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워져야 볼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귀신?
   그것도 있다, 스파이, 간첩.
   하지만 스파이는 낮에도 움직이잖아.
   그런가.
   그렇다면,
   빛.

   나는 고개를 돌려 주희를 바라보았다. 어두워져야 볼 수 있는 것? 이라고 말하면서.

   누군가 주희에게 희가 아버지인지 어머니인지를 묻는다면 그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만신, 대무녀. 그러면 어머니인가? 그저, 만신. 대무녀. 희는 1대 만신인 어머니 유순옥의 뒤를 이은 2대 만신이었다. 1대 만신인 유순옥은 대무녀가 되기 전 경성 최고 권번을 졸업한 뒤, 훗날 조선 레뷰 열풍의 주인공이 되는 배구자와 금성오페라단을 만든 권삼천, 다국적 소녀단 스즈란자의 일원인 권익남 등과 함께 동경행 배에 오른 이였다. 희는 무속춤에 빠진 유순옥이 만신이 되기 위해 다시 조선행을 택했을 즈음에 태어났다고 한다. 동경에서 조선이라면, 현해탄을 이야기하는 걸까 물었을 때,
   “바다. 바다의 바다, 중간.”
   그러나 그 시절 무당이란 여성에서 여성으로 내려오는 형벌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귀신 이야기가 대부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여성들에 관한 것이라 그랬던 걸까. 그러나 유순옥의 운명은 그 집의 유일한 남성인 희에게로 찾아왔다.
   “저 옷은 쟤가 나보다 낫네.”
   그날 희는 유순옥이 가장 아끼던 옷을 입고 작두 위에 서 있었다. 희의 춤을 본 유순옥이 남긴 말은 저게 전부였다. 유순옥은 실제로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동경에서 유학하던 시절, 아사쿠사의 극장가에서는 남자 여배우가 흔했다. 유럽, 시카고, 중국까지 순회공연을 다니던 소녀연예인단 덴카이스지차의 배구자가 유명세를 얻은 것도 <소공자>의 주인공 역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경성 극장가를 떠들썩하게 만든 권금성이 연기한 배역도 촌부였다. 남성의 옷을 입은 여성 배우들을 따르는 소녀 팬들로 그 시절 경성의 극장가는 연일 매진행렬이었다. 만신이 데리고 다니던 당사당패의 남성들 또한 무당이 접신할 때 여성의 옷을 입고 흥을 돋우는 일을 했다. 그러니 단순하지 않았던 건, 무당이라면 여성일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그거는, 여성들이 얼마나 슬펐니. 죽고 나서야 겨우 그 슬픔에서 해방되니까, 살아서는 말 한마디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랬던 거지.”
   주희는 저렇게 말하곤 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을 두고 형벌이라니, 그리고 그 형벌이 신의 목소리로 삶의 진실을 말해야 하는 거라니. 그러나 주희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이 오자 사람들은 무당의 목소리를 두려워했다. 식민 지배가 시작되자 무당들은 미신에 심취해 허언을 일삼는 사람들이 되었다. 해방이 되자 이번엔 무당의 말이 빨갱이들의 암호로 불렸다. 무당들이 하는 이야기는 일본의 것도, 북이나 남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48년, 지리산 자락 북쪽의 남원 골에 빨치산들이 내려오던 날, 어느새 만신이었던 대무녀 희는 가장 먼저 산 채로 땅에 묻혀야 했다.
   귀신, 간첩, 할머니. 무당은 신의 목소리를 들었고 간첩은 북의 말을 전했으며 할머니들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한 일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해, 빨치산의 주축으로 지목된 이들은 주희의 형 주혁과 주율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의 장학생이었던 형들이 대체 왜 거기에 있었을까. 하지만 당시 주희는 형들의 안위에 대해서 더이상 궁금해할 수 없었다. 주희는 그때 남원도 경성도 아닌 동경에 있었다.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장학생이 된 형들과 달리 주희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곳엔 아름다운 게 없었어.” 주희는 제복 같은 교복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제복에 큰 칼을 차고 다녔던 선생들, 그들이 니체니 카프카니 곰브로비치니 이런 작가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주희에게 수치감을 주었다. 제복이 정신을 괴롭혔다면 육체를 괴롭힌 건 남달리 왜소한 체격이었다. 학교를 가기 전에 주희의 체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신을 따르던 작은 무녀들은 오히려 색색의 옷을 입혀보고 감탄 섞인 칭찬을 하곤 했다. 주희는 어느 날부터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책을 읽었다. ‘소녀’ 아니냐며, 학교에서 바지가 벗겨지는 수모를 당한 후였다. 그날 희는 치마를 입고 나타난 주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음 날 주희는 희와 함께 경성행 기차를 탔다. 희와 주희가 경성행 기차에 오른 날, 그러니까 1942년의 어느 날. 또 다른 사람들이 그 기차에 탑승했다. 그들은 일본과 중국, 미국 순회공연을 마치고 이제 막 조선에 도착한 열여섯 명의 소녀들, 다카라즈카극단의 소녀연예인단이었다. 경성역에서 주희가 가장 먼저 본 건 엄청나게 밝은 빛이었다. 그것은 소녀 연예인을 향한 플래시 세례였다. 그러나 카메라의 플래시 빛보다 더 강렬하게 주희를 흔든 것은 오히려 건너편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목소리였다. 소녀들을 향한 열렬한 사랑의 고백, “꽃이 일제히 피는 것 같다”는 군무로 유명했던 다카라즈카의 열여섯 소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들을 사랑해 마지않던 조선의 소녀들이었다.
   주희, 주희도 다카라즈카 소녀 연예인들의 팬클럽이었어? 주희는 고개를 저었다. 다만 거기엔 아름다움이 있었다고 했다. 누가? 열여섯 명의 소녀가? 중심의 소녀들도 아름다웠지만,
   “그들을 향해 사랑의 말을 건네던 어둠 속의 소녀들이 너무나 아름다웠지.”
