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치로, 날 사랑하라고 해. 어서 가서 그렇게 얘기 하란 말이야. 날 사랑하라고. 제발이지 날 사랑하라고!”
   “못 합니다. 거기 있는 경비병이란 자가 제 말투를 이상하게 여겨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요.”
   “네 말을 듣도록 해봐. 나를 시험하는 거라면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제발이지, 날 가엾게 여겨달라고.”
   “시험해보려는 게 아니었어요. 그자는 진짜로 다른 사람과 결혼할 작정이에요. 공주님, 다시는 안 가고 싶습니다.”
   “치로, 한 번만 더 가주렴. 무슨 수가 생기지 않겠니?”
   “안 가고 싶다고요. 나는 물고기잖아요. 마녀에게 산 인간 목소리 시약이 거의 다 떨어졌고 또 거길 자꾸 들락거리다 내가 누구란 걸 알게 되면 그들이 나를 주방장의 식칼 아래로 데려갈 거라고요.”
   “얘야, 어서 가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그 말만 좀 전해주렴.”
   치로가 눈을 꾹 눌러 감고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못 갑니다.”
   치로는 그렇게 말하고도 물거품이 일어나도록 꼬리를 계속 흔들었다.
   “네 친구의 마지막 부탁이야. 경비병에게 가서 네가 직접 왕자를 만나겠다고 해. 그래서 왕자를 만나게 되면 그가 바다에 빠졌을 때 구해준 게 바로 나였다고 얘기해다오. 왕자를 만나기 위해 나는 목소리도 잃었다고. 나만큼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제발 나를 사랑하라고.”
   물고기 치로가 바위에 지느러미를 걸치고 있다가 바다 위로 떠올라 성 쪽으로 헤엄쳤다. 그리고 멀어지기 직전에 몸을 돌려 초음파로 말했다.
   “좋습니다. 다시 가볼게요. 하지만 일이 잘못돼서 내가 죽으면 내 애인 리토의 슬픔은 누가 위로해준단 말입니까?”
   “바다가 있지 않니? 바다가 다 알아서 해줄 거다. 그러니 넌 그들에게 가서 나를 위해 어떻게 할 건지 그것만 궁리해다오. 얘야, 서둘러야 해.”

*

   그들은 이른 새벽에 배를 띄웠다. 인어공주는 갖은 빛깔의 수술로 장식된 왕자의 옆방에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애끓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메마른 눈이 붉어지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금장 띠를 두른 탁자 위에서 뚜껑도 열린 적 없이 음식이 식어버렸다. 싱싱한 양귀비에서 재 냄새가 났다. 잠시 잠이라도 자며 마음을 달래고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생각뿐이었다. 그가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식을 올릴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를 향한 갈망이 강해졌다.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어디든 함께 가려고 했던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카피라는 우하수드라 나라의 왕자이기에 앞서 그녀의 예언된 상대였다. 그녀, 그러니까 하세가 카피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행자 갈매기의 예언이 그녀가 사는 심해의 왕국까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난데없이 태양이 다가올 때 하세는 땅의 왕자 카피라를 사랑하네.
   가슴에 꽂힌 칼보다 뜨거운 사랑이 하세의 가슴속에 있네.’

