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혹은 1983년, 그때 아직 나는 태어나지 않았다. 여인숙이 즐비한 뒷골목, 쓰레기 봉지의 터져나간 부분으로 비둘기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내 친어머니, 그때에는 누군가의 딸이기만 했던 소녀는 골목에서 풍기는 시큼한 냄새에 헛구역질을 하면서 제 또래의 여고생에게서 빼앗은 흰 농구화에 쓰레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튈까 깨금발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소화가 안 돼서 정말 미치겠어. 30분 간격으로 칭얼대는 소녀 때문에 잠을 설친 내 아버지일지 모르는 남자 중의 하나는 약국이나 가보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고, 동이 트자마자 소녀는 여인숙 근처 약국을 찾았다. 소녀는 내가 잉태된 줄도 모르고 훼스탈 두 알을 활명수와 함께 털어넣었다. 그러고도 속이 편치 않자 끼니때마다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소화되지 않았고, 기어이 태어났다. 그리고 곧 공중변소의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몸에 더러운 휴지가 덕지덕지 붙은 채 청소부에게 발견되었을 때, 나는 용케도 살아 있었다. 의사가 궁둥이를 아무리 때려도 눈을 꼭 감은 채로 울지 않았다. 눈물을 아낀 나의 탄생은 다음 날 자 조간신문의 사회면에 기록되었다.
    이것이 엄마가 말해준 내 출생의 전모였다. 아빠가 집을 나간 뒤, 엄마는 밤마다 팔베개를 해주고 동화를 읽듯 옛날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는 한 불량한 소녀의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 소녀의 이야기에 점점 살을 붙였다. 나는 그 이야기가 무서워 눈을 꼭 감고 잠든 체했지만 엄마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빠가 잠시 돌아와 짐을 싸들고 우리 곁을 영영 떠나던 날 엄마의 이야기는 완성되었다.
(「양장 제본서 전기」, 『실수하는 인간』, 20~21쪽)

