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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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을 녹여 동상을 만들겠다. 그런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비전도 비전은 비전이지요.
비전은 퓨쳐와 뭐가 다릅니까?
비전이 퓨쳐보다 더 이미지화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미지라, 비전과 뷰의 어원이 같습니까?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동전을 녹여도 됩니까?
불법이죠.
불법을 굳이 왜?
동전으로 동상을 만들기 위해.
이백만 원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십 원, 오십 원, 백 원, 오백 원 각각 같은 비율로.
십 원짜리가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왜 동전이었어야 했습니까?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누구의 동상을 만들 계획이었다고 하던가요?
누가의 동상이든 동전을 녹이는 것은 불법입니다.
동전은 어떻게 녹이고요?
어떻게든 녹일 계획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인 남자 셋이 그 동전이 담겨 있던 포대자루를 날랐다고 하더군요.
포대자루는 총 세 자루였다고.
한 자루가 180kg이 넘었다고.
아아.
그녀의 바람대로 동전 이백만 원 어치를 녹여 동상 만들기에 성공했다면, 그녀가 행복해졌을까요?
글쎄요. 그거 만든다고 뭐 얼마나 행복해졌겠습니까.
아니, 혹시 행복해졌을지도 모르지요.
한복 전시회를 열겠다. 그런 비전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 그런 비전도 비전이지요.
한복 40여 벌을 모았다더군요. 무당의 무복까지요.
그렇지요. 무복도 한복이지요.
무복이라. 그 여자 귀신이 붙은 건 아닙니까?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뭇가지, 낙엽, 흙도 모았다고 하더군요.
흙은 어떻게 모읍니까?
편지 봉투에 보관했더군요. 집 안 구석구석에 편지 봉투가 처박혀있었다더군요.
그것들은 어떤 비전과 연관된 것인지?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더군요.
흙이니 낙엽 모은다고 시간이 붙잡아진다던가요? 허허.
실제로 시간을 붙잡지는 못해도, 붙잡고 있는 기분이, 붙잡았다, 그런 착각이 들었을 수는 있었겠지요.
그 여자는 착각이 컸던 모양입니다. 허허.
그 여자는 뭘 그리 붙잡고, 뭘 그리 모으는.
그래서 그 동전들, 그 한복들, 그 나뭇가지, 낙엽, 흙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여자의 아들이 어느 날 찾아와 처리했다더군요.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높은 언덕으로 이사를 갔다더군요.
아, 언덕으로 되돌아갔군요.
노인 둘은 어떤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 여자의 취미일지, 어떤 여자의 병일지.
나는 노인 둘 옆 테이블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언덕, 둘 중 한 노인이 그 여자가 이사를 간 언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 테이블이 흔들렸다. 앉아 있는 의자 역시 잔잔하게 흔들렸다.
지진이다. 지진이야. 멀리에서 누군가 짧게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더 이상 안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언제나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노인 둘은 안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다. 그즈음 A가 내 앞에 나타났다.
너도 느꼈나?
나도 느꼈다.
내 앞에 나타난 A는 인사 대신 지진에 대해 말했다.
여기 더 있을 것인가?
아니 지금 나가도 좋다.
A와 나는 곧장 자리를 옮기기로.
카페를 나서기 전 옆 테이블 노인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 노인은 나를 보고 웃었던 것인지, 허공을 보고 웃었던 것인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A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더러워.
왜?
노인네가 나를 보고 씩 웃잖아.
무슨 노인네?
카페에 있던 노인네.
카페에 노인네가 어디에?
내 옆 테이블에.
네 옆 테이블은 비어있었다. A는 나의 옆자리가 비어있었다고 말했다.
그럴 리가.
카페 2층엔 나 혼자뿐이었다고, A는 말했다.
그럴 리가.
노인 둘과 A, 지진의 느낌, 짧은 비명과 언덕으로 이사 간 여자가 등장하는 꿈이었다.
개복수술은 처음인데요.
처음이라 그렇지 별것 아니에요.
정말 별거 아니에요. 자고 일어나면 다 끝이 나 있을 거예요.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돼요.
간호사가 내 손을 잡아주었던가.
자고 일어나자 정말 끝이 나 있었고,
수고했어. A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무슨 말인가를 A에게 해주고 싶었는데, 누워있는 나는 온몸이 덜덜 떨려 무슨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네가 꿈에 나왔었어. 그런 이야기를 A에게 해주고 싶었지만, 아랫니 윗니가 딱딱 부딪칠 뿐이었다.
고생했어. 잘 해냈어. A가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고.
열린 병실 문 뒤 복도에 노인 둘이 서성였다.
