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영은 결국 나를 안락사 시키기로 결정했다.

   해영의 책상에 놓아둔 에이포 용지 크기의 작은 어항 속에서 나는 알이었다. 프론 센터에서 몇 가지 심리 검사와 이상형에 대한 인터뷰를 마치고 나면 고객에게 맞춘 프론 알을 구입할 수 있었다. 한 상자에 들어있는 프론 알 개수는 평균 이백 개에서 삼백오십 개였다. 프론은 환경에 매우 예민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상자에 들어있는 알이 모두 부화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해영의 방 안의 조도와 온도, 습도, 소음 레벨을 견딜 수 있는 운 좋은 프론이었기 때문에 스물 남짓한 다른 프론들과 함께 인간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우리는 새우의 형태로 태어났다. 까맣고 작은 눈이 양쪽에 달려있고 굽은 등과 수십 개의 다리를 가진 새우의 모습으로. 얇은 껍질로 쌓인 투명한 몸 안쪽에서는 인간이 되기 위한 변이가 쉴 새 없이 이뤄지고 있었다. 해영이 어항 안으로 뿌려준 먹이를 소화시키며 스무 마리 남짓의 새우들이 인간이 되려는 이유는 하나였다. 나를 키워준 인간을 사랑하는 것. 진심을 다해서.

   해영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해영의 손가락 사이로 나의 머리칼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젯밤에도 해영은 울었다. 이제는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울었다. 해영을 안아주려고 다가갔는데, 해영은 내 가슴을 쥐어뜯으며 티셔츠를 찢었다. 네가 이해할 수 있어? 네가 내 감정을 느낄 수나 있어? 해영은 이렇게 말하며 울부짖었다. 해영이 티셔츠를 찢으면서 손톱으로 내 피부를 긁었다. 붉은 손톱자국이 가슴 위에 길게 생겼고, 따가웠다. 해영의 마음이 적어도 이것보다 더 아플 거라는 걸 알았다. 그 정도만 알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인간도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헤아릴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영이 매일 밤 술을 마시고 울고 무언가를 부순다는 걸 알았다. 해영 앞에서 나는 매일 프론의 한계를 인식했다. 그러면 가슴 위에 생긴 상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쓰라렸다. 이해할 수 없어도 나는 여전히 해영을 사랑했다.
   “노래 불러줘.”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해영이 말했다.
   “노래?”
   나는 다시 묻고 대답했다.
   “부를 줄 아는 노래가 없어.”
   “그 노래 있잖아, 네가 어항 속에 살 때 불렀던 노래.”
   나는 촉촉해진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말했다.
   “장송곡?”
   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함께 태어났던 스무 마리 새우들에 대한 기억이 거의 나지 않았다. 인간으로 치면 다섯 살도 안 된 어린아이 시절이라 기억을 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우리는 아주 미세한 차이만을 제외하면 같은 유전자로 태어난 프론들이기 때문에 생김새도 똑같았다. 서로 구분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 이름도 없었다. 이름 같은 건 온전한 인간화를 마친 프론만 가질 수 있었다.
   인간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새우 머리의 변화로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머리는 인면어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부화한 뒤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인간화가 되지 못한 프론들은 힘없이 어항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투명한 몸도 탁한 색을 띠었고 몸이 금세 딱딱하게 굳었다. 사체들은 남은 프론이 헤엄을 치며 만든 물결에 따라 서로 부딪히고 부딪혀 가루가 되었다. 나를 포함한 열댓 마리 프론들은 그 장면을 신생아의 얼굴을 하고 바라보았다. 콧대가 자라지 않은 작은 콧구멍 두 개와 미약하나마 깜빡일 수 있는 눈꺼풀, 아주 얇은 입술을 가진 허술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목적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다.
