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 수영장은 공사 중이었다. 여름을 제외하면 늘 그랬다. 덕분에 우리는 매번 이곳에서 만났다. 풀장 바닥의 하늘색 페인트가 여기저기 흉터처럼 부풀었다.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페인트 거스러미를 뜯었다. 머리맡엔 때 묻은 목장갑이 뒹굴었다. 눈을 감으면 간혹 물속에 있는 것처럼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오후 두 시였다. 목적지까지는 고속열차로 두 시간이 걸렸다. 유진은 언제나 약속 시간에 늦었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유진을 좋아했는지도 몰랐다. 초등학교 때 잠깐이었다. 제시간에 약속 장소에 도착한 사람은 늘 늦게 오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유난히 잔머리가 튀어나온 정수리, 피어싱 때문에 살점이 나간 오른쪽 귀, 세 개의 점이 있는 이마에 배는 땀. 그런 것을 힘주어 그려보는 순간이 쌓여 기념품처럼 어떤 모양을 남기는 것이다. 하물며 나는 늘 십분 일찍 도착하는 사람이었다. 유진이 오 분을 늦으면 나는 십오 분 동안 유진에 대해 생각했다. 약속 시간을 정확히 지켰던 신영은 그래서 나보다 조금 늦게 유진을 좋아하게 되었다. 유진도 어느 한 해는 나를, 그다음 해에는 신영을 좋아했다고 말하곤 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만 적당히, 질서정연하게 번갈아 가며 서로를 좋아했다. 비릿한 냄새가 나는 컴컴한 비디오방 안, 침대도 소파도 아닌 것에 셋이 나란히 누워 지나간 영화를 볼 때면 궁금하기도 했다. 오늘 유진은 누굴 보러 나온 걸까. 얼굴 위로 어렸다 흩어지는 화면들처럼 무심코 흘러가는 질문이었다.
   인기척에 눈을 뜨니 몸집만 한 가방을 멘 유진이 스틸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신영의 기타가 든 가방이었다. 유진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걸어와 내 손을 아프지 않을 만큼 밟았다. 나는 손을 들어 유진에게 인사했다. 햇빛을 등지고 있어 유진의 얼굴에 검게 그림자가 졌다. 유진의 무릎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울타리 밑으로 기어들어 온 게 분명했다.
   유진이 잘 지냈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신영이 군대에 간 후 우리는 전만큼 자주 만나지 않게 되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약간 엉뚱하게 생긴 삼각형 같은 것이어서 신영이 빠지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약속 장소가 깊이 칠십 센티미터의 어린이용 풀장이라는 사실만은 언제나 변함없었다.
   바나나를 오래 두면 어떻게 될까.
   썩겠지.
   유진이 무심히 대답하며 기타를 내려놓았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육 개월 치 월세가 밀리자 주인아줌마는 마스터키로 방문을 열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었다. 여러 번 전화를 걸거나 한밤중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기도 했었다. 나는 전화를 받지도 문을 열지도 않았다. 주인아줌마라서가 아니었다. 나는 얼마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천장을 바라보다 잠들고 다시 깨어 천장을 바라보곤 했다. 주인아줌마가 방문을 열었을 때 나는 외출 중이었다. 현관에는 몇 달째 아무것도 자라지 않은 화분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빨래 건조대에 버석하게 마른 트렁크 팬티와 수건 따위가 널려있었다. 오랫동안 환기를 시키지 않아 온 방에서 냄새가 풍겼을 것이다. 뭔가 들킨 기분이 들었다. 속옷보다 그게 더 부끄러웠다. 바나나를 떠올린 것은 그다음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주인아줌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려다 관뒀다. 방안에는 썩어가는 바나나가 있었다. 월세가 한 달에 사십이니, 이백사십만 원짜리 문이었다. 고작 바나나 따위가 방치되었다고 해서 열릴 리 없었다. 차라리 방 안에 갓난애가 있다고 말하는 편이 나았으나 그런 거짓말을 할 타이밍도 놓친 후였다.