   어쩌면 그때, 주희는 여성의 옷을 원했던 자신에 대해 말하던 건지도 몰랐다. 잠시 뒤 주희가 희를 올려보았다. 우린 왜 경성에 온 거야? 주희의 물음에 희는 다카라즈카극단을 가리켰다.
   희가 가리킨 자리엔 1929년의 경성 밤거리가 나타났다. 그날, 유순옥과 희는 1921년 중국 다렌에서 조직된 다국적 소녀가극단 스즈란자의 조선극장 레뷰 무대를 함께 보았다. 가까이는 동경소녀가극단을, 멀리는 미국식 버라이어티쇼를 표방했다는 스즈란자에는 여덟 명의 조선 소녀들이 있었다. 스즈란자뿐이 아니었다. 배구자가 아홉 살 나이에 입단하여 큰 인기를 끌었던 덴카이스이치자, 동경 아닌 경성발 소녀가극단이라는 포부를 내세운 낭랑좌가 인기몰이에 한창이었다. 희는 중국, 일본, 한국 할 것 없이 남장을 한 소녀 배우들이 다정하게 섞여 있던 그 무대에 온통 마음이 동했었다. 극장 벽면 가득한 포스터는 배구자예술회의 공연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희는 언젠가 매일신보에서 보았던 기사를 떠올렸다. 그 유명한 소녀 연예인 배구자가 예술회를 설립하고 <몽 파리>와 같은 미국식 레뷰 뿐 아니라 <아리랑>과 같은 조선의 희곡 또한 소녀가극으로 선보인다는 내용이었다. 어린 시절 일본에 입양된 배구자는 근화학교의 강연 중 간단한 인사말조차도 조선어 통역에 의지하곤 했다. 많은 남성 관객들은 배구자의 공연을 재밌게 보고도 툭하면 그가 조선말도 못하고 서양 문물에 넋이 나간 모던 걸, 일본 여자라는 말로 비꼬곤 했다. 그러나 희가 느끼기에 조선무용을 국제 박람회장의 무대에, 일본 관객이 바글대던 극장에 올린 것은 조선말도 못한다는 바로 그 배구자였다. “이제 소녀 연예인들의 무대를 배우기 위해 아사쿠사까지 견학을 갈 필요가 없어요.” 배구자의 기사를 보며 희는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국경을 넘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은 소녀 연예인들의 춤과 노래,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또 다른 소녀들의 사랑일 것이라고.
   “난 그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주희의 말에 희는 다시 1942년의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주희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었다.
   그래서 주희는, 어디로 갔지?
   주희는 결국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한다면, 그로부터 6년 후 게이오 대학 철학과 강의실에 앉아 있던 주희는 뒷덜미가 잡혀 조선으로 가는 배에 태워졌다. 뒷덜미를 잡혀, 하고 말할 때 주희는 약한 경련이 일어나는 사람처럼 팔을 떨었다. 귀신, 간첩, 할머니는 다 죽였대. 그 이야기를 들은 날 밤, 주희는 산 채로 땅에 묻혔다는 희의 마지막을 생각했다. 동네 사람들은 희가 남자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말을 해주지 않았던 걸까.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만신을 찾아왔다. 그러면서도 집에 돌아갈 땐 딱한 눈으로 만신을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적어도 희의 당사당패는. 거기까지 생각하던 주희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주혁과 주율이 희가 낳은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스쳐지나갔다. 주혁과 주율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죽었다는, 희의 거꾸로 선 시신은 끝없이 주희를 따라다녔다. 주희는 그 시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망망대해에서 갈 곳은 바다뿐이었다. 그러니까 희가 태어난 그곳, 중간. 물론 그 생각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이번엔 또 다른 사람이 주희의 뒷덜미를 잡았다. 같은 뒷덜미인데도 이 말을 할 때 주희는 옅은 웃음을 보였다.
   해녀 이씨.
   기억하기로, 주희에겐 오로지 한 명의 친구가 있었다. 조선으로 끌려가는 배에서 주희의 뒷덜미를 낚아챈 사람, 한밤중 바다의 중간에서 나타난 해녀 이씨. 그때 주희와 이씨는 이름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둘은 그냥 빨갱이였다. 주희는 주혁과 주율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런데 이씨는 왜? 제주도면 오히려 빨갱이의 반대편 아니야? 그래, 하지만 이씨는 그때 제주도에서 살아남은 여성이라서. 이씨는 4.3 때 제주도민의 절반이 죽자 밀항선을 타고 후쿠오카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이씨는 파친코에서 일을 하다 붙들려 배에 태워졌다. 주희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쯤은 큰 이씨를 똑바로 올려보았다. 누군가 자신을 만지는 것에 질색하던 주희였다. 학교에 다니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그런 주희가 올려다보았을지언정 가만히 있었다니 신기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너, 옷 좀 바꿔 입자.”
   이씨는 주희의 셔츠를 가리켰다. 그러나 주희의 시선은 바닥으로 향했다. 어두운 밤바다는 달빛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주희는 그림자에서도 선명한 이씨의 해진 치맛단을 잠시 바라보았다. 곧이어 언제나 반듯하게 접혀있던 희의 치마가 떠올랐다. 그사이 이씨는 고개를 갸웃했다. “일본 놈인가? 혹시 내가 제주도 말을 썼나?” 주희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이씨의 혼잣말 버릇을 이해했다. 이씨는 그때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몰랐던 것이다. 어쨌거나 둘은 그 배에서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단지 옷을 바꿔 입었을 뿐인데도 여자 옷을 입은 주희와 남자 옷을 입은 이씨를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남자 옷이 이렇게 전지전능할 줄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이씨는 몹시 신나보였다. 둘은 그날 밤, 동양극장 처마에 자리를 잡았다. 경성의 주점들은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주희는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무언가 어른거린다는 느낌에 실눈을 떠보니 이씨가 주먹밥 하나를 가져다 놓는 게 보였다. 정작 이씨는 물을 들이켜던 모습도. 다음 날 주희는 치마의 밑단을 정성스레 접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이름 같은 거 몰라, 넷째라고 불렸어. 딸이 다섯이었거든.”