   흰자와 검은자가 구분이 되는 눈을 갖고 짧지만 목이 생겨 고개를 좌우로 돌릴 수 있을 쯤에는 우리에게도 감정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이때부터는 프론끼리 짧은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해영이의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거나, 해영이가 방 안 침대에 앉아 흐느끼고 있으면 무슨 일일까 서로 물어본다거나, 이런 것들이 주된 대화 주제였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까지 함께 대화를 나누던 친구도 저녁이 되면 헤엄칠 방향을 잃고 빙빙 돌다가 어항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가라앉았다. 대여섯 마리의 프론들이 일주일 사이에 가루가 되었다. 남은 프론들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우리는 그 감정을 공유하기 위해 동그랗게 모여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성대는 거의 다 자랐지만 폐가 아직 자라는 중이었기 때문에 큰 소리는 낼 수 없었다. 그저 낮고 조그마한 음을 규칙적인 박자로 낼 수 있을 뿐이었다. 이것이 장송곡이라는 것은 나중에 인간 교육을 받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우우우-, 하고 울었다. 해영에게는 우우우-, 하는 노랫소리로 들렸겠지만. 해영이 나의 울음소리를 듣기 좋은 노랫소리라고 생각한다면 종일 울어줄 수도 있었다. 해영은 나를 안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건조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몸짓. 인간의 피부는 정말 놀라운 힘을 갖고 있었다. 온기. 인간은 상대방에게 전해줄 수 있는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어항 속에서는 모두의 몸이 차가웠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 있는 열에너지에 대해서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완전한 인간화를 마쳤지만 나는 종종 내 몸이 지나치게 차다는 걸 알았다. 해영이 가끔 나의 손을 만지며 화들짝 놀랐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속죄하듯 양손을 열심히 비볐다. 다른 인간들처럼, 어미의 양수 속에서 태어났다면 달랐을 것이다.
   나는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을 보고 웃었다. 입꼬리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세수를 했고 꼼꼼히 면도도 했다. 무쌍꺼풀 눈, 코끝이 뾰족한 아주 적당한 크기의 코, 얇게 패인 인중과 그 밑에 연분홍빛 얇은 입술, 희고 깨끗한 피부, 연갈색 머리칼.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해영이 원한 것들이었다. 몇 번의 인터뷰와 진보된 의학기술로 만들어졌지만, 이것들은 모두 해영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눈코입이 퇴역군인의 훈장만큼이나 소중하고 자랑스러웠다. 적어도 외적인 부분에 있어서 해영의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이 세상에서 나 하나뿐이라는 뜻이니까. 한참 동안 거울 속에 내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데, 해영이 오늘 입고 갈 옷을 골랐다고 소리쳤다.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프론 센터에서 태어났으니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기뻐해야 할까. 나는 하얗고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과 높은 천장에 달린 값비싼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며 어깨 근육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센터의 내부는 대형병원과 비슷했다. 손에 닿는 모든 것이 밝고 매끈하고 깨끗했다. 소독약과 라벤더 방향제가 섞인 냄새가 센터 곳곳에 떠다녔다. 해영은 접수대에서 접수를 마치고 카페에서 기다리자고 했다. 카페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기다란 의자가 놓인 휴게실이 있었고, 벽면에 붙은 텔레비전에서는 프론 관련 다큐멘터리가 방송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사랑이 없는 시대의 인공사랑>이었다. 한눈에 봐도 미인형인 여성 프론과 함께 소파에 앉은 남자는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다리가 없는 인간은 의족을 만들고 심장이 약한 인간은 인공심장을 발명하죠. 사랑이 없는 인간이 사랑을 발명하는 것, 이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이어서 인간화가 완벽히 끝난 프론과 함께 사는 인간의 삶의 만족도가 눈에 띄게 상승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해영은 나를 보며 아랫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미안해.” 해영이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담긴 커피에 빨대를 꽂았다.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막상 프론 센터에 들어오니 또다시 감정의 변화가 생긴 모양이었다. 나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미안해.”
   “계약 기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이렇게 돼서……”
   나는 말 없이 녹차 티백에 달린 끈을 만지작거렸다. 해영이 말했다.
   “널 버리는 것 같아. 아니, 버리는 거 맞을 거야.”
   “아니야 해영아. 내가 도와주지 못해서 그런 거야.”
   해영이 아까보다 촉촉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기억해야 해. 네가 실패작인 게 아니라 내가 실패한 인간인 거야. 그게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된 원인인 거고.”