   바나나는 천천히 물러갈 것이다. 노릇했던 껍질에 검은 반점이 돋아나고 과육이 익어 부풀어 오를 것이다. 어느 순간 제풀에 툭, 하고 껍질이 가로로 뜯어지겠지. 보얗고 반짝거리는 과육이 향긋한 냄새를 피워 올리면 그 속으로 초파리가 날아들고. 검은 반점이 생기면 맛있어진다던데 내게는 끝내 바나나가 맛있지 않았다. 텁텁하고 목이 막혔다. 그래도 사야 한다면 바나나를 샀다. 얼굴보다 큰데 이천삼백 원밖에 안 해서 샀다. 딸기는 비싸고 오렌지는 과즙이 흐르니 샀다. 과도도 필요 없고 껍질을 치우기도 쉬워서 샀다. 바나나는 너무 싸고 흔하고 편했다.
   방에 있는 소형 냉장고는 냉장 칸과 냉동 칸의 구분이 없었다. 냉장 칸 천장에 달린 작은 강화 포켓이 냉동 칸을 대신했다. 냉장고에 들어가면 아이스크림은 녹고 과일이나 김치는 얼었다. 아이스크림은 먹지 않았고 과일은 책상 위에 두고 되도록 빨리 먹어치웠다. 책상 정면에는 창문이 있었다. 커튼이 없어 바람도 햇볕도 잘 들었다. 주말 아침 알람 대신 햇볕이 들어 잠을 깨기도 했다. 방치된 창에서 쏟아지는 햇볕이 책상 위 바나나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 것이었다.
   유진이 카디건을 벗었다. 어깨에서 나시 끈이 흘러내렸다. 햇볕에 드러난 목이며 어깨가 발그스름했다. 유진은 여름이면 시도 때도 없이 선탠을 했다. 한번은 왜 그리 열심이냐고 물었더니 세 보이잖아, 오골계처럼. 하며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유진의 살갗은 붉게 달았다가 한나절이 지나면 희멀겋게 되돌아왔다.
   나 예전에 이 수영장 물 진짜 많이 먹었어.
   유진이 손차양을 만들며 말했다. 수영장 바닥이 햇볕에 달아 이제는 뜨거울 지경이었다.
   난 그때 오줌 누고 물장구치고 있었을걸.
   유진이 토하는 시늉을 하며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내밀었다. 우리가 만든 목록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하나만 빼고 이미 모든 항목이 지워진 상태였다. 어제는 고등학교 앞 카페에서 여고생을 만났다. 여고생에게 트위터 프로필에서 이름과 다니는 학교의 정보를 알아냈다고 설명했다. 신영의 타임라인에 있는 글에 대해 얘기할 땐 손바닥에 땀이 났다. 유진과 나는 여고생에게 고무바퀴가 돌아갈 때마다 발광하는 황금색의 묵직한 킥보드를 건네주었다. 여고생은 킥보드를 받아 세워두고 그분이 진짜 죽었어요? 하고 물었다. 이번엔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잠자코 기다렸다. 만약 킥보드를 받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처분할지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좀 초조했다. 여고생은 아이스초코를 마신 뒤 야간 자율학습을 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갔다. 킥보드 손잡이를 끌며 교문을 지나 교실로 가는 언덕을 걸어 올랐다. 우리는 멀찍이 서서 허리와 고개를 굽히며 동시에 손을 흔드는 이상한 배웅을 했다.
   신영의 트위터 타임라인에는 ‘이 글을 관심 글로 지정하는 트친에게 가상으로 유산을 분배해드립니다.’라는 글이 게재되어 있었다. 약 일 년 전에 올린 글이었다. 신영을 팔로우하고 있는 트위터 친구는 칠십 명 정도였고, 그중 그 글을 관심 글로 지정한 사람은 아홉이었다. 가상 유산분배는 트위터 내에 무작위로 퍼져나가는 놀이 중 하나였다. 누군가 시작한 장난이 유행처럼 번졌고 신영도 그것을 따라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글은 신영이 죽은 후 자신의 죽음을 오래전부터 예비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되었다.
   신영은 혹한기 훈련 도중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 사라져 얼어 죽었다. 자살은 아닌데 그렇다고 타살도 아니고 말하자면 자살이기도 타살이기도 한 사고사였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사건은 훨씬 간결하게 종결되었다. 여자 친구와 결별 후 병원 상담을 받은 기록, 고등학교 시절 약 일주일간의 가출 경력, 트위터 타임라인의 몇몇 글들이 자살의 근거가 되었다. 평소 정서가 불안하고 사회 부적응자 기질이 있었으며 분노와 충동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결론지어졌다.
