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이미지는 언제나 둘이므로, 우리는 항상 이미지를 두 번 바라보아야 한다
─Jean-Luc Godard



   비평이란 자기 구두를 먹는 것이어야 한다, 베르너 헤어조크를 기억해, 갑자기 무슨 베르너 헤어조크냐고 그게 비평이랑 무슨 상관인지 묻자 할은 자기도 호기심에 구두를 삶아먹어본 적이 있다고 놀랍지 않냐? 이것은 계시다, 구두도 안 신으면서 그게 무슨 소린지 그가 말하는 비평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들으면 들을수록 알 수 없었고, 아마 지도 모르는 게 아닐까? 다른 건 몰라도 한숨도 못 잔 채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이것이 현대 문명이다! 두 잔째의 에스프레소를 입안에 털어넣은 할이 외쳤다. 현대 문명이고 뭐고 할이 평소보다 더 맛이 간 채 가독성 같은 건 쓰레기통에 처넣어라, 작가에겐 이야기를 진행시켜야할 의무 따윈 없다, 언어의 목을 비틀어라, 다른 건 다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인신공격만큼은 견딜 수 없다, 다성성! 우리는 다성성을 회복해야 한다!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 그의 소설에 대한 준의 비판(혹은 투쟁?) 때문이었는데 나는 그가 보여준 내용을 몇 번이나 읽었지만 도대체 어디가 인신공격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고, 이 부분을 보라고! 그는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혀 없으며 문장은 눅눅한 시리얼 같고 차게 식은 패스트푸드 같은 상상력만을 허둥지둥 전자레인지에 데워 내놓기에 급급하다. 단어들의 실패, 그는 눅눅한 시리얼을 좋아하는 인간이 어디 있냐며 이게 인신공격이 아니면 뭐냐고 자기는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의 악의란 얼마나 급진적인가! 나는 준이 출간된 지 이제 3년이 지났으며 독자와 비평가 모두에게 철저하고 공평하게 외면받았던 할의 소설에 대해 왜 갑자기 그런 글을 썼는지, 할은 그걸 또 어떻게 찾아서 읽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고, 할을 저렇게 만든 것이 준의 비판인지 아니면 그 3년이라는 시간인지, 무관심과 비판, 그것이 번갈아 우리를 찾아올 때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또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다가 언어는 공간을 일그러뜨릴 뿐이야, 공간을 존중하지 못하는 말 같은 건 할 필요가 없고, 공간을 존중할 줄 모르는 인간들만이 언제나 언어 속에 살고 있으니까, 그런 언어는 필요가 없고, 언어가 될 필요가 없고, 머물지 못하는 언어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고 언어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생각했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할은 최근에 짐을 만났는데 나의 소식이 궁금하다며 대신 안부를 전해 달라 했다고, 나는 그런 식의 말을 하는 짐의 모습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기에 할이 정말 맛이 갔거나 아니면 짐이 미쳤거나 둘 중 하나는 분명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안 그래도 어제 짐의 전시를 보았다고 하자 할도 같은 전시를 봤다고, 근데 왜 마주치지 못했을까? 얘기하다보니 우린 서로 다른 곳에 있었고 (나는 SE 아트센터에 있었고 할은 AT 갤러리에 있었다) 확인해보니 짐의 전시는 SE 아트센터와 AT 갤러리에서 동시에 진행 중이었으며 그것이 동일한 내용의 전시인지는 서로 본 것을 얘기해봐도 알 수 없었는데 두 군데를 다 가보지 않는 한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어가는 동안에도 할은 한숨을 쉬거나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는 농담을 하려고 애썼다. 남자 셋이 거리를 걷는데 한 명이 말하길 ‘너 신발 끈 풀렸어' 그랬더니 '나도 알아' 그러고 둘은…… 아니 이게 아니다, 남자 둘이 거리를 걷고 있는데 한 명이 말하길 '너 신발 끈 풀렸다' 그러자 '나도 알아' 그렇게 몇 블록 더 걸어갔고 또다른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할은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것처럼 갑자기 멈춰 섰다. 저게 뭐지? 그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못 보던 간판에 불이 켜져 있었다. 오데사문학그룹 녹색등. 새로 생긴 술집인가? 그렇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가게는 없었고 이미 없어진 곳일까? 불을 저렇게 켜놓을 이유가 없잖아? 새로 단 거 같아 아직 오픈 전인가? 그러기엔 너무 아무것도 없는데 생각하다가 할은 저건 우리를 추측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는 기능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만이 살아 있잖아, 그것이 우릴 살릴 수 있을까? 가끔 우리가 하지 않았던 대화 소리가 자꾸 들려, 그렇다면 우린 어디에 있는 걸까? 묻다가 집까지 걸어가겠다고 했다. 걸어간다니 정신 차려, 네 집이 어딘데? 할은 괜찮다고 걸어갈 수 없는 집은 집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집에 와서 할을 비판한 준의 글을 다시 읽어보려 했지만 그새 삭제했는지 찾을 수 없었고 대신 가장 최근에 올라온 장 외스타슈에 대한 글이 있기에 그걸 좀 읽었다. 준은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부재하는 방식과 폴 제고프가 쓴 각본을 연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리고 외스타슈의 죽음에 대해 국내엔 제대로 소개되어 있지 않은 참고 자료의 몇몇 부분을 직접 번역하여 올려놓기도 하고 뤽 물레의 단편 몇 개를 소개하기도 했는데 흥미로운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제시하면서도 자신은 계속 모르겠다는 말만 하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읽다보니 이 정도로 많은 문헌과 영화를 섭렵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모를 수 있다는 건 제대로 아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마지막으로 준은 언젠가 장 외스타슈에 대해 지금보다 더 긴 글을 쓰고 싶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준의 블로그를 읽다보니 예전에 할이 블로그에 일기를 쓰던 것이 생각났고, 어쩌다 그걸 발견했는지 언젠가 잘 읽고 있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손을 덜덜 떨던 그의 모습을 본 이후론 다시는 언급하진 않았지만 바닥까지 치닫는 그의 미친 소리를 챙겨보는 게 한때 내 삶의 낙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것 같다. 할의 일기는 점점 뜸해지긴 했어도 꾸준히 올라왔는데 간격이 길어질수록 글은 점점 짧아졌고 그마저도 어느 순간 다 사라져버렸다. 오랜만에 들어가보니 한 달 전쯤 쓴 아주 짧은 글이 하나 있었다.