   나는 테이블 위에 오른 해영의 손등 위에 나의 손을 올렸다. 해영이 손끝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상담 시간에 맞추어 상담실에 도착했다. 데스크에 앉아있던 센터 직원이 인간과 프론을 따로 인터뷰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해영과 다른 방에 들어갔다. 해영은 끝나면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상담실 문을 열었다. 상담실 안에는 나뭇결을 흉내 낸 무늬가 찍혀있는 베이지색 테이블과 지나치게 푹신한 검정 가죽 의자가 있었다. 사방 어디에도 창은 보이지 않았고 기다란 형광등은 차가운 빛을 뿜어댔다.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두 손을 모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담사가 들어왔다. 상담사는 굵은 바늘이 달린 주사기를 내 손목 안쪽에 찔러 넣었다. 사용을 다한 프론을 추적, 감시하기 위해 손목에 칩을 넣는 것이었다. 피부 아래로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 덕에 정말 나의 삶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담사는 검지만 한 크기의 녹음기를 테이블 한쪽에 올려두고 태블릿을 켰다. 이름, 나이, 사는 곳, 현재의 기분 상태부터 시작해서 오늘의 날씨, 관심 있는 뉴스, 좋아하는 영화 제목 같은 것들을 물어봤다. 해영과의 성관계 여부와 횟수, 하루에 사랑이란 단어가 들어간 대화를 몇 번이나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모두 “전혀.”라고 대답했다. 상담사는 한쪽 눈썹을 빠르게 올렸다가 내리며 프론에 관한 질문을 시작했다.
   “당신이 태어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을 돕기 위해 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대답해주시겠습니까.”
   “해영은 자신이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해영이 인간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어떻게요?”
   “사랑의 경험을 주는 것입니다.”
   “당신은 주인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왜죠?”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삶의 목적입니다.”
   “슬프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이죠?”
   “당신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고작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나는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상담사가 작은 숨을 내쉬고 다시 물었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병인가요?”
   “생명체가 살고 있는 사회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머리가 세 개인 외계인이 사는 행성에 머리가 하나인 인간이 떨어진다면, 그들은 인간을 ‘선천적 머리 부족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죠.”
   꽤나 재밌는 유머라고 생각했는데 상담사는 표정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나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제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담사는 이제야 미소를 지었다. 태블릿에서 파일 하나를 열고 나에게 내밀었다. 파일 맨 위쪽에 ‘안락사 동의서’라고 써진 글씨를 읽었다. 상담사가 말했다.
   “손해영 고객님이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희 센터에서는 고객님의 치료가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매우 기쁩니다.”
   상담사가 곧바로 물었다.
   “질투가 나지 않습니까?”
   “왜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나는 해영이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을 거짓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다.
   “아닙니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해영 씨는 행복해 보입니까?”
   “그렇습니다.”
   상담사는 입술을 더 굳게 다물고 태블릿에 무언가를 써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결혼식이 삼 개월 뒤라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프론을 키우고 함께 지냈다는 사실이 신랑 측에 듣기 좋은 소식은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 쪽에서는 심리상담 기록도 모두 폐기하고 프론 치료 계약서도 삭제할 계획입니다. 해영 고객님과 충분히 대화가 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안락사 날짜는 내부 회의를 통해 결정하고 전달하겠습니다.”
   상담사는 안락사 동의서를 내 쪽으로 밀며 스마트 펜을 꺼냈다. 형식적인 절차였다. 어차피 프론의 의사 따위 들어갈 리가 없는 서류였다. 나는 빠르게 동의서에 서명했다. 내 이름은 우연이었다. 우연히 얻은 것이라고 해서 우연. 우리가 만나야 했던 것은 필연이었지만 수백 개의 알 중에 내가 살아남은 것은 우연이었으니까.

   운전대를 잡은 해영은 큰 소리로 웃었다. 상담실에서 했던 ‘선천적 머리 부족 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직후였다. 신이 난 해영은 자동차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마트폰 벨 소리가 울렸다. 해영은 스피커를 켜고 전화를 받았다. 해영의 어머니였다.
