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한 세계



   꿈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 비는 꿈 밖에서 오는 중이다 나는 여기 있는데 산책을 하고 있는데 저기에도 있다 꿈 밖에서 나의 습관은 산책이 아니다

   골목을 걷고 있을 때 우산 쓴 사람을 본다 잊고 있던 사람이다
   그는 나를 잊은 것처럼 지나치고
   지나갈 때
   나는 그가 좋아진다 그의 부러진 우산살 하나가 마음에 든다 가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있다

   공원에서 그를 본다 어느 사이 나는 우산을 들고 있고 그는 나무 밑 벤치에 앉아 비를 본다 내 취미는 비를 보는 것이 아니다 빗소리를 듣는 것이다
   나는 그를 처음 본 것처럼 바라보고 그의 우산은 멀쩡하다 아무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골목에서 우산살 하나가 부러진다 이런 우산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고 사람이 골목 입구에서 비를 맞고 있다 나는 사람을 지나친다
   지나갈 때 사람이 나를 불러세운다
   우리 지난번 꿈에서 본 적 있죠?
   그런가요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사람이 좋아질 때가 있어요
   그 사람은 내 우산을 마음에 들어 하고 나는 그것을 건네준다 비가 내린다 그는 이미 젖었고 내 몸은 젖지 않는다

   꿈 밖에서 비가 그친다 나는 거기 있는데 책상에 엎드려 잠시 자고 있는 중인데 여기에도 있다 여기에서 나는 산책만 한다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알 것 같은 사람을 본다 내가 손을 펴자 저쪽에서도 손을 흔든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지 건조한 집으로
   비 한 방울이 우산을 통과해 이마로 흐른다

   나도 내가 좋아질 때가 있다 이런 것은 혼자만 아는 비밀이면 싶다





   생활
   ―오토매틱



   오전 11시 점도 없이 맑은 낮잠
   수은에서 헤엄치기
   허우적거리는 팔과 얼굴과 다리

   수은은 실온에서 액체인 금속입니다 수은, 중얼거리면 이름 같습니다, 누구일까
   남 생각하는 시간은 아깝고 신경증은 없어요

*

   수은에다 1페니를 띄워도 가라앉지 않습니다
   동전보다 밀도가 높아요
   원자번호 80번 원소들의 세계에는 원소들만
   나의 책상 위엔 내 종이들만
   1인실에서 생활합니다 그곳까지는 복도가 있습니다 비가 올 때 젖은 우산들 펼쳐져 있습니다 지그재그로 가야 합니다 지그재그로 물웅덩이가 모입니다 밟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면 안 됩니다 복도는 일직선 책상은 네모 액체는? 생활입니다 비는 밖에서 오고 안으로 흐를 것 건물은 안으로 물을 기릅니다 그런 것에 복도는 무감합니다

*

   로퍼에 1페니를 끼워봐 흘렸어? 더 빌빌대면서 동전을 찾아봐 대열을 이탈했어? 행운을 빌어봐 총탄이 네가 있던 곳을 스쳐지나갔다고 생각해봐 긍정은 질렸고 부정은 끔찍해?
   페니로퍼에 1페니를 끼워놓으면 행운이 찾아옵니다 없으니 십 원짜리로 대신
   새 상품은 당분간 신선
   새 신을 신고 걸어 다녀도 사람 사는 곳 다 거기서 거기
   희망도 절망도 양 겨드랑이에 모두 가득 껴 들고

*

   (책상 위에 둔 A4용지들이 자꾸 사라진다)
   누가 네 것을 훔쳐 가면 처음부터 네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해
   페이지를 넘겨
   과도한 신경증이야
   억울함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것이 중요해 죄책감이야 예전에 저지른 일 때문에 벌 받는 거야 스스로 처벌 가능해
   알고 있어
   벌은 그렇게 오지 않아 알고 있는데 그건 죄가 아니야 신경증이지 알고 있어 편집증 알지 아는데……

   메틸수은에 중독되면 신경이 마비되다가 죽습니다 병명은 미나마타
   수은 질질 흐릅니다
   수은 누구의 이름이거나 암호 같은
   미나마타 현에 사는 여성 혹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녀석
   상상 속에서 중독은 아름답습니다
   현실에선 수은에 중독된 생선 잡아먹고 수백 명 떼죽음

*

   하루 죽은 것처럼 내일을 미루기 고개 들고 창을 보면 책상 옆에도 빛이 들어와
   유리는 소화한 걸 그런 식으로만 토해내는 걸까 유리의 방식 사랑스러워 거의 굴곡 없이 통과시키는
   경계 유리 속을 통과할 때 뻑뻑해 유리의 방식을 익히는 거 투명해지려면 어쩔 수 없이
   견뎌 유리는

   고체가 아닌 액체입니다

   수은의 어는점 -38.83℃ 끓는점 356.73℃
   금속 위에 상반신의 생선 하반신의 인간이 헤엄치기
   수은 증기로 구성된 낮잠
   유독성

   창문 밖으로 총탄이 날아갑니다
   어째선지 내부는 강화유리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오전 5시 반 당분간 나는 금속, 오토매틱입니다

이제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살고 있다. 영향을 주고받는 일에 대해, ‘나’라고 쓸 때 이 안에 들어찬 수많은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미안해진다.

2018/08/28
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