 차우차우 두 마리가 사는, 갈 때마다 주인의 선생도 못 알아보고 짖는 그 멍청한 개들이 사는, 천사장의 집을 일주일에 한 번씩 빠지지 않고 방문했다. 우리는 세 시간가량 수업했다. 물론 그 시간 동안 끔찍하게 소설을 잘 쓰기 위한 탐구만을 논한 건 아니었다. 그는 가끔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나는 운명을 믿어요. 그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운명이요? 그래요, 운명. 우리의 상대는 이미 정해져있어요. 아주 오랜 옛날, 태초부터 정해져있었던 거죠. 사장님의 운명의 상대는 누군데요? 음.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직 만나지 못했어요. 하지만 언젠간 만날 겁니다. 만났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 그렇구나 라고는 말했지만, 속으로 역시 돈을 버는 게 만만치 않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에도 고개를 끄덕여야 했으니까.
   천사장의 소설은 중국인답게 스케일이 웅장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야말로 취미생활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두 쌍의 팔과 다리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괴물 이야기를 쓰질 않나, 이언 플래밍의 소설을 어설프게 따라 한 스파이 소설을 쓰질 않나. 난 처음부터 소설을 다시 써야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취미생활이었으므로 약간만 수정하면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등을 맞대고 있는 괴물은 좀 상상이 가지 않네요. 그리고 구름에서 불이 어떻게 떨어져요. 요즘은 소설도 막 써서는 안 돼요. 과학적인 부분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뭐, 여기까지 서사를 끌고 오셨다는 점은 칭찬할 만한 거니까 너무 기죽지 마시고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천사장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웃으며 민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보니 일 년 동안 그의 머리카락이 자라있던 걸 본 적이 없다. 아마 적절한 시기마다 이발을 해왔을 것이다. 그래도 있을 법하지 않나요? 뭐가요? 이 친구들 말이에요. 우리가 모르는 외딴 섬에서 네팔로 굴러다니며 풀을 뜯어먹고 있을지 모를 일이잖아요. 천사장님. 네. 없어요. 왜요? 인터넷에 검색해봐요. 안 나와요. 정말로요? 그럼요. 알겠어요. 그럼 고칠게요. 천사장은 가끔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첫 만남 때 그가 너무 까지 말라고 했던 말을 종종 잊어버렸다. 천사장의 고집은 그가 쓴 다른 소설에서도 계속됐다. 인종 문제는 너무 올드해요. 올드요? 낡았다는 말인가요. 네. 요즘 누가 인종 문제로 소설을 써요. 대세를 따라야 합니다.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말이죠. 묘사에 좀 더 치중한 소설을 써 봐요. 또 주인공이 킬러에게 총을 맞고 즉사하는 결말은 서점에 있는 어느 스파이 소설을 찾아봐도 똑같을 거예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천사장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요? 나는 생각이 달라요. 이 사람이 꼭 죽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왜죠? 거짓말을 했잖아요. 이런, 그런다고 죽여요? 네. 그럼 너무 진부하잖아요. 그런가요? 그럼요. 다시 고쳐볼게요.
   그래도 나는 천사장 덕분에 아버지가 우리에게 떠넘기고 간 빚을 어느 정도 갚을 수 있었고, 비록 반지하지만 어머니와 함께 전셋집으로 이사할 수 있게 됐다. 그런 천사장이 휴가를 함께 보내고 싶다고 제안해온 것이다. 회사에는 제가 말할게요. 꼭 같이 가고 싶거든요. 은호씨만 오케이하면 돼요. 당신들 같으면 이처럼 은혜로운 천사장의 제안을 어떻게 거절할 것인가. 나는 사장님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다고 말했다. 그럼 어디로 가는데요? 천사장은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어디요? 저기 저, 남쪽이요. 남쪽이면 제주도요? 아니, 그보다 밑이요. 아, 일본? 아니, 그보다 더 밑. 호주요? 음. 거기보단 윈가. 사실 제가 속한 모임에서 소유한 작은 섬에 가는 거예요. 매년 가는 휴양지죠. 올해는 은호씨와 함께 가보고 싶네요. 거기까지는 어떻게 가는데요. 일단 상해에 가서 전용기를 갈아타야 해요. 걱정 말아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은호씨는 몸만 오면 돼요. 재밌는 여행이 될 겁니다. 보장해요. 아, 여권은 들고 오셔야겠죠?