   유진과 내가 멘션을 작성하는 동안에도 트위터 타임라인에는 몇몇 사고나 시위가 화두로 떠올랐다. 어떤 영화나 음악에 대한 감상이 업로드되기도 했다. 하나의 주제마다 수십 개의 관련 글이 오르내렸다. 어떤 주제는 단 몇 분 만에 헌것이 되었다. 나는 시시각각 고였다 흘러가버리는 이야기를 눈으로 좇았다. 일 년 전의 일을, 신영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보기만 해도 목이 막히는 전국각지의 벚나무 사진들을 멍하니 구경하다가 어플을 종료했다.

   나는 창가 쪽에, 유진은 통로 쪽에 앉았다. 우리가 예매한 좌석은 두 개였는데 유진은 통로 건너편 좌석에 기타를 놓았다. 넘어지지 않도록 정성껏 각도를 잡았다. 목이 부러질 수도 있으니까, 하면서 유진이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기타를 칠 줄 아는 사람일까?
   내 말에 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도 받아 줄 거야. 여고생도 킥보드가 필요하진 않았을걸.
   여고생은 관심 글을 지정한 세 번째 트위터 친구였다. 신영은 첫 번째 트위터 친구에게는 만화 캐릭터 피규어를 주기로 했었다. 내가 멘션을 보내자 그 사람은 아내 등쌀에 피규어를 모으는 취미는 관두었고 있는 것도 모두 팔아버렸다고 답했다. 프리미엄이 붙어 최고가에 거래된 피규어 자랑을 한참 늘어놓다가, 정중하게 실은 찜찜하다고 덧붙였다. 그럴 수 있었다.
   두 번째 유산은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되기도 했던 한 소년만화의 전집이었다. 내가 알기로 모두 서른한 권이었고 신영의 성격상 꽤 깔끔하게 잘 보관했을 것이었다. 그걸 보고 나는 약간 화가 났다. 나한테 줬어도 되는 거였다. 그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는 적어도 내가 알기론 없었다. 신영과 나는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나눠 들고 그 만화의 주제곡을 부르기도 했었다. 그래도 유언이니까, 유산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영의 엄마는 신영이 군대에 가자마자 방을 정리하면서 만화책을 모두 내다 버렸다고 했다. 다행히 두 번째 친구는 요즘 트위터 접속을 하지 않는 것 같았고 멘션에 답도 없었다. 되레 어느 날 우리가 보내놓은 멘션을 보고 있지도 않은 유산에 권리를 주장하면 어쩌나 걱정이었다. 세 번째가 킥보드였고, 네 번째가 오늘 유진이 가져온 기타였다. 이후로도 우리는 야광달 포스터, 네덜란드 고흐 박물관에서 사 온 화집, 시집 등을 분배해야 했다.
   프랑스 사진가가 촬영한 사진으로 제작된 지름 일 미터의 야광 보름달 포스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영은 밤에 불을 켜고 자는 습관이 있었는데 야광 달이라니 의아했다. 고흐 화집 역시 신영의 방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만화책과 섞여 버려진 것일 수도 있었지만 신영에게 여권이 없다는 사실로 보아 거짓말일 가능성이 컸다. 혹은 예기치 않게 거짓말이 되어버렸거나. 마지막으로 시집은 정말로 신영이 수집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집을 받기로 했던 트위터 친구의 타임라인을 보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친구의 타임라인에는 최근 읽은 시집 제목과 시구절이 업로드되고 있었다. 종종 자신을 찍은 사진을 올리기도 했는데 그 생김새가 두어 살 많은 나이의 유진처럼 보였다. 신영은 여덟 번째, 아홉 번째 트위터 친구에게는 아무것도 분배해주지 못한 채 군대에 갔다. 애써 만들어내려 해도 남에게 줄 무언가가 더는 없었나 보았다.
   기타 가방을 멘 유진과 킥보드를 든 내가 대문을 나서자, 신영의 엄마가 그런 건 뭣 하러 가져가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트위터니 타임라인이니 말을 고르다가, 역시 아줌마가 해준 닭볶음탕이 제일 맛있다고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유진도 나를 따라 인사했다.
