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윌리엄스



   이십 년 전 개봉했던 영화가
   다시 상영하고 있다
   나는 그게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누가 나오는지도 모르면서

   누군가 정해준 좌석을 따라
   묻지도 않고 나를 앉힌다

   스크린 속엔 많은 사람이 있고
   이미 죽은 사람이 늙은 사람이 되어서
   이미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이 되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텅 빈 나무 냄새가 난다

   부의함 앞에서 머뭇거렸던 적이
   나는 한번쯤 있었다

   영화관에 드문드문 들어찬 사람들도 조금씩 늙어 있다

   조문은 항상 내가 늦을 수밖에 없는 약속

   그래서 내가 많이 미안해하고
   미안해하는 동안 나무 냄새가 나고

   스크린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하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버린다

   그래서 나는
   몇 번씩 이 영화를 돌려 보았다는 사람들 틈에서 조용히 비켜 있다





   그린란드



   그곳엔 오랫동안 서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눈 덮인 곳 눈 속에 눈이 있는 곳 우수수 얼음이 떨어지는 곳 커다란 얼음으로 만들어진 협곡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이 있다고 당신이 제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그 사람은 너무 깊고 너무 높아서 아무도 부를 수 없다는 말과 나만큼이나 당신만큼이나 꽤나 오래 살아왔을 것이라는 말 기억하십니까

   나는 오래 기억하고 있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적당히 잊어야 할 약속 같은 것도 있는 법인데 깊고 높은 것은 뭘까요 이상한 말입니다 그래서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짧고 오래 살아왔다는 말만큼이나 이상한 말이었습니다 오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살아온 날보다 더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잠시 앉았다가 가요 앉는 것도 가는 것도 쉬운 일이니까 나는 게을러서 한번 마음먹으면 다음 마음을 먹기까지 오래 걸리니까 잠깐 쉬어가요 내가 오래전에 말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게으른 내가 많은 시간 공을 들여 말해본 말입니다

   당신이 해주는 이야기 속에는 너무나 많은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내가 잠시 쉬어가는 동안에도 눈이 내리고 하얗고 넓어지는 것들이 참 많고 마음이 마음을 먹고 다른 마음이 나의 마음을 치우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커브를 돌아 나타나는 기차를 보게 됩니다 잠시 앉아 있던 우리가 백 년째 눈을 맞으면서 나타나는 기차와 사라지는 기차를 보고 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오래 앉아 있었던 일과 사라지는 기차의 뒷모습

   당신의 이야기에서 그는 여전히 서 있고 협곡은 더 단단해지고 기차는 커브를 돌고 우리는 여전히 오래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커브라서 치우치기도 쉬운 것이라서 별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 눈이 그칠 만한 일도 아니었기에 우리는 그저 여기에서 함께 느려지고

   눈이 계속 오고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희형

이례적인 더위가 가고, 또 이례적인 추위가 가면, 결국 우리는 살아 있게 된다.

2018/03/27
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