   그러더니 주먹밥이라면 옷값일 뿐이라며 헛기침을 했다.
   “그럼, 내가 이름을 만들어드릴까요?”
   주희는 희를 따르던 어린 무녀들에게도 종종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들은 대부분 이름이 없었다. 그때는 톨스토이나 프라스터 메리메와 같은 외국 번안 소설들이 동경에서 경성으로 곧장 들어왔고 연극으로 만들어지며 큰 인기를 끌었었다. 안나, 에레나, 쏘냐와 같은 이름도 덩달아 유행이었다. 주희는 책에서 나온 이름을 가져와 불러주었다. “사람이 된 기분이야.” 무녀들은 무척 좋아했다. 주희는 이씨도 이름을 가지면 좋아할 거 같았다. 그리고 만약 이씨가 좋다고 하면 주희는 이 이름을 줄 생각이었다, 이보나. 곰브로비치의 희곡 부르군드의 공주 이보나, 왕자 앞에서 결코 웃지 않아 미움받는 공주, 나라의 위계와 가족의 질서, 세상의 법칙을 파괴한다며 죽임을 당하는 공주 이보나. 훗날 이씨가 말한 그 날의 기분은 이러했다. ‘빨갱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닌가, 주희는 머리를 쓰다듬고 싶게 착한 사람이네.’ 하지만 정작 그날, 이씨는 주희의 말에 울음을 터트렸다. 놀란 주희가 주머니를 뒤집어 손수건을 꺼냈을 때였다.
   “야, 내가 너 돈 벌게 해줄까?”
   그렇게 이씨가 주희를 데리고 간 곳은 극단이었다. 그러니까, 소녀 연예인을 찾는다는 극단.

   1921년 조직된 예술협회는 “학력 보통학교 졸업 이상, 연령 17세 이상 22세 이하. 단 품행이 단정한 독신자 여성 배우 모집”이라는 공고를 내었다. 하지만 소녀 연예인을 뽑는 가극단과 여성국극단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혼인을 해도 혹은 혼인을 안 해도 상관없었다. 주희와 이씨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3년 후, 주희와 이씨는 그곳에서 나와야 했다. 1959년, 정권이 바뀐 뒤 나라에서 설립한 예술협회는 다시 이런 공고문을 붙였다. “품위가 있고 학력 조건이 되는 연극인 모집” 전쟁에서 돌아온 남성들이 우선 채용되었다. 여성이 남성을 연기하고, 대학을 나오지 않은 소녀들이 하던 국극은 점점 설 자리가 없어졌다. 연극협회에 시험을 보러 가자는 주희에게 이씨는 마치 전생을 떠올리는 사람처럼 제주도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 그때 후쿠오카를 가면서 아이를 두고 왔어. 갓난쟁이.”
   주희도 그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주희의 놀라는 표정에도 이씨는 웃어보였다.
   “이 나라에서 나는 품위가 없는 여자라고, 학식도 없고.”
   하지만 이씨 네가 도망친 건 이유도 모른 채 빨갱이가 되어 죽임을 당하니까, 밀항선에 갓난아이는 태울 수가 없으니까, 만약 그 아이가 울기라도 한다면 배에 있는 모든 이들이 바다에 던져질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주희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주희도 알고 있었다. 게이오 대학에 입학한 적이 있는 생물학적 남성인 주희는 협회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낳은 아이를 두고 혼자 살아남은 해녀 이씨는 그럴 수 없다는 걸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그 애도 이름이 없었네. 보고 싶을 때 이름을 부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때도 너를 알았으면 좋았겠지. 그럼, 그 아이도 이름이 있었겠지?”
   주희를 향해 돌아선 이씨는 어느새 분장을 다 마치고 장군이 되어 있었다.
   “선화공주님, 그래도 공주님이 제 이름은 만들어주셨잖습니까.”

   사실, 극단에서의 3년 동안 주희와 이씨가 어떻게 지냈는지 잘 모른다. 주희는 선화공주 역으로, 이씨는 선화공주와 사랑에 빠진 장군 역으로 제법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 정도를 들었다.
   무슨 재밌는 기억 없었어? 라고 물으면,
   “나는 그게 좋았어, 내가 남자든 여자든 나를 사랑해주던 관객들.”
   그러고는 다른 이야기들을 시작하는 거였다. 가령 공연이 끝난 밤 이씨가 주희를 데리고 간 서대문의 카페―랑자국(娘子國)에서 먹었던 스위하―트 칵텔이라든가 구약나무 뿌리로 만든 곤약구라든가 하는 것. 스위하―트 칵텔은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이 즐겨 마시던 달달한 술이었다. 스위하―트 칵텔을 처음 마신 날, 주희는 그 단맛에 몇 잔을 들이켰고 결국 이씨에게 업혀 집에 돌아갔다. 아이고, 무슨 처자가 이렇게 술을 마셔, 모던 걸이 되려고 하는가! 주희가 세 들어 살던 집의 주인이 혀를 찼다.
   주희는 취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가끔 엉뚱하게 느껴졌다. 주희는 아침마다 배달된 신문을 뒤적이며 커피를 내리고 오후에는 구운 비스킷을 제철 과일과 함께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갸웃할 때마다 주희는 술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카페―랑자국에 흐르던 미국의 재즈 음악 ‘폭스트로트’, 훗날 엔카의 기원이 되었다던 그 음악이 너무 좋았다고 말하곤 했다. 또 언젠가는, 폭음하느라 늦게 들어가는 모던 보이들을 데리러 온 부인들과의 설전, 이런 구경이 철없이 좋았다고 했다. 카페―랑자국에서 나와 청진동 쪽을 걸을 때 마주치는 1900년대부터 있었다던 국밥집들 이야기도 했었다. “‘달빛을 이고 마시다’라는 국밥집에서 밤참을 먹으면 이씨는 국밥을 하나도 안 남기게 먹어. 나는 평생 밥알을 세느라 바빴는데.” 그러면서 웃느라 입을 가리던 주희. 어쨌거나 결론은 이씨였다. 카페―랑자국에 발걸음을 끊게 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줄줄 새는 월급을 보던 주희가 엉뚱하게도 그곳을 알려준 이씨에게 가벼운 타박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씨는 심드렁한 표정을 보였다. “이거 오사카에 있던 다방이야. 동경에도 있었다던데, 너 되게 가난한 유학생이었구나.” 그러더니 주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얘가 그래서 지금 이렇게 돈을 쓰니? 니체인가 뭔가를 읽어도 다 소용이 없구나?”