   기차가 정시에 플랫폼에 도착했다. 도착을 알리는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넉넉하게 출발하는 바람에 의외로 시간이 많이 남았다. 유진과 나는 역내 스낵바에서 십 분 만에 나오는 우동을 사먹었다. 우동 국물을 들이켜며 나는 유진에게 신영의 소식을 들은 날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고 털어놓았다. 방세도 내지 못하고 버티다 결국 문이 잠겨 나흘째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고도 얘기했다. 유진은 다 들어놓고서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며 버럭 화를 냈다. 유진은 신영의 소식을 듣고 아이스크림 가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삼 개월의 수습 기간을 거치고 이름이 적힌 명찰을 단 아르바이트생이 되어 다시 삼 개월을 일했다. 문득 이런 사실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유진과 나의 차이일 수도 있고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하는 사람과 일찍 도착하는 사람의 차이일 수도 있었다.
   신영은 아직도 냉동고 속에 있었다. 신영의 부모는 제대로 된 해명 혹은 처벌을 원했다. 여기저기 멍든 신영의 몸이 유일한 증거가 되어주었다. 육 개월간 나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음식을 시켜 먹고 실컷 잠을 잤다. 자는 것이 지겨워지면 영화를 보았다. 세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고 나면 날이 밝았다. 영화는 내용은커녕 제목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오후 늦게 바람을 쐬러 옥상에 올라갔다. 난간에 기대 아래를 보면 총 일곱 개의 십자가가 떠 있었다. 어릴 때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다녔고,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된 후에도 신이 있다면 그의 이름은 예수일 거라는 생각을 가끔 했다. 아직도 교회에서 점심으로 먹었던 비빔국수를 떠올리면 침이 고였지만, 드문드문 솟은 일곱 개의 십자가 중 어느 것도 내게 구원이 되지는 못했다.
   얼마 뒤 유진이 수영장으로 나를 불러냈다. 오랜만의 외출이었고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나는 부쩍 길어버린 수염이 어색해 자꾸 턱을 만져댔다. 오 분만 일찍 준비를 시작했다면 면도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후회했다.
   철제 울타리를 넘으면 깊이가 다른 세 개의 풀장이 보였다. 백 미터쯤 되는 길고 깊숙한 수렁이 수영장 부지를 가로질렀다. 여기저기 벽돌과 철근이 쌓여 있었다. 잠긴 관리실 앞에 뚜껑을 덮는 대형 쓰레기통들이 방치되어 있어 근방에 음식물 썩는 냄새가 고약했다. 저녁 거미가 내릴 때 수영장은 더 넓고 아득했다. 대교에서 흘러드는 소음이 희미하게 텅 빈 풀장에 공명했다. 봄 하늘과 풀장 바닥의 색이 닮아지고 경계가 흐려졌다. 어느 순간 풀장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나온 거대하고 네모난 조각처럼 느껴졌다.
   유진은 양팔을 벌려 균형을 잡으며 풀장 가장자리를 돌고 있었다. 내가 바닥으로 내려가자 그제야 따라 내려왔다. 유진이 퇴근하려는데 아르바이트생 두 명이 대청소를 해야 한다며 붙잡았다고 했다. 유진은 매장 안에 있는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들어가 스쿱으로 벽에 달라붙은 얼음을 긁어냈다. 한 시간 넘게 그 일을 했다. 마치 쇼생크를 탈출을 하는 팀 로빈스처럼. 그렇게 말하며 유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등을 둥글게 말고, 거북이처럼, 팀 로빈스처럼.
   갑자기 두 사람이 한꺼번에 웃더라고. 신고식이라고 했어. 매니저가 휴무라 출근을 안 했거든. 오늘만 기다렸던 것 같아.
   유진의 손끝은 그때까지도 빨갛게 얼어있었다.
   신영이 유산 전달하자.
   유진이 말했다. 두어 차례 소나기가 내렸던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어귀에 바람이 불 때마다 젖은 이팝나무 꽃들이 무더기로 떨어졌다. 잎이 길쭉길쭉한 이팝꽃은 수십 마리 죽은 날벌레처럼 보였다.
