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백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린다 커피 향이 고소하다 불에 볶은 과테말라, 케냐, 옥사카산 원두

   수익의 일부는 정당하게 현지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돌아간다

   많이 살수록 할인율은 높아진다 최저가의 최저가 에코백은 덤이다

   담배 있어요? 역 광장을 돌며 담배를 구걸하던 남자가 무료 급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선다 보이지 않는 구석에, 그러나 너무도 쉽게 눈에 띄는 한국이 싫다며

   외국을 전전하던 친구는 이제 세상에서 서울보다 좋은 곳은 없다고 한다

   돈만 있다면

   이렇게 편한 나라가 어딨어?

   멕시코 시티에서 총에 맞아 죽은 아이를 봤어 모르몬교 백인을 향한 증오 범죄였는데 해변에서 먹었던 토르티야는 정말 매웠지 실컷 떠들다가 친구는 기념품으로 샀다는 핸드메이드 에코백을 건넨다 착한 소비는 가난한 지역 사회를 살리는 데 도움을 준다고

   못에 걸리면 그대로 쭉 찢길 것 같은,

   급식소에 셔터가 내려진다 배웅하는 사람은 없다 각자의 길을 간다 또다시 만나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작은 가능성도 남기지 않는다

   걷는 거리가 익숙하다 다 아는 곳 같다

   각 호선이 막힘없이 연결된다 이렇게 늦은 밤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나라는 없을 거야 사거리를 지나다 총 맞을 일도 없잖아? 살인율이 가장 높다는 멕시코, 멕시코를 곱씹다가

   스스로를 가장 잘 죽이는 나라와 타인을 가장 쉽게 죽이는 나라 중 어느 쪽이 좀더 나은 곳일까 생각하다가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지 못했다 다음 열차를 기다리며 에코백을 버렸다 원하지 않는 물건을 처치하는데 돈을 쓰는 일은 무척 아까운 일이다 게다가

   친환경 소재 에코백은 잘 썩어 어쩌면 좋은 비료가 될 수 있고

   질 좋은 비료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

   빈 열차가 플랫폼을 빠르게 통과한다 달리는 기차의 소음은 시원하게 갈리는 원두 소리 같구나

   쇠 타는 냄새

    불합리한 구조조정에 항의하던 사람이 서울 한복판에서 칼을 휘둘렀으나 부상자는 0, 사상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고 한다





   큰 새장



   이것은 정말 지루한 책이다 그는 책의 첫 단락을 읽는 순간부터 그것을 직감했지만 독서를 그만둘 수 없었다

   왜 책을 덮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까 이유를 알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책을 읽어나갔다 지루한 책이 더 끔찍하게 지루해지길 바라면서

   그가 읽는 책에서는 바순처럼 낮은 음조로 노래하는 새 한 마리가 등장했다 그 새는 목은 길지만 늘 움츠리고 있었고 잘 날지 않아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눈에 띄지도 않는, 여간해서는 지평선을 날아오르지도 않는 새를 책은 끝도 없이 묘사하고 있었다 새의 몸을 가로지르는 검은 세로줄 무늬가 얼마나 제각각인지 갈대와 갈대 사이를 걸을 때 진흙을 꽉 움켜쥐는 발톱은 또 얼마나 날카로운지 읽다 보면 가끔은 그가

   바순의 음조로 낮게 우는 그 새가 된 것 같기도 하였다 그 순간은 책의 귀퉁이를 쪼개는 빛의 움직임처럼 아주 잠시였을 뿐이지만

   책은 언제나 새 한 마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거기에는 멸종 위기에 놓인 개체수의 슬픔이나 인생에 대한 어떠한 알레고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지독한 책이야, 안락의자에 파묻혀 그가 책의 무의미함에 감탄할 때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기척을 느끼며 새는 전방을 주시하고

   잠을 이기지 못한 그가 졸린 눈을 비비며 침실로 향한다 책이 닫힌다 남자가 놓아준 갈대숲이 소란스럽다 새는 접었던 날개를 활짝 편다 공중을 활강한다 진흙을 더 세게 움켜쥐며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음조로 노래한다 바순보다 낮게

   “진흙과 곱게 간 잿빛 돌이 주재료임이 분명한 그 새의 둥지는 아직까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도 갈색 부리로 돌을 가는 새의 모습을 찍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미스터리한 일이다”

   다음 날에도 문장은 시작되고 남자는 햇빛 아래서 자신의 주위를 에워싼 채 가볍게 부유하는 먼지를 본다 손등에 내려앉는 티끌, 아름답구나 그는 누구의 발걸음도 닿은 적 없는 자신의 마당을 향해 잿빛 돌을 던져보았다

정다연

동양인, 한국 여성, 글쓰기의 치열함을 사랑합니다. 요즘은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견 아롱이의 그림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계절마다 우편을 보내주기도 합니다. 상상력이 부족해서 더 많은 것들을 상상하려 노력해요.

2020/11/24
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