서성이는 노인 둘. 두 노인은 걷는 것도 같았고 멈춰있는 것도 같았다.
저 노인들은 언젠가 보았던 노인들이다.
노인 둘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여자, 그 비전, 그 욕심,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하자면 다 이해할 수 있겠지요.
아,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 여자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가 안 돼요.
나는 노인 둘의 목소리를 들으며, A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잠들었던가.
내가 잠들고 깨는 사이에도 두 노인은 여전히 거기, 복도에서 어른거렸다.
저 노인들은 걷고 있는 것인가. 멈춰 있는 것인가.
수고했어. A는 자꾸 내 손을 주물렀다.
복도에 저 노인 둘, 저들이 내 꿈에 나왔었다. 그런 말을 A에게 하고 싶었던 것일까. 온몸이 덜덜 떨리고 열이 올랐다.
물수건으로 겨드랑이, 이마를 좀 닦아주세요. 간호사는 내 몸 위에서 빈손을 놀려 내 몸을 닦는 시범을 보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A는 대답했다.
A는 그렇게 했다.
A는 차갑고 축축한 물수건으로 나를 닦기 시작했다.
차갑고 축축하고 노골적인 시선. 열린 병실 문밖으로, 한 노인이 키득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 허공을 보고 있는 것인지.
A와 노인 둘, 마취와 잠이 등장하는 꿈이었다.
가장 생생했던 것은 물수건이었고 잠에서 깨어나자 창밖이 너무 밝았다.
커튼은 없다.
창문은 있다.
창문만 있다.
몇 가지 생각을 정리했다.
빛은 흩어지고 있다.
빛은 흩어지고만 있다.
커튼 없고, 지진 없고, 마취 없다. 꿈이었고,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한 뒤에 몇 가지 생각을 더 정리했다.
창문 밖에 어른거리는 저 그림자는 누구의 것인가.
누구도 아니다.
A는 누구인가?
A는 내가 아는 두 사람, 혹은 세 사람.
가장 A라 할 수 있는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가 꿈에 나왔어.
내가?
어 너.
A로 짐작되는 지인과 나는 어두워질 때쯤 공원 벤치에서 만났다.
벤치에 앉아 맥주 한 캔씩 마셨다. 땅콩과 김을 먹기도 했고.
어수선한 꿈자리였다. 나는 말했다.
너무 많이 자서 그런 것이다. A라 짐작되는 사람이 말했다.
아니. 아니야. 나는 아니라 말했다.
낮에 잠을 줄여. A라 짐작되는 사람이 말했고.
비전과 퓨쳐, 뷰, 영단어가 대화에서 오가기도 했다.
조만간 다시 만나.
A라 짐작되는 누군가가 먼저 벤치에서 일어섰다.
맥주 한 캔만 더 사다 주고 가. 나는 누군가의 등에 대고 말했다.
얼마 뒤 누군가 내게 맥주 4캔을 건네었다.
이제 진짜 간다.
먼저 떠나는 누군가의 등을 올려다보면서 캔 맥주 뚜껑을 땄다.
누군가 완전히 떠난 뒤에,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천천히 맥주를 마셨다.
아주 어두워지자 공원의 구조물들이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벤치에서 잠이 들었던가.
포기하고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택시기사가 말했다.
국수나 먹고 들어갈까 하다가. 택시기사 말했고.
저기 있는 국숫집 가봤어요? 택시기사가 물었다.
저 골목에 국숫집이 있던가요? 내가 기사에게 되물었다.
있어요. 국수도 팔고 밥도 팔고. 기사는 국숫집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국수보다 밥이 비싸.
국숫집인데 국수보다도 밥이 비싸.
잔치국수 삼천오백 원 야채비빔밥 팔천 원.
먹을 만해.
기사는 그럭저럭 국숫집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편의점이 하나, 둘 스쳤다. 편의점 옆에 편의점이 생기는 현상은 새로운 현상이다. 새롭다. 새로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택시기사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믿었던 사람들은 다 날 배신했어. 배신하지 않은 인간들은 죽어 나갔지. 때 돼서 죽은 것이니 탓할 일은 아니지. 그런데 돌이켜 생각하면 나보다 먼저 죽는 것도 배신이야. 제일 큰 배신.
택시기사는 자기가 아는 몇몇 배신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김씨 성을 가진 배신자에 대하여.
내 집이 이리 멀었던가.
그깟 공원 벤치로 향하기 위해 이리도 멀리 나왔던가.
택시 요금은 기본료를 넘어서고 있었다.
다 왔어요. 이제 다 왔어. 기사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며 나는 택시 요금을 치렀다.
