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눈이다.
   선진이 편의점에서 나와 맞은편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았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 막 자정을 넘긴 서교동의 좁은 이차선도로는 반대편에 선 사람의 표정이 분간될 만큼 밝을 리 없었다. 편의점 문을 당기는 대신 밀었으나 열리지 않았고, 가벼운 번잡함을 느끼며 다시 당겨 열고 나오던 참이었다. 문 바로 아래에 가파른 계단이 두어 칸 있었고, 들어올 때 분명 밟았을 그것을 선진은 기억하지 못했다. 계단은 화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잘못 튕긴 기타줄처럼 거북하고도 자명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당황한 발끝을 황급히 추스르는데, 검은 봉지에 담긴 도시락이며 각성 효과를 주는 고카페인 음료수 들이 중심을 잃은 그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근래 술을 자주 마신 것은 사실이었지만, 별로 성공하지도 못하면서 줄기차게 망각을 기도하는 술이나 단기기억에서 삭제된 계단 때문이 아니라도 선진은 자주 비틀거렸고, 그러다 사람들과 자주 부딪혔으며, 그러면 필요 이상으로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것은 아마도 불면의 귀결, 가스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한 20세기 시인처럼 불필요한 일들까지 떠맡아 과로 속에 머리를 처넣고 피로를 합성해낸 결과일 터였다. 그런 어지러움, 상존하는 불균형을 없애려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상층대기의 공기덩어리라도 된 듯한 기분이 그에게는 퍽 은유적으로 느껴졌다. 사람의 부재는 생활의 균형이며 사고의 중심 따위를 전부 흩뜨려버렸다. 무게중심을 잃은 삶에서 낮과 밤은 서로를 경계하지 않고 물들어갔다. 밝은 것이 자주 어두웠으며 어둠 속에서는 심심찮게 섬광을 보았다.
   일련의 동작들 끝에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계단에서 내려선 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봉지를 들지 않은 오른손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호기롭게 멋을 부리며 앞머리를 정리하는 동작이라기보다는, 헝클어진 머릿속의 모양새를 머리카락에다 구현해보겠다는 듯, 이를 갈거나 입술을 깨무는 것처럼 어딘가 좀 괴로워 보이는 동작이었다. 그렇게 경직된 손으로 머리칼을 훑고 나면 머리는 정리되기는커녕 전보다 더 제멋대로 여기저기를 향해 삐쳐나갔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이연은 가끔 그 동작을 따라했는데, 그녀의 눈에 장난스런 마름모꼴의 반짝임이 스치는 것을 보고나서야 선진은 자신이 또 머리카락에 손을 대었음을 의식하곤 했다. 그 동작의 끝에는 손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머리를 약간 기울였다 바로 하게 되는데, 그렇게 시야가 한번 흐트러진 직후, 느닷없이 정류장의 여자가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녀는 통화중인지 오른손으로는 전화기를 귓가에 댄 채, 흔들림 없는 자세를 유지하려 애쓰면서 왼손에 든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바람을 가릴 수 없어 불이 잘 붙지 않는지 여자는 몇 번에 걸쳐 같은 시도를 반복했다. 그러다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문 채로 라이터를 든 손을 내리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이상한 눈이다, 선진은 생각했다. 전화기 너머로 뭔가 예기치 못한 얘기를 들었을까. 안색이 창백했고 약간은 놀란 기색이었다. 그런데 그 눈, 보일 리 없는데 선명하게 드러난 여자의 눈은 표정이며 몸짓과 정반대를 말하고 있었다. 지독히 무심한, 무섭게 초연한 눈이었다. 이상한, 이상한 사람이다. 선진은 발길을 재촉했다.

   아무도 없는 방에는 마땅히 붙일 수식어가 없었다. 불 꺼진, 싸늘한, 적막한 빈방이란 동어반복에 다름 아니었다. 한참을 앉아 있다보면 무뎌지는 사실이지만,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폐쇄된 사각형의 공간이란 상당히 기묘한 것이었다. 선진은 잠긴 문을 여는 순간부터 그 문 너머에 집약되어 있는 텅 빈 어둠에 눈이 익을 때까지 매일을 그 기묘함 앞에서 새로운 당혹감을 느꼈다. 문이 닫히는 소리 이후에는 사람의 존재와 무관하게 돌아가는 냉장고 따위의 규칙적인 기계음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선진은 없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 여기저기 시선을 돌려보았지만 어둠의 밀도는 어느 모서리에서든지 동일했다. 뒷머리 아래쪽, 몸이 피곤할 때면 가장 먼저 뻐근해오는 자리에서 불쑥 어떤 이름이 비명처럼 솟았다. 눈길보다 손이 먼저 스위치에 닿아 전등을 켰다.