   나는 창 너머로 열차에서 쏟아지는 사람들과 다시 빈틈없이 채워지는 좌석을 건너다보며 우동을 먹었다. 새삼 나 자신이 월세를 내지 않은 침낭 도둑놈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유진이 잠은 어디서 자냐고 물었다. 나는 잠은 집에서 잔다고 대답했다. 방에 들어갈 수 없게 된 후 낮에는 카페나 공원을 전전했고 밤이 되면 몰래 옥상으로 올라가 침낭을 펴고 잤다. 주인아저씨의 창고에서 꺼내온 침낭이었다. 아저씨는 홈쇼핑 중독이었고 늘 그렇듯 얼마간 침낭의 기능과 성능을 자랑하다 창고에 처박아두었다. 옥상에는 접시 안테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두 팔을 벌려야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구식 안테나였는데 잔뜩 녹슬어 로고가 지워질 지경이었다. 까슬한 시멘트 바닥에 누워 바라본 하늘은 짙은 파란색이었고 어떤 날은 분홍색이기도 했다. 간혹 비행기가 소리 없이 하늘을 갈랐다.
   스마트폰 별자리 어플을 켜 하늘을 향해 치켜들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자리에 있는 별들을, 그것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별자리를 보여 주었다. 이토록 징그럽게 많은 별이 존재하는데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니 이상했다. 은하수나 갖가지 크기로 빛나는 별들의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 도무지 텅 빈 하늘에 그런 게 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다 다시 바나나, 세상에 무용하고 무한한 바나나들을 생각했다. 부모들이 어릴 때는 아주 귀했다는 바나나를. 이제는 흔하게 널려 아쉬울 때나 찾는 바나나를. 아니, 아쉽지도 않을 만큼 언제나 너무 많은 바나나를.

   약속장소까지는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평일이었고 상대는 대학생이었다. 나와 유진은 휴학생이었지만, 유진이 평일에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에 매니저에게 스케줄 조정을 부탁해야 했다. 하지만 유진이 휴무를 얻지 못했어도 우리는 이곳에 왔을 거였다. 이번에도 먼저 트위터 멘션으로 신영의 소식을 전하고 유산을 받을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상대는 좋다고 대답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주택가였다. 우리는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이 깔린 골목으로 들어섰다. 사자 모양 손잡이가 붙은 몇몇 개의 대문을 지났다. 어느 대문 아래로 개가 주둥이만 내밀고 짖어댔다. 유진은 겁도 없이 손을 집어넣어 개를 쓰다듬었다. 쪼그려 앉은 유진의 등에 매달린 기타는 방패처럼 보였다.
   전단지 접착제 자국이 남은 대문을 보자 옛날 생각이 났다. 처음 야외수영장으로 소풍을 간 날이었다. 선생은 유진에게 껌을 뱉으라고 했다. 그건 유진이 가진 마지막 껌이었다. 유진은 수영을 못했기 때문에 그늘에 앉아 껌을 씹으며 아이들이 노는 것을 구경하겠다고 말했다. 선생은 유진의 입을 벌려 껌을 꺼냈고 억지로 물속에 유진을 집어넣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영에게 용돈 삼백 원이 남아있었고 우리는 판박이 껌을 샀다. 마음에 드는 대문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대문에 판박이를 붙이고 다녔다. 껌 종이에서 판박이를 떼어내 대문에 붙이고 손톱으로 빈틈없이 긁은 다음 그림이 그대로 옮겨붙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그날 수영복이 든 가방 세 개를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그 뒤로도 돈을 내고 수영을 배운 적 없었다. 어차피 누구나 물에 뜨는데 모두가 그럴듯한 자세로 헤엄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무서워하는 것을 왜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붉은 벽돌집을 지나는데 유진이 까치발을 들었다. 생각해보니 유진은 내가 좋아하던 시절보다 많아야 겨우 오 센티 정도밖에 자라지 않은 듯했다. 유진은 늘 또래보다 작았고 지금은 훨씬 어린 나이의 아이들보다도 작았다.
   벚꽃이다.
   유진이 낮은 담장 위로 뻗어 있는 가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살구꽃이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좀 더 높이 달린 굵은 가지를 가리켰다. 끈에 꿴 에이포용지가 바람이 불 때마다 뱅글뱅글 돌아갔다. 굵은 글씨로 살구꽃이라고 적어놓았다. 자세히 보니 벚꽃보단 불그스름하고 잎이 동글동글했다.