   “앞으로 결혼 준비 때문에 바쁠 텐데. 네가 계속 바래다 줄 수 있겠어?”
   “이 정도는 해야죠.”
   “혹시나 프론 센터 앞에서 사진이라도 찍히면 책잡히는 건 당연한 거 아니니?”
   “그럼 엄마가 데려다주게요?”
   한숨과 함께 해영의 엄마가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그 얼굴을 어떻게 보니.”
   해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영의 엄마가 말을 이었다.
   “해영아 약속해. 다시는 그런 프론을 만들지 않겠다고……”
   해영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운전대 옆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나는 여전히 해영의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창 의사들이 발명한 정신병들로 고생했을 때는 네가 제대로 된 사랑을 몰라서 그렇다고 우기더니. 치료가 끝나니까 아주 웃겨.”
   “난 괜찮아. 그리고 센터는 지하철 타고 다녀와도 돼.”
   “우연이 너한테 밥이라도 사야 하는 거 아냐? 인간이라면? 아, 정말!”
   해영은 다시 운전대 옆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붉어진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우연아, 나는 이 세계가 이상해. 어렸을 때부터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 물론 몇몇 사람들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인간들이 말하는 숭고한 사랑, 진실한 사랑, 이딴 거 나 잘 모르겠어. 그거 몰라도 잘 살아왔는데, 인간들은 다 내가 이상하대. 아무도 사랑할 줄 모르는 내가 불쌍하대!”
   해영이 운전대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뒤에 선 차들이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 교육을 받던 날이 떠올랐다. 인간화가 진행되고 한 달이 넘어가던 날이었다. 나를 닮은 프론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칼을 가진 프론들은 석회색 얼굴을 하고 어항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딱딱하게 굳은 몸은 곧 물속에서 가루가 되었으나 머리카락은 그렇지 않았다. 해영은 어항 안을 한참 바라보더니 뜰채를 가지고 와서 나의 친구를 건져 올렸다. 화장실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와 변기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해영은 빈 뜰채를 들고 아무런 표정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어깨가 간지러웠다. 탈피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이마에서부터 벗겨진 허물이 목과 쇄골을 타고 어깨까지 내려왔다. 나는 하늘하늘 헤엄치며 허물이 물에 쓸려 벗겨지도록 했다. 강한 어깨뼈와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근육, 무언가를 잡거나 놓을 수 있는 손이 생기던 시절이었다.
   며칠 뒤 해영은 거실 테이블에 커다란 어항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새 어항에 풀어주었다. 그때 나는 혼자였다. 더 이상 나의 언어를 이해해줄 프론은 없었다. 대신 나는 테이블 앞에 놓인 텔레비전 채널을 통해 인간의 언어를 배웠다. 인간화가 거의 진행된 프론은 일시적으로 아이큐가 수십 배로 높아져서 감각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컴퓨터처럼 흡수할 수 있었다. 이 시기를 놓치면 나중에 인간이 프론에게 가르쳐줘야 할 것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해영은 늘 지식을 전달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고심해서 틀어주었다.
   인간 교육을 받으면서 나는 해영이 말한 이상한 세계에 대해서도 공부할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인간들이 늘어갔다.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지배층들은 그것을 일종의 병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프론인 나조차도 지배층들이 그것을 병으로 분류한 이유를 알았다. 그들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을 무서워했다. 혼인율이 내려가면서 인구가 감소한다거나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 살인과 기타 강력 범죄를 저지른다거나 소시오패스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등의 연구 결과를 만들고 발표했다. 그들은 새로운 인간종의 탄생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오랜 시간 동안 이룩해온 인류의 문명 속에는 사랑이 가득한데, 인간을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들은 그들이 정성 들여 쌓아놓은 사랑에 대한 가치를 더럽힌다고 생각했다.
   “난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아. 지금껏 나를 해친 것 말고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았다고.”