   태어나서 한반도를 한 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는 나에게 이름도 없는 섬에 전용기까지 타고 가자고 하니,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유난 때문에 오히려 주저하지 않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어머니는 뭘 믿고 그런 곳에 가냐고, 혹시 가서 유괴라도 당하면 자긴 어떻게 하냐고 난리를 떨었다. 나는 상관없다고, 천사장님이 잘 해주실 거라고, 우리는 일 년이나 함께 일한 사이라고 말했다. 상해로 가는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천사장은 담배를 태우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대신 전용기를 타면 필 수 있어요. 그러고는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지금요? 네. 좋아요.
   우리는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공항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검은 벤을 타고 이동했다. 나는 주춤거렸지만, 잘 따라갔다. 차창 너머로는 안쪽에 썬텐이 된 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미로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차가 멈춘 곳은 바다가 보이는 공터였는데, 전용기가 미리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전용기에 탑승했다. 버스를 환승하는 것과 같이 간단한 일이었다. 이미 안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중국인들이었고, 천사장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내게 영어로 말을 걸었는데, 영어를 못 하는 나로서는 짧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주로 천사장과만 대화했다. 그들의 연령층은 다양했다. 노부부부터 젊은 부부, 혼자 온 남자와 여자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반듯한 정장 차림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마트에서 사온 꽃이 그려진 남방을 입고 있었다. 곧 전용기가 이륙했고, 여덟 시간의 비행 끝에 이 섬에 도착했다. 전용기 창문 밖으로 모습을 보인 섬은 작고 깨끗했다. 수림이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더라도 공기가 맑을 것 같았다. 하긴, 여기까지 날아왔는데 맑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전용기는 모래사장에 착륙했다. 호텔 지배인인 노란 머리의 서양인이 우리를 맞았다. 우리는 그 사람을 따라 섬 중앙에 위치한 호텔을 향해 올라갔다. 천사장은 그곳이 우리가 묶게 될 숙소라고 내게 말했다. 길은 나무 사이로 나 있었다. 걷는 동안 사방에 있는 소나무에서 솔향이 풍겨왔다.
   호텔은 삼 층짜리 건물이었고, 강남이나 여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회색빛 빌딩이었다. 딱히 특색은 없었다. 건물 옆으로 나무들을 직접 벌목해서 만든 것 같은 둥그런 동산 같은 게 있었는데 미니 골프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듯 보였다.
   호텔 프런트에서는 직원들이 우리를 반겼다. 모두 피부가 창백한 백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마치 내가 천사장의 소설을 합평할 때처럼. 우리는 키를 건네받고 캐리어를 드르륵 끌며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천사장과 나는 같은 방을 썼다. 퀸사이즈 침대 두 대에 욕실과 티브이가 구비되어 있었다. 창문 밖으로는 바다가 보였다. 천사장의 말에 따르면 이 섬은 인도양에 위치한 곳이라고 했다. 20세기 어떤 비행기 조종사가 우연히 이 섬을 처음 발견했고, 21세기 들어 중국인이 이곳을 인수한 뒤로 줄곧 그들만의 섬으로 관리 돼 왔다고 한다. 그 말을 하는 그를 보면서 지금껏 내가 알아온, 민머리에 이상한 소설을 써대는, 천사장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엄연한 중국인 부호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지금 침대에 누워있다. 몸을 엎드려 팔에 이마를 댔다. 정신이 조금씩 자리 잡아갔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가볍게 문을 두 번 두드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천사장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몸은 어때요. 그는 내게로 다가와서 물었다. 네. 좀 누워 있었더니 좋아졌어요. 다행이군요. 괜히 걱정 끼쳐드렸네요. 아닙니다. 그럼 혹시 괜찮으시면 밖에 게임하러 나가시지 않겠어요? 게임이요? 네. 여기서만 할 수 있는 게임이 있거든요. 그게 뭔데요? 구주희요. 구주희요? 볼링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천사장은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한번 해보고 싶네요. 좋습니다. 이제 막 출발할 거에요. 지금 준비해서 로비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네, 알겠어요.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담배 연기를 뿜으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어머니가 사준 꽃 남방을 벗고 혹시나 해서 챙겨온 흰색 와이셔츠를 입었다. 간단히 세수를 한 뒤, 시계를 차고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에는 중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있었다.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니까 그들 중 하나가 몸은 어떠냐고 물어왔다. 나는 뎃츠 오케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활동하기에 편한 캐주얼한 반팔 티를 입고 있었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와이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노란머리의 지배인이 우리를 밖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들어오기 전에 봤던 호텔 옆에 있는 라운지로 갔다. 그곳에는 빛을 머금은 잘 깎인 녹색 잔디가 펼쳐져있었고, 한쪽에는 햇빛을 피할 수 있는 벤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중국인들은 일단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나도 천사장을 따라 앉았다. 곧 호텔 직원들이 와서 우리에게 얼음이 들어간 콜라를 한 잔씩 건넸다. 나는 글라스에 담긴 차가운 콜라를 마시며, 당구장에서 서비스로 나오는 종이컵에 담긴 탄산음료를 생각했다. 이것과 그게 다를 건 또 없지.
