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그는 나에게는 그런 명칭을 가진 사람이었다.
   ‘오빠.’
   그것은 나에게 있어 부조리의 상징 같은 어휘이다.
   그 무리와 부조리에 얽힌 존재가 나다. 1)

   E여고 2학년 열여덟 숙희는 일생일대의 번민에 빠져 있다. 엄마의 재혼과 함께 자신에게 찾아온 운명의 남자 때문이다. 그 남자와 숙희의 공식적인 관계는 오누이. 숙희는 ‘오빠’의 배 다른 동생이다. 이런 상황은 숙희의 “맘속에서 혐오와 공포를 자아낸다.”(109쪽) 사변 후 시골 외갓집에서 생기 없이 지내던 엄마에게 불쑥 찾아온 재혼 상대 무슈 리의 아들 현규에게 숙희는 이토록 단단히 빠져 있다. 현규의 모든 것이 숙희의 관심사다. 첫 만남에서부터 숙희는 눈앞의 현규를 철저하게 ‘스캔’한다. “V넥의 다갈색 스웨터를 입고 그보다 엷은 빛깔의 셔츠 깃을 내보인 그는, 짙은 눈썹과 미간 언저리에 약간 위압적인 느낌을 갖고 있었으나 큰 두 눈은 서늘해 보였고, 날카로움과 동시에 자신(自信)에서 오는 너그러움, 침착함 같은 것을 갖고 있는 듯해 보였다. 전체의 윤곽이 단정하면서도 억세고, 강렬한 성격의 사람일 것 같았다. 다만 턱과 목 언저리의 선이 부드럽고 델리킷하여 보였다.”(111~112쪽) 이게 다가 아니다. 한눈에 키와 어깨 폭까지 완벽히 파악하며 쿨하게 ‘채점’하기까지 한다. “‘흐응, 우선 수재 비슷해 보이기는 하는 걸……’”(112쪽) 이렇게 현규는 첫 대면에서 숙희의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한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대체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이토록 까다롭고 눈 높은 십대 여성에게 ‘불합격’ 통보를 받았을는지 눈에 선하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프레피룩을 즐겨 입는 전도유망한 이 스물두 살의 서울대 물리학과 남학생의 존재감은 숙희의 마음속에서 점차 커져만 간다. 번듯한 외모에 지성을 갖춘 데다가 스포츠에도 처지지 않은 현규가 여고생 마음에 질러버린 불은 걷잡을 수 없다. 현규를 향한 숙희의 열정은 점점 강렬해진다. 숙희에게 현규의 두상(頭狀)은 언젠가부터 아폴로의 그것이다. 그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와 눈빛을 비롯한 일거수일투족이 해독(解讀)의 대상이다. “나는 나의 슬픔과 괴롬과 있는 대로의 지혜를 일 점에 응집시켜 이 순간 그의 눈 속을 응시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알고 싶은 것이다. 그의 눈 속에 과연 내가 무엇으로 비치는가? 하루해와 하룻밤 사이, 바위를 씻는 파도 소리같이, 가슴에 와 부딪치고 또 부딪고 하던 이 한 가지 상념에 나는 일순 전신을 불살라본다.”(102쪽) 이뿐만이 아니다. 현규에 대한 숙희의 사랑은 소설의 도입에서부터 이미 궁극에 달아 그가 풍기는 비누 냄새만으로 그의 상태와 존재를 감지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쯤 되면 중증이다. 아무도 그녀를 말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희는 망설인다. 현규를 향한 자신의 욕망이 현실화되었을 때 일어날 파국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규에 대한 숙희의 감정은 고통과 번민이고 동시에 그것은 그녀가 느끼는 사랑의 무게이다. 아폴로의 후광과 비누 냄새가 숙희의 몸과 마음을 끝 간 데 없이 고무시키는 상황에서, 숙희는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서울 외곽 S촌의 저택에서 딸과 여동생이라는 사회적 가장무도회를 아슬아슬하게 지속해나간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현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주변 환경은 숙희의 고군분투를 도와주기는커녕 느슨해져만 간다. 의붓아버지 무슈 리는 가장의 권위나 위계를 내세우지 않은 채 숙희가 물질적 풍요와 여유 속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을 종횡하는 걸 금지하지 않는다. 