   정말 그러네, 하고 말하며 유진이 핸드폰을 꺼내 살구꽃 사진을 찍었다.
   따줄까?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 후엔 줄곧 살구꽃. 살구, 꽃. 하며 걸었다. 골목을 벗어나자 큰길이었고 슈퍼와 세탁소와 카페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우리는 불투명 시트지가 발린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꽃무늬가 그려진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종업원인지 주인인지, 누나도 아줌마도 아닌 여자가 두 개의 물컵을 가져다주었다. 유진이 아이스커피 두 잔을 시켰다. 여자는 카운터에 앉아 때때로 노골적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출입문을 돌아보았다. 문 위에는 초록색 비상구 등이 달려 있었다. 하나뿐인 문이 출입구이자 비상구인 셈이었다.
   당구장 냄새난다, 그치?
   아무리 그래도 카페에서 당구장 냄새가 난다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유진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 유진이 웃어댔다. 잠시 뒤 카페 문을 열고 의외로 젊고 잘생긴 남자가 들어섰다. 꽃무늬가 그려진 헤진 소파에 남자가 앉자마자 카페의 모든 풍경이 남자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남자는 거의 광대뼈까지 내려오는 노란 앞머리를 넘기며 우리에게 눈인사를 했다. 잘생긴 사람을 보면 약간 위축되는 나로서는 유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등받이에 기대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남자에게 기타가 든 가방을 건넸다. 남자가 테이블을 유진과 내 쪽으로 밀어놓고 기타를 꺼냈다.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어쿠스틱 무광 기타였다. 남자는 기타를 안고 줄을 튕기고 줄감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몇 가지 코드를 연주하기도 했다. 유진과 나는 남자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골똘히 기타 줄을 튕기던 남자가 기타 헤드를 바닥에 거꾸로 세웠다. 한쪽 눈을 깜빡이며 무언가를 가늠해보는 듯했다.
   기타가……
   남자가 말을 떼자 유진이 나섰다.
   기타를 받기로 하셨죠?
   휘었네요.
   남자의 말에 유진이 몸을 숙여 기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나도 유진도 기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신영이 치기엔 기타가 좀 작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우리는 신영이 기타를 치는 걸 본 적 없었다.
   상판도 부풀었고.
   남자의 말에 의하면 기타의 넥은 공기가 습해도 휘고 건조해도 휘었다. 휘지 않는 넥이란 애초에 없죠, 자고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은 모두 휘어질 운명을 타고난 거예요. 남자가 턱에 손을 괴며 그렇게 말할 때는 별자리 운세를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오래 방치돼서 복구가 불가능한 기타를 땔감이라고 불러요.
   남자가 유진에게 기타를 내밀었다.
   나무로 된 물건엔 귀신이 잘 붙는대요.
   남자는 중고로 팔기도 애매할 거라고 했다. 누가 유품을 중고로 판단 말인가. 나는 남자의 손에서 기타를 빼앗듯 받아들었다. 기타를 가방에 넣고 지퍼를 닫았다. 남자가 웃으며 유진에게 말을 걸었다.
   서울에서 오셨죠?
   묻지도 않았는데 남자가 유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영수증에 관광 코스를 그리기 시작했다. 역을 중심으로 도시의 번화가나 지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타워, 유명 먹거리 골목, 식물원 등을 표시해주었다. 능숙한 솜씨였다.
   우리는 카페에서 나와 얼마간 길을 따라 걸었다. 유진의 손에 약도가 들려 있었다.
   그건 왜 챙겨?
   유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기타는 여전히 유진의 등에 걸려 있었다. 나는 기타가 소리만 나면 기타지 땔감은 뭐며, 그렇게까지 부를 이유는 또 뭘까 생각했다. 유진의 추궁에 나는 남자가 잘생겨서 더 기분이 나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저런 놈 때문에 여기까지 오다니, 가뜩이나 방세 낼 돈도 없는데 차비가 아깝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놀다 가자.
   나는 대답하지 않고 기타를 들어주겠다고만 했다.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지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밥 먹을까?
   우동 때문에 아직도 배 터질 것 같아.
   식물원은 어때?
