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떡을 하나 사 먹으며 그를 기다렸다. 공연장 안에서 기다릴까 하다가 괜히 스토커처럼 보일까 봐 나와 버렸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가 방금 전 그와 악수를 나눈 오른손을, 그의 손을 맞잡았을 때는 따듯하기 그지없던 손을 금세 얼려버렸다. 공연장 입구를 힐끔거리며 언 손에 입김을 불어넣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부스스한 단발머리가 보였다. 그는 얇은 점퍼 하나만 걸치고는 작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잰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그의 발걸음이 상수동의 설렁탕집 앞에서 멈췄을 때는 실망했다. 내심 그가 만날 가는 단골집 말고 더 좋은 곳으로 향하기를 바랐다. 설렁탕집을 따라 들어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설렁탕을 깨작깨작 먹고 싶지 않았다. 설렁탕집에 앉아 소주 한 병을 비워내는 그를 보고 있는 것은 때마다 괴로웠으니까. 그 힘없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나도 한 잔주면 안 되겠냐고 넉살 좋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습관처럼 그를 따라 설렁탕집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는 그를 보고 그의 대각선 맞은편에 앉았다. 그럴 용기도 없으면서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을 설렁탕집 이모가 대신 물어봐 주었다. 오늘은 많이 팔았는감. 그의 입이 열리는 그 짧은 순간, 마음이 바짝 졸아들었다. 당연하죠. 가져간 거 다 팔았어요. 오늘 여기서 소주 세 병은 깔지 몰라요. 그가 웃었다. 다행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이.

   넌 리액션이 없지 왜 자꾸만 도망가 나 혼자만 적극적 오 샤이보이. 송원은 이렇게 불현듯 가사 한 구절이 떠오를 때마다 행복했다. 사장님 춘장에 침 튀어요. 종업원 민희가 쏘아붙였지만 뭐 어떠랴. 기분 좋을 때 나오는 아밀라아제는 맛있는 춘장을 만드는 비법 중 하나였다. 주걱 채 춘장을 떠서 맛을 보았다. 끝내준다, 흐흐흐. 오늘은 민희가 우리 사장은 잘생긴 바보야 라고 몰래 통화하는 것을 들어도 상처받지 않을 것 같았다. 민희야. 잘생겼다고 해줘서 고마워. 아이돌 그룹 릴리걸즈가 데뷔 5주년을 맞이해 가사 공모전을 개최한다고 했다. 송원은 이번을 기회 삼아 잠자고 있던 음악적 재능을 되살려보고자 했다. 민희야, 내 가사가 뽑히면 어뜩하지. 그럼 릴리걸즈도 만나야 되는데, 떨려. 민희는 대꾸도 않고 소독기에서 수저를 꺼내 마른 수건으로 닦았다. 계족반점의 사장 김송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눈치 없고, 쪽팔린 거 모르고, 우울한 거 모르는. 조부 때부터의 가업인 중국집을 뒤로 한 채 음악 한다고 지방 음대에 갔다가 군 제대 후 복학하려던 즈음. 가게를 짊어졌던 엄마가 쓰러지면서 서울 석관동의 계족반점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랬다. 음악은 다시 하면 되지 뭐. 그러나 스물세 살부터 시작한 계족반점 사장 노릇은 서른하나가 되도록 딴짓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처음 몇 년은 먹기만 했지 해본 적은 없는 요리를 배우느라, 그 후에는 끊어진 손님들을 다시 모으느라, 그다음은…… 병원에 있는 엄마도 돌보고 같이 일하는 민희도 짝사랑하고, 근데 그런 민희가 결혼을 해버렸고…… 동네 여자들하고 술도 마시고 몸도 섞고. 바쁜 8년을 보내느라 음악은 뒷전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가사 좀 써보겠다고 굴리는 머리가 잘 안 돌아갔지만 오늘은 운 좋게도 잘 생각이 나지 않던 2절의 첫 마디 가사가 생각이 났다. 첫 출근을 한다던 배달원도 왠지 좋은 사람일 것 같았다. 송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나가 좋으면 그다음도 좋을 거라 믿는.
   점심 배달이 시작되는 열한 시 반을 지나 열두 시가 되었다. 십 분 전에 배달 전화를 받고 곧 갖다 드리겠다고 말한 송원은 민희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배달할 사람도 없는데 주문부터 받음 어떡해요? 이 사람은 대체 왜 안 와. 전화번호 몰라요? 전화번호를 받는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얼마 전 그만둔 배달원의 끝내주는 사람을 소개 시켜준다는 말만 믿고 있었다. 규식 오빠한테 또 속은 거예요? 돈 빌려준 것도 못 받았죠? 아니다, 민희야. 민희 너는 얼굴은 고운데 마음이 좀 삐뚤어졌어. 그리 말하려는데 가게 문이 열렸다. 벙거지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덩치 작은 사내가 들어왔다. 혹시 새로 오신다는 분…… 맞아요? 민희가 물었다. 사내는 대꾸 대신 모자를 벗었는데 사내라고 하기엔 뭐한 말간 소년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덥수룩한 곱슬머리 아래로 언뜻 보이는 눈망울은 어딘가 익숙했다. 송원은 사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예의 그 바보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나타났다. 십 년 만에.