   근대라는 말은 어디서 온 거지? 우리가 전부 잊었다면 근대는 어디서 시작된 거지?

   이게 무슨 말일까, 잠시 생각해보다가 그가 쓰던 다짐과 고백들은 이제 어디로 갔을까? 이겨낸다! 시발! 그러기도 했는데 그때의 그는, 그걸 읽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우리가 같은 간격 속에 있는 건지 그 간격을 유지하는 동안에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건지 그렇다면 포기해야 하는 건 그 간격인지 아니면 이해인지 궁금해지기도 했고, 이젠 글의 내용보다는 간격이 그 사람을 만든다.

   베르너 헤어조크는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에롤 모리스의 재능을 알아보곤 영화를 해라, 지금 당장 시작하라며 충동질을 했고, 돈도 없고 돈이 나올 구석도 없다는 그에게 영화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시작해라, 영화를 완성시킨다면 내 신발이라도 먹겠다, 라고 했다. 정말 그 약속 때문이었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자극을 받은 에롤 모리스는 바로 제작비와 스텝들을 모으고 두 명의 촬영감독을 갈아 치워가며 결국 영화를 완성시켰고 1978년 10월 뉴욕영화제에 출품했다. 소식을 들은 베르너 헤어조크는 1979년 4월 11일 수요일 UC THEATRE에서 에롤 모리스의 데뷔작 〈Gates Of Heaven〉의 상영을 기념해 관객들 앞에서 요리한 자신의 신발을 먹었고 레스 블랭크는 그 과정을 담은 〈Werner Herzog Eats His Shoe〉라는 짧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신발을 먹기 전, 그는 관객들 앞에서 나는 그가 어떻게 제작비를 마련했는지 모른다, 광대 짓을 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돈을 꾸고 훔치거나 카메라와 소품을 도둑질하고 작업실에 숨어들어야 한다, 아직 개봉되지 못한 에롤의 영화에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 메이저 배급사가 나서줬으면 좋겠다며 스스로 광대를 자처했다. 나는 할이 말한 비평은 구두를 먹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 헤어조크를 빗댄 표현이었을까 생각해보았지만 알 수 없었고,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레스 블랭크의 다큐멘터리를 다시 한번 보았다. 합당한 이미지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문명은 거기에 합당한 이미지가 없어요, 공룡의 문명처럼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합당한 언어와 이미지를 개발해내야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베르너 헤어조크는 말한다. 이미지의 새 문법을 만드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죠.

