命日



   누구나 태어날 때 한 권의 책을 갖고 태어난다고
   할머니는 자주 얘기했죠

   눈 뜨면 펼쳐지는 창

   첫 장에는 절망에 대한 메타포가 가득했어요

   섬은 바다가 잊은 꿈이라서
   오도 가도 못하고
   멈춰버린 춤이란다

   영원히 한 동작만을 반복하는
   뒤집힌

   어떤 페이지는 너무 무거워서 넘길 수가 없고

   쌓아두기만 하면 결국 무너진다
   할머니 말이

   문득 떠올라서 시월은 더 차가워져요

   맨발로 찾아간 날에는 꼭
   양말을 신겨주던

   우거진 숲에서

   삐죽삐죽 자꾸 자라나던 건
   읽을 수 없는 글자들

   넌 커서 선생님이 되어야 해

   나는 지옥에서 자라 마지막 장부터 다시 썼어요

   가라앉는 섬에 앉아 하루 종일
   입술을 가위로 오려요

   뒤집힌 창에서 쏟아지는 눈발
   아직 눈이 오려면 멀었다고 했는데

   파도는 섬을 뒤적이며
   자꾸만 비밀을 이야기하죠

   이제 낱장으로 뜯긴 페이지들은 전부 녹아내려도 좋아요

   할머니 있잖아
   나 선생님 소리 많이 듣고 살아





   Why can’t you love me?



   아니 아니
   새처럼
   아니 아니

백은선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고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편견으로 가득한 사람인 것 같아서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시를 좋아하지만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올해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와 시집 『도움 받는 기분』을 냈다.

2021/08/31
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