   처음에는 땅의 인간이라 꾹 참았다. 그러나 열다섯 살이 되어 땅의 세상을 보았을 때 하세는 갈매기의 예언이 실현되리라는 걸 알았다. 땅의 빛이 칼날같이 억셌다. 하세는 무엇도 보기 전에 눈을 찔렸다. 테두리가 사납게 번지는 탁한 자줏빛 어둠이 그녀의 심장과 같은 온도로 불탔다. 하세가 낯선 고통에서 깨어나 다시 눈을 떴을 때 빛 속에서 파도 거품이 솟구쳐올랐다 터무니없이 부서졌다. 바람은 변덕스러웠다. 무더운 공기 중에 떠도는 비릿한 냄새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소리들이 귀를 울렸다. 이토록 강렬한 세계를 하세는 알지 못했다. 깊은 바다는 부드러운 꿈처럼 고요했다. 하세는 난생 처음 느끼는 풍부한 감각들에 벅찼다. 자신이 그 모든 것이 되어 소리를 내고 냄새를 풍기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세는 날마다 바다 위로 올라갔다. 물에 쉽게 젖고 바스러지며 죽는 것들이 아름다웠다. 곤충의 젖은 날개, 해안가 숲에서 굴러온 낙엽들, 찢어진 책의 낱장 따위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모래 위에서 죽은 해파리가 둥글고 우묵한 자취를 남겼다. 달의 어둠이 잔잔한 바다 위에 젖지 않는 신비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하세는 숨 막힐 듯 감동했다. 이 모든 게 카피라처럼 느껴졌다. 하세는 카피라를 만나기도 전에 그가 사는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다.
   보다 못한 언니들이 하세를 말렸다. 땅의 세계는 바다 왕국과 다르다고 했다. 인어의 순수함이 땅에선 어리석음이 될 거라고 했다. 땅의 인간을 사랑한 인어는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만다고도 했다. 언니들은 하세가 물 위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조개 문을 막았다. 하지만 하세는 문을 부수고 물 위로 올라갔다. 그날부터 언니들은 막고 하세는 부수는 일이 반복되었다.
   언니들이 화를 내며 말했다.
   “얘, 하세, 한 번만 더 바다 위로 올라가면 널 동굴에 가둬버릴 거야.”
   하세도 지지 않았다.
   “언니들, 그를 사랑하게 된 건 내 탓이 아니야. 사랑은 죄가 없어. 그러니 동굴에 가두든 말든 알아서 해.”

