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나 파커



   그녀는 오늘도 아담을 안아준다

   이브나 파커와 아담
   역할은 시냇물

   훗날 아주 엉망인 어느 하루를 보낼 때
   이브나 파커와 아담은 이날을 기억하며 미소 짓게 된다

   시인과 경찰과 교수 역할을 맡은 아이들 틈에서
   반짝이는 푸른 옷을 입고 바닥에 누워 있던 장면

   이브나 파커는 곁눈질로 아담의 눈물 젖은 얼굴을 눈치챘다
   정말 아름다운 시냇물이구나, 생각하며

   시인이 엉망으로 외워버린 대사를 들었다
   그는 악어 대신 악마를 불렀고 그러자 할 일이 없어진
   시냇물의 악어는 이때다 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무대에선 이브나 파커와 아담이 필요 없어졌다는 뜻

   시인이 만들어 낸 악마를 때려잡기 위해
   경찰관이 무대 뒤에서 헐레벌떡 파이프를 찾아왔다

   적당한 대사가 없던 교수는 이때다 하며 아담을 향해
   저기, 저 자가 악마라네, 내가 봤어! 손가락질했고

   놀란 아담은 이브나 파커의 물줄기 속으로 재빨리 숨어들었다
   파이프가 날아와 그녀의 품속으로 함께 떨어졌다

   무대가 끝나자 시인과 경찰과 교수와 그들의 부모와
   가짜 꽃다발들이 넘쳤다 이브나 파커와 아담도 함께
   무대 위에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브나 파커,
   아담은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그녀는 아담을 토닥여 주었고 파이프 끝으로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이브나 파커의 푸른 드레스는 항상 젖어 있어서
   아담은 말라 죽을 일이 없었다

   훗날 아주 엉망인 하루를 보내며 이브나 파커와 아담은
   더이상 시냇물을 닮지 않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녹슨 파이프는 어디에나 있었고
   계속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장면 너머엔 장면이



   충정로에 가면 가장 오래된 아파트가 있고 을지로에 가면 가장 오래된 중국집이 있다. 칠이 다 벗겨진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끼익거리는 소리가 복도 가득 울려 퍼지는 오래된 아파트. 그리고 노란 물이 들어버린 단무지 그릇과 언제나 비대칭으로만 쪼개지는 나무젓가락이 있는 오래된 중국집. 사실 이런 장면들을 너는 본 적 없지만 언젠가는 충정로를 지나 을지로에 갈 수도 혹은 을지로를 지나 충정로에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과 동시에 정말로 거기에 간다고 해서 오래된 아파트와 오래된 중국집을 알아볼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다 곧 오래된 아파트와 오래된 중국집에 대한 이야기는 잊고 살다가 어느 날 충정로와 을지로를 지나갈 때가 있을 것이고 그때 문득 뒤를 돌아보며 방금 우리가 지나온 아파트가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지 않냐며 일행에게 말을 건넬 수도 있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나가 있던 사람이 응, 무슨 아파트요? 여기는 모든 것들이 오래되었어요, 라고 답할 때 아, 그렇죠. 오래된 것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라고 답하며 그런데 오늘 점심은 기름진 짜장면이 어떻겠냐고 너는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여진

쉿. 조명 꺼진 무대 위, 가만히 소리 죽여 걷는 마음들이 있다. 언젠가 만난다면 좋은 일, 만나지 못하더라도 각자 또 서로 뚜벅뚜벅.

2021/05/25
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