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곁



   튀어오를 빵이 없어도
   기대할 무언가가
   있다면 좋아

   아무런 옷깃도 선박도
   흔들지 않는 바람이
   막 칠한 벽을 말린다면
   그걸로 좋아

   잘게 오려진 색종이들이
   머리맡을 뒤덮으며
   소음을 잠재운다면
   그것만으로 좋아

   애증이 무색무취의 꽃잎들로
   흩어지는 장면 속에서
   속삭임으로만 축복을 나누다

   연기와 굉음이 뒤섞인 밤에
   깨어나도 괜찮아

   주어져 있는 것은
   다만 남겨진 것
   원래부터 그곳에 있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약속한 시간이
   정해진 장소와
   달라졌다고 해도

   겹겹의 조각을 포개며
   종이를 모으던 손과
   어긋나게 되었다고 해도

   유리잔 안의 물이
   진동을 감지하듯
   수평만을 유지하게 되니까
   일어나지 않는 일들만이
   밤새도록 그것을
   들여다보게 하니까

   바닥에 귀 기울이는 어디에서든
   잠들어도 좋아

   얕은 숨으로 퍼지는 물결을
   받아 적어도 좋아

   들리지 않을 때까지
   말하는 일이
   속삭임이라면

   나눌 수 없을 때까지
   나누는 일이
   꽃잎들을 물들인다면





   조물



   밝아지는 불빛이 공간을 하얗게 비춘다면 처음이라는 말이 모르는 목소리로 새어나오겠지

   떠오르고 가라앉는 빛의 운동이 어둠을 부르면 바닥이 공간 안에서 솟아오르겠지

   시작과 끝을 알리려는 시간이 바람으로 흐르며 땅을 푸르게 길러낸다면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들을 따라 가장 평평한 곳에 벽이 세워지겠지 밤과 낮이 구분될 수 있도록

   해는 출몰하고 계절은 순환하고 달아나던 그림자가 불빛을 찾아 떠돌아다닌다면

   비좁고 어두운 방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더 많은 벽이 벽으로 이어지겠지

   볕이 들어와 머물도록 창문이 생기고 비의 윤곽이 지붕의 모양을 계획한다면

   정신이 마주하는 것은 하나의 집 그 공간에 알맞은 한 사람만이 문을 열고 그곳에 들어서겠지

   인기척도 등불도 없이 밤마다 자신의 그림자에 깃들어 살게 되겠지

신두호

물을 자주 목격했다. 유리잔 안에, 창밖의 허공에, 움푹 팬 땅 위에 물이 있었다. 평평해지는 것을 떠올렸고 그것과 함께 살려고 했다. 그 자리에 생겨나는 무언가를 지켜보면서.

2018/07/31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