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



   주제에
   소년이었지

   잘 오래 가까이
   있고 싶어서 우리 둘레 배경을 오려버렸다 겁도 없이
   발만 겨우 디딜 종이 조각 위
   네 발등 위에 내 발을 올리고

   섬으로 여행 온 기분이 어때
   소년은 좋다고 했다

   여백 없이 꽉 찬 섬이다
   나무도 우리고 돌멩이도 화산도 우리
   먹을 수 있는 열매는 이잡듯이 따낸 우리고
   야생 동물은 정수리에 손도끼가 꽂히게 될 우리
   어제는 피를 묻혀가며 뼈를 뒤졌고
   오늘은 불을 피우고 노래를 불렀지
   내일은 껴안고 자다가 입냄새를 맡을 거다
   마실 물이 없어서 오줌을 마실 지경이 됐을 때
   낡아 떨어진 옷과 야하지 않은 몸
   수백 일이고 안 씻은 얼굴 앞에서 우리는

   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우리를 딛고 서 있었다
   주제에 낙원이었고

   종이 조각이었다

   잘라버리는 건 나의 일이었다
   
   소지품 검색대에서 주섬주섬 배낭을 헤치고 필통 안에 있는 가위를 꺼내 보였다
   이거 봐 덕분에 우리는 여행도 가고
   덕분에 우리는 안전했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웃은 거야
   덕분에
   우리였다고

   돌아와서 살아 있다고

   그애는 처음부터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무해한 사랑
   이라는 간판 앞에 맨손으로
   보초를 섰다

   내 말이 틀려?
   필통에 가위가 있는 게
   뭐 잘못됐어?
   말해 봐
   날 뭐라고 욕했는지 말해 봐

   “난 아무 말 안 했어.”
   소년은
   ‘난’
   강조했다
   그럼 누가
   소년을 두고 오려낸 배경들이
   부스스 일어나서 잘린 면을 벼리며 날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나
   오래전부터

   그런 식으로 손이 베이면 자초한 일이라고들
   했지
   가위 때문에
   가위
   같이 썼으면서
   빚진 줄도 모르는 이 버러지들아
   갚아





   끝



   OUT OF SERVICE

   세면대 밑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얼룩이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었다. 평소처럼 세수를 하던 아침의 일이었다.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이럴 줄 알고 물줄기 정말 가느다랗게 틀어서 씻었는데. 방으로 뛰어들어가 닦을 것 막을 것 무엇이든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급한 대로 연습장을 좍좍 찢어 세면대 아래를 틀어막았다. 무엇을 저렇게 연습했을까? 백지가 아니다. 일그러진 글씨들이 물에 젖으며 녹아 흩어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과 나에 대한 거짓말 그리고 유려하게 쓰여진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읽는 것만으로 심장이 뛸 정도로. 나는 이 모든 것을 고급 종이에 적어 번화가의 상점에 내놓길 원했다. 아니, 아니야. 심경을 담은 자필 메모라는 부제로 뉴스 기사에 언급되길 원했다. 실은 이 집의 첫 손님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소개해주고 싶었다. 이것을 읽어도 괜찮은 사람에게. 읽고 기억하고 없어져도 괜찮은 사람과 가느다랗게 떨어지는 물을 구경하면서.

   물줄기를 나란히 들여다보며 말하길 바랐다. 이것은 여섯 살 때 처음 발을 담갔던 개울이야. 그리고 처음 죽을 것 같이 취하고 쓰러졌던 화장실의 배경 음악이야. 뭐라도 줍고 싶어 다 벗고 잠수했던 녹색 심야 그리고 미래에서 온 이과수 폭포야. 언젠가의 우리는 짙은 물 냄새를 맡으며 마음의 풍광에 압도되어 서로를 장악하고 서 있을 거야. 그제야 무엇인가를 해낸 기분이 들 거고 이 물이 줄곧 이어지던 이유를 물보다 깊고 크게 알 수 있겠지. 나는 비로소 다 돌려받은 사람처럼 울음과 웃음을 한번에 터트리며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아주 먼 미래의 가정이고 중요한 얘기는 아니야.

   잘하고 싶은 게 많았다.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그 하나가 잘 안 되었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나는 혼자서 더없이 안전하였는데. 혼자에게 일 인분의 머리카락 땀 눈물 병균이라면 크지 않을 거라 그 정도만큼은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믿는 것이 고장날수록 의연해야 할까. 책임을 질 차례였다. 매일 의연하게 더러워지며 해결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까지 조금만 견디자. 지금까지 잘 견뎌왔다. 조금, 조금 불편할 뿐이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 나는

   여느 아침처럼 화장실 거울 너머 얼굴에 붙은 것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보이기 시작해서 씻어도 씻어도 사라지지 않던 그것은 내 어머니의 광대뼈였고 아버지의 눈동자였으며 혐오하던 스승의 지문이었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의 글씨체였다.

신이인

시를 발표하면서 살게 된 지 일 년이 지났습니다.
시를 쓴다는 사실을 만회하듯이, 만회할 수 있다는 듯이 가볍게 춤추고 웃으며 지내요.

2022/02/22
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