   해영이 내 품에 안겨 울면서 했던 말을 기억한다. 해영의 손목에 남은 상처도. 해영은 자신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누구를 사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자신만을 사랑해서 자신에게만 상처를 줄 수 있었다. 나는 해영을 진실로 사랑했으나 내가 해영에게 돌려받을 사랑은 없을 거라는 걸 일찍이 깨달았다. 나는 탄생과 동시에 실패했고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조수석에 앉자 해영이 나의 어깨를 말없이 쓰다듬었다. 나는 상담실에서 상담사가 했던 질문 몇 가지를 해영에게 말해주었다. 해영을 원망하지 않는가, 해영이 아닌 다른 인간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해영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적이 없는가와 같은 질문들이었다. 해영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따위 쓸데없는 질문은 왜 하는 거야?”
   “대부분의 프론들은 주인에게 버림받으면 자살을 해. 인간이 프론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프론도 자신들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거든. 주인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자살 충동을 느끼니까. 근데 너는 내가 목을 매달거나 건물 옥상에서 떨어지길 바라지 않았고 안락사로 끝내기를 바랐어.”
   “그런데?”
   “하지만 내가 돌연변이일 수도 있잖아. 갑자기 도망을 가거나 인간에게 분노해서 인간을 해칠 수도 있는 거고.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아주 낮지만 말이야.”
   “어련하시겠어. 위대한 지도자들이 만든 발명품인데.”
   “그래.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태어난 목적대로 잘 행동하고 있어.”
   “그래도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말이야.”
   프론이 발명되고 십 년 새, 실제로 혼인율은 증가했고 범죄율은 줄어들었다. 기본 수명이 이 년인 프론을 팔 년째 갱신해가며 진짜 부부처럼 살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처음으로 나를 사랑해주는 존재를 만났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며 눈물을 흘리는 남자의 사진이 옥외 광고에 크게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해영처럼, 거짓 사랑으로 거짓 결혼을 하며 지배층들의 눈을 피하려는 사람도 분명 존재했다.

   안락사 날짜가 나왔다. 우리는 우울하게 앉아있는 대신에 맥주 파티를 하기로 했다. 해영이 맥주 안주로 소시지를 굽는 동안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해영이 가장 좋아하는 얼굴을 가지고도 해영의 사랑을 얻지 못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프론은 역시나 실패작이 확실했다. 차라리 바다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해영을 몰랐을 테고, 해영을 몰라서 누굴 사랑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태에 머물 수도 있었을 텐데. 바다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별자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며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야기를 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살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내가 불결하게 느껴졌다. 그건 진짜 프론의 삶이 아니니까.
   해영과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봤다. 텔레비전에서는 개그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고, 해영은 웃기지 않은 타이밍에도 큰 소리로 웃으며 내 쪽으로 몸을 기댔다. 나는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해영아, 너 정말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무슨 소리야.”
   “아니다. 한 번도 그 남자를 사랑한 적이 없어?”
   “응.”
   “근데 왜 결혼하려고 하는 거야?”
   해영이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으며 말했다.
   “우연아 나 같은 인간한테는 연애보다 결혼이 더 편해.”
   “왜?”
   “결혼은 합리적이거든.”
   “어째서?”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의 직업, 연봉, 부모님 재산, 나이, 키, 가족 병력을 모두 교환했어. 그 남자는 조신하게 살아온 중산층 외동딸을 선호했고, 나는 빨리 남자를 만나서 이따위 병에서 벗어나고 싶었지. 그러려면 결혼만큼 확실한 증거가 없거든.”
   인간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가끔 바보 같아 보이기도 한다. 나는 또다시 프론의 한계를 실감했고, 입을 다물었다. 프론은 조건 없는 사랑만 하기 때문에 조건을 가지고 남녀가 입을 맞추고 함께 자고 한 집에서 사는 게 이해될 리가 없었다. 해영은 그런 일은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그 결과로 나 같은 인간이 태어난 거고. 해영이 맥주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왠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해영과 건배했다. 해영이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어떤 거?”
   “먹고 싶은 거나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아니. 특별히 없어.”
   해영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양손으로 나의 볼을 꼬집으면서 말했다.
   “네가 그래서 매력이 없는 거야. 알아?”