   그의 활동명은 ‘유키’. 음악은 PC 통신 전성기였던 90년대 후반, 천리안의 인디음악 동호회에서 시작했다. 나직하게 속삭이는 듯한 창법, 잔잔한 선율과 가사, 덤으로 귀염성 있는 얼굴까지. 그는 천리안에 작게나마 팬클럽이 생길 정도의 인기를 얻고 홍대 클럽을 전전하며 공연을 했다. 발표한 곡이 표절 의혹이 일던 중 반반한 얼굴 덕에 아이돌 제안을 받았다. 모로 가도 메이저 입성만 하면 된다고 그는 춤을 추며 노래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누군가의 아류 냄새가 나는 2인조 힙합 아이돌로 데뷔했고 망했다. 인디 씬으로 다시 돌아가기엔 민망해진 그는 먹고 살기 위해 퀵 배달을 시작했는데 이게 또 적성에 맞았다. 작지만 단단한 몸으로 큰 차들을 피해 오토바이를 탔다. 얼마 전까지 월 매출 이천을 찍는 중국집에서 일하다가 월급을 올려주지 않겠다는 그쪽 사장의 말에 열 받아서 초봉부터 백팔십을 준다는 계족반점으로 오게 된 터였다. 십 년을 가까이 이런저런 배달 일을 하며 단 한 번도 저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던 그였다. 그런데 새로 출근한 가게에서 자신을 반기는, 눈물이 글썽한 젊은 사장을 만났다. 남자 새끼가 간지럽게 왜 저래. 그는 남사스러워지는 기분을 숨기고 자기를 소개했다. 본명으로 말이었다. 박만우입니다. 반갑습니다. 젊은 사장은 여전히 감격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요 앞에 다복 빌라부터, 빨리요. 새초롬하게 말하는 종업원의 얼굴이 살짝 붉었다. 사장이나 종업원이나 첫인상은 별로였다.
   계족반점의 새로운 배달원 박만우가 삼십 분 동안 다섯 집을 찍고 왔을 때, 갓 내놓은 짬뽕 두 그릇을 철가방에 넣고 다시 나갔을 때. 양파를 까고 있던 송원과 민희는 혀를 내둘렀다. 규식 오빠가 괴물을 보냈네. 송원은 민희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저 형, 노래도 엄청 잘 한다? 들려줄까? 송원은 냉큼 일어나 시디 한 장을 찾아 카운터 구석에 처박혀 있던 구식 오디오에 넣었다. 듣기 좋은 나른한 목소리가 흘렀다. 잊지 말아요 짧은 순간이지만 이대로 구름을 타고 너에게로 가고 싶…… 그러다 돌연 쇠 벽을 긁는 듯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시디가 삑사리를 다 내네. 송원은 시디를 꺼내 조심스럽게 입바람을 불며 먼지를 털어냈다. 민희가 심드렁하게나마 감탄했다. 목소린 좋네. 꼴은 거지꼴이더니. 송원은 어린애처럼 신이 났다. 나 중국집 안 했으면 음악 했을 거랬잖어. 유키 형처럼 됐을 거야. 민희가 칼질을 멈추고 턱을 괴고는 송원을 빤히 보았다. 우리 사장님은 진짜 연예인 깜인데. 눈이 큰데 길기도 하고, 코는 거의 일반인의 것이 아니지. 목소리도 저음에다 멋지고. 근데요, 사장님. 희주언니가 사장님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희주라면 송원과 사귀다가 한 달 전에 헤어진 방석집 주인이었다. 칠칠이에요, 칠칠이. 사장님 얘기만 나오면 그 칠칠이, 머리는 좀 좋아졌냐고 물어보던데. 맞어, 희주랑 사귈 때 내가 좀 칠칠맞았어. 희주가 하는 말 자꾸 까먹구. 야, 우리 오늘 파티할까? 유키 형 첫 출근 기념으로. 민희가 자기 할당량이었던 양파들을 바구니 채 송원의 앞으로 밀었다. 담배 피우고 올게요. 송원은 혼자 남은 가게 안에서 다시 한번 유키의 노래를 틀었다. 잊지 말아요 짧은 순간이지만 이대로 구름을 타고 너에게로 가고 싶…… 또다시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노래가 끊겼지만 자꾸만 웃음이 났다.
