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질서 안에서



   아침에 눈을 뜨고 침대를 벗어나

   초록색 줄무늬 양말을 함께 신고 온 순발력이나 우연 따위 같은

   공통점이 여럿 우리에게 있었다 영국식 공원에서 가로등을

   깨뜨리며 놀아도 서로를 겨냥한 적 없는 규칙, 그런 우정이.

   말없이 빌려온 책의 구절이 머리에 자꾸 맴돌았다 “나지막한 공포가

   촘촘히 살갗에 박혀있어, 애니. 불길이 번져나간 속도보다 감각이

   더디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어?” 속도와 감각, 공포, 속도, 감정,

   감정을 믿을 수 있어 애니? 너는 나를 지목하곤 했다 그 눈으로

   그 손으로 약속이나 문제처럼 절대로 풀 수 없는 것들을

   쉽게 지워질 블랙보드 위에 옮겨 적으면서 우리는 그것을 베끼고

   번갈아가며 읽었다 목가적으로 우리는 다른 박공지붕 아래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하나로 묶인 영원과 작용의 그림자였다

   돌아오는 길엔 불 꺼진 가로등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고 주머니에

   그대로 남아 있는 돌멩이를 꽉 움켜쥐었다 확인하지 않아도

   손바닥은 하얀색이었고 우리는 그대로를 믿었다

   소실되지 못한 집의 반쪽에서는 매운 연기가 났다





   지난 시즌



   케이크를 조각내거나 뭉그러뜨리고 가장자리로 몰아세우니

   모두가 가여워진다 아아 이게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야

   시를 좋아한 적은 없지만 시는 쓸 수 있다는 게

   여기서 너가 내가 주어를 바꾸어가며 포크로 뒤적거리거나

   찍어내리고 이른 계절의 워터멜론을 가지런히 쟁반에 담아

   오늘을 지키거나 편지 따위를 주고받을 수도 있지 우리는 말이야

   이따금 중국 암호에 골몰해 이를 함축적이고 경제적인

   클리셰로 여기거나 타고난 불행이라 치부하지 않으면서

   끈적거리는 손을 핥아내고 노트를 펼치고 볼펜으로

   전통적인 전율과 전율의 그림자에 대해 나열할 수도 있다

   절반 이상을 버리고 다시 물을 채워가는 것,

   높고 긴 창문, 상징 없는 휘장,

   자국만 음료와 터널,

   머그잔 앞의 노동자들

   여전히 환절기마다 입을 막고 콜록거리는 건

   마이너스의 마이너스까지 오지 않았다는

   마이너스 요인

한상은

쓰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까워지고 있다 생각했는데,
너무 오래 손을 놓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2018/11/27
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