   천사장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나도 다리를 꼬았다. 그들은 화창한 날씨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했다. 아무 쓸모도 없는 그런 얘기들이었다. 그 사이 잔디밭에는 아홉 개의 대형 핀이 설치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볼링이긴 한데 사이즈가 꽤 큰 공으로 하려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지배인이 다가와서 준비가 다 됐다고 말했다. 중국인들이 박수를 쳤다. 그러자 멀리서 곰의 탈과 복장을 쓴 사람들이 달려 나와 중국인들 앞에 섰다. 나는 여기가 놀이동산도 아닌데 무슨 쇼를 하나 싶었다. 곰은 입꼬리를 양쪽으로 올린 채 웃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허리를 여러 번 숙여가며 인사했다. 중국인들은 그게 뭐가 웃긴지 깔깔거렸다. 천사장까지도 웃고 있어서, 나도 억지로 미소를 띠었다. 곰들은 우리가 조금 진정된 것이 보이자 뒤돌아 앉아 몸을 웅크렸다.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지배인이 말했다. 그 말에 늙은 중국인 한 명이 곰들 뒤로 느릿느릿 걸어 나갔다. 그는 발목을 한 번 돌리더니, 우리를 힐끗 쳐다봤다. 내가 하는 걸 잘 봐두라는 듯이. 그리고는 웅크리고 있는 곰을 발로 찼다. 중국인의 발길질에 곰은 핀이 있는 곳까지 굴러갔다. 나이스 샷. 곰이 핀에 부딪치자 일곱 개의 핀이 엎어졌다. 사람들이 말했다. 나이스 샷. 나는 가만히 있었다. 천사장은 처음에만 어색하지, 해보면 재밌다고 말했다. 이번엔 그가 직접 앞으로 나갔다. 쓰러진 핀은 어느새 다시 세워져 있었다. 굴러간 곰도 뛰어서 돌아왔다. 전 이놈으로 해야겠어요. 천사장이 공을 고르듯 엎드려 있는 곰 중 하나를 골라 뒤에 섰다. 그도 발목을 한 번 돌렸다. 그리고 곰을 발로 찼다. 곰은 방금 전 곰보다 더 빠르게 굴러서 핀에 부딪쳤다. 아홉 개의 핀이 모두 쓰러지자, 중국인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쳤다. 나도 얼떨결에 일어났다. 곰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결국 내 차례가 됐다. 곰 앞에 섰다. 자세히 보니, 곰은 벌벌 떨고 있었다. 내가 주춤거릴수록 중국인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역할놀이를 하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곰은 공의 역할을. 나는 선수의 역할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곰을 발로 살짝 찼다. 내가 찬 곰은 굴러서 여덟 개의 핀을 쓰러트렸다. 또다시 중국인들이 박수를 쳐줬다. 나는 축구와 볼링을 동시에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 차례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온 힘을 다해 곰을 차버렸다. 이번에는 여섯 개의 핀을 쓰러트렸다. 나는 곰에게 욕을 퍼부었다. 앞서 두 개의 핀을 쓰러트린 중국인이 했던 것처럼. 물론 한국어로 했기 때문에 곰들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탈 안에 정말 인간이 들어가 있는 거라면 말이다.