   엄마 연옥이 사장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시절, 송원은 물었다. 내가 여길 이어받아야 돼? 술 퍼마시다 객사한 남편을 보내고 홀로 춘장을 볶았던 연옥은 송원이 싫다면 계족반점을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이름 한번 들어본 적 없는 지방 음대에 합격한 송원에게 기꺼이 등록금을 내주었다. 그런데 굳건히 계족반점을 지킬 것 같던 연옥은 당뇨 합병증으로 중풍이 와 오십 대 초반의 나이에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때껏 철없이 지내왔던 송원은 결심했다. 엄마, 나 가게 할 거야. 젊고 잘생긴 사장할 거야. 그 후 2년 정도 계족반점은 파리만 날리다가 송원이 점차 손맛을 알아가자 끊겼던 손님들이 찾아왔다. 동네 점집 ‘청녀’의 박설은 풍수지리상 계족반점은 망할 수가 없다고 했다. 가게 맞은편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의릉이, 위쪽으로는 대학교가 있었다. 의릉의 신성한 기와 본래 안기부였던 터의 음기(陰氣)를 덮어버린 학생들의 활력 넘치는 양기(陽氣)까지, 그런 좋은 기들이 계족반점에 전달될 거라고 박설은 말했다. 잘생긴 사장님 잘되라고 내가 빌어줄게. 송원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송원이 데면데면하게 구는 만우의 눈치만 보다가 술 한잔하자는 말을 꺼낸 건 만우가 계족반점에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던 때였다. 그날 밤 송원은 열대야 때문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송원이 지내는 가게 안의 쪽방에는 엄마 연옥 때부터 쓰던 고물 에어컨이 달려 있었지만 소리만 요란할 뿐 쉽게 시원해지지 않았다. 보다 못한 민희가 혀를 차며 선풍기 한 대를 사 왔지만 장마가 끝난 8월 중순의 폭염에는 맥을 못 추었다. 송원은 끊었던 담배가 간절해졌다. 멘솔 향 나는 담배 하나면 머릿속이 좀 시원해질 것도 같았다. 결국 지갑을 들고 가게 밖으로 나왔는데 보신탕집이 있는 뒷골목이 소란스러웠다. 보신탕집 사장을 비롯해 지구대 경찰들, 방송용 카메라를 든 사람들 등 열댓 명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 보신탕집이 몇 년간 불법 영업을 해 온 것을 제보한 모양이었다. 개는 어떡할 겁니까? 경찰 한 명이 물었다. 보신탕집 마당 구석에 엎드려 있는 골든 리트리버의 이름은 꼭지, 암컷이었다. 곱슬곱슬한 크림색 털은 목이고 엉덩이고 전부 엉겨있었지만 살집은 좋아 보였다. 방씨가 데려가든가. 보신탕집 사장은 모든 걸 체념한 듯한 얼굴이었다. 신이 난 건 꼭지를 볼 때마다 그냥 못 지나치고 입맛을 다셨던 탕약 집 방씨였다. 아저씨, 제가 키우면 안 돼요? 송원이 나서지 않았으면 꼭지는 맛 좋은 개소주가 됐을 터였다. 예쁘게 잘 키울게요. 카메라는 벌써 송원을 찍고 있었다. 꼭지가 제 이마를 긁어주는 송원의 발목을 핥았다. 흐흐흐, 간지러워. 스쿠터를 타고 가던 만우가 멈춰 서 그 광경을 보았다.
   송원은 꼭지를 가게 앞에 앉혀두고 주방 가위를 들고 나왔다. 저 엉긴 털부터 잘라내고 싶은데 자신이 없었다. 저에게 꼬리치는 꼭지의 몸에 가위를 댔다가 뗐다가 우물쭈물 거렸다. 좀 더 작은 가위 없어요? 만우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송원은 가위를 든 채로 울상이 되었다. 형, 나 개는 키워 본 적 없어요…… 대책 없는 새끼. 만우는 속으로 읊조렸다. 주방으로 가 직접 가위를 찾아들고 온 만우는 그 가위로 꼭지의 마구 엉긴 털을 조심스럽게 잘라내었다. 꼭지야, 기분 좋아? 형은 왜 그렇게 재주가 많아요? 만우는 쪼그리고 앉아서 바보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송원이 짜증 났다. 마침내 엉겨 붙은 털들이 바닥에 수북이 쌓이고 꼭지의 맨몸이 드러났다. 이 자식 밥 먹여야겠다. 형, 우리도 소주 일 병? 애인과 싸우고 애인의 집에서 나온 만우는 하룻밤 지새며 술 마실 곳을 찾아 동네를 어슬렁대던 터였다.
