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작은 역사



   짧은 매몰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언어로 말을 했다

   말이라기보다는 길들이지 못한 야생의 새 같았다 새라기보다는 흙을 뚫고 나오는 첫여름의 아지랑이 같았다 아지랑이보다는 파도에 떠밀려온 폐그물, 아무것도 잡지 못해 다시 공중으로 흩어지는 빛들, 빛이 닿자 어두워지는 반대쪽 숲의 새 소리……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꿈에는 중력이 없다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고 오직 무너지는 느낌만이 연속으로 무너진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만큼 무너지고 무너진 만큼 새로운 세상이 지어졌다 말이 중력을 잃자 먼지들이 별에 달라붙었다 사물이 투명해지고 허공은 윤곽을 입었다

   가끔 달이 잘리면 누군가의 다리도 잘렸다 말과 말은 섞일 수가 없어서 짐승들이 아름다워졌다 천국이 있다면 이런 모양일 거라고, 누가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말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처음 매몰된 사람은 달변가고 마지막에 매몰된 사람은 말을 못 배운 어린아이였다 처음 구조된 건 어린아이고 끝내 구조되지 못한 건 달변가였다 기쁨이 슬픔을 초과해서 세상의 모든 구멍에 비가 내리던 날, 수천만 개의 단어가 유실되었다

   매몰되기 전 ‘말에는 전생이 깃들어 있다’고 습관처럼 말하던 이가 있다 그는 이제 종일 숫돌에 칼을 가는 대장장이가 되었다 입을 열면 불꽃이 튀고 쇠 냄새가 났다 뭐라고 중얼거리기만 해도 칼날에 혈관을 닮은 상형 문자들이 새겨졌다 칼이 전생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 대신 사물이 말하는 일이 흔해졌다 그건 알아들을 만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건 하나씩을 들고 광장에 모여 백 년 동안 그것을 흔들었다 춤이라고 해야 할까 주술이라고 해야 할까 누구도 표현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모두 죽고 사물만이 남았을 때 세상은 단 한 권의 사전이 되어 있었다

   새로 태어난 사람들이 사전을 펼쳐 언어를 학습한다

   무언가 쌓여 오르는 꿈에는 중력이 있다 아무것도 쌓이지 않고 오직 쌓이는 느낌만이 연속으로 쌓인다





   수련회



   사람이 사람에게 기대는 모습으로
   나무들이 쌓여 갔다
   기름 냄새가 떠도는 강가에서
   우리들은 손을 이어잡았다

   이름표를 목에 걸고
   누군가는 형광 조끼를 입고
   호루라기 소리를 내면서
   불이 타올랐다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노래를 부르고
   다시 거꾸로 돌면서 축복해, 말하고
   나무들이 무너지는데
   불은 자꾸 커지기만 했다

   우리들이 만든 원에는 출구가 없었다
   이십 대 초반의 청년부 회장이 입구에 서서
   원을 벗어나려는 동작들을 제지했다
   회원들의 그림자가 멀리 강물에 닿았다

   불은 얼굴들을 비추고 꺼뜨리고
   두려워하는 표정을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두려워하게 됐을 때
   우리들은 죄를 말해야 했다
   말하지 않으면 불 속에서 그가 고통받기 때문에

   미워했다고 말하자 나무가 무너졌다
   저주했다고 말하자 누군가 울기 시작했다
   불 앞에선 더 솔직해야 한다고
   꽉 잡은 손이 더워 놓고 싶었지만
   우리들은 서로에게 기대면서 무너졌다

   가장 어두운 죄만큼은 불에 비치지 않게
   고개를 숙여 그늘을 만들면서
   마음을 속여 기도를 만들면서
   눈물을 흘릴수록 불이 커졌다

   회장의 죄가 무엇인지 잘 듣지 못했다
   내내 울고 내내 소리치는
   그의 안경에는 불이 두 덩어리나 타고 있었다
   죄보다 긴 그림자는 없으므로
   우리들의 얼굴은 밤새 환했다

   손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뺨이 뜨거운 이유를 알아야 했다
   형제 안에서 영광을 보네
   자매 안에서 존귀를 보네
   우리들이 원 안에서 불에 타고 있었다
   서로의 안에서 무너지며 소리치고 있었다

이병철

끝이 없는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 시를 씁니다. 쓸수록 내가 미워지는 것을 견딜 수 없지만, 견딜 게 너무 많은 겨울엔 오히려 춥지 않아요. 기대어 무너지는 마음 안에 있습니다. 누군가 혹시 나를 사랑한다면, 시집을 내고 싶어요.

2020/12/29
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