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해주(三亥酒)



   묵은세배를 가는 길
   집성촌에 눈은 내리고
   섣달그믐처럼 눈은 내리고
   김씨 종가 오녀 중에
   넷째가 가슴에 쌓여 있네
   사위 왔다고 따라주는 장깍지 잔은
   아린 듯 저린 듯 뜨겁지
   돼지날에 저은 술은 석 잔에 그쳤어야 했네
   용천한다고 초저녁부터 꼬여버린 말들
   이 집에 살겠노라고
   셋째인 누나에게 장가가겠노라고
   울 것 같은 그 아이 볼을 보며
   되뇌는 맹세는 붉다가 커졌네
   슬쩍 눈물을 닦고 또 잔을 받으며
   나는 돼지처럼 해해 웃었네
   박수 소리 웃음소리로 쏟아지는 함박눈
   얼어붙은 탱자 가시들을 덮어주었네
   속없는 옛날처럼 눈이 내리고
   허물어진 종갓집에 눈은 쌓이고
   시린 장깍지 잔은 입술에 남아 있네
   벗은 가시처럼 부끄러운 열여섯 살
   홀리듯 찔린 그 술에 그만
   장가들고 말았었네





   순창 국수



   출장 가다가 허기진 순창에서
   허름한 문을 밀고 물국수를 시켰다
   맛뵈기로 나온 머릿고기가 맛있어
   ‘고기 추가’를 주문했더니
   꼬부랑 할매가 손사래를 친다
   - 다 못 먹을 틴디, 돈 배리지 말고
     국시나 잡숴보고 생각허더랑께
   곱절로 퍼주는 국수는 삼천 원
   면발과 장맛이 선하게 맺혀
   허겁지겁 삼켜 마시는데
   - 하이고매, 도망간 여자 뒤꼭지라도 봤당가
     애옥질 나겄네, 찬찬히 찬찬히!

   어머니가 만들어놓은 양념장으로
   척척 국수를 말아주는 여름 툇마루,
   젖은 눈으로 하염없이 바라보는
   찬찬히 먹으라며 등을 쓰다듬는
   순창은 그녀가 살던 곳
   도망치듯 내가 떠나온
   첫사랑 떠난 곳

박신규

쉽게 지치고 무너지는 것이 후각과 미각이다, 나처럼, 권태롭다. 돼지날에만 한번씩 열어 세 번 살피고 세심하게 오래 묵혀야 하는 삼해주, 이번 생의 가장 아리고 아름다운 술이다. 북촌 어딘가에 간신히 명맥이 있다지만 어디 남원 종가만 할까. 풋사랑처럼 차갑게 닿던, 간장 종지보다는 큰 은빛 ‘장깍지’ 잔. 아직도 무너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취해도 마비되지 않는 헛것처럼 자꾸만 홀리면서……

2018/08/28
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