기사가 거스름돈을 헤아리는 동안, 나는 기사 얼굴을 얼핏 쳐다보았다.
기사는 노인으로 보이는 노인이었다.
꿈에 나왔던 그 노인과 비슷한 노인인가. 같은 노인인가.
기사는 내게 거스름돈 사백 원을 건네며 씩 웃어 보였다. 모두 박혀 있는 이. 틀니이려나.
아무래도 기사님이 제 꿈에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을 기사에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대로변에 내렸다. 대로변의 편의점 앞에서.
곧장 편의점으로 들어가 맥주와 껌을 샀다.
껌을 씹으며 맥주를 마시며. 집에 도착하기 전에 골목을 두어 바퀴 걸으며.
담벼락과 담벼락 사이를 걸었다. 찬바람이 내 얼굴로 불어왔다.
나는 바람을 등지기 위해 잠깐 뒤돌아 멈춰섰다.
고개를 숙였을 때 길바닥에 흩뿌려진 쌀알이 보였다.
곧 새벽이 될 것이었다.
나는 다시 앞을 보고 걸었고, 그러자 바람이 얼굴로 불어왔고 바람과 함께 어떤 이미지, 뷰, 퓨쳐, 비전이 나타났다. 그리고 사라졌다.
걷던 나는 작은 조각을 밟기도 했다.
내가 밟은 것은 마른 나무 조각과 낙엽이었다.
낙엽이 흔한 계절이던가.
먼 공중, 어딘가에서 새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집에 도착해 이불을 펼치자 편지 봉투가 툭 떨어졌다. 열어보았을 때 그 안에 어김없이 흙이 들어있었다.
뭘 그리 붙잡는. 뭘 그리 모으는. 여자가 이사를 갔다던 언덕.
바람에 창이 흔들렸다. 아직까지 찬바람이 부는 걸 보면 계절도 이제 허구가 된 것이다.
동전을 녹여 동상을 만들겠다. 그런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네. 압니다.
한복 전시회도 열 계획이었다고 하더군요.
네. 들었습니다.
나무 조각, 낙엽, 흙을 모으고요.
네.
노인이 내게 말하면 내가 대답했다.
그것들 말고도, 시계, 담배, 우표, 볼트, 경첩, 목화솜, 색색의 원단을 모았고, 비둘기 사체까지 집 안에 보관했다고 하더군요. 그 여자는 집 안에 문손잡이들은 모두 빼고 그 자리에 끈을 달아놓았답니다. 가구들도 마찬가지로 끈을 달아놓았다고 합니다. 어디서 새는 물인지 집 안 모든 바닥이 늘 축축했다고 합니다. 물론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지요. 그 여자가 집안 대부분의 전기선을 독단으로 끊고, 또 독단으로 선과 선을 다시 이었다고 하더군요. 무슨 선이 무슨 선과 이어졌을는지는 아마 그 여자도 정확히 알지 못했을 테지요. 아니, 본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확신 없이 어찌 그리 살겠습니까? 그게 사람이 사는 집이었겠습니까? 젖은 방바닥 위에 솜뭉치들을 깔아놓았다고 합니다. 그 솜뭉치들은 버려진 인형 배에서 꺼낸 것들이라더군요. 그 여자 집 안이 어땠을지 상상이 됩니까?
나는 그 여자의 집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 여자가 입고 있는 것, 그 여자 머리카락 여기저기가 그슬어 있었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태우다가 그리된 모양이겠지요. 그 여자 눈에는 피곤함이, 화가 가득 차 있었다지요.
멀리에서 A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에서 다가오는 A는 내가 아는 누군가와 누군가.
노인은 내 왼쪽 귀에 대고 계속 이야기했다.
그 여자는 엄연한 가해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얼굴을 싹 바꾸고 가련한 표정을 하고 있지요. 자기도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면서 말입니다. 그 여자 아들이 딱할 뿐입니다.
그 여자가 저지른 죄에 대해 노인이 이야기를 시작했고, 테이블이 흔들리고 의자가 흔들렸다.
지진이다. 지진이야. 아득히 비명이 들려왔다.
너도 느꼈나?
이 꿈은 언젠가의 꿈과 너무 많이 비슷해. 내 앞에 바짝 다가온 A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여기 더 있을 것인가?
아니 지금 나가도 좋다.
A와 나는 곧장 자리를 옮기기로.
노인은 나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나를 보고 웃었던 것인지, 허공을 보고 웃었던 것인지.
김엄지
왜 그런 혼돈이 일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부디 계절이 바뀌었기를.
2018/04/24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