   여기까지 왔는데, 라는 게 유진의 핑계였다. 어쨌거나 유진도 나도 헛걸음을 했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몇 없는 유진의 휴무 날이기도 했다. 식물원은 남자가 그려준 지도상으로 역에서 가장 가까운 관광지였다.
   식물원까지는 다시 버스를 타야 했다. 노선을 보니 생각보다 꽤 멀었다. 서울로 되돌아가는 기차 편은 많았다. 다만 날이 저물어 식물원이 폐장하는 것이 걱정이었다. 어느 정류장에서인가 한꺼번에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버스가 비자 운전기사는 자주 한눈을 팔았다. 두 번이나 코앞에서 신호를 놓쳐 다음 신호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는 동안 유진이 내 어깨에 기대 아주 잠깐 졸기도 했다.
   둥글게 깎은 나무로 장식된 식물원 입구에서부터 매표소까지는 뛰어갔다. 매표소 직원은 창구 너머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관람객 입장 시간이 이미 십 분 전에 지났으며 폐장까지 이십 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들어갈 수 없다고 하니 오기가 생겼다. 나는 우리가 이 식물원을 관람하기 위해 두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이 도시에 왔다고 했다. 직원은 머뭇거리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무얼 보러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생각지 못한 질문에 당황해 바나나 나무라고 대답했다. 뒤늦게 식물원에 바나나 나무가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매표소 직원이라고 해서 식물원 안에 있는 식물의 이름을 모두 외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예매해놓은 기차표의 시간이 촉박하니 서둘러 관람하겠다고 직원을 설득했다. 내 방에도 못 들어가는 신세면서 식물원에 들어가려고 온갖 거짓말을 지어내다니 우스웠다. 직원은 바나나 나무, 하고 중얼거리며 표를 끊어주었다.
   입구에 식물원 지도가 걸려있었다. 출입구부터 열대 식물, 다육 식물, 수경 식재관 등 총 여덟 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간이 촉박해 모두 둘러볼 수는 없었다. 유진이 열대 식물관이라고 적힌 부분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바나나 나무 보러왔다면서?
   유진이 땀이 밴 이마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웃었다.
   열대 식물관은 바깥보다 훨씬 후끈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목구멍 속으로 밀려들었다. 야자나무나 선인장이 식물원 천장에 닿을 듯 자라있었다. 문득 더운 나라에서 태어난 유진은 지금보다 훨씬 많이 자랐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으니 이끼가 잔뜩 낀 인공 폭포가 나왔다. 열대 우림관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우리는 그 안을 두 번 돌았다. 바나나 나무는 없었다. 역시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이름을 외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바나나가 하늘을 향해서 자라는 거 알아?
   유진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바나나가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자란다는 것은 들어본 적 있었다.
   마트에서 진열해 놓은 건 야구 글러브처럼 바닥을 향해 휘어져 있잖아? 그런데 아냐. 실은 위를 보고 있다고.
   유진이 까치발을 들고 허공을 향해 높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하나 따먹으려고 했는데.
   바나나 나무가 있었다고 해도 어림없는 높이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무에 달려있는 건 아직 파랗잖아.
   금방 익어.
   하긴 바나나같이 무르고 상하기 쉬운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나는 다시 내 방에 있는 바나나를 떠올렸다. 날벌레들이 갉아 먹고 햇볕에 뭉개져 껍데기만 남은 바나나. 언젠가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방세를 벌어 문을 열면, 바나나를 먹고 자란 독특한 무늬의 나방이 후르르 날아오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진이 바오바브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앞에 걸린 팻말을 소리 내 읽었다.
   원줄기가 술통처럼 생긴, 세계에서 손꼽히는 큰 나무 중의 하나이다.
   유진의 이목을 끌만한 구절이었다. 유진은 같은 디자인의 시계라면 꼭 남성용 사이즈를, 나란히 진열된 카페 로고가 그려진 텀블러 중에서는 가장 크고 단단한 것을 골라잡는 사람이었다.
   작잖아.
   유진이 실망한 표정으로 바오바브나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무줄기가 불룩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왜소했다. 흔히 보는 가로수보다도 훨씬 작은 키였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큰 나무라기엔 좀 섭섭한 모양새였다. 부러 헝클어놓은 듯한 잔가지들이 허공을 향해 구불구불 뻗어있었다. 팻말에 적힌 대로라면 아프리카에서는 바오바브나무를 신성하게 여겨 구멍을 뚫고 시체를 매장하거나 사람이 들어가 직접 살기도 했다. 열매가 달려 있는 모양이 쥐가 매달린 듯 보여 죽은 쥐 나무라고도 불렸다.