   가게 바닥에서 고깃국을 한 대접 먹은 꼭지가 엎드려 졸았다. 네 병째 소주를 따던 송원이 만우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형, 나는 형이 멋있어요. 음악도 잘하고, 잘생기고, 오토바이도 잘 타고, 가위질도 잘하고. 저러다 고백하는 놈들이 있었다. 만우의 경험상으로는. 제 얼굴이 좀 예쁘장하게 생긴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놈들은 예의가 없었다. 이놈도 그럴까. 형처럼 음악 하며 살 줄 알았어요. 홍대 클럽 같은 데서 공연도 하고. 앨범 한 장 팔릴 때마다 기뻐하면서. 그 돈으로 소주도 사 먹고. 이놈은, 이 젊은 사장 놈은 취기로 고백하던 예의 없던 놈들과 달랐다. 만우가 제일 혐오하는 낭만파 새끼였다. 앨범 한 장 판 돈으로 소주 사 먹는 기분이 얼마나 좆같은데. 물려받은 가게로 잘 먹고 잘사는 놈이 뭘 알까. 만우는 담배가 생각났다. 술이 확 올랐다. 형, 다시 음악 하면 안돼요? 그 말을 끝으로 송원은 테이블 위에 고개를 처박았다. 만우는 송원의 뒤통수를 잠시 노려보다가 가게 밖으로 나갔다. 새벽 세 시. 날이 더웠다. 열대야는 좀처럼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밤공기 사이를 배회했다.
   송원이 막 스무 살이 되던 해 만났던 시로유키. 눈썹 위로 바짝 올라간 앞머리를 고수하던 그녀. 그녀와 송원은 천리안의 유키 팬클럽에서 만났고 서로를 이름 대신 아이디로 부르곤 했다. 송원은 시로유키를 줄여서 ‘시로’로, 시로는 송원을 그의 아이디 파내텀(pinetum: 소나무 재배원. 즉 송원.) 으로 불렀다. 시로는 유키 팬클럽의 첫 정기모임 때 송원을 보고 반해버렸다. 송원이 자기 별명이 잘생긴 또라이, 미남 병신이라고 고백했는데도 시로는 그가 좋다고 했다. 둘은 2년 정도를 열렬히 사랑했다. 그들은 유키의 노래를 들으며 몸을 섞는 것을 좋아했다. 꼭 셋이 하는 것 같아, 그치. 송원은 저만큼이나 유키를 사랑하는 제 여자친구가 좋았다. 그렇게 유키를 사이에 두고 사랑을 나누던 둘은 인디 씬에서 유키의 작업물에 대해 말이 많아질 즈음 끝이 났다. 송원이 볼 때는 시로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오해를 하고 있었다. 니가 나랑 만나서 자고, 먹고, 놀고 그런 일들이 다 우연이야. 알어? 송원은 그렇게 시로를 설득했다. 유키의 노래 중 몇 곡이 일본의 어느 인디밴드 노래와 비슷한 건 다 우연일 뿐이었다. 아무리 예술가라 한들 사람들 생각은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이미 이 세상에는 ‘완전 새것’ 따위는 없는 게 아닐까. 유키를 트집 잡는 사람들은 창작 같은 거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일 거야. 암 것도 모르면서. 그 말에 시로는 화를 내며 헤어지자고 했다. 야, 너 잘생긴 바본 줄 알았더니 말 잘한다? 꺼져. 송원은 바보는 시로 너라고 대꾸해주고 싶었지만 헤어지는 마당에 굳이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유키 팬클럽은 잠정폐쇄되었고 송원은 다른 인디음악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유키가 표절하지 않았음을 주장했지만 외롭고 어려운 투쟁이었다. 사람들은 유키에게서 쉽게 등을 돌렸다. 그 뒤 유키는 그런 사람들 보란 듯이 메이저 데뷔가 결정 났고 그가 본때를 보여주겠지 기대했던 송원은 유키의 데뷔 무대를 보고 홀로 울었다. 힙합 그룹이라니. 그것도 당시 최상 가를 치던 일본의 2인조 힙합 그룹 ‘엠플로’를 따라 한. 유키는 절대 저렇게 전자음 입힌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아니었다. 형, 이상한 춤 좀 추지 마. 하나도 안 멋있단 말야. 송원은 시로와 헤어졌을 때보다 더 많이 울었다. 제 세상을 지탱하고 있던 하나의 축이 무너져버렸다.
   9월 중순에도 열대야는 계속되었다. 쪽방의 고물 에어컨은 배달 오토바이 마냥 덜덜덜 방정맞은 소리를 내더니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송원은 더운 밤을 선풍기 하나, 죽부인 하나로 버텼다. 홀에서 자는 꼭지에게는 대형견용 얼음 패드를 깔아주고 소형 선풍기를 틀어주었다. 혹시나 덥지 않을까 새벽에 종종 확인을 해보면 옅게 코까지 골며 잘도 잤다. 잠을 못 이루는 것은 송원뿐이었다. 샤이보이의 다음 가사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시디플레이어를 찾아 유키의 노래를 들었다. 그러다 새벽 서너 시쯤 겨우 잠이 들었다.