   프론은 주인과 취미가 비슷했다. 주인이 프론에게 특이 취향을 주입하지 않는 경우만 제외하면. 좋아하는 영화 취향과 정치성향도 주인의 입맛에 맞게 미리 선택할 수 있었다. 해영은 사랑이 비슷한 사람끼리 하는 거라는 프론 제작자들의 한심한 상상력에 분노했다.
   해영이 붉어진 내 뺨에 양손을 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해영처럼 웃으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고 내가 인간의 자궁 속에서 자란 진짜 인간이 된 상상을 했다. 나에게 엄마가 있다면 나는 미움도 배웠을 것이다. 그랬다면 반쪽짜리 사랑을 가지고 해영을 사랑할 일도 없었으리라. 해영이 나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물었다.
   “그래도 넌 세상에서 내 얼굴이 제일 좋지? 그렇지?”
   해영은 대답을 하는 대신에 우우우-, 하고 프론의 장송곡을 불렀다. 장송곡을 듣자 그날 일이 떠올랐다.

   어항 속에는 나를 포함해서 프론 셋이 남아있었다. 그중에서 나는 월등한 속도로 인간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완벽한 유두를 가지고 있었고 배꼽도 제일 먼저 생겼다. 불필요한 다리는 거의 다 쪼그라들었고, 인간의 두 다리가 생기려고 하반신 가운데에 세로줄이 생겼다. 그들은 부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인간화가 진행되고 나면 프론은 자신이 더 이상 변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탈피 후에도 변하지 않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면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곧 삶의 의미가 사라졌다는 뜻과 같았다. 인간이 될 수 없는 프론에게 남은 시간은 쓸데없는 여분의 삶일 뿐만 아니라 고통이었다. 그들은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물로만 가득한 어항 속에는 우리를 해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 번에 하나씩 서로의 목을 졸라주는 것밖에는.
   가끔 그날 일을 꿈으로 꿨다. 나와 똑같이 생긴 입이 벌어지고 나와 똑같이 생긴 눈 속에 동공이 열리면, 검은자위 속에는 늘 내 얼굴이 담겨 있었다. 나는 형제의 사체 가루가 흩날리는 어항 속을 헤엄치다 형제의 목을 조르고 어항 밖으로 나왔다. 프론을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일부 인간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프론 센터까지 혼자 가야 했다. 해영은 결혼식 준비로 바빠서 데려다줄 수 없다고 했다. 해영이 택시를 타고 가라고 돈을 건네주었지만 나는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해영 없이 혼자 인간들 틈으로 들어가서 인간처럼 걷고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하철 손잡이에 손을 올리자마자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알았다. 바로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나의 손목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손목 안쪽에 동그란 모양으로 피부가 볼록 솟아 있었다. 칩이 들어간 자리었다. 역을 지나면 지날수록 나를 보는 눈이 많아져 갔다. 그냥 프론도 아니고 버려지고 있는 프론이어서 그런지, 눈들 속에는 예전보다 혐오와 동정의 빛이 짙게 감돌았다.
   “인간을 증오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거짓말을 잘 하는 편입니까?”
   “아닙니다.”
   “거짓말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상담사는 녹음기를 껐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나 있었다. 상담사는 소매로 연신 이마를 닦아냈다. 칩 리더기를 꺼내 나의 손목 안쪽을 찍고 몇 가지 버튼을 눌렀다. 나는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상담사가 말했다.
   “지난번 검사 때 손해영 고객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희 치료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죠. 아시겠지만 거짓 결혼은 현시대에서 불법입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 무너진 가정은 곧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상담사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의 거짓말은 잡아내지 못했습니다. 신기하군요. 프론은 인간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었는데 말입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직 특별한 조치는 없습니다. 당신의 프론 위험등급이 낮음에서 조금 경계 수준으로 올라간 정도입니다. 당신은 다음 주에도 인터뷰를 할 것이고, 해영 고객님은 또 다른 프론을 만나게 될 수도 있겠지요.”
