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존 스몰츠 / 이사
존 스몰츠
매일 사물을 따라 그리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존 스몰츠 버스로 이동하고 팔백 미터 이상 절대 걷지 않는다 직업은 일러스트레이터 꽃을 따라 그리고 개를 따라 그리고 자전거를 따라 그린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모두 색이 번져 있고 그건 자기가 가만히 선 채 세상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뻔뻔하게 말하며 노약자석에 앉아 발끝으로 구겨진 콜라 캔을 굴리는데 어쩐지 사람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같은 도시에 사는 존 스몰츠의 어머니는 존 스몰츠의 여동생과 버스 정류장에서 일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사하고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것은 존 스몰츠를 분노케 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존 스몰츠는 서쪽 해변에서 해를 보며 자신의 치와와와 아침을 맞았는데 그게 자신의 삶과 무슨 상관일까 생각하며 버스를 타고 매일 집에 돌아왔다 그는 해돋이 그림을 그렸는데 태양의 외곽선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서서 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는 여동생과 어머니에게 서쪽 해변에서도 해가 보인다고 다만, 조금 늦게 뜰 뿐이라고 말하며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믿지 않았다 존 스몰츠는 진정성 있는 눈동자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가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하며 오렌지 껍질을 깎았다 존 스몰츠는 에코시스템조각을 전공했는데 전공에 에코가 들어갔다고 해서 그가 오렌지 껍질을 반듯하게 벗기는 것은 아니었다
자전거 그림을 완성한 존 스몰츠는 발코니에서 일본산 파꽃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는데 꽃의 모양이 너무도 보송보송해서 따라 그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파꽃에는 항상 꿀벌이 앉아있어 그리는 동안 특별히 긴장을 해야만 했다 존 스몰츠의 치와와는 파꽃을 노렸다 존 스몰츠는 발코니에 치와와가 나오는 것을 금지했지만 치와와는 쉽게 그의 영역에 침범하곤 했다 존 스몰츠는 발코니에서 오후의 햇살을 맞으며 빨갛게 익어갔는데 그가 에코시스템조각을 전공했기에 자연물을 좋아할지 모른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존 스몰츠의 치와와는 파꽃을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존 스몰츠는 망연자실해서 파꽃의 잔해를 바라보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앞집 발코니를 바라보았다 한 남자가 웃통을 벗은 채 선글라스를 끼고 흰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있었다 꿀벌이 그 남자에게로 날아갔고 그 남자는 잠이 들었는지 가만히 있었다 존 스몰츠는 연필을 든 채 남자를 계속 바라보았지만 남자를 그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존 스몰츠는 곧 그 남자가 자신에게 욕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존 스몰츠는 욕하는 남자에게 함께 커피를 마시지 않겠냐고, 최근에 로스팅한 맛있는 원두가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남자를 더욱더 화나게 만들 뿐이었다 존 스몰츠는 발코니는 당신의 공간만은 아니라고 나도 눈을 뜨고 내 공간에 있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치와와가 짖어대는 통에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남자에게 들리지 않았다
파꽃을 따라 그리기 실패한 존 스몰츠는 아마존에서 『세밀화로 보는 식물의 세계』를 주문했다 존 스몰츠는 그림을 보고 그림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그림의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여 그는 외곽선이 분명하고 반듯한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다 존 스몰츠는 그림을 따라 그리는 사람으로 유명해졌고 그림을 본 출판사에서 그에게 그림을 의뢰했다 이제 존 스몰츠는 『세밀화로 보는 심해어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존 스몰츠는 심해어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구글에서 심해어의 그림과 사진을 찾아서 따라 그리는데 그 그림들이 너무도 선명하여 많은 사람이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에코시스템조각을 전공하였기에 이런 그림을 그리기 아주 적당하다는 생각을 하며 서쪽 해변에서 해를 보며 매일 아침을 맞고 있다
이사
종로 4가 창신육회에서 거인을 만났다 우연히 합석한 우리는 식탁 위에서 끓고 있는 소고기뭇국 다섯 그릇을 미동도 없이 마셨다 떠들썩한 무리에 섞여 나는 거인의 어깨에 매달려 방으로 돌아왔다
방은 거인 하나가 들어가기에 충분히 작았다 적당한 일조량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방에서 거인은 짐을 싸는 것을 도와준다고 했다 거인은 느리게 나무 상자에 접시를 담았다 나는 거인의 엉덩이 골을 바라보았는데 그곳에는 붉은 털이 촘촘하게 나 있었다
거인은 어디로 짐을 옮겨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거인의 물로 거인의 수맥으로 짐을 옮기고 있었다 집 앞, 쌓여가는 짐 앞에서 우리는 쉽게 무력해졌다 기압이 높은 날씨에는 거인의 활동이 느려진다고 한다
입에 파이프 물고 거인은 돌계단에 앉아있었다 방은 더이상 나의 방이 아니다 내일은 오늘보다도 더 맑을 것이라고 했다
박다래
방 안에는 공이 굴러가고 있다. 공은 정사각형 방의 꼭짓점에서 꼭짓점으로 정갈하게 움직인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공을 보고 나는 어느 오후의 잠과, 잠이 오던 순간을 떠올린다.
2019/06/25
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