   꼭지는 삼시 세끼 고기를 먹으며 점점 더 통통해져 갔다. 만우가 손질해준 크림색 털은 곱게 자라났다. 가게가 한창 바쁠 시간에는 한 번 쓰다듬어 주는 것조차 잊었으므로 송원은 꼭지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내버려 두었다. 꼭지는 근처 대학교까지 올라가 놀다 오곤 했다. 학교 애들에게 예쁨을 받는 모양이었다. 종종 영업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때도 있었는데 송원이 슬슬 찾으러 가볼까 하면 그 큰 엉덩이를 실룩대면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민희는 사람 먹는 것을 얻어먹고 다닌다고 걱정했지만 하루 종일 놀다가 들어온 꼭지는 행복해 보였다. 송원은 그게 좋았다.
   계족반점은 향우회 단체 손님을 마지막으로 오늘 영업을 끝냈다. 홀로 남은 송원은 아직 꼭지가 돌아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낮에 대학교 쪽으로 가는 걸 봤지만 지금은 밤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송원은 가게 문을 단속하고 배달용 오토바이에 탔다. 우선 대학교로 향했다가 석관동 일대를 구석구석 뒤졌지만 꼭지는 그 숨기기도 힘든 큰 몸으로 어디에 들어앉은 건지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 점집 ‘청녀’를 지나쳤고 집 앞에 나와 담배를 태우고 있는 박설과 마주했다. 잘생긴 사장님 오랜만이네. 박설은 울고 난 듯이 쉰 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는 점쟁이 청녀 박설의 무기 중 하나였다. 신내림을 받지 않고도 그 희귀한 목소리로 용한 점쟁이 인 척 사람들을 홀렸으니까. 송원만 해도 박설의 말대로 매상을 올려준다는 부적을 사서 가게에 붙여놓았다. 누나, 나 얼굴 되게 좋아진 것 같지 않아요? 있잖어, 나 누나가 만날 거라던 귀인을 만났거든. 박설은 송원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잘 될 거라 했잖아. 사장님은 얼굴에 복이 많아. 송원은 기분이 좋아졌다. 박설이 내뱉은 멘솔 향의 연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조만간 짬뽕 먹으러 와요 누나. 소주 서비스 줄게. 송원이 다시 오토바이에 타려는데 박설이 신은 회색 스니커즈가 눈에 들어왔다. 신기하다, 누나도 이거 신네. 요즘 유행인가. 우리 유키…… 아니, 배달하는 형님두 이거 자주 신 거든요. 유행이면 나도 하나 사서 신을까. 박설은 대꾸하지 않았다. 오토바이 시동을 걸고 송원이 박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용한 골목에 오토바이 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박설은 담뱃재를 땅바닥에 튕기며 괜히 같은 자리를 서성였다. 그녀가 발을 뗄 때마다 회색 스니커즈가 헐떡였다. 마르고 주름진 발뒤꿈치가 보였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시간은 잘만 흘러서 10월이 되었다. 꼭지를 찾는 전단을 돌리고 올 때면 송원은 전에 없이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바쁠 때는 가게 앞에 묶어두고 한가해지는 틈을 봐서 산책을 시켰어야 했는데. 그 덩치 큰 애가 이리도 눈에 안 띌 수 있을까. 송원은 밤마실 다니는 거 마냥 영업이 끝나면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를 몇 바퀴 돌았다. 꼭지는 이제 석관동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일 밤 나갔다. 그러다 어느 밤, 송원의 바람대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던 10월의 밤. 송원이 오늘을 마지막으로 밤마실은 관둬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가게 문을 잠그는데 뒤에서 매끈한 모터 소리가 들렸다. 만우가 스쿠터에서 내리지 않고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송원을 보았다. 지갑을 두고 가서…… 송원은 가게 문을 다시 열고 카운터 서랍에 잘 뒀던 만우의 지갑을 갖고 나왔다. 스쿠터 샀어요? 예쁘다. 만우는 어울리지 않게 힘없이 웃는 송원을 보다가 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타볼래요? 