   우리는 각자 여섯 번씩 곰을 차고 호텔로 돌아왔다. 방에 돌아와서 천사장은 내가 처음치고는 구주희를 잘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정말요? 고마워요. 그나저나 천사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하세요? 저요? 여기 올 때마다 하니까 잘하게 되더라고요. 소설도 못 쓰는데 이거라도 잘해야죠. 에이, 왜 그러세요. 농담입니다. 농담. 우리는 잠깐 웃었고, 옷을 갈아입은 후 저녁 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저녁은 스테이크에 와인을 곁들여 마셨다. 백인 요리사들은 돌아다니며 비어있는 잔에 와인을 따라줬다. 나는 되지 않는 영어 단어를 섞어가며 내일도 게임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나가서 하고 싶어요. 이 말에 중국인 한 명이 그럼 지금 또 하자고 말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못할 게 뭐 있어요. 중국인은 지배인에게 당장 구주희를 준비하라고 말했다. 나의 말 한마디에 한밤중에 게임은 다시 시작됐다. 지배인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나와 천사장, 그리고 중국인 세 명이 함께 벤치에 앉았다. 라운지는 조명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선선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금세 아홉 개의 핀이 세워졌다. 그리고 곰의 탈을 쓴 이들이 나와서 낮에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인사했다. 나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곰들은 역시나 웃고 있었다. 그들은 곧 몸을 웅크렸다.
   우리의 게임은 새벽까지 계속됐고, 나는 수많은 발길질 중 한 번밖에 스트라이크를 내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디까지나 내가 그 게임을 하는 데 있어 쾌감을 느끼는 건, 곰을 찰 때 내 발과 곰의 엉덩이가 닿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점수가 조금 아쉽긴 했지만, 내일 할 때는 더 늘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다이어트. 그래요. 이게 다이어트도 되겠네요. 좋은 스포츠예요. 나는 방으로 돌아와 천사장에게 말했다. 그렇군요. 천사장은 화장품을 바르고 침대에 누웠다. 힘을 줘서 찬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닌 거 같아요. 물론 힘을 줘서 잘 되는 경우도 있지만, 천사장님 차는 걸 보니까 약간 곰의 엉덩이 밑 부분을 차는 것도 좋은 거 같아요. 맞아요. 은호씨는 이 게임이 무척 마음에 들었나보군요. 그럼요. 내일도 하겠죠? 그렇겠죠. 아침에 다시 해요. 그때는 잘해볼게요. 아침은 힘들 걸요. 왜요? 그들도 쉬어야죠. 그들이요? 누구요? 곰들이요. 아, 곰. 곰이 있었죠. 천사장이 불 좀 꺼주시면 안 되냐고 물어왔다. 네, 제가 끌게요. 불을 끄자 창문으로 달빛이 환하게 비춰왔다. 나는 천사장에게 안녕히 주무시라고 말했다. 천사장은 벌써 잠들었는지 말이 없었다. 밤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더 집중하면 바닷물이 떠밀려왔다가 나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무언가 타고 있는 냄새, 비린내, 누군가의 땀 냄새. 별장의 온갖 별난 냄새들이 방 안으로 풍겨 들어왔다. 나는 구주희에 대해서 천사장에게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었다. 눈을 감았다. 머릿속엔 온통 곰을 어떻게 하면 잘 구르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아무래도 어떤 곰을 선택하느냐도 중요해 보였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때였을까. 천사장이 말했다. 아직도 믿지 않아요? 나는 벌떡 일어나 그를 바라봤다. 뭐가요? 천사장은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들 말이에요. 무슨 이야기요? 내가 만든 이야기요. 나는 천사장의 소설을 생각했다. 그의 소설을 생각하면 할수록 곰이 구르는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곰은 핀을 향해 구르고 있지 않았다. 곰은 정처 없이 굴렀다. 구르다가 쓰고 있던 탈이 벗겨졌다. 탈 안에는 인간이 있었다. 나는 그 인간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은호씨. 천사장이 다시 말을 걸었다. 네. 정말 믿지 않아요?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죄송해요. 알겠어요. 천사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돌려 엎드렸다. 그리고 말했다. 등에서 뭔가 떨어져나간 것같이 가려운데, 혹시 긁어주실 수 있겠냐고.

이동현

세계적인 록밴드 ‘머저리들’의 유일한 히트곡 <울라울라쇼>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믿을 수 있을 만큼 믿어라. 그래요. 저는 믿을 수 있을 만큼만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8/07/31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