   주희는 니체라는 이름에 말문이 막혔다. 그 뒤 주희는 카페―랑자국은 얼씬도 하지 않았고 니체 읽기에 전념하였다. 아모르파티란 그러니까 대체 무엇인가? 그런 주희의 머릿속엔 스위하―트 칵텔과 그걸 마시던 모던 걸, 모던 보이 그리고 이씨의 커다란 손이 맴돌았지만.

   주희와 이씨는 극단을 나오게 된 후부터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다. 가끔 이씨가 부산에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후쿠오카로 간 이씨가 재일조선인인 남편을 만났는데, 그는 조선학교에 헌신하는 사람이라 이씨가 해녀 일을 해서 대신 생계를 꾸린다는 거였다. 그러나 해녀 일만으로는 남편이 데리고 온 아이들을 키우기가 어려워서 밀수품 장사를 시작했다는 거였다. 재일조선인이 부산에? 하지만 없던 일이 아니었다. 부산의 가정집에서는 일본방송이 나왔다. 후쿠오카 사람들은 한국의 가요무대를 보았고 부산 사람들은 일본의 엔카를 트로트처럼 들었다. 소리와 전파에는 경계가 없었다. 게다가 일제 밥솥이나 인스턴트커피 같은 것들이 인기였다. 막상 이씨가 파는 것은 미국제 분유라고들 했지만. “빨갱이 때문에 죽을 뻔했으면서 어떻게 재일조선인하고 산대?” 사람들은 주희와 이씨가 친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주희는 반응하지 않았다. 가족도 믿지 말라고 하던 70년대였으므로. 그리고 또 하나, 주희는 그들이 진짜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식은 떼어놓고 남의 자식을 위해 돈을 번다는 말들, 그러니까 빨갱이가 됐지! 그 시절 빨갱이는 만능의 단어였다. 귀신, 간첩, 할머니. 어느 날 주희가 이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앞에 그 단어를 늘어놓았다. 아마도 1987년, 그때는 텔레비전 있는 집이 드물어서 다 같이 뉴스를 보곤 했었다. KBS 뉴스는 홍콩에서 부부싸움 끝에 한국인 남편에게 살인을 당한 수지 킴이 사실은 남편 납치를 기도한 여간첩이라고 보도했다. 물론 얼마 뒤 수지 킴은 가정폭력을 행사한 남편에게 살해당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텔레비전 뉴스가 전부였던 그 시절의 사람들은 진실을 알 리가 없었다. 주희는 아무 말 없이 수지 킴의 이름과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주술을 외우듯 저 단어들을 발음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1990년에는 그 유명한 할머니 공작원, 북한 서열 22위인 이선실이 강화도에서 북으로 귀환한 뉴스가 있었다. 이제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있었으므로 주희는 이웃들의 의견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주희의 반응도 좀 달라졌다. “왜? 할머니는 간첩 하면 안 되나? 항상 인자해야 돼?” 주희, 그때 왜 그렇게 화를 냈어?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건 마치 소녀가 항상 여자여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말한 것 같기도 하다. 주희도 어느 시절엔 선화공주였듯이.
   그런데, 잠깐. 경성에 남았다던 주희가 부산의 일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이씨가 떠난 후 주희는 자신 또한 연극협회 시험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주희의 이름은 연좌제의 맨 첫 장에 있었다. 그 뒤 주희는 양조장에서, 신문사에서, 그리고 술집에서, 목욕탕에서 일했다. 양조장과 신문사에선 각각 일본어로 된 주문을 받고 기사를 번역했다. 술집에선 기생관광을 오는 일본인들을 상대했다. 그즈음은 일본 게이들이 한국으로 남창관광도 자주 왔으므로 주희에게 연애를 거는 일본인 사업가도 꽤나 있었다. 주희는 그들과 연애를 하진 않았으나 경복궁이며 창경궁 같은 곳을 안내해 주고 팁을 받곤 했다. 쉬는 날을 노려 목욕탕에선 때밀이를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연극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가끔은, 이씨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보고 싶을 땐 이름을 불러보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던 그 이름을. 연좌제도 돌리지 못한 연극에 대한 마음은 의외의 인물이 바꿔 놓았다. 어느 날 주희에겐 아이가 생겼다. 결혼? 아니었다. 연좌제에 이름을 올린 주희는 누구와도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연좌제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몇 킬로미터 이상 거주지에서 벗어나면 당국에 신고를 해야 할 정도였다. 주희는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형사들과 동네 이웃처럼 지냈다. 여름엔 수박 물을 나눠 마시며 걸었고 겨울엔 베지밀을 주머니에 넣었다 주기도 했다. 담당하던 형사가 죽었을 때 주희는 조문도 다녀왔다. “대체 왜 주희가 그 사람들을 이해해야 돼?” 물어도, “그래, 그거, 확실히 인간이었네. 죽은 걸 보니까” 하고 말던 주희. 어쨌거나 그 시절 주희는 그저 일자리 찾기에 바쁜 청년 계약직 노동자였다. 언제나 생활을 이길 수 있는 것이란 없으니까. 그렇다면 더욱이 어떻게? 결혼해야만 아이가 생기는 건 아니지. 주희는 그 말을 할 때마다 굉장히 귀찮아하는 표정이었는데 아마 그 질문을 수도 없이 들어서인 것 같았다.