*

   ‘끝내 배가 부서지고 만 거야. 나는 바다에 빠져 죽어가는 카피라를 구했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그를 품에 안았어. 마침내 그를 만난 거야. 나팔꽃처럼 새파란 나의 바다 왕국으로 데려가고 싶었어. 하지만 곧 그가 물속에 오래 있으면 죽는다는 사실이 떠올랐지. 나는 그를 안고 힘껏 헤엄쳤어. 태풍이 잦아든 해변에 그를 뉘였어. 습기가 가득한 바람에 꺼진 모닥불 냄새가 실려왔어. 그때가 여름 태풍이 불어오던 7월이었어. 왜냐하면 8월에는 이미 내가 다리가 생긴 채 땅을 밟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그는 정신을 차렸어. 하지만 사람들이 다가왔고 나는 바위 뒤로 숨어야만 했어. 나는 그를 다시 만나야 했어. 그에게 가야만 했어. 마녀의 집에 가는 지도를 얻으려고 모래에 파묻혀 있는 가오리에게 흑진주 수백 알을 주었어. 마녀의 집 앞을 지키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감겨 있는 덩굴손들에게 내가 가진 젖지 않는 황금 천들을 모두 내주었어. 불을 밝혀주는 조건으로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는 심해 아귀에게 남은 산호 보석까지 다 주었어. 마녀에겐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었어. 마녀는 내 목소리를 가져갔어. 그렇게 다리를 얻었어. 그걸로 모든 일이 제대로 되어간다고 믿었지. 땅을 딛는 순간 그가 나를 알아보고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난 이미 그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선 두려울 게 없었어.
   그러나 땅의 세상은 달랐어. 그들은 발가벗은 채 해변에 쓰러져 있던 나를 하찮게 여겼어. 왕자의 성으로 데려가긴 했지만 특이한 소라껍질을 줍듯 수집한 것에 불과했어. 나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옷을 입는 방법도 몰랐어. 도구를 사용해 음식을 먹을 줄도 몰랐어. 그들은 나를 겁주며 왕자가 예의 없는 걸 질색한다고 했어. 그들은 왕자의 그림자만 지나가도 나를 찾았어.
   “이봐, 왕자가 열여섯번째 회랑을 돌아 나오고 있더군.”
   그때마다 나는 넘어질 듯 위태롭게 걸어 보일러실에 숨었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칼로 찌르듯 아팠어. 그러나 그보다 고통스러웠던 건 그리운 카피라를 피해야 한다는 거였어. 나는 뜨거운 배관 사이에서 몸을 웅크리고 며칠이고 밤을 샜어.’
   사실 하세는 그런 와중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하세가 카피라를 만나 사랑하는 건 하세의 가슴속에선 이미 실현된 일과 같았다.
   ‘적어도 이곳의 생활방식을 익히고 나면 왕자 가까이 갈 수 있을 거야. 그러면 그도 나를 사랑하게 될 거야.’
   하세는 그 희망에 모든 걸 걸고 견뎠다. 누구도 그녀에게 호기심 이상의 애정을 갖지 않는 땅의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사람들은 하세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가졌는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목소리 없는 하세가 아무 말도 못하자 그 관심마저 곧 시들해졌다.
   하세가 익힌 음식을 먹고 숟가락을 사용하려고 애쓰는 동안 바다에서 물방울을 손가락 끝에 얹고 즐거워하던 감각이 사라졌다. 사람들의 자기중심적인 대화방식을 익히다 해초의 노래를 자신의 노래보다 더 소중히 여기던 마음이 사라졌다. 빗지 않아도 아름답게 너울거리던 풍성한 머리카락이 뒤엉켜 거칠어졌다. 그녀는 작은 빗을 얻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일하지 않는 바다와는 달리 땅의 세상에선 무엇이든 얻으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볼 생각도 없이 하세다웠던 것들이 사라지게 내버려두었다. 그녀가 신경 써야 할 유일한 것은 카피라였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해야 할 것은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하세는 가까스로 그와 가까워졌다. 그녀는 불완전한 다리로 누구보다도 가볍게 춤췄다. 아침에 일어나면 왕자가 그녀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함께 식사를 했다. 함께 거대한 구름이 흩어진 틈새로 드러난 새파란 별들을 밤새 바라보았다. 노루 새끼가 첫 걸음을 떼는 걸 보았다. 고요한 숲에서 나무에 쌓인 눈이 녹아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왕자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끝없이 들려주었다.