   아침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간 사소한 물건들은 일말의 움직임도 없이 내버려졌던 순간의 모습대로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찌나 그대로인지, 극에 달한 정적임이 일종의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황급히 뜯고 나서 전자레인지 옆에 적당히 내버려둔 즉석밥의 포장지처럼 하잘것없는 것들이 흡사 박제된 독수리나 삼엽충의 화석처럼 거나한 대상으로 생각되었다. 선진이 없는 동안 방 안에서는 시간조차 흐르지 않은 듯 보였다. 내가 소리 내지 않으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내가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 공간을 선진은 생각했다. 지독하게 독존하는 공간은 어디든 팽창하는 우주의 끄트머리였다. 중심에서 멀수록 팽창속도는 빨랐다. 발을 내딛으면 그 아래에는 중력도 지표도 없어서, 어느 쪽이 아래를 향하는 방향인지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다. 비명을 질러야 할 일이 있다면 이름을 부를 테지. 선진은 새카만 편의점 봉투를 빈 곳에 적당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잊어버렸다.

   소음보다도, 적막이 더 견디기 힘들어. 어느 날 이연이 그렇게 말했을 때 선진은 무엇을 했던가. 적막이란 너무 연약한 것이어서 누군가 그 이름만 불러도 바로 부서진다. 그것은 미국식 농담이었다. 선진은 그 너머에 악질적인 단서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자신의 적막을 스스로 불러 부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적막의 파괴는 언제나 어려운 일, 대개는 절망이 예정된 일이었다.
   이연의 적막을 해체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 것은, 이제 와 생각해보면 일종의 영웅 심리에 기인했다. 이연은 영문학도였고, 모더니즘으로 석사 논문을 썼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박사 유학을 가면서는 세부 전공으로 중세 기사도문학을 택했다. 한 자리 수로 된 세기의 마른 들판을 칼을 휘두르며 달려다니는 아서 왕 따위가 나오는 이야기들. 아니, 아서는 칼을 휘두르기 전에 돌에 박힌 칼을 뽑아내느라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했던가. 선진은 잘 알지 못했다. 그 뽑은 칼로는 풀리지 않던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렸던가. 아니면 그것은 고르디우스의 이야기던가. 이연을 통해서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류의 이야기들을 숱하게 들었다. 낯선 서양 이름의 파편들은 그것을 발음하던 이연의 꿈꾸는 듯한 눈빛과 아무렇게나 뒤섞여 자주 선진의 새벽을 잠식했다.
   허구를 더듬는 일을 전공하는 것도 모자라 중세의 허구라니, 그런 것을 하기 위해서 이제껏 자라온 터전이며 알던 사람을 전부 내버리고 육 년이니 십 년이니 기약 없는 시간을 함부로 약속하며 떠나다니. 돌아와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불안정한 생활을 언제까지 감수할 용의가 있는지, 선진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런 것에 대해 이연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땅히 택하도록 운명 지어진 것을 묵묵히 받아들인다는 생각으로 직업을 택한 선진에게 이연의 결정은 도무지 현실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너무 크고 아득한 일이었다. 기사도문학. 고작 스무 살 남짓 되었던 시절에는 이연의 앞을 가로막는 가시덩굴을 칼로 끊어내며 길을 내는 기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완연히 어른의 눈을 하고 유학 가겠다는 말을 처음 꺼냈을 때, 그 어조에 다른 무엇보다 미안함이 잔뜩 담겨 있는 것을 느끼고 선진은 자신이 이연의 길과 관련이 있다면 기사보다는 가시덩굴 쪽에 가깝다는 것을 자각했다. 내가 뭐라고 하든 너는 갈 것임을 안다, 그리고 그 이후 너의 생에는 나는 없는 것이다, 선진은 그렇게 말했다. 문학하기가 목숨을 절벽에 내어놓기나 다를 바 없이 위험한 시대를 무릅쓴, 응원해야 마땅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진은 이연이 출국하던 날, 눈이 마주친 마지막 순간까지도 너는 좋은 학자가 될 거라는 말, 끝까지 잘 버텨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이상 이연을 가로막을 말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이를 악물고 반복할 뿐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없는 사람이다.