   주희는 아이를 명동에 새로 생긴 프린스 호텔 다방에서 만났다. 그날은 만월이었는지 아주 밝은 밤이었다, 마치 열여섯 소녀 연예인들을 본 날처럼. 아이를 데리고 온 건 희의 당사당패에서 징을 치던 이였다. 그는 주혁의 아이라고만 짤막하게 말했다. 주희는 가만히 주혁의 나이를 꼽아보았다. 그때 그는 고작 스물을 넘긴 청년이었다. 그래. 그래도 아이는 낳을 수 있었다. ‘그건 그런데요, 희가 죽을 때 당신은 어디서 뭘 했어요? 희가 여자가 아니라는 걸 가장 오래 알던 사람이잖아?’ 주희는 그 말이 넘어올까 봐 물을 들이켜야 했다. 미군과 결혼한 딸을 찾아 하와이로 갈 거라던 그는 잠시 주희를 바라보다 이런 말을 했다.
   “여자 옷을 끝까지 벗지 않겠다고 말한 건 만신이셨습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는 주희를 보다 고개를 떨구었다.
   “태어날 땐 몰라도 죽을 땐 자기 자신으로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요.”

   주희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생에서 무언가가 자주 사라졌고, 그때마다 그것을 감내해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다방에서 주희는 자신이 그걸 그저 받아들인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희가 사라진 자리에는 이씨가 있어주었고, 이씨가 주희의 인생에서 걸어 나간 후에는 아이가 찾아와 준 것이다. 주희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이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이씨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씨가 떠나던 날, 주희는 어두운 바닥을 더듬어 무언가를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재일조선인들은 북조선에, 김일성에게 돈을 보내고 자식을 보낸대. 너 그래도 갈 거야?”
   너, 제주도에서 그 사람들 때문에! 간절하고 다급한 마음은 그저 그렇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것은 자꾸만 분노를 만들었다. 자신이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주혁과 주율과 연결된 자신이. 하지만 내가 무슨 죄를? 분노와 죄책감과 절망감이 뒤섞인 곳엔 자신이 아닌 낯선 사람이 있는 것만 같았다. 이씨는 묵묵히 화장만을 지우고 있었다. 장군의 얼굴에서 다시 이씨의 얼굴이 되었을 때였다.
   “주희, 제주도 해녀들은 숨비소리라는 걸 낸다…… 4.3이 지나고 난 후부터야.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소리래.”
   주희가 퍼뜩 거울에 비친 자신과 이씨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살아남은 여성들에겐 숨소리뿐인가 봐, 말 대신 숨소리를 내.”
   이번엔 이씨가 주희를 바로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북조선엔 계급도, 내 가족, 남의 가족 가릴 것도 없대. 그렇다면 나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지 않으려나.”
   이씨의 그 말은 어느새 희와 함께 있던 주혁과 주율을 데리고 왔다. “어머니, 사회주의에선 모두가 한 가족으로 평등하게 살 수 있대요.”
   몇 주 후, 주희는 아이와 부산행 기차를 탔다. 오래 전 희와 함께 경성역에서 보았던 소녀 연예인들과 건너편 어둠 속에서 사랑을 말하던 조선의 소녀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래도 남원 아닌 부산이라니, 뭐가 있긴 있어. 밀수하는 이씨라든가 말이지? 주희는 그 말에도 그냥 웃어버리고 말았고, 이때다 싶었다.
   “그럼, 제인의 이름은?”
   주희는 이 말엔 웃지 않았고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처럼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제인은 아이가 만든 제 이름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난 후였을 것이다. 주희는 제인이 과외를 해서 번 돈으로 가발을 사고 미니스커트를 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태원의 어느 클럽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은 빨래를 챙기다 알게 되었다. 주희가 망설이는 사이, 말을 꺼낸 건 제인이었다. 생물학도였던 제인이 소련으로 가는 국비유학생 시험에 통과한 후였다.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나 트렌스젠더들은 질병에 걸린 게 아니에요. 저는 그걸 공부하러 갈 거예요.” 외국에 사니까 이름은 제인이라며 웃어보였단다. 주희는 어쩐지 제인이, “주희 당신을 이해해요”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희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고작, “근데 제인은 미국 이름 아니야?”
   물론 그땐 소련과 미국이 바다를 가운데 두고 핵을 쏘아 올리느니 하던 와중이었으므로 나름 근거는 있는 걱정이긴 했다. 게다가 주희는 미국도 소련도 다 별로였다. 1960년대를 생각해보면 그랬다. 미국은 자기 나라 밀가루를 가져와서 싸게 팔았는데 그건 꼭 대동아전쟁 때 쌀을 못 먹게 하고 칼국수를 먹게 하던 일본 생각이 나게 했다. 그래도 지가 좋다는데, 뭐. 주희는 대신 제인을 노서아어로는 어떻게 쓰는지 사전을 찾아보았다. 물론 노서아어로 제인을 쓸 일이 없다는 건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되었다. 모스크바도 아닌 서울에서 말이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주희는 서울역에 있었다. 밤눈이 내리는 평일의 서울역은 적막했다. 주희는 건너편 하얏트 호텔 전광판의 속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위 도중 총에 맞은 서울대생> ‘아니야, 우리 애는 시위를 하지 않았어요.’ 주희의 말에 답이라도 하듯 <금발 가발에 여장을 하는 이상행동을 일삼던 명문대생>이라고 제인을 소개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삼촌의 손에 자란 불우한 어린 시절, 이라는 자막이 이어졌다. 제인의 사진은 <클럽 출입하는 이태원의 여장 남자들>이라는 자막과 함께 등장했다.