   장 외스타슈의 〈엄마와 창녀〉는 3시간 30분이라는 상영 시간과 제목 때문에 정말이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영화였지만 막상 보고 나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다행히 엄마도 창녀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보는 동안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다른 생각을 했는데 등장하는 인물들도 끊임없이 부질없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죄책감은 들지 않았고, 준은 자신의 글에서 영화에 등장하는 세 번의 부재가 무엇을 만들어내는지를 눈여겨 봐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두 번의 부재밖엔 발견할 수 없었는데 내가 놓친 것인지 아니면 준의 착각이었는지 생각하다가 할과의 약속이 갑자기 취소되어 아무 생각 없이 들른 시네마테크에서 프랑스 68혁명 특집으로 이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고, 그렇다면 이제 그 부재를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영화에서 알렉상드르는 우연히 만난 베로니카와 또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기다리면서 그걸 생각했어요, 오면 레모네이드 얘길 해야지, 없어진 단어들에 대해 얘기해야지, 저는 낯선 사람들이 어떻게 대화를 하는지 몰랐거든요, 근데 혼자 앉아서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평소라면 생각하지 않았을 것들을, 보지 않았을 것들을 보게 되었어요. (사람들과의 대화가 두려워. 우리가 진짜 무언가를 나누게 될까 봐) 이런저런 단어를 찾는 건 왜일까? (저는 단어를 찾지 않아요. 그저 기다리죠) 다음날 다시 약속을 잡은 베로니카를 만났을 때, 알렉상드르는 말한다. 어제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기에 오늘의 이야깃거리가 생겼죠, 어제였다면 할 얘기가 없었을 거예요, 그 시간이 우리 사이에 뭔가를 만든 셈이죠.

   새로 오픈한 카페에서 짐을 만났을 때, 이 얘기를 하자 그는 외스타슈의 영화를 보긴 했지만 인물들의 부재에 대해선 잘 기억나지 않고, 그저 사고방식이 죽어가는 과정만이 기억난다고, 안 그래도 어제 도널드 바셀미를 읽었는데 엄청 신기하다고, 바셀미를 읽은 거랑 무슨 상관인데? 바셀미를 읽어본 적 있어? 나는 없다고 읽으면 알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아니 읽어도 알 수 없을 거라고, 사람들은 우릴 잊어버린 것 같아, 나는 아까부터 직원이 주문을 받길 기다렸지만 카페엔 두 명의 손님이 말없이 각자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을 뿐 카운터엔 아무도 없었고, 기다리기로 했으면 끝까지 기다려봐야지, 어디까지 잊을 수 있을지를 보자, 어디까지 우리를 잊을 수 있을지, 우리조차 우리를 잊을 수 있을지 한번 지켜보자는 짐의 말에 이 부재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생각하다가 모든 시작은 잊히기에 가치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아무것도 잊고 싶지 않다고 말하진 않았고, 짐은 할의 안부를 물었는데 나는 늘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둘은 거의 만나지도 않고 어쩌다 만나더라도 서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자꾸 나한테 각자의 소식을 캐묻는 걸까, 아마도 그것은 구성적인 이유랄까, 서로가 서로의 부속품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여긴 혁명이 진행 중이야, 화장실에 갔다 온 그가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화장실에 가봤어? 짐의 표정에서 심각함을 깨닫고 확인해보니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되었고,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야 되는 게 아닌가, 우리의 믿음과 두려움을 잃어버리기 전에, 피터 그리너웨이 영화 같은 건가? 그리너웨이라니…… 그 인간은 안 돼, 그는 말했다. 뭐가 안 된다는 건지…… 밖으로 나와 걷다가 저번에 할과 봤던 정체를 알 수 없는 간판을 짐에게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근처를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여기 있었다고, 그것이 얼마나 이상했는지 설명하려 했는데 그럴수록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만 들었다. 어쩌면 이것은 해방일까? 우리는 고정된 시선으로부터 해방된 건지도 몰라, 꿈이 언제나 시제를 뒤바꾸는 것처럼, 시선으로부터의 독립, 그는 고개를 저으며 풀린 신발 끈을 묶었고 ?나는 전에 할이 하려고 했던 농담이 생각났다. 신발에 대한 농담 알아? 남자 셋이 거리를 걷다가 한 명이 말하길 ‘너 신발 끈 풀렸어' 그랬더니 '나도 알아' 그러고 둘은…… 아니 이게 아니다, 남자 둘이 거리를 걷고 있는데 한 명이 말하길 '너 신발 끈 풀렸다' 그러자 '나도 알아' 그렇게 몇 블록 더 걸어갔고 또다른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말하길 ‘너 신발 끈이 풀렸어’ 그래서?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야. 뭐야 그게, 나머지는 할에게 가서 듣고 나한테도 말해줘. 그때 할이 하려던 농담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다가 SE 아트센터에서 본 짐의 전시에 대해, 어떻게 두 곳에서 동시에 진행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같은 전시인지 묻자 그는 자기가 아는 사람이 한 공간에 다 모이면 어떻게 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고, 세계가 분열되진 않을까 걱정되었다고 그래서 분산시켜야만 했어, 동시 접속, 어쩌면 그게 필요한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두 개가 똑같은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나는 AT 갤러리에서도 전시를 볼 생각이라고 하자 짐은 오는 날에 연락해달라고 했다. 어차피 근처에 있을 테니까 오면 선물을 줄게, 짐은 SE 아트센터와 AT 갤러리가 생각보다 멀지 않다고, 걸어서 20분이 좀 넘게 걸리지만 가는 길이 좋다고, 걷다보면 두 전시장을 가는 길 자체가 전시보다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고 했다.