   이제부터 나는 없는 사람이다. 크게 달라질 것이야 있겠나, 나는 원래부터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사람이 아니던가. 이석이 그렇게 말했을 때 희경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존재는 부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어린 희경은 아버지가 집에 언제 들어오고 언제 나가는지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자랐다. 얼굴을 마주해도 어차피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는 사이였다. 아버지의 공백은 언제나 새벽 한두 시에 퇴근을 하는 기형적인 직장생활 탓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가 근본적으로 혼자 있기를 원하는 사람, 도무지 개인으로서 온전히 떨어져 나오는 게 불가능한 가정이라는 작은 집단에 정을 붙이기 어려운 유형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수 세대에 걸쳐 식상하게 반복되고 있는 전형적인 과실을 범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새벽에 들어오는 아버지를 어쩌다 마주치면 그는 술기운이라고는 전혀 없는 창백한 얼굴로, 가방에 다 넣을 수 없어 보자기에 싼 사건 기록 뭉치를 들고 오느라 시큰거리는 손목을 다른 손으로 붙들고 희경에게 소리 없이 눈인사를 하고는 묵직한 법서들이 숨통을 틀어막을 것처럼 생긴 어둑한 서재로 들어가곤 했다. 짜증도 권태도 보이지 않는, 언제나 그저 조금 지치고 슬퍼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오래전의 언젠가 그의 안에서 무언가 핵심적인 것이 조용히 빠져나가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불행하게도 어머니의 성격은 아버지의 그것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유복하게 자라 유행에 따르듯 유명 여대를 나온 어머니는 보살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시선을 받지 못하면 중심을 잃고 마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그녀 삶의 첫번째 실패였다. 남편을 기다리고, 아침저녁으로 잠깐씩 그의 눈을 들여다볼 때 그의 마음에 부는 바람의 결을 가능한 한 자세히 살피는 것을 업으로 삼던 어머니는 줄곧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다녔으며 쉰이 가까워질 무렵부터는 가벼운 공황장애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병증들이 나타난 것은 하나로 성급히 수렴시킬 수 없는 여러 이유 때문이었겠지만, 그 중심에 불행한 일상이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서로가 무엇을 감당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없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섣불리 내린 결정이 두 사람의 일평생을 좀먹고 있었다. 희경은 다만 그 삭아가는 신경들의 무심한 목격자에 지나지 않았다. 집 안에는 늘 창백한 세 명의 유령이 각기 다른 시각에 출몰하여 미끄러지듯 지나다니다가 이윽고 밖으로 나가버리곤 했다. 셋 중 누구도 온기와 관심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상대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이렇다 하게 언성을 높여 다툴 상황조차 없었다. 그저 각자의 삶이 무료하고 침착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평생을 바쳐 겨우 다 쓴 책을 거실 탁자에 내려놓고 쉬고 있는 노학자의 한때처럼 모든 것이 노곤하고도 고요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희경이 일상에서 아버지를 떠올린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이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문질러 지움으로써 떠남에 대한 부채감을 덜려고 할 때 희경의 신경은 파르르 떨리며, 나는 무심하지 않았다, 사실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서 그 모든 사건 없음의 사건들 속을 엄청난 긴장감 속에 걸어왔다고 소리쳤다.
   비겁한 새끼.
   희경은 그가 하는 말의 앞뒤를 알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가 이렇게 비합리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그 경악스러운 마음이 오히려 그녀를 더욱 극단으로 몰아붙였다.
   세상에서 저 하나도 어쩔 줄을 모르는 정신병자 새끼, 이번에야말로 모아놓은 수면제 한꺼번에 다 처먹고 너 원하던 대로 죽어버려라. 넌 네가 쓰러 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생활이 무섭고 감정이 무서우니까 도망가는 거잖아.
