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긴 정면



   “미래는 아이들의 얼굴에, 생일과 명절에 딸이 보내오는 사진에 적혀 있다. 딸의 딸이 자란다.”1)

   얼굴이 참 많기도 하지. 사진첩 속의 부드러운 무릎뼈를 가진 너, 길쭉한 머리통을 점차 둥글게 만들던 너, 컬러 사진 속에서 명암으로만 구성된 세계를 보는 너…… 작년 사진만 봐도 전생 같지 않아? 적힌 미래를 읽을 수 없다.
   친구의 딸이 자라고 딸의 딸이 자라는 시간들

   국 데워 먹어라 속이 따뜻해야 무엇이든 한다
   딸들은 새하얀 겨울 무를 투명해지도록 모서리가 다 무너지도록
   푹 끓인 국을 나눠 먹고는
   서로의 입속에 다글다글 들어앉은 이를 다 헤아렸지요
   이가 없어도 먹겠어
   부드러운 무보다 더 부드러운 살과 반투명한 피부
   그 안에 작고 단단한 돌 같이 박혀 있는 것들을

   속눈썹이 다 얼어버리는 날씨에
   열어둔 수도꼭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딸의 딸들로
   딸의 친구로 친구의 딸로
   언니로 동생으로

   여기에 앉아서
   겨울나무에 남은 열매 위로 눈이 쌓이고
   녹고
   얼었던 열매가 다시 말라가는 동안 찾아오는 새들을
   조그맣다는 면에서는 모두 닮은 모두 다른 새들을
   작고 단단한 부리가 날씨보다 빠르게 열매의 형태를 해체하는 것을
   몇 세기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지요

   언니야
   새들의 잠은 얼마나 깊을까
   새들은 한쪽 눈만 감고 반쪽짜리 잠이 든대
   잠이 쏟아지도록 먹이고 싶어
   불을 꺼주고 이불을 덮어주고
   실컷 자고 난 새들에게 다시 따뜻한 것을 먹이고
   무엇으로 만든 이불이어야 저 작은 몸에도 무겁지 않을까

   새가 날아가고
   가볍게 튕겨 오르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우리가 보는 생명력
   너무 인간적인 생각

   아름다움의 이유가 그것의 약점이기도 하지요2)

   사람의 얼굴은 우리가 만져본 어떤 물성과도 달라서
   자연을 접고 펼치고
   뒤집으며 형식을 지운다

   어떤 이름을 짓는다 해도 모두 실패한 이름이 될 거야
   너희는 매번 이름을 넘치며 제멋대로 자랄 테지
   속한 자리의 표면을 깨뜨리면서

   공간이 파괴된다면 지평선이, 또 수평선이 생기겠지요

   오늘도 날이 춥다 옷 단단히 입고 나가라
   네 세계의 변화가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은 말고
   계절에 맞는 옷차림을 준비하고 문을 여는 것처럼
   문을 모두 열어두는 것처럼
   추위가 맺힌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는 것처럼

   미래는 적혀있다 시간에 갇힌 얼굴들
   맞댄 얼굴들
   미래는 없다는 확신 속에서도

   기록 바깥에서 늙어가는 얼굴들의 기댄 이마 사이로
   흘러오는 미래
   얼굴에 주어진 자연을 다시 뒤집으면서





   영원에서 나가기



   우리도 다 늙었나 봐
   꽃 사진을 찍으며 함께 웃던 친구들아
   우리는 열심히 웃느라 늙는 일도 깜빡한 것 같았네

   그런데 다 늙는다는 건 뭐지?
   우리가 자라온 시간
   늙어갈 시간보다 오래된 꽃나무 밑에서
   우리는 여전히 질문으로만 답할 수 있는 질문을 잔뜩 가진 사람들

   친구의 품에 안긴 작은 사람의 이마에서 꽃잎은 얼마나 거대해지는지
   손바닥에 떨어진 꽃잎은 얼마나 작고
   얼마나 쉽게
   두 손가락 사이에서 형태를 잃어버리게 되는지

   나는 발이 없는 것만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우리와 세계가 서로 단단하게 묶인 레이어라면
   같은 비율로 커지다 먼저 멈출 수밖에 없다면
   우리의 작은 손으로는 나뭇잎 하나 망가뜨리기 어려울 텐데
   우리는 참 쉽게 깨질 텐데

   매일 2만 마리의 새들이 유리 벽을 통과하려다 죽는대
   자그마한 발을 가진 작은 새들
   다 큰 새들은
   다 자란 다음에도 새롭게 거대해지는 풍경이 의아해

   이 세계는 형태가 결정하는 물질로 이루어진 레이어다3)

   도시의 유리 벽들은
   끝없이 자라는 나무에게도
   두 발로 나뭇가지를 움켜쥔 새들에게도 당혹스러운 속도로 자란다

   기다리는 시간 앞에서 숫자는 얼마나 길게 늘어지는지
   동전을 세는 손안에서 숫자는 얼마나 작아지는지
   살아 있었던 것들을 세는 마음 앞에서 숫자는 얼마나 거대해지는지

   유리문은 가볍게 회전하고 우리는 문 안으로 미끄러진다
   우리는 너무 많은 영화를 너무 많은 스크린을 봤다
   프레임 안으로 쉽게 미끄러진 다음
   화면 바깥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강화 유리는 안전하게 깨지는 유리이기도 하지
   설탕 결정처럼 우수수 쏟아지는 유리 파편 아래의 새를 본다
   가느다란 뼈와 연약한 살 부드러운 깃털
   굳어가는 새는 새의 형태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창문 안쪽에 서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커다란 나무를 보고 있다
   과일과 설탕을 2:1의 비율로 끓여 걸쭉한 상태의 액체로 만드는 것은 과일을 보존하는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집이 불에 타오를 때만 비로소 건축 구조를 목격할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4)

   열매들이 나무에 매달린 채로 썩어갈 때
   우리는 꽃의 모양을 본다

김지연

없는 언니를, 자매인 우리를 종종 상상해왔다. 어린 우리가 같은 이불을 덮고 바라볼 천장. 늙은 우리가 나란히 안락의자에 앉아 바라볼 창문. 언니이고 동생인 내 친구들에게.

2021/04/27
41호

1
킷 리드 외 27인, 「상어섬의 어머니들」, 『야자나무 도적』, 신해경 옮김, 아작, 2020.
2
하지만 ‘생명력’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바로 그것의 약점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영원의 건축』, 한진영 옮김, 안그라픽스, 2013.
3
물질이 형태를 결정하고 동시에 거의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물체들이(예를 들면 돌덩어리, 물 한 방울,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자연적인 것들) 있는 반면 다른 것들은(항아리, 곡괭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들) 형태가 물질을 결정하는 듯이 보인다. 조르조 아감벤, 『내용 없는 인간』, 윤병언 옮김, 자음과모음, 2017.
4
조르조 아감벤, 같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