   다음날 AT 갤러리에 가기 전 전시장 앞 카페에서 짐을 기다렸지만 약속 시간이 다 되어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는데, 3시가 되자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서서히 공간을 감쌌고 바닥에는 무지개가 펼쳐졌다. 카페엔 아무런 음악도 나오지 않았고 창밖으로 고양이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혼자 온 손님들은 커피를 앞에 두고 각자의 책에 푹 빠져 있었다. 신기할 만큼 조용하고 여유로운 풍경이었고 간간이 누군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들렸는데 그마저도 누군가 나 대신 생각의 페이지를 넘겨주듯 부드럽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요하고 충만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런 순간이 나에게 얼마나 필요했는지, 내가 뭘 잊고 있었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는 느낌, 이것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야지 생각했고, 문득 이 침묵이 바로 짐이 나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질서, 그것이야말로 할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가 얘기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이보다 더 그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그는 예전부터 무질서, 라는 제목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을 쓰고 있었는데 최근 새로운 걸 쓰기 시작했다는 할에게 무질서에 대해 (별로 묻고 싶진 않았지만) 물어보았다. 완성했어? 완성이라니? 완성은 아마추어나 하는 짓이지, 하하 퍼킹 애맷추얼! 제기랄, 뭔가를 묻자마자 이렇게 후회해보긴 처음이야, 할은 많은 것들이 저절로 완성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방해해선 안 되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도 한숨도 못 잔 건 아니겠지? 할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절대 불면을 얘기해선 안 돼, 불면이 다 듣고 있으니까 알겠지? 자기를 잊으려 한다고 복수할지도 몰라, 뭐지 진짜 미친 새낀가?, 미친 건가, 싶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신체가 꾸는 꿈과 정신이 꾸는 꿈이 달라서인 것 같다고, 나는 꿈에 대해 물었는데 꿨지만 말로 못하겠다고, 기억나긴 하는데 말로 못해, 말로 못하는 건 기억이 아니야, 아니 말로 할 수 없는 게 바로 기억이야, 아니 어쩌면 기억할 수 없다기보다는 이젠 기억이 날 원하지 않아, 어쩌면 이럴 때 내가 해야 하는 건 바로 악어의 목을 조르는 일이야, 그게 뭔데? 이거 몰라? 뭔가 기억나지 않을 때, 난 이렇게 말하지 난 지금 악어의 목을 조르고 있는 중이야, 이거 어디서 나오는지 몰라? 나는 알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내게 커피를 내놔! 그럼 내 삶을 주지! 아니 그런 거 별로 갖고 싶지 않아, 좋은 커피는 어제의 꿈을 생각나게 만들지, 갓 나온 커피를 마시며 할은 말했고, 나는 그때 말해줬던 그의 소설에 대한 준의 비판(어쩌면 강박 관념?) 글을 찾아봤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할은 나중에야 준이 왜 자신을 비판했는지, 의도적으로 싸움을 걸고 있는 이유가 뭔지 알았다고, 준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삶에 대한 회의와 알콜 중독,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희망도 없을 때, 그때 자신의 소설을 발견한 거라고, 차라리 다행이야, 그게 나라는 게, 그는 말했고 나는 그가 그런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건지 궁금할 뿐이었다. 어떻게라니? 보면 알 수 있지, 잃을 것도 없고 절망으로만 버티는 사람만이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거라고, 준은 아마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을 거라고, 마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할은 있는 힘껏 준을 미워하기로 했고, 모든 힘을 다해 그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그래서 정신을 차릴 수 있게) 의견에 맞서고 경멸에 정면으로 부딪히며 그 개떡 같은 눅눅한 시리얼을 더욱 먹어주겠다고, 그게 준을 살게 해줄 것이고, 날 살게 해줄 것이다, 결국 비판이 우릴 완성해주니까. 