   말을 하면서 희경의 머릿속에는 내뱉고 있는 문장들이 아닌 좀더 간결한 다른 문장이 조금씩 변주되며 반복해 울렸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지금 이석에게 내뱉고 있는 말들은 실은 스스로에게 늘 윽박지르고 싶었던 내용일까. 불가해한 관성과 불안에 이끌려 아버지와 같은 전공을 택해놓고 정작 매 학기 시간표의 대부분은 독문과 과목으로 채워넣은 탓에,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희경은 세 학기를 더 다녀야 했다. 이석은 희경이 한껏 자조적인 표정을 지으며 앉아있던 독문과 4학년 전공 수업의 맨 앞자리에서 파우스트를 찬양하던 공대생이었다. 평소에 그는 세상에 대해 별 관심이 없고 그러므로 어떤 대상에게든 아무런 악의도 없다는 말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몰두해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듣는 사람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문장을 한없이 길게 늘일 수 있었다. 그는 카프카의 짧은 소설들을 줄줄 외우고 다녔는데, 그중 어떤 것은 결국 희경도 단어 하나까지 전부 외우게 되었다. 이석의 말을 들으면서 희경은 그때 외운 글 하나를 그의 머리 위에 들이붓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눈 속에 선 나뭇등걸들과도 같으니까. 겉보기에 그것들은 그냥 살짝 늘어서 있어 조금만 밀치면 밀어내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나무들은 땅바닥과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보아라, 땅바닥과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도 다만 겉보기에 그럴 뿐이다.1)

   그를 볼 때마다 희경은 자신의 일부를 뜯어내어 조금 과장되게 부풀린 버전을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희경 안에서 해결되지 못한 것들, 무언가 쓰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갈증, 막연히 어떤 책의 행간에다가 머리를 파묻어버리고 싶은 언제나의 기분, 그런 부분들을 이석은 가장 적나라한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었다. 겉보기에 그런 것일 뿐 실제로는 전혀 아닐지도 몰랐지만, 희경은 그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석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했다. 이석이 하는 일들은 희경이 견딜 수 없이 원했으나 하지 못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원하면서도 포기할 만큼 불안하게 여겼던 일이기도 했다. 이석이 아무 생각 없다는 듯, 혹은 모든 불운의 가능성을 다 재어보았지만 그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는 듯 시 이외의 것들을 모두 내다버릴 때 희경은 극중 인물의 과감한 행동을 지켜볼 때와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이윽고 자괴감을 느꼈고, 때로 위악의 습관이 척추를 타고 치솟아오를 때면 가장된 것임이 틀림없는 이석의 천진함을 지독히 혐오하기도 했다. 그 모든 감정이 마구잡이로 얽혀들 때 그 핵심에는 이석이 아닌 희경 자신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내게 이석은 그저 나 자신의 반영에 그치는 사람일 뿐일까, 희경은 생각했다. 그는 곧 발현되지 못한 나였기 때문에, 타자가 아닌 내가 될 지경까지 그를 끌어안고 내면으로 들이고 싶었다. 그게 역설적으로 그를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는 비틀린 의지였을까.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이석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내게 독해되지 않은 그의 행간의 무엇이 그를 어쩔 수 없는 시인으로 만들었나. 어쩌다 이렇게, 어째서 이렇게 그는 자꾸만 간다고 하는 건가. 이번에는 또 어디로? 또 어디로 가서 일주일 넘게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며 고행자 같은 얼굴로 자살미수인지 창작인지 알 수 없는 일에 골몰할 것인가. 그것은 시작(詩作)에의 기투(企投)인가 아니면 삶을 거부하는 몸짓인가. 희경은 이석에게 시가 먼저인지 죽음이 먼저인지 종종 알 수 없었다. 시학에의 몰두가 웃음거리가 되는 순간을 헤집으며 나아가는 시인이 종국에 맞닥뜨릴 해답은 하나뿐이기 때문인지, 생을 꺾어놓지 않으면서 부정하는 유일한 방법이 시였는지. 두 가지가 악의적으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희경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날 그가 무슨 뜻으로 어떤 곳으로 떠나겠다고 한 것인지, 모르는 편이 시적이었다. 너무 시적이어서 그 이후로 매일 매시간 극심한 기갈을 느꼈다. 남의 시에서 아름답게 충격적인 심상, 전율을 일으키는 마지막 행을 마주한 습작생처럼.