   “프론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더 정교한 프론을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프론과 사는 것도 나쁘지 않죠. 당신과 우리 센터 고객의 치료 기록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해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해영을 치료하고자 했다. 나는 웃음을 참았다. 피부가 가려워서 팔과 어깨를 긁었다. 아직도 탈피해야 할 허물이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프론 센터 대기실에 앉았다. 텔레비전에서는 다 죽어가는 몰골의 은퇴한 프론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이마와 눈가 주위로 검버섯이 가득한 백발노인이 말했다. 기껏해야 이 년, 생명을 여러 번 갱신했다고 해도 십 년을 넘기지 않았을 거였다. 프론은 자신의 수명이 끝나기 한 달 전부터 빠른 노화를 겪어야 했다.
   “제이가 나에게 처음 키스를 하던 날보다 좋았습니다. 제이와 그녀는 정말 잘 어울렸어요. 제이는 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고맙다고 해주었지요. 사랑을 알게 해주어서, 정말이지 고맙다고.”
   이윽고 제이라는 남자와 여자의 결혼식 장면이 나왔다. 노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정도면 만족할만한 프론의 삶이 아닌가요?”
   에어컨 때문인지 공기가 찼다. 차가운 어항 속에 잠긴 기분이었다. 손끝에서부터 한기가 돌았다. 나는 양손으로 몸을 연신 쓸어내리다가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무언가가 집혔다. 명함이었다. 해영의 예비 신랑이 다니는 직장과 이름이 적힌 명함. 해영이 며칠 전 휴지통에 던져버린 것을 챙겨두었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남자가 궁금했다.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그의 얼굴을 본다면 내 이야기도 완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는 치과의사였다. 해영이 남자가 개인병원에서 일한다는 것을 말해준 적이 있었다. 나는 남자의 병원으로 가기 전 백화점에 들러 손목시계를 구입했다. 손목에 칩이 든 자국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해영이 놀다 오라며 그동안 챙겨준 용돈을 한 번에 다 썼다. 시계에 달린 매끈한 검정 가죽끈을 매만지면서 남자의 병원 문 앞에 섰다. 남자의 병원은 고급 아파트 단지 상가 내에 있었고, 크기가 커 보이지는 않았지만 환자들이 곧잘 드나들었다. 나는 유리문에 적힌 진료 마감 시간을 바라보았다. 유리문 안쪽으로 언뜻언뜻 흰 가운을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지하철역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역 근처에서 몸을 돌려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골목 안쪽에는 붉은색 네온사인 간판을 걸어 놓은 바가 있었다. 남자는 어둑어둑한 조명에 잠긴 바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남자의 얼굴을 충분히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남자를 따라 들어가야 했다.
   남자의 옆에는 타이트한 초록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 앉았다. 남자는 여자와 삼십 분쯤 대화했다. 주로 남자가 이야기하면 여자가 남자의 어깨를 더듬으며 웃어주는 식이었다. 삼십 분이 지나자 남자는 여자에게 돈을 건넸고 여자는 자리를 떠났다.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남자는 무심코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우리는 잠시나마 눈이 마주쳤다. 나는 바텐더에게 술을 주문했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강인한 턱선과 얇지만 날카로운 눈, 진하고 두꺼운 눈썹을 가진 남자였다. 유치하게도 나는 남자와 나의 얼굴 중 어느 쪽이 더 잘생긴 얼굴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남자가 어느새 내 옆자리에 앉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남자는 아주 정중한 태도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역 근처에서 치과를 하고 있다고 자신의 개인 정보를 밝혔다. 나는 역까지 걸어오면서 본 회사 이름을 대며 주식 관련 일을 하고 있다고 둘러댔다. 남자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오랜만에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며 환하게 웃었다.
   “여기는 아는 사람 아니면 찾기 힘든 곳인데,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
   “처음입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들렸습니다.”
   “조용하고 좋죠?”
   남자의 말대로 바 안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유리잔을 닦는 바텐더와 남자와 나, 그리고 구석진 자리에 앉은 젊은 커플이 다였다. 바 안에 흐르는 음악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볼륨이 낮았다. 남자는 내 손목을 내려다보며 시계가 멋지다고 했다.
   “시계 한번 차 봐도 될까요?”