    정소현의 데뷔 단편 「양장 제본서 전기」(『실수하는 인간』, 문학과지성사, 2012)의 한 대목이다.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출생담치고는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데 사실 이 삽화는 작품의 전체 구도를 놓고 볼 때 있는 그대로 신뢰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은 우선 딸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엄마가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에게 이런 서사가 필요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작품에는 대체로 사실적인 이야기 전개 가운데 일종의 환상적 장치가 몇몇 끼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누구든 소정의 심사 절차를 통과하면 자신이 남기고픈 기억만 도서관의 양장 제본서에 남기고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돕는다는 설정이다. 영지라는 이름의 일인칭 주인공이 일찍이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알코올의존증에다 신경증까지 앓고 있는 엄마 슬하에서 신산하기 이를 데 없는 성장기를 보낸 뒤 끝내 한 권의 양장 제본서로 남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 작품의 서사적 골간이다. 이 모녀의 불행은 일단 아버지가 집을 떠나면서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건설 현장에서 성실히 일하며 딸에게 다정한 편지를 부치곤 했던 아버지가 영구 귀국 후 갑자기 집을 떠나게 된 이유는 나중에 가서야 밝혀진다. 양장 제본서가 되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을 찾아온 영지에게 아버지는 이런 말을 남긴다. “설마 하다가 속는 거다. 내가 바보라서 속은 게 아니야. 내 애를 가졌다고 속이고 결혼까지 한 여자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니?”(31쪽)
    물론 이 아버지란 인물이 전하는 이야기도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저는, 누구예요?”(32쪽)라고 묻는 딸에게 “글쎄 모르겠다.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 엄마나 이모한테 물어보는 게 빠를 거다. 어쨌든 너는 내 핏줄이 아니야.”(같은 쪽)라고 말하는 사람을 믿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영지 자신도 이렇게 의심한다.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그가 꾸며낸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33쪽)
    따라서 부모의 이야기 중 한쪽이 거짓이거나 둘 다 거짓일 수는 있어도 모두가 참이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영지가 이렇게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알리바이 삼아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풀어보려 하는 한은 뜻을 이루게 될 가능성도 희박해진다. 오히려 주인공을 향해 생생하게 육박해오는 진짜 현실은 가령 이렇다. “중학생 때 나는 자주 굶었고, 방학 동안에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는 나를 딱하게 여긴 선생님의 추천으로 장학금을 주는 여자실업고등학교 야간반에 진학했다. 낮에는 남자고등학교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방학 동안에는 갈빗집에서 음식을 날랐다. 남자아이들은 나를 빵순이라고 불렀고 주방 아줌마들은 막내라고 불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변두리 공단 지역에 있는 중소 의류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곳에서 전산 작업과 복사를 하고 커피를 타는 ‘김양’으로 6년을 보냈다. 사흘에 한 번 꼴로 야근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철야를 하며 창고의 재고를 체크했다. 월급만으로 부족할 때가 많았기에 주말에는 예식장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했다.”(16쪽)
    정말 이럴 수도 있을까 싶게 지속되는 주인공의 불행들은 대부분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기인하거나 적어도 그로 인해 증폭된다. 이 불행들은 영지라는 인물이 누군가의 딸이거나 딸이 아니었기 때문에 만들어지기 시작해 ‘빵순이’와 ‘막내’와 ‘김 양’으로 이름만 바뀔 뿐 그가 스스로 양장 제본서가 되어 존재를 삭제하기 전까지 멈춰지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여성인 엄마가 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엄마가 겪고 있는 불행 또한 대체로는 그가 여성이 아니었다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엄마와 아버지 둘 중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에 관계없이―작품이 전개될수록 사실상 그 구분은 불가능하게 되지만―아버지는 그런대로 일상적 평온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엄마가 집이 되어버렸다는 영지의 말을 전해 듣고도 아버지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다. “요즘 같은 세상엔 책상이 되기도 하고, 신발장이 되기도 하고, 이름조차 안 남기고 완전히 사라지는 사람들도 허다한데 그런 것에 비하면 네 엄마는 괜찮은 편 아니냐?”(31쪽)
    엄마가 딸에게 가하는 정신적 학대나 성장한 딸이 병약해진 엄마에게 가하는 복수가 물고 물리는 사이 아버지의 존재는 대부분 공백으로 남겨져 있다. 따라서 아버지를 비난하는 것으로 독해를 마무리 짓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그에 관해 제공된 정보가 너무 적고 읽으면 읽을수록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으로 이들 중 어느 한쪽을 단죄하려 드는 일이 불필요할뿐더러 가능하지도 않게끔 작품이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보다는 이 작품이 진실의 자리를 비워놓음으로써 오히려 여성의 삶을 둘러싼―가령 결혼과 가족, 돌봄, 노동, 계급 등―다차원의 물음들을 가능하게 하고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최근 들어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페미니즘문학의 가까운 전사(前史)로서 손색이 없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여성 주인공의 출생담이나 ‘버림받은 유년’ 모티프를 즐겨 채용하는 정소현의 소설들은 대개 돌봄 노동의 위기와 가족 안에서의 여성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고 있지만 어쩐 일인지 페미니즘적 독해의 대상이 되기보다 정신분석 텍스트로 더 자주 언급되곤 했다. 인용문에서 보듯 작품 안에서 전도의 전도를 거듭하는 ‘가족 로망스’가 우선 눈에 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적 시야를 확보할 때 정소현 소설의 개별적이고 심리학적인 차원은 사회적 맥락과 연결되어 훨씬 더 풍부하게 읽힐 여지가 생긴다. 정체성 정치(“저는, 누구예요?”)의 수준을 슬쩍 비껴가면서 피해, 가해의 이분법을 상회하곤 하는 그의 소설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페미니즘 문학과 관련된 최근 논의들을 일찌감치 선취 또는 능가하는 면모마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 문학이 마치 80년대 말, 90년대 초반에 한창 유행하다 오랜 공백기를 거쳐 최근에 와서야 새삼스럽게 재부상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때에 따라 페미니즘의 눈으로 읽어보려는 비평적 시도가 많고 적었을 수는 있어도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현실의 여러 질곡들이 근본적으로 해소된 적은 없으며 적어도 90년대를 전후한 지난 30년간의 한국문학이 이런 현실에 무감각하지만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쯤 발표된 이 작품 「양장 제본서 전기」 또한 그 뚜렷한 증거들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강경석

87년 이래 최근까지 30년간의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감정구조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문체와 형식, 리듬과 같은 문학작품의 내재적 요소들이 그와 관련해 어떤 사회적 함의를 지니는지를 탐구하고 싶지만 뜻대로 풀리지는 않고 있다. 문학평론가로서 남은 삶도 게으름과의 고독한 사투 이상은 되기 힘들 것으로 조심스레 전망하고 있다.

2018/01/30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