   그의 새 시집은 한 권도 출간되지 않았다.

*

   선진은 한밤중에 편의점까지 가서 무엇을 어떻게 왜 사왔는지는 잊어버린 채 책상 위의 스탠드만 덩그러니 켜진 방에 앉아 있었다. 문턱을 넘자마자 집 안의 불이란 불은 다 켰던 것이 기억났다. 어찌된 일인지 그중에서 지금까지 켜져 있는 것은 스탠드뿐이었다. 어둠은 어깨높이에서 넘실대며 금방이라도 선진을 질식시킬 것 같았다. 피가 모세혈관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양 손가락 끝이 저릿했다. 그대로 조금 더 있으면 그 마비의 암시가 팔을 타고 올라와 뇌를 겨냥할 것만 같았다. 선진은 비합리적인 서늘함을 느끼고 팔을 한 번 비틀어보았다. 손바닥이 위를 향하자 저린 느낌이 더 강렬해졌다. 묘목이 스스로 설 힘을 얻기까지 버팀목을 대어주듯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뭔가 써야 했다. 기록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모든 것에 대해 만성적인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잘 쓰지 못하는 것도 물론 자괴의 원천이었지만 그래도 쓰기에 완전히 실패하는 경우보다는 나았다.
   새벽이 되면 감각들이 증폭되었다. 그건 마치 병치레를 하는 도중과 같았다. 열이 끓어오르는 상황에서는, 수도꼭지를 틀고 흐르는 물에 손을 대기만 해도 차가움의 본질 같은 데다 머리를 집어넣기라도 한 것처럼 그 온도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소음이 먼지처럼 가라앉고 저마다의 인격들이 반쯤 잠잠해진 밤의 거리는 어떤 영혼들에게는 도리어 활개를 칠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선진도 늘 그런 자리에 속해왔다. 누군가가 그늘진 구석이라고 불러도 달리 할말은 없지만 사실 저 끝의 경계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아주 멀리까지도 사유를 펼쳐댈 수 있는 세계의 한 자락이 선진의 것이었다. 물론 그런 광막함은 해방감을 주는 만큼이나 자주 외로움을 동반하기 십상이었다. 이연이 있는 한동안 선진은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8월의 한복판에서도 배 속에 한기가 가득찬 기분이 들어 마시던 물을 전자레인지에 데우려다가 그제야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방심했다, 세계는 본래 이런 곳이었지. 너무나 경솔했다.
   선진은 아무 책도, 공책도 펼쳐져 있지 않은 목재 책상 위를 노려보았다. 책상 위에는 방금 연필꽂이가 넘어지기라도 한 듯 몇 자루의 검은색 펜만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것들은 죄다 같은 종류여서 마치 어떤 근사한 문양을 이루기를 의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진은 그 앞에 망연히 앉아서 그중 어느 것을 집어들 것인가를 이십여 분 동안 생각했다. 그것들은 마치 각자에게 유리하게 왜곡된 기억이나 어순만 조금 바꿔 변주한 고백들처럼, 모두 같으면서도 서로 달랐다.

   글을 써주고 싶었다. 마치 이연이 돌아오기를 착실히 기다리고 있는 연인처럼 하루에 한 통씩 다정한 편지를 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면 실제로는 보지 못한 유년의 이연이 등장하는 소설을. 또는 기저에 은근한 멸시가 깔려 있고 먼 미래에 이연이 지금의 결정을 후회할 것을 암시하는 암울한 분위기의 시를. 아니, 정말이지 아무 것이나 좋으니 이연에 대해 마구잡이로 쓰고 싶었다. 선진이 늘 알 수 없는 과제들에 압도되어 읽고 쓸 시간을 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와중에, 이연은 선진에게 아무거나 좋으니 많이 써달라고 했다. 어쩌다보니 선진은 일상의 사소한 인상들에 대해서도 온갖 해괴한 문체를 다 동원하여 당황스럽게 긴 감상을 적어내려가는 사람이 되었다. 가끔 소설을 썼다. 이연이 원하는 낯선 방향으로 선진은 다시 쓰이고 있었다. 혹은 그 자신이 은밀히 원하던 방향이 이연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잘 알 수 없었다. 이연은 선진의 글이 감각묘사에 뛰어나다고, 그런데 색채, 소리, 향, 어느 하나를 전달하는 데에 특별히 능한 것은 아니라고, 알 수 없는 말을 했었다.