   그날 주희는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경찰청장을 만나겠다며 부산에서 서울까지 온 길이었다. 제인이 오발된 경찰의 총에 맞은 직후엔 그렇게 주희를 찾아오던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언제부터인가 발걸음을 하지 않고 있었다. 경찰청장은 어째서 시위대 근처에도 가지 않은 제인이 서울대 정문에서 총을 맞고 죽었는데 해명을 해주지 않는 걸까. 사과까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궁금했다. 하지만 주희는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주희는 슬펐나, 글쎄. 주희는 그저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제인은 미국 음악을 좋아했지만 그만큼 생물학을 사랑했고, 그래서 소련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고, 그리고 여성이 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은 원래 여성이었다고 했다. 그때 주희는 제인을 보며, ‘얘야, 나도 한때는 여형 배우를 했지. 그리고 이씨와 옷을 바꿔 입었을 때 너무나 편안했어’ 하는 대신, “우리 때는 남자도 여장을 많이 하고 그랬지” 말해버렸었다. “제가 여성이 되고 싶은 건 취향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제인에게는 항상 ‘주희는 그걸 알잖아요’가 겹쳐있었다. 주희는 고개를 돌렸던 자신을 수없이 되감았다. 주희는 그때 오래도록 서울역사 안에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바깥으로 나가 서울 땅을 밟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랑하던 경성이, 눈부신 빛과 사랑의 고백으로 와주었던 경성의 밤이, 이씨와 함께했던 경성의 거리가, 선화공주로 살았던 그 경성의 무대가, 제인이 왔던 서울의 그 밤이, 빨갱이로 몰려도 연극을 위해 남아 걸었던 그 서울이. 하지만 빛이 너무 강하면 오히려 앞이 안 보이지, 그 길들은 차츰 환해지더니 마지막엔 하얗게 사라져가는 것만 같았다. 주희는 고개를 들어 다시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제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제인의 얼굴을 보던 주희가 중얼거렸다. 제인이 완벽하게 사라지기 전에.
   “우리 딸, 제인, 우리 제인. 아주 예쁘네.”
   며칠 후 제인의 시신과 함께 부산에 내려온 주희는 두 번 다시 서울에 가지 않았다. 부산의 장례식장에서는 주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너, 너 그 옷 나랑 바꿔 입자.”
   주희는 어둠 속에서 나타난 이씨를 한참 바라보았다. 주희는 천천히 이씨에게 다가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씨의 가슴께에는 김일성 배지가 달려 있었다. 김일성의 얼굴 위로 주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희는 그때까지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희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주혁과 주율이 빨치산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내내 어리둥절하기만 하던 주희였다. 누군가의 죽음을 실감하는 건 항상 그런 어리둥절함과 시작된다는 것 역시 늘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씨를 보고 나서야 주희는 이제 밤에만 만날 수 있는 사람에 제인이 포함된다는 걸 깨달았다. 주희는 소리 내어 울었다. 이씨는 주희의 등을 쓸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제발 그 옷을 나랑 바꿔 입자,
   “제발 그 옷을 나에게 주렴.”
   다시 삼십 년이 흘러, 주희의 몸속은 암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의사는 서울의 병원을 추천해주었다. 하지만 1985년 연좌제가 모두 해제되고 거리 제한이 사라졌음에도 주희는 서울행 기차를 타지 않았다. 사람들은 제인이 죽고 나서 주희가 조금만 크게 웃어도 자기 자식이 아니라서 그렇다느니, 나라에서 받은 돈으로 팔자를 폈다느니 수군거렸다. 주희는 점점 더 집 안에만 머물렀다. 낮에는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저 밤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굴었다.
   “주희, 주희는 소원이 뭐야?”
   “나? 나는 다시 태어나는 거.”
   이런 고생을 하고도 또 태어나고 싶은 거야? 욕심이 아주 목까지 찼다는 말에 주희는 소리가 나도록 웃었다. 주희는 그날 아주 늦은 시간에 잠을 자듯 죽었다. 반평생을 밤에 다니더니 결국 죽어서 가는 길도 밤이네. 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삼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면 주희는 밤에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기다린 게 아닐까. 이씨가 그랬고 영혼이 되어버린 제인이 그랬고 귀신과 살던 희가 그랬고.
   빛 속에 휩싸인 열여섯 명의 소녀들이 아닌 그 소녀들을 환대하던, 어둠 속에서도 빛나던 사랑을 품었던 소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보나.”
   주희가 죽고 얼마 후 나는 기억을 떠올리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것은 메리라는 미국인 여성의 메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메일에 의하면, 메리의 아버지는 주한미군으로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서울에 머물렀다고 했다. 여기까지 읽었을 땐 아무래도 전쟁 피해자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온 메리씨가 한국에서만 찾을 수 있는 자료를 부탁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메리씨는 나와 친분이 있는 일본인 교수를 통해서 메일을 보내온 참이었다. 그러나 그다음 문장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께서 이보나 씨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합니다.”