   왕자는 그녀를 좋아했다. 카피라는 그녀의 왼쪽 눈동자에서 아득한 대초원을 오른쪽 눈동자에선 끝없는 바다를 보았다. 그는 자신의 방 가까이 그녀를 머물게 했다. 때때로 왕자는 무슨 소리를 들은 것처럼 잠에서 깨어났다. 견딜 수 없이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왕자는 조용히 하세의 방으로 갔다. 습하고 차디찬 달빛이 잠든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왕자는 봄밤의 어둠 속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약간 괴상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말을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더는 귀를 기울여봤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왕자는 하품을 하며 곧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그가 그녀를 사랑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로 했다. 하세는 그가 떠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럴 수 없었다. 이제 와선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이 그녀를 성대한 결혼식이 치러질 배로 데려갔다. 누구도 신랑이나 신부보다 아름답게 꾸미지 말라고 했다. 하세는 폭이 좁은 치마를 입고 그가 준 귀걸이를 뗄 필요조차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슬픔에 시들어 있었다. 왕자를 잃는다는 두려움에 다리에 경련이 일었다. 결혼식이 내일밤 바다 한가운데서 열릴 것이오. 그들이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세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실연을 알았다. 결혼식을 위해 돛대가 백합으로 장식되고 작은 크리스털 구슬들이 꿰어져 불빛 아래 반짝였다. 주방에선 바나나잎으로 싼 기름기 없는 사슴 통구이의 껍질이 바삭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신의 음료라 불리는 붉은 석류즙이 유리병 속에서 찰랑거렸다. 사람들은 경쾌한 걸음으로 바삐 움직이며 가장 깨끗하고 귀한 것들로 결혼식을 준비했다. 하세는 주황색 등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어둡게 죽어갔다. 손과 발이 차갑게 식었다. 얼굴에는 열이 올랐다. 울음이 몸 안에 차올랐지만 메마른 눈동자엔 눈물조차 고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카피라가 그녀를 떠날 거라는 생각만큼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카피라가 누구인지 몰랐을 때부터 사랑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으면서도 아무것도 잃지 않은 듯 했다. 하세와 카피라는 마주보고 웃었다. 벽에 붙어 있는 도마뱀의 그림자가 공룡처럼 불어나듯 점점 커지는 웃음이었다. 카피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웃어본다고 했다. 그런 카피라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리 없었다.
   그녀는 어떤 희망이라도 찾아야 했다. 아직 어딘가에 그 희망이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착각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가 결혼하려는 사람은 이웃나라의 공주가 아닌, 그러니까 하세 바로 그녀 자신일지도 몰랐다.
   하세는 휘청대는 다리로 갑판의 난간에 서 있었다. 오래된 어둠으로 가득찬 새벽이었다. 나긋한 물안개 위로 파도 거품이 뱃전에 부딪쳐 알알이 부서졌다. 불투명한 우윳빛 거품 속에서 갖은 형상들이 생겨났다 무심히 사라졌다. 언니들과 물 소용돌이를 타고 놀다 날카로운 바위에 꼬리가 찢겨 울던 모습과 가오리들과 노래를 하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눈은, 슬픔에 차가워진 눈은 난간 너머의 바다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삶은 그 바다에 있었다. 그녀는 바다를 사랑했다. 그녀는 파도 거품의 굴곡을 눈으로 어루만지며 흐름을 음미했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년이 바삐 갑판을 가로질러 갔다. 하세는 할말이 있는 사람처럼 소년을 바라보았다. 윤기 없는 까무잡잡하고 둥근 얼굴의 소년이 마치 친구처럼 느껴졌다. 하세는 소년을 잘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도와달라고,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얘기할 참이었다. “이봐요, 꽃을 들고 가는 이여, 그가 날 사랑하게 해주세요.” 그러나 그녀는 목소리가 없었다. 소년은 탐스런 꽃을 한아름 들고 그녀가 그곳에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가버렸다. 그녀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