   들어봐, 우리가 어떤 작가를 보고 묘사를 잘 한다고 할 때 보통은 감각되는 객체를 잘 묘사한다는 뜻이거든. 읽는 사람이 덩달아 그 장면 안에서 그 사물을 직접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거. 근데 네가 감각묘사를 잘 한다는 말은 그런 거랑은 좀 달라. 네 글에서는 작가가 완전히 뒤로 빠져 있어. 아, 이건 단순히 시점의 문제도 아니고. 똑같이 일인칭으로 써도 작가의 작위가 느껴지는 글하고 인물하고 독자만 단둘이 남는 글은 느낌이 달라. 네 글을 읽을 때는 절대로 인물을 멀찍이서 지켜보게 되지가 않아. 그저, 인물과 독자 사이에 아무 것도 끼어 있지 않고, 엄청나게 가까워져서, 결국엔 완전히 일체가 되는 거지. 문장 자체가 곧바로 화자의 감각기관이 되는 글이야. 모든 문장이. 마치 작품이 그대로 살아 있는 한 인간의 몸인 것처럼. 그건 특별한 능력이야. 그러니까 계속 써, 선진아.
   하나하나의 감각을 온전히 전달하는 기술이 아니라 독자를 감각 그 자체로 끌어들이는 글쓰기? 그건 어쩌면 그저 자의식에 매몰된 글쓰기의 다른 말이 아닐까? 작가가 사라지고 없는 것은 선진이 작위를 쓸 수 있을 정도의 글쟁이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결국 이연에게 준 그 모든 글들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고백들에 지나지 않는지도 몰랐다. 오히려 선진은 대개의 경우 허구를 경멸해왔다. 좀더 명징하고 실제적인 것들이 마음을 편하게 할 때가 많았다. 허구를 걷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때 이연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던 것일까, 선진은 확신이 없었다. 선진이 글을 쓰기 시작하고 좀더 지났을 때 이연은 선진의 문장들이 너무나 그녀의 것을 닮았다며 놀렸다. 선진은 달리 반박하지 않았다. 의도한 것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이연으로부터 선진에게로 투과되어 들어왔다. 선진은 원래부터 자기 것이라고 믿었던 익숙한 사상이나 어휘가 실은 이연의 것이었음을 깨달을 때마다 침대 밑으로 유유히 기어들어가는 그리마를 세 마리쯤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언제 어디로 들어왔는지 모를 살아있는 것들이 어두운 바닥 어딘가에서 선진과 생활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죽이려면 스스로의 잠자리 가까운 곳에 독약을 푸는 수밖에는 없었다. 지금의 이 소름끼치는 감각들을 묘사해줄까, 선진은 짐짓 위악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 감각에 대한 명명이 실제와 적절히 부합하는가는 선진 자신도 아니고, 선진을 쓴 이연만이 알 것이었다. 나는 쓰였다, 선진은 중얼거렸다. 공교롭게도 그건 이용당했다는 뜻의 말과 소리가 똑같았다.