   그제야 메리씨가 왜 나를 찾아온 건지 알 것 같았다. 주희는 이보나라는 소녀 연예인이 속해 있던 국극단 멤버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주희와 나는 어떤 관계인가. 간단히 말하면 나의 이웃이었지만 실상 그리 간단치만은 않았다. 나는 나보다 서너 살 위였던 재성, 그러니까 제인과 함께 자랐다. 나는 제인이 먹는 것을 따라 먹었고 제인이 걷는 길을 졸졸 따라 걸었다. 그러다 제인이 넘어지기라도 하면 같이 넘어질 정도였다. 어른들에게 받은 선물은 항상 함께 가지고 놀았다. 인형이든, 비행기든, 로봇이든 제인과 나에겐 경계가 없었다. 그렇게 되기까진 나를 돌봐 준 주희가 있었다. 주희는 나의 부모가 일하러 가면 나를 불러다 제인과 함께 밥을 챙겨 먹였다. 엄마는 빨치산 생존자였던 외할아버지에 대한 미움 때문에 주희를 꺼려하다가 나중엔 누구보다 좋아했다. 주희가 죽기 직전, 자꾸만 여성의 옷을 입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밤마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병실을 돌아다녀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을 옮겨 다닐 때 엄마는 열심히 새로운 병원을 찾아내고 부탁을 하고 고개를 숙이곤 했다. “네 말대로 누굴 좋아하거나 친한 건 가족이라거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나 봐.” 주희가 죽고 난 후에도 엄마는 내게 종종 전화를 걸어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사실 그런 건 정말 별 상관이 없었다, 주희와 제인은 어린 시절 이후에도 나를 돌봐주었으니까. 제인이 서울대에 들어가고 나선 한동안 나의 과외선생님 노릇을 하기도 했다. 원하던 대학에 합격한 직후 나는 그 핑계로 제인에게 줄 음반을 샀었다. 제인이 미국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만 알고서 무작정 건스앤로지스의 <this i love> 라는 곡이 든 음반을 주었는데 알고 보니 제인은 니나시몬과 같은 흑인 여성의 재즈를 좋아했다. “니나 시몬은 흑인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노래했다고 해. 아. 그런데 초반에는 목소리 때문에 남자라고 생각되었대. 사람들은 목소리마저도 무조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 걸까.” 그제야 제인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떠올라 얼굴이 좀 붉어졌다. 하지만 제인은 그 음반을 받고 씨익 웃음을 머금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는 좋아하는 사람들을 통해 봐야 한다며. 그럼 나는 제인의 ‘좋아하는 사람’일까? 나도 알고 있었다. 제인이 스스로를 남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고 내가 제인을 좋아한다면, 그거 뭐 이상한 건가? 아니야, 라는 내 마음과 그렇지 않다는 주변의 목소리가 뒤엉키는 나날이 오래 지속되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입학한 대학은 강력한 학생운동의 바람 속에 있었고 나 또한 늘 거리에 있었다. 엄마는 네 외할아버지가 어떻게 집을 망쳤는지 아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몇 번 지명수배가 내려지길 반복하던 시절, 나는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제인이 초대한 미군 클럽이었다. 함께 수배가 내려져 쫓기던 친구는 끌탕을 찼다, 민족이 신음하는 곳에 음악을 들으러 간다고?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절대 잡힐 리 없는 곳이 바로 이태원이었다. 형사들도 미군 부대는 건드리지 못하니까. 그 말에 친구가 고개를 돌리던 모습. 그래서 제인이야, 혁명이야? 피로한 기분은 무대 위의 제인을 보자마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니나 시몬의 노래를 부르던 제인은 문득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흔들며 따라 웃다 문득 클럽 벽면 유리에 비친 나를 보았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하고 있나. 이런 물음은 나를 다시 거리로 밀어냈다. 그대로 돌아 나가려 할 때였다. “노래는 다 듣고 가지, 소리는 경계가 없잖아.” 고개 숙인 내 앞에서 찰랑이던 드레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낡은 내 운동화가 어쩐지 머쓱해서 뒷걸음질 치는데 제인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더니 운동화 앞코를 드레스 자락으로 닦으며 물었다. “우리 갈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제 새 신발을 신었으니까.”
   그날 제인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어느 여성 시인의 집이었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부터 좋아했던 시인이었다. 막상 대학에 들어가니 그 여성 시인의 시는 엄중한 시대 상황에 개인적 불행을 말하는 ‘나약한’ 언어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나는 그 여성 시인의 시를 여전히 좋아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몰래 혼자 읽곤 했다. 제인은 멍하니 서 있는 내 옷깃을 조금 잡아당기더니 갑자기 담 너머로 시인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쳤다. “제 친구가 시인님을 좋아해요!” 당황한 내가 제인과 담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할 때였다. 현관문이 아주 조금 열리더니 그 희미한 빛 사이로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시인.
   “자, 나를 밟고 서.”
   퍼뜩 정신을 차려 돌아보니 제인이 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 제 등을 내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옷이 다 망가질 텐데, 그러면서도 나는 제인의 등을 밟고 올라섰다. 그날 내가 담을 사이에 두고 시인과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조금 울었다는 것과 시는 쓰지 않나요? 라고 묻던 시인의 말과 그리고 제인의 그 말만이 반복되어 떠오를 뿐이었다, 나를 밟고 서, 나를 밟고.
   메리씨의 메일은 그 기억들을 하나, 둘 꺼내 보였고 나는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메리씨를 마중하러 가면서는 다른 이유로 머리가 복잡했다. 이보나라면, 이씨를 찾아가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일본에도 있었다던 메리씨는 왜 이씨를 곧장 찾아가지 않은 걸까.
   그 복잡함과는 별개로 메리씨와는 죽이 좀 잘 맞았다. 몇 번의 수감생활 끝에 나는 소설이 아닌 문화사를 바탕으로 하는 시 연구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1950년대 이전은 내가 공부하는 시기는 아니었지만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이나 다국적 소녀 연예인 스즈란자와 같은 자료들이 우리의 대화를 이어준 것이다. 신여성이나 모던 걸, 여성들의 자리는 언제나 위태로웠으나 특히 ‘소녀’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조선무용을 정립한 배구자나 노래와 댄스로 조선 예원에 데뷔하려는 꿈으로 현해탄을 건넜다던 나선교, 박옥초 같은 레뷰 공연의 선구자들은 어릴 때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예인들이었지만 제국은 이들을 전선에 이용하기에 급급했다. 1940년대 경성역에 도착한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가장 먼저 한 것도 신사참배였다. 레뷰 무대로 사용된 연예관과 일본인 극장 유락관은 경복궁 안에 세워진 곳이었다.
   “마릴린 먼로도요, 그녀가 서야 했던 곳은 전쟁터였죠.”