만우는 당연히 너 혼자 동네 몇 바퀴 돌고 와라, 그런 뜻이었다. 그런데 송원이 불쑥 뒷자리에 올라타 만우의 허리를 잡았다. 이 새끼 진짜 눈치 없고 재수 없고 남사스러워. 만우는 짜증이 났지만 그냥 이러고 한두 바퀴만 돌자 싶었다. 오늘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만우의 스쿠터는 제 새 주인을 닮아가는 건지 작은 몸집으로 날쌔게 달렸다. 송원은 양팔을 넓게 벌리고 찬 공기 속 바람을 느꼈다. 스쿠터는 한적한 골목에서 멈췄다. 만우는 담배를 하나 꺼내어 물다가 송원에게 권했다. 송원은 순간 ‘5년 금연’의 기록을 깰까 말까 다른 때보다 더 숙고했다. 담배는 이내 만우의 입에 물렸다. 끊었댔지…… 이거 마실래요? 만우는 점퍼 주머니에서 팩 소주를 꺼내 내밀었다. 송원은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받아 빨대를 꽂고 소주를 한입 빨아들였다. 어떻게 담밸 끊지, 독하네. 만우는 오늘은 저 젊은 사장보다 제가 더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역시 사람은 켕기는 일을 하고 살면 안 되는 거였다. 기분이 영 구려져서 얼른 돌아가야겠다 싶었다. 형, 십 년 전엔 멘솔 폈잖아요. 언제 바꿨어요? 그런데 젊은 사장이 또 불쑥 옛날얘기를 꺼냈다. 만우는 담배를 튕겨냈다. 씨발, 저 새낀 잊을만하면 저러드라. 켕기는 거고 뭐고 불쾌해져서 스쿠터에 시동을 걸려고 하는데 눈치 없는 젊은 사장이 계속 나불댔다. 멘솔도, 설렁탕도, 단발머리도…… 다 형 때문이었어요. 그 순간 만우는 불쾌함을 넘어서 끔찍한 기분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니놈 시간여행에 나 좀 끌어들이지마. 끔찍한 새끼. 또 얼마나 낭만을 떨려고. 송원이 아직 시로와 사이가 좋았던 무렵. 장염에 걸렸다던 시로를 두고 홀로 유키의 공연을 보러 갔다. 유키의 신곡 <매직 아워>를 처음 선보이는 공연이었다. 송원의 기대만큼이나 유키의 새 노래는 좋았다. 공연이 끝나고 대체 매직 아워가 무슨 뜻이지 싶어 배설과 사투 중인 시로에게 전화까지 걸었다. 해 질 때, 막 되게 부드럽고 따듯한데 파랗고 그런 순간 있잖아. 아주 잠깐. 그 말을 듣고 보니 유키의 신곡 <매직 아워>의 가사가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잊지 말아요 짧은 순간이지만. 공연 후 유키는 조촐하게 마련된 부스에서 직접 제작한 앨범을 팔았다. 송원은 그 누구보다 먼저, 시로 것까지 두 장의 앨범을 사고 유키에게 사인까지 받았다. 수줍게 악수도 했다. 그리고 송원을 마지막으로 유키의 앨범을 사 가는 이는, 유키에게 악수 한번 청하는 이는 없었다. 바로 옆 부스에서 당시 인디 씬 최고의 인기밴드 ‘엽문’ 역시 새 앨범을 팔고 있었으니까. 유키는 준비해 온 삼십 장의 앨범 중 스물여덟 장을 안고 설렁탕집으로 갔다. 설렁탕집 이모는 알아서 소주 한 병과 설렁탕을 내왔다. 딱 방금 전 팔린 앨범 두 장의 값이었다. 씨발,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닌데 좀 사주지. 눈물이 도는데 이모가 서비스라며 메밀전이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공연 끝나고 온겨? 오늘은 많이 팔았는감. 저 정 넘치는 충청도 말투 앞에서 울긴 싫었다. 당연하죠. 가져간 거 다 팔았어요. 오늘 여기서 소주 세 병은 깔지 몰라요. 억지로 웃었는데 이모는 그 웃음이 좋은지 깔깔대다 주방으로 들어갔다. 유키는 설렁탕 국물을 한두 입 떠먹다가 말고 담배를 물었다. 멘솔 향이 머리에 퍼지면서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가 말았다.
   앨범이 다 팔렸다고 하니까 진짜 좋았어요. 나 같으면 들떠서 클럽 같은 데 가서 그 돈 다 썼을 텐데. 형은 평소처럼 소주 마시는 것도 멋있고. 형 피는 담배가 좋아 보여서 같은 담배도 펴 보구. 시로…… 그때 사귀던 여자친구가 나는 단발이 안 어울린다고 했는데 그래도 길렀어요. 난 형이 뭘 하면 다 멋있고 나도 그런 거, 그런 노래하고 싶었어요. 아…… 형, 나 민희가 결혼하기 전까지 민희 좋아했어요. 그니까 뭐 형한테 무슨 감정 품고 그런 거 아니라구요. 그냥 형 노래가 좋은 건데. 씨발새끼. 저 새끼는 정말 씨발새끼야. 만우는 순간 십 년 전에도 참아냈던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혼자 추억과 낭만에 빠진 송원의 다음 말이 정확히 예상되어 미칠 거 같았다. 형, 음악 다시 하면 안돼요? 그 말 덕분에 만우는 더 이상 제 젊은 사장에게 켕기는 마음 따위는 갖지 않기로 했다.