   글을 쓸 때 이따금 얄팍한 종이인형이 된 기분을 느꼈다. 그런 미안한 얼굴로 무슨 대답을 기대했을까? 생업을 적당히 접고 따라가겠다, 혹은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기다리겠다, 또는, 합격을 축하한다, 그도 아니면, 잘 가라 내지는 잘 살아라 정도의, 악의도 선의도 없이 텅 빈 작별의 말. 하나같이 지나치게 허구적인 말들이 아닌가? 그보다는, 생각은 먼저 이기적인 방향으로 치닫고 말은 중심 없이 격앙되어가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처음 만났을 무렵의 너라면 기쁜 얼굴로 나를 응원해주었을 텐데, 우리가 너무 어른이 되었나, 이연은 그렇게 말했다. 새삼스럽게 되짚을 필요가 있었을까, 순수의 분실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어떻게 쓴 글이든 한 작품이 그 자체로 한 인간을 닮기에는 인간 쪽이 언제나 너무 저열했다. 단정한 체념의 언사는 다음날 저녁에 배우가 바뀌어 다른 입을 통해 말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혈관이 따뜻한 인간으로부터 유리된 단어들의 작위적 조합에 지나지 않았다. 선진은 연극을 시작하려는 배우처럼 무대 뒤에서 목을 가다듬고 문장을 생각했다. 허구를 작정하지 않은 독백은 처음이었다. 감각 따위는 없을 것이다. 목을 가다듬는다. 만일 마리오네트도 스스로 공연 준비를 한다면, 자조적인 단서를 붙여보았다. 객석에는 세계의 모든 신이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지금 방 안에 앉아 있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제 앞엔 책상이 하나 있어야 할 것이고, 펜과 종이가 있어야 할 것이고, 스탠드가 하나 켜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시계는 3시 정도를 가리키고 있어야 되겠습니다. 방은 어두컴컴하고 책상 위의 스탠드가 유일한 광원입니다. 빛은 종종 과하거나 약합니다. 그래서 이따금 스탠드의 목을 이쪽저쪽으로 비틀어 불빛을 미세하게 조정해봅니다.
   전구를 너무 오래 켜두면 과열되듯, 사람의 이름도 부르고 또 부를수록 온도가 점점 높아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간지러운 애칭보다도 제 이름을 그대로 부르기를 좋아했습니다. 한 번에 세 차례씩 이어서 부르기도 자주 했어요.
   김선진김선진김선진!
   그러면 저는 세 배는 더 빨리, 더 가까이 더 기꺼이 그 사람에게 가고 싶었습니다. 이름이 불리는 것으로, 저는 비로소 세계 내에서 존재를 확인받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사람이 원해서 글을 쓴다고 변명할 수 있었고, 또, 뭐가 있을까요. 아무튼 그런 날들이었습니다. 이름들은 한동안은 더 뜨겁겠지요. 싸늘함은 타나토스를 연상시키지 않을 도리가 없는 감각이 아닌가요. 그러니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보다는 두 번이, 두 번보다는 세 번이 더 낫습니다.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 한 번 더. 한 번보다는 두 번이, 두 번보다는 세 번이 더 낫습니다. 적어도 세 번쯤은 발음해도 좋을 말.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갈 수밖에 없습니다. 카프카의 인디언은 끝을 모른 채 달립니다. 아, 이런, 국적과 시대가 몽땅 뒤섞여버리고 마는, 배워온 문장들. 제임스 조이스, 필립 라킨,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신경증의 문장들. 나의 문장들. 그 사람의 문장들. 다만 없어지지 않기 위하여. 가야 합니다. 처음부터 저는 허구를 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명예를 준다! 그런 말을 신봉하는 사람 쪽에 가까웠지요. 아니, 당신의 화자를 믿지 마세요. 실은 그 사람을 만나기 전부터 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쓰지 않습니다. 갈 수 없는 것은 거리나 관습 탓이 아닙니다. 저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빵을 받아먹고 탈이 난 배를 움켜쥐고서 연명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순수를 시샘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헤엄을 치는 상상을 해봅니다. 하지만 곧장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헤엄을 친 지 벌써 십 년이 다 되어갑니다.