재능 따윈 필요 없다, 히치콕이 말했지! 죽어라! 그럼 재능은 생겨날 것이다! 설마…… 할의 풀린 눈은 마치 전생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현대 문명이지, 할은 커피를 들이켜며 말했고, 나는 그가 커피에 대해 말한 건지 비평에 대해 말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할은 오늘, 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고 있다고 했다. 소리 내서 읽어봐줄래? 할은 자신의 말도 안 되는 문장들이 읽는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는 화학 작용을 눈앞에서 바라보기를 즐겼고, 나는 예의상 몇 문장을 읽다가 나중엔 아무렇게나 읽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짐을 기다렸던 날, 그는 끝내 오지 않았고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깼을 때, 혼자 책을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 준을 보았다.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근데 무슨 얘길 하지? 고민하다가 내 쪽을 보며 먼저 손을 흔든 건 준이었고, (근데 정말 손을 흔들었을까?) 난 같이 손을 들어보이며 나도 모르게 그가 앉은 테이블까지 걸어갔다. 준은 이렇게 만나서 반갑다고 블로그에 쓰시고 있는 일기 잘 읽고 있어요, 라고 말했다. 어떤 일기를 얘기하는 거지? 나도 모르는 내 일기 같은 게 있나? 잠깐 앉으실래요? 준의 바로 옆에 의자가 있었지만 그는 다른 의자를 건네주며 여긴 포스트모더니즘의 자리거든요 말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누굴 기다리고 계시나요? 전 언제나 기다리죠. 그렇군요. 나도 준의 글을 잘 읽고 있다고, 안 그래도 얼마 전 장 외스타슈의 영화를 보았다고, 그러자 그는 반가워하며 자기가 보던 책 표지를 보여주었다. 프랑스어라 봐도 뭔지 잘 모르겠네요, 외스타슈에 대한 책인가요? 아뇨 폴 제고프가 쓴 거예요, 그도 죽었나요? 그럼요, 모두 죽었죠, 번역되어있진 않지만 이런 것들이 있어요. 친구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허구였고 고독은 좋은 재료입니다. 당신은 그들의 모든 지루함과 냉담함 속에서 사물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잘 보는 법보다 보지 않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지 않아야 봐야 할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 결국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우리가 지킨 비밀이에요, 여기까지 듣자 나는 그가 준이 아니라 장 외스타슈의 유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를 만났다는 건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카페 밖으로 나왔을 때, 누군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며 소리쳤다, 꼼짝 마! 짐이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며 우리를 겨누고 있었다. 할은 재빨리 손을 들었지만 짐은 입으로 소리를 내며 방아쇠를 당겼다. 할은 끄으윽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려졌고 몸까지 벌벌 떨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짐은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너무 할리우드 스타일인데? 그의 총구가 이제 나에게 향했다. 이제 어쩌지? 짐은 천천히 나의 머리를 조준했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짐이 방아쇠를 당겼지만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못다 한 이야기들

   할 하틀리의 시대는 갔는가?
   anti text movement 그것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아카이빙은 왜 쓰레기 같은 짓인가에 대해
   정해진 길을 걷는 건 산책이 아니다.
   그리고 쓰지 못한 일기가 언제나 진짜 일기다.

나일선

미장센이 시선이라면 몽타주는 심장의 박동이다. 이 둘의 고유성은 예측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전자가 공간에서 예측한다면, 후자는 이를 시간에서 찾는다.
─이정하, 「몽타주, 나의 아름다운 고민거리」, 『몽타주』, 문학과지성사, 265쪽.
─장 뤽 고다르 (이정하, 「몽타주, 나의 아름다운 고민거리」, 『몽타주』, 문학과지성사, 265쪽 인용)

2022/04/26
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