   남자는 나의 곤란한 표정을 읽으며 크게 웃었다. 손사래를 치며 장난이라고 했다. 남자는 술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 나는 이 잔을 끝으로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쉴 틈 없이 이야기했다.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말이 나오자 나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남자는 해영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해영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정말 기적이죠. 안 그렇습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웃고 싶었다. 누구보다 먼저 남자에게 해영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남자는 새로운 잔을 비웠다. 남자의 입김에서 술 냄새가 느껴졌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전보다 조금 작은 목소리였다.
   “난 윗대가리들 말 안 믿어요. 사랑이 없는 인간에게 프론이 필요하다는 말 말입니다.”
   남자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말했다.
   “그쪽은, 역시 프론이죠?”
   술기운이 이제야 올라오는 것인지 현기증이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검지와 엄지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인 것 같았다.
   “그쪽에게는 가혹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자연치유를 믿는 편입니다. 인간의 사랑이 무슨 입속에 든 이빨도 아니고, 인공적인 치료가 항상 효과적이라고 할 수는 없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는 표현을 했다.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허물이 벗겨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걸었다. 남자는 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화장실로 따라 들어왔다.
   거울 속에, 손을 씻고 있는 나의 등 뒤로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이 프론인 걸 알았는지 안 궁금합니까?”
   남자는 나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혼자 이어서 말했다.
   “난 당신 얼굴을 본 적이 있어요. 해영이 당신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거든. 자기 이복동생의 얼굴이라고.”
   나는 물기가 묻은 손을 꼭 쥐었다. 함정에 빠진 것 같았다.
   “자살했다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죽었다는 사람이 내 눈앞에 있으니까, 이거, 뭔가, 이상하잖아.”
   나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남동생을 닮은 프론을 키워.”
   남자는 내 옆에 있는 세면대로 갔다. 남자가 손을 씻는 동안 나는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거울을 보다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물었다.
   “근데 둘이, 잤어?”
   나는 남자의 뒤통수를 잡아 거울 위로 뭉갰다. 있는 힘껏 남자의 머리를 잡아채서 수도꼭지에 박았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세면대 안으로 붉은 피가 뚝뚝 흘렀다. 남자는 짧게 욕을 뱉으며 내 손을 잡아 사정없이 비틀었다. 내 머리채를 잡고, 화장실 문을 발로 찬 뒤 변기 물속으로 내 머리를 집어넣었다. 남자가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까짓 것 죽여 봤자 살인죄도 안 나와. 알아?”
   남자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청소도구 칸에서 마대 자루를 꺼내왔다. 긴 막대기로 나의 머리통과 등, 허벅지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나는 더 이상 반항할 의지가 없었다. 통증 따위 순간이었다. 나는 종이처럼 구겨져 갔다. 남자가 막대기를 내리칠 때마다 몸이 흔들렸지만 어느샌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막이 고요한 물속에 잠겨버린 것 같았다. 나는 차가운 타일 위로 몸을 뉘었다. 처음으로 인간을 때렸다. 처음으로 해영이 원망스러웠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온몸의 감각이 새롭게 열리는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왼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내 얼굴을 만졌다. 눈과 코와 입과 이마, 턱을. 세상에서 유일한 얼굴을 가진 프론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해영이 뭘 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바다에 가고 싶다고 말할 걸 후회했다. 내가 있다고 해서 해영의 삶이 그다지 좋아지지도 않았지만, 내가 없는 해영의 삶도 그다지 좋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오른손으로 눈가를 닦았다. 터진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아주 작게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따뜻하다.
   내 몸에서 흐르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따뜻한 피였다. 눈물이 날 정도로 따뜻한 피가 내 뒤통수를 적시고 목과 어깨를 타고 내려왔다. 해영에게 이 온기를 전해줄 수 있다면, 그것도 꽤 괜찮은 프론의 마지막일 것 같았다. 손목에서 기계음이 났다. 나는 시곗줄을 풀었다. 볼록 튀어나온 자리에서 경고를 알리는 빨간 램프가 규칙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돌연변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백승연

잘 쓰기 위해 잘 살고 있는 사람.

2018/05/29
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