*

   이 무슨 지난한 자기고백인가. 희경은 견딜 수 없을 때마다 서교동 길가에 주저앉아 이석의 번호를 눌렀다. 누르고서는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친절한 안내, 이어지는 반복과 마침내의 정적을 들으며 입도 뻥긋하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바람이 지나자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에 소름이 돋았다. 날이 추워지면 이런 짓도 곧 중단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벌써 어둠을 뚫고 시야에 들어오는 낙엽의 수가 확연히 늘고 잿빛이 농밀해졌다. 맞은편 편의점의 불빛과, 희경이 앉아 있는 버스정류장의 전광판 말고는 변변한 가로등 하나도 없는 길이었다. 소리 내지 않는 독백 중의 어떤 문장에 이르렀을 때 희경은 갑자기 어둠이 물처럼 사방에서 밀려들어오는 느낌에 휩싸였다. 너무 깊은 곳으로 줄기차게 잠수해 들어가는 기분이다, 얼마든지 수면을 뚫고 올라갈 수 있으면서도 이상한 충동으로 인해 자꾸만 더 머리를 집어넣고 마는 기분, 희경은 생각했다. 분명 팔을 내저어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다리는 물살을 딛고 선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점점 숨이 막히는 듯해서 희경은 황급히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찾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은 십대 때부터 있던 습관이었다. 흡연이 아닌, 담배에 불을 붙이는 습관. 고등학교 때는 그저 라이터를 켜고, 불을 옮겨 붙이고서는 금세 비벼 꺼버리곤 했다. 명쾌한 점화, 불을 받아들이기 위한 짧은 호흡, 영혼이 옮겨지듯 영역을 옮겨 딛는 조그마한 불씨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요즘은 불을 붙이고 나서 얼마 안 가 꺼버리는 대신 불빛이 가만히 점점 더 안쪽으로 스미며 필터 부분에 닿을 때까지 규칙적인 속도로 타들어가는 것을 오래도록 보고 있었다. 쓸데없고 아름다운 것의 기록, 희경은 생각했다. 언어화되지 않은 숱한 이미지들도 실은 기록이었다. 그렇다면 순간을 잡아다 결박해서는 자기가 내키는 대로 색을 입히려는 짓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맞은편에 이석을 세워놓고 실컷 비웃고 싶었다. 시를 찾으려 시 속에다 머리를 처넣을 작정이었냐, 멍청하게, 모든 게 쓰레기 같은 시인데.
   어떤 장면들은 선명히 보였다. 먼 시간, 유리된 공간, 이석이 급하게 들어와 털썩, 희경의 앞자리에 앉는다. 십 년이나 십오 년쯤 후, 이석이 가장 피곤할 때, 피곤한데도 조금 더 웃고 활기차게 얘기하려고 애쓸 때의 표정을 희경은 훤히 짐작할 수 있었다. 표정뿐만 아니라, 온몸에서 동작에서 말끝에서 배어나올 분위기도. 자리에 앉으면서 이석은 습관대로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더는 소년이 아닌 이석의 그런 동작을 보면서 그것이 무슨 징표이기라도 한 듯이 아, 너는 여전히 내가 아는 너 그대로구나, 희경은 몰래 안도할 것이다. 무언가 생각하는 틈틈이 다음 말을 찾을 때 이석의 시선은 조금은 불편한 위치에 놓인다. 마치 테이블 높이에 체스판 같은 격자무늬의 구획들이 놓여 있는데 그 사각형 중에서 자연스럽게 시선 닿는 칸보다 한 칸쯤 더 앞쪽을 보는 것 같다. 공백이 많은 눈빛이다. 욕심으로 끓어오르지 않아 선선하면서, 주관의 자리를 남에게 내어주지 않을 결심으로 단단한 눈빛. 그 빈 자리로 계절의 색채가 일렁인다. 비밀스런 리듬이 손끝을 타고 흐른다. 무거움 속의 가벼움 같고 깃털 끝의 닻 같은, 알 수 없는 마음.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소년의 태도. 그런 것이 언제까지나 이석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희경은 아직 오지 않은 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만히 이석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독창적인 각도로 곡선을 그리는 눈매, 펜 끝으로 그린 듯, 그런데 한번에 휙 그어내린 게 아니라 네다섯 번 끊어 조금씩 기울여가며 그은 반직선들을 둥글게 이어붙인 듯한, 서른을 한참 넘겨서까지 왠지 모르게 아직 어린 소년의 눈매. 단어와 단어의 사이로 장난스럽게 반짝거릴 때, 가라앉은 미색의 잿빛이 지배하던 눈이 또렷하게 살아나곤 했다, 표면과 심층이 사실은 반대야, 본래의 나는 이런 모습이었어, 고백하는 눈.
   독백을 뚫고 공유된 단어들이 격발하듯, 허구의 시선이 마주쳤다. 희경은 불현 듯 고개를 들고 주변에서 가장 밝은 불빛을 응시해보려 했다. 실은 시선을 피하려던 것에 가까웠다. 맞은편 편의점 앞에 소년 하나가 난처한 동시에 난처해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응시하며 서 있었다. 이상하게 모순적인 표정이다, 희경은 생각했다.

양소연

당신의 다른 이름을 내가 모르듯이.

2018/03/27
4호

1
프란츠 카프카, 「나무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