   얼마 전, 아직 늦더위가 가시지 않았던 날. 탕약집 방씨가 배달을 갔다 돌아오는 만우를 불러 세웠다. 애타는 변명이었다. 우리 늦둥이가 아토피를 앓는데 크고 혈통 좋은 놈을 골라 개소주를 끓이면 좋다더라. 꼭지 그놈이 요즘 더 튼실해진 게 다른 개는 눈에도 안 찬다. 시장 나가도 그런 개는 팔지도 않는다. 댁네 사장이 형씨를 많이 따르는 거 같던데 말 좀 잘해 달라. 애원하다시피 제게 말하는 방씨에게 연민이라도 품은 게 아니었다. 만우는 그저 현실적으로 흥정을 했을 뿐이었다. 며칠 전 중고 바이크를 사고파는 사이트에 갖고 싶던 스쿠터가 올라왔다. 단종 품이라 프리미엄이 얹혀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무리였다. 딱 오십 만원이 부족했다. 얼마까지 줄 수 있냐는 만우의 말에 방씨는 삼십…… 이라고 말끝을 흐리다가 만우가 별 반응이 없자 사십을 불렀다. 육십, 아니면 됐구요. 방씨는 돌아서려는 만우를 붙잡았다.
   모처럼의 휴일이었다. 송원이 목욕탕을 갔다가 돌아왔을 때 민희가 가게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 민희 소주 일 병 생각났구나? 웃겨, 우리 민희는 뭔데요. 담배를 태우던 민희가 잔기침을 해댔다. 송원은 코를 킁킁대며 문 앞의 의자에 앉았다. 담배 바꿨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틈을 참지 못한 송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지 소스 새로 만들었는데, 먹어 볼래? 민희는 짧아진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연기를 잠재웠다. 사장님 되게 못 미더운 거 알죠. 알아, 민희 넌 되게 믿음직하고. 민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갈래요, 들어가요. 의자에 앉은 채로 송원이 손을 흔들었다. 발을 떼려던 민희가 멈칫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어쩌다 계족반점이 된 거예요? 송원은 대답을 않고, 웃음을 참듯 입가를 씰룩였다. 뭐에요, 빨리 말해줘요. 흐흐흐, 그거 우리 할아버지 이름이야. 네? 전전 사장님 이름이…… 맞어, 계족이야. 김계족. 이번에는 민희의 입가가 씰룩였다. 결국 짧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미안해요, 웃어버렸네. 가게 이름 바꿔볼까 고민하다 관뒀어, 흐흐흐. 잘했네, 난 계족반점이 좋아요. 민희는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사장님. 응? 나 남편이랑 헤어지려구요. 그 사람 의심병이 또 도졌거든요. 송원은 당황했고 뭐라 대꾸할지 몰라 고민했다. 그냥…… 나중에 알게 되면 섭섭해할까봐요. 가볼게요. 그제야 무슨 말이든 하려는 송원에게 민희가 손사래를 쳤다. 날이 쌀쌀해요. 들어가요. 민희는 뒤돌아 잰걸음으로 멀어졌다.
   다음 날 가게 문을 연 송원은 오전부터 분주했다. 민희가 늦는 모양이었다. 전에 없이 늦잠이라도 자는 건지 전화를 해도 답이 없었다. 송원은 원래 민희가 하던 일들을 제가 하다가 오픈 시간이 훌쩍 넘은 것도 몰랐다. 가게 문이 열리고 민희인가 기대했던 것도 잠시, 박설이 들어왔을 때 만우도 아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장님 혼자서 바쁘네. 박설의 쉰 목소리가 오늘따라 축축했다. 집에서 입는 실내복 차림에 얇은 외투를 걸친 박설은 추운지 손바닥으로 팔뚝을 비벼댔다. 누나, 짬뽕이죠? 소주는? 뭘 물어, 마시지. 송원은 금세 짬뽕과 소주를 내왔다. 누나, 좀 있다 가지 볶음밥도 해줄게요. 내가 만든 소슨데…… 가게 문이 열렸다. 그 찰나에 민희나 만우가 들어오길 바랐던 송원이었지만 들어선 것은 외상값을 갚으러 온 부동산 조씨였다. 조씨에게 받은 몇 장의 지폐를 넣으려 포스를 열었는데 안이 텅 비어있었다. 천 원짜리 한 장 없이. 송원은 카운터 서랍을 구석구석 뒤졌다. 손님이 두고 간 물건이나, 영수증 등 그럭저럭 중요한 것들을 서랍에 두곤 했다. 혹시나 민희가 사흘 치 매상을 잘 모아서 서랍에 두진 않았을까, 내가 어디 잘 두고 잊은 건 아닐까. 기대를 버리지 않고 마지막 서랍을 열었다. 돈은 없었다. 대신에 종이 케이스에 담긴 시디 한 장이 텅 빈 서랍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케이스 겉면에는 아무런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시디는 마트에 가면 한 장에 천원이면 살 수 있는 공시디처럼 보였다. 송원은 그것을 낡은 오디오에 넣었다. 시디가 바퀴를 감듯 돌았다. 기타 반주를 시작으로 나직이 읊조리는 듯 노래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여행의 끝 이름 없는 꿈의 마지막 송원은 저도 모르게 침을 깊숙이 삼켰다. 카운터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바닥에 앉았다. 도입부가 끝나고 기타 연주가 조금 격해지자 읊조리던 목소리가 흔들렸다. 마디마디에 흠집을 내듯이 불안한 음정이었다. 