   남성들은 마릴린 먼로의 춤과 노래에 열광하면서도 손가락질했어요. 물론 지금도 여배우들과 여가수들의 스캔들에 사람들은 유독 민감하죠. 나는 메리씨가 보여준 배구자와 마릴린 먼로의 사진이 겹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소녀들을 박람회장에 전시하듯 세운 제국과 마릴린 먼로와 배구자를 보며 환호하고 야유하던 남성들의 모습도 어쩐지 스치듯 겹쳐지는 구석이 있었다. 실제 조선에서도 카프를 중심으로 레뷰에서 활로를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물론 식민지 조선의 레뷰는 제국의 스펙터클 전시장이 되어갔으므로 그 시도는 오히려 소녀들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나는 과연 카프가 당대의 사회 역사적 맥락을 제거한 채 그 소녀들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여러모로 나는 예술노동자로서의 여성이란 1900년대, 그리고 현재까지, 너무나 쉽게 어떤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지점에서 반복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제국이든 그 반대편이든, 문화와 문학은 전선을 가장 빠르고 쉽게 넘는 강력한 무기인 동시에 선전 수단이었다. 다만 1900년대와는 달리 케이팝과 한국문학은 이제 한국에서 일본으로 그 경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물론, 누군가가 그것을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메리씨가 서울에서 짐을 푼 곳은 용산이었다. 나로선 명동이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전쟁기념관과 미군부대를 보고 싶다고 했다. 첫 식사는 식민시기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삼각지 근처에서 칼국수로 해결했다. 밥을 먹고는 카페를 찾기 위해 철길을 건너 현재 미군이 주둔하는 녹사평길을 따라 걸었다. 문득 미군 부대를 보자, 클럽에서 보았던 제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인, 그 좋아함은 무엇이야? 나는 그걸 제인에게 끝내 묻지 못했다. 제인이 서울대 정문에서 총을 맞고 죽은 날, 지명수배가 내려졌던 나는 버스 구석에 앉아 광화문을 지나고 있었다. 횡단보도에 있는 경찰을 보고 고개를 파묻으려다 문득 대형 전광판에서 낯익은, 그토록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다. 제인의 얼굴이 왜, 하기도 전에 자막이 눈에 들어왔다. <여장 남자 서울대생 시위 도중 사망> 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요, 제인은 시위 안 해요. 그 어떤 비난에도 제인은 시위에 나간 적이 없었다. 그것은 주희의 영향일 수도 있었지만 제인은 그저 나와 너를 사상이나 이념으로 나누는 것에 흥미가 없다고 했다. 제인은 학생운동에 전념하는 나를 한 번도 비난한 적이 없으나 이걸 물은 적이 있었다. “왜 그렇게 여성스러움은 비난의 대상이야? 여성적이라는 건 비난 받아야 할 일인 거니?” 제인은 어느새 학생운동권에 만연한 여성 혐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는 그럼 어디에 있는지 묻는 거였다. 그 사이 전광판에는 <시위 도중 사망한 서울대생>이라는 자막이 반복해서 나왔고 중얼거림 정도였던 내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버스 창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아니요, 제인은 아니에요. 아니에요, 진짜 아니야, 저거 아니야, 제발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제인이 시위를 안 했다는 거였을까, 죽지 않았다는 거였을까. 나는 그날 현장 검거 되었다. "이년들아 눈감고 다리를 벌리고 앉아!" 이후의 기억은 이 말과 함께 모두 멈춰 섰다. 수감되고 얼마 후 주희가 호박죽을 끓여 나를 찾아왔다. 제대로 먹지 못해 오히려 퉁퉁 부은 얼굴로 호박죽을 마주하고 나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주희, 제인이 오면 물어봐주세요. 좋아한다는 게 뭔지요.”
   “응, 그런데 제인은 이제 오기 힘들게 되었어. 그렇게 원하던 미국에 갔단다.”
   “아? 소련 아니구요? 아, 그래. 그거 뭐, 어디면 어때, 그 사람이 좋아하는 곳이 제자리죠.” 좋아함이란 무엇인지, 그제야 나는 제인이 이미 오랫동안 그 답을 해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런데 제인, 너, 너 왜 죽었어? 이건 누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걸까. 호박죽으로 미처 삼키지 못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주희는 이후에도 내가 가석방될 때까지 책이며 옷이며 음식을 챙겨왔다. 물론 두부도 챙겨왔다. 그리고 벌써, 그로부터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난 여전히 독립된 나라의 수도 한 가운데 있는 미군 기지를 보고 있었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그곳을.
   다음 날엔 메리씨가 궁금해하던 전쟁기념관에 갔다. 메리씨는 전쟁 기념관에 새겨진 미군 전사자들의 이름을 보고 무척 고마워했다.
   “우리를 기억하고 있군요. 아버지가 기뻐하실 거예요.”
   아. 기억이란 게 뭘까. 잠깐 내가 말을 고를 때였다. 메리씨는 가방 속에서 사진을 하나 꺼내들었다. 사진 속에는 젊은 남성 둘과 한복을 입고 선 여성이 있었다. 이씨와 주희 그리고 찰스씨 같았다. 메리씨가 사진을 보이며 주희씨는, 하고 말문을 열었다. 나는 나대로 이제 이보나씨는 일본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진을 향해 이보나씨는, 했을 때였다. 메리씨와 나의 손이 동시에 한 사람 위에 겹쳐졌다. 나는 메리씨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보나씨는 여자이고, 하는 내 말에 메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으나 “이보나씨는” 하면서 다시 한 사람을 가리켰다. 아까와 같은 사람이었다. 이씨의 곁의 한 사람,
   주희.

참고문헌
백현미, 『근대 극장의 여자들』, 연극과 인간, 2016.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4, 『귀신, 간첩, 할머니: 근대에 맞서는 근대』, 현실문화, 2014.
이화진, 『소리의 정치-식민지 조선의 극장과 제국의 관객』, 현실문화, 2016.
권보드래 외, 『미국과 아시아』, 아연동북아총서28, 2018.
Todd A. Henry, 『Assimilating Seoul―Japanese Rule and the Politics of Public Space in Colonial Korea, 1910-1945』, Philip E. Lilienthal Imprint in Asian Studies, 2016.
주영하, 간략한 20세기 음식사, ‘주영하의 음식 100년’, 경향일보, 2011.8.30.
한총련사태 비대위가 밝힌 경찰 인권 유린 사례, 한겨례, 1996, 9, 14. (이 부분은 2019년 8월 24일 토요일 연세대에서 개최된 <87년 이후의 광장> “96년 8월, 그 이후” 학술대회에서 이미라가 발표한 「96년 8월 ‘폭력 시위’ 비판 담론」의 내용을 재인용한 부분입니다.)

해시태그 문장 출처: 김행숙, 「인간의 시간」, 『에코의초상』, 문학과지성사, 2014.


한정현

사랑하는 『줄리아나 도쿄』.

2019/08/27
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