   “왕자님, 하세를 데려왔습니다.”
   인간으로 변장한 물고기 치로가 목소리 시약을 먹고 힘겹게 말했다. 치로는 허리를 구부리고 왕자의 말을 기다렸다. 왕자는 뜨거운 태양이 정교하게 조각된 흑단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있었다.
   “하세라니?”
   “해변에서 발견된 왕자님의 친구 말입니다.”
   왕자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던 눈을 들지도 않고 말했다.
   “그녀의 이름이 하세였군. 내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어 기쁘냐고 물어보도록.”
   “하세는 말을 못합니다.”
   왕자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말을 못한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지.”
   왕자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하세의 고통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꿈꾸는 듯한 말이 계속되었다.
   “사실 난 깊은 갈망을 느낀 적이 없어. 얼마 전 배가 난파되어 물에 빠지기 전까지는 말이지. 나는 이곳저곳 돌아다녔어. 신기하고 고귀한 것이라곤 실컷 구경했어. 열정적인 여자도 천진한 소년도 탐욕적인 재능도 빼어난 것이라곤 뭐든 가졌어. 나와 똑같은 체구의 글씨를 쓰는 자동기계인형도 미래의 시간을 가리키는 점성술사의 나침반도 가졌어. 지도에 표시된 내 나라의 경계는 점점 넓어지고 있었지. 내가 일일이 알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의 삶이 내 발치에서 일어났다 스러졌어. 깊이 들이마신 백단향의 냄새에서 피를 끓게 하는 강렬한 욕망과 헤아릴 수 없는 허무를 함께 느꼈어. 나는 행복하지만 내일 죽는다 해도 아쉬움이 없었어. 나는 삶을 완전히 아는 듯 했지만 한순간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지. 나는 많은 것을 가졌기에 무엇도 갖지 못한 것 같았어. 때로는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다는 불길한 기분이 들기도 했어.
   그런데 죽음의 혼돈 속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가 나를 보고 있었어. 그 순간 나는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마치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나를 새로 만들고 있는 것 같았어. 나는 그녀의 신선하고 고요한 눈빛에서 비로소 태어난 거야. 내가 정신을 차릴 즈음 그녀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더군. 나는 난생처음 아픔을 느꼈어. 얼굴조차 또렷이 떠오르지 않는 그녀를 내 몸이 마르고 눈물이 쏟아지도록 그리워하게 되었어. 그런데 그녀가 나와 혼인하기로 되어 있는 이웃나라 공주라니. 내 운명에 감사했지.”
   왕자는 여느 때처럼 하세에게 말했다. 그러나 하세가 다른 때와 달랐다. 마음을 다해 기쁨으로 그의 얘길 듣고 있지 않았다. 왕자는 하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곁에 있는 광대와 가벼운 농담을 나누었다. 왕자에겐 하세의 대체물이 얼마든지 있었다. 하세가 왕자가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왕자는 다시는 하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왕자가 문득 떠오른 듯 눈동자를 빛내며 하세를 보았다.
   “오늘 전령사 치로가 놀라운 얘길 전해주더군. 바다에 빠진 날 구한 게 너였다고. 어쩌면 내가 깨어날 때 본 게 너였는지도 모르겠어. 하세, 네 이름을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 거야. 고맙다는 말은 네가 날 구한지 몰랐을 때부터 너에 대한 내 우정으로 대신했다고 생각해.”
   왕자가 들뜬 기분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왕자는 더는 하세에게 할말이 없었다. 왕자의 관심은 이미 다른 데로 넘어가버렸다. 하세는 심장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치로, 목소리 시약을 줘.’
   하세가 치로에게 초음파로 말했다.
   ‘못 합니다. 마녀에게 목소리를 판 자가 목소리 시약을 마시면 곧 죽어버린다고요.’
   치로가 말했다. 하세는 포기하는 척 하다 치로에게 달려들어 치로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목소리 시약을 빼앗았다. 단숨에 마셔버렸다. 입 안이 타들어가며 잘린 혀가 부풀어올랐다.
   “왕자님, 절 좀 보세요!”
   하세가 소리쳤다. 피와 고통, 설움과 갈망이 뒤섞인 기괴한 목소리였다. 왕자가 놀라 하세를 바라보았다.
   “왕자님을 구한 건 저예요. 왕자님이 깨어나 처음 본 건 저예요. 왕자님이 그리워한 건 이웃나라 공주가 아니라 저일 거예요. 왕자님은 이웃나라 공주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시지만 우리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진짜 사랑하는 건 저라는 걸 알게 되실 거예요. 저는 왕자님을 사랑해요. 절 떠나지 마세요. 결혼하지 마세요. 그녀에게 왕자님께선 절 사랑하신다고 말하세요.”
   하세가 얇은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제야 눈물이 터져나왔다. 뜨겁고 따가운 눈물이 하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세의 뺨이 염산에 닿은 것처럼 부글부글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왕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네 목소리는 정말 끔찍하구나. 이렇게 거슬리는 소리는 다시 듣고 싶지 않아.”
   왕자가 주저앉아 있는 하세를 지나쳐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
   “하세를 방에 데려다주도록.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서 말하지 못하게 해!”

*

   모든 게 끝났다. 하세는 물거품이 되었다. 그 곁에 물고기 치로가 있었다. 치로는 하세가 변한 물거품을 전복 껍질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공주님, 언니들이 보고 싶어할 거예요.”
   물속 깊이 헤엄쳐가는 도중에 치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공주님 모습이 변해서 다들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흡사 사라진 것 같거든요.”

김진나

사랑은 요구할 수 없다. 그러나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 절박하게 몸을 떨며 애원한다. 마치 부탁을 하고 누군가 말을 전해주면 실현될 수도 있는 일인 것처럼. 좋아하는 작가 후안 룰포의 「나를 죽이지 말라고 해!」의 구조를 바탕으로 썼다.

2018/01/30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