수많은 한숨들은 내가 꾼 꿈들, 내가 한 거짓말 소주를 홀짝이던 박설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바다는 흐르고 지평선은 계속 치솟지만 카운터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자니 테이블 밑으로 박설의 마른 두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 발보다 한 뼘은 더 큰 회색 스니커즈를 맨발로 구겨 신은 채였다. 사장님한테 귀인 만날 거라고 한 거, 좋은 일 있을 거라고 한 거. 그냥 해본 말이야. 복채 받으면 나쁜 말 같은 거 못해. 있지, 만우는 원래 그런 놈이야. 사라졌다 보였다를 반복해서 진 빠지게 만드는. 알면서도 맘을 줬어. 여기 돈만 가져간 거 아냐. 단골손님 굿해주고 받은 돈이 사라졌더라구. 우리 순진한 사장님은 몰랐겠지만 여기 일하는 애. 그 고운 애도 만우 그 새끼한테 홀렸나 봐. 같이 갔을 거야.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돌아갈 수 없어 꿈의 조각들을 맞추려 애쓸 뿐 노래가 끝났다. 오디오 안의 시디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송원은 웃어버렸다. 형이 신곡을 들려주네요, 십 년 만에. 담배를 물던 박설이 코웃음을 쳤다. 신곡은 무슨. 제 버릇 개 못 주지. 기타 몇 번 튕기는 척하더니 또 베낀 거야. 뻔뻔한 새끼. 박만우는 음악만 안 했어도 괜찮은 인간이 됐을 텐데. 송원은 바닥에서 일어나 오디오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나직한 음성이 다시 한번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이곳은 여행의 끝 이름 없는 꿈의 마지막 박설의 맞은편에 앉은 송원은 박설이 마시다 남긴 잔 속의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누나, 세상에 ‘완전 새것’는 없어요. 박설은 대꾸 없이 담배 연기를 송원의 얼굴에 내뱉었다. 기분 좋은 멘솔 향이었다. 송원은 웃었다. 뭘 만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몰라요. 그러니까 함부로 말하는 거예요. 암 것도 모르면서. 흠집이 난 듯한 목소리로 유키가 열창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한숨들은 내가 꾼 꿈들, 내가 한 거짓말……

   송원은 설렁탕집을 나서는 유키를 얼른 뒤쫓아나갔다. 오늘은 꼭 말해야지. 저 형 팬인데요. 저하고 소주 한 잔만 더 하면 안 돼요? 이렇게 말하면 스토커 같을까? 남자 새끼가 재수 없다고 하려나. 유키는 가게 앞에 서서 종이컵 커피를 홀짝이다가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려는데 라이터가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라이터를 몇 번 흔들어대다가 포기하고 발걸음을 떼는 유키에게 송원이 불쑥 불꽃이 오른 라이터를 내밀었다. 뭐라도 말 하고 싶었지만 막상 유키를 코앞에 두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송원이었다. 유키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뽀얀 연기와 함께 유키의 나직한 목소리가 퍼졌다. 고맙습니다. 송원은 뭐라 대꾸도 못 하고 저도 담배를 하나 물었다. 불을 붙이고 빨아들이는데 익숙하지 않은 연기가 목구멍을 간질였다. 꼴사납게 연거푸 기침이 나왔다. 유키가 머뭇거리다가 종이컵을 내밀었다. 날이 춥죠, 이거라도. 겨우 기침이 멎은 송원은 그걸 또 받아들었다. 민망하게 손이 떨렸다. 지금인가, 지금 말하면 형이 좋다고 할까. 형하고 소주 일 병 할 수 있는 건가. 그래, 지금이다. 말하자. 형, 계속 음악 해주면 안돼요? 대뜸 나온 말에 유키가 놀란 듯 송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노래, 계속해주세요. 다음번엔 두 장 말고 열 장 살게요. 그러니까 다음 앨범도 꼭 내주세요. 송원은 차마 저를 보고 있는 유키의 두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정면만을 보고 빠르게 쏟아낸 말이었다. 짝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망했다 싶었다. 그때 유키의 작고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맙습니다. 다음 앨범도 만들 수 있으면 그때는 술 한 잔 살게요. 그제야 송원은 용기를 내어 유키를 마주 보았다. 유키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의 따듯한 손을 맞잡았을 때보다 더 가슴이 뜨거워졌다. 찬 공기에 흩어지는 멘솔 향의 연기가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 참고 음악
〈샤이보이〉 작곡: 최영두 작사: 배기정, 최영두 노래: 정성희
〈MAGIC HOUR〉 아티스트: SPECIAL FAVORITE MUSIC
〈水面の果て〉 아티스트: TRY TRY NIICHE


배기정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
아직도 이 구절을 떠올릴 때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빛나던 때를 생각하면 울적하기도 합니다. 스무 살의 홍대가 그립습니다.

2018/09/25
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