   나는 울타리를 넘었다. 티셔츠 자락이 울타리 끝에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순간 시야 안으로 옹이 진 바오바브나무의 줄기가 훅 닥쳐왔다. 유진은 한 번에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한 발을 올리고 울타리 위로 몸을 걸치고 몸을 돌려 다른 한발을 울타리 밖으로 내딛는 식이었다. 나는 뒤늦게 손을 내밀려다 그만두었다. 신영이 있었다면 뒤에서 유진의 발을 받쳐주었을 거였다.
   유진과 나는 신영이 내년 봄에 전역하면 함께 복학할 계획이었다. 우리는 같은 교양 수업을 듣고, 일주일간 기차여행을 떠나고, 블록버스터 영화 시리즈 중 마지막 편을 개봉일에 함께 관람하자는 약속을 했다. 모든 계획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었다. 나는 망설이다 유진에게 물었다.
   넌 앞으로 뭐할 거냐?
   유진이 손목시계를 힐끔 보았다.
   제2롯데월드를 폭파시키고 싶어.
   왜?
   어디서 들었는데 그거 짓는 게 롯데 회장 꿈이었대.
   꿈?
   꿈.
   울타리를 넘을 때 긁혔는지 아랫배 부근이 쓰라렸다. 나는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난 맥컬리 컬킨이 침 뱉는 걸 보고 싶어.
   겨우 침? 걔가 마약 끊고 락밴드로 데뷔한 지가 언젠데.
   유진의 대답에 내가 정말로 쩨쩨한 인간이 된 거 같아 최대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진의 이야기야말로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사제 폭탄을 제조하는 남자가 나오는 영화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폭탄을 만들려면 복잡한 전선들을 다룰 수 있어야 했고 수십 개의 비커가 필요했다. 주인공은 자동차 밑에 기어들어 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박스 테이프로 폭탄을 부착했다. 비장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온 후 원격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자 폭탄이 퐁, 하고 폭발했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자동차가 뒤집히며 흔적도 없이 타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겨우 다칠만한 규모의 폭발이었다.
   제2롯데월드는 백이십삼층짜리 건물이었다. 육삼빌딩을 제치고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세계에서는 다섯 번째로 높다고 했다. 한 번에 폭파시키려면 최소한 경차만 한 폭탄이 필요할 것이었다. 그건 고작 이백사십만 원짜리 문을 여는 것보다 훨씬 비싸게 먹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 폭탄 제조범은 전공자였다. 이과생, 공대생.
   역시 전공이 중요해.
   그 말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앞뒤 다 잘라먹은 말을 알아듣지도 못했을 텐데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사람처럼 먼저 도착해 있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늦게 가는 사람도 먼저 도착해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유진도 그래서 우리를 번갈아 좋아하게 됐던 건지도 몰랐다.
   나는 기타를 멘 유진이 아이스크림 스쿱으로 바오바브나무를 긁어내는 모습을 상상했다. 바오바브나무의 살은 적당히 녹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패일 것이다. 동그란 톱밥이 날려 유진의 정수리와 어깨에 쌓였다. 그러는 동안 아프리카의 햇볕이 유진의 피부를 건강한 색으로 그을러 주었다. 피부가 까만 유진을 상상하자 귀여워서 조금 웃음이 났다. 내가 소리 내어 웃자 유진이 말했다.
   신영이 전역이 언제였지?
   내년 봄쯤.
   유진이 바오바브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누군가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누가?
   누군가.
   나는 조금 전의 유진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살구꽃을 자꾸만 벚꽃이라고 부르는 봄이었다. 고개를 들면 헝클어진 뿌리 같은 바오바브나무 꼭대기가 보였다. 식물원 유리천장 위로 햇볕이 불쑥 기울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죽은 쥐들이 흔들거렸다.

태가연

잔디를 밟으면 어디든 조금씩 무덤. 한 번 묵은 호텔의 메일 주소는 절대 차단하지 않고, 나만 아는 신념을 매일 바꿔가며 지킨다.

2018/10/30
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