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일기



   오빠가 집에 왔어요 눈을 감을 수는 있었으나 숨을 쉬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방안 가득 햇살이 쏟아져요 선생님 올해 첫 폭염주의보입니다

   두툼하게 상처를 껴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왔어요 아무리 돌을 던져도 오빠는 안전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떠올려요 아마 태어나기 전부터 맡았던 냄새, 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오래된 태양은 아직 씨 뿌리지 않은 땅의 흙을 깨운다
   상처가 젖어듭니다 오빠의 숨에서 진한 냄새를 맡았어요 저 사람은 무엇인가를 보고 있나요

   쓸어낼수록 퍼지는 재, 그 질감을 제가 잘 알아요 오래된 태양은 땅의 영면을 방해하는 걸까요 눈은 감을 수 있었으나 숨을 쉬지 않을 수는 없었어요 그러면 오빠가 안심할까봐 혹시나 눈이 마주치면 웃게 될까봐

   커튼을 열었습니다 숲의 냄새를 맡았어요 저 사람도 오빠인지 궁금합니다 단단하고 탄력 있는 상처 덕분에요 오빠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요

   재에서 맨몸으로 일어서는 오빠, 늘 그랬듯 성실하게 싸웠어요 눈을 감았습니다 재로부터 저는 안전하나요

   선생님 늘 그랬듯





   친구와 양동이



   암벽등반만이 유일하게 빨간 선을 얻었다
   성공을 축하해 하고 말하려다 입속에 쌓아두었다
   친구는 암벽등반 후 죽을 만큼 아팠으니까
   어딘가에 오르는 일은 힘든 일이야, 다른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뒤집어진 양동이엔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난 늘 그 수첩이 탐났다
   암벽등반, 패러글라이딩, 파랑, 밤의 기억, 주고받은 숨, 아름다운 비늘……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을 적어놓은 그 수첩
   버킷리스트 만들기가 취미인 친구의 수첩

   중세 시대에는 교수형을 집행하거나 자살할 때 양동이를 뒤집었대
   올가미를 목에 두르고 올라설 곳이 필요했으니까

   돈은 때를 모르고 부족했다
   심장의 알맞은 형태는 늘 고민이었고
   버킷리스트에 빨간 선을 긋기엔 스케줄도 날씨도 연애도 연봉도
   늘 살인적이었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지만

   그곳에서 보낸 엽서 잘 받았어
   꼭 해야 하는 일들이 적힌 친구의 엽서
   양동이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들
   빨간 선을 대신 죽죽 그었다

   그리곤 양동이를 걷어찼다
   축복과 저주가 바닥에 흘러넘쳤다
   그곳엔 아무도 지나가지 않고

박은지

긴 연애 중이다. 긴 연애를 하면서 알게 된 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뿐이다. 나머지는 모르겠다. 사랑은 무엇일까. 너는 누굴까.

2018/07/31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