그는 숙희 모녀의 든든한 울타리로서 남편과 아버지의 역할에 충실할 따름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툭하면 외국으로 출장을 떠나 자주 집을 비운다. 언제 터질지 모를 현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숙희의 욕망에 부채질을 해대는 격이다. 의붓아버지 무슈 리는 숙희에게 있어서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는 상징적 대타자-아버지가 아니다. 그저 엄마 없인 비참해질 따름일 ‘사람 좋고 불쌍한 (의붓) 아버지’에 불과하다. 그녀는 생각한다. “‘우리 엄마가 그의 곁에 와준 것은 얼마다 다행한 일이었을까!’”(115쪽) 숙희에게 있어서 무슈 리는 사변 전후에 종적을 감춘 친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저 ‘엄마의 남편’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엄마는 부재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숙희의 욕망을 금지하는 상징적 타자로 인식될 만큼 의미가 크다. 엄마는 상징계적 억압의 최후 보루이다. 현규에 대한 숙희의 감정이 억압되어야 하는 까닭은 현규가 자신의 의붓아버지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엄마의 의붓아들이기 때문이다. 숙희에게 있어서 절대로 튀어나와선 안 되는 궁극적인 금기의 한마디가 “엄마의 아들을 사랑하고 있어요.”(123쪽)인 이유이다. 그러나 엄마마저 무슈 리를 따라 외국에 나간다고 선언하고 숙희는 현규와 S촌 저택에 홀로 남게 될 상황에 처한다. 이런 상황에서 숙희를 짝사랑하는 친구 지우의 러브레터를 우연히 발견한 현규는 애써 참아오던 숙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숙희는 현규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기까지 한다. 숙희의 욕망을 금지하는 상징적 타자들의 자리가 급속하게 위축되어 가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놓이고만 것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욕망이 곧장 실현될 수도 있는 소설 말미의 결정적인 상황에서, 숙희는 근처의 젊은 느티나무를 껴안는 다소 엉뚱한 도착(倒錯)을 수행한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이 만들어낸 ‘오빠’와의 부조리하게 얽힌 관계를 파기하지 않고 욕망을 지속할 수 있음에 행복해한다.
   물질적인 풍요와 여유 속에서 생성된 욕망의 대상을 대타자의 존재감 상실과 함께 불안하게 향유해야 하는 숙희의 딜레마는 이전과는 뭔가 다른, 전후(戰後) 십대(teenager)의 출현과 맥을 같이 한다. 파시즘과의 전쟁이 완료된 이후 보편타당한 인류 공통의 가치 부재와 물질적 풍요의 낙차 속에서, 각 지역은 기성의 과거를 부인(disavowal)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자하는 미래 전망의 형상으로 각 지역의 십대를 전면에 내세운다. 미국의 틴에이저를 시작으로 1950년대 중후반 한국의 ‘얄개’ 일본의 하이틴(ハイ·テイ?ン)이 문화현상으로 나타난 건 우연이 아니다. 2) 숙희는 ‘얄개’를 기점으로 한국에 포착된 새로운 세대적 감수성에 부여된 성차(性差)이다.
   숙희는 상징계적 억압을 찢고 나오는 대신 ‘오빠’와의 도착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현재의 금지와 억압을 향유하는 길을 선택한다. 이러한 숙희의 엉뚱한 선택은 한국에서 십대를 보낸 대다수의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상징계적 억압과 금지를 사회적 기대지평 속에서 향유하며 전개해온 특수한 물질문화적 멘탈리티의 기원과 맞닿아 있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와 함께 「젊은 느티나무」를 대표하는 시그니처 문장인 “편지를 거기 둔 것은 나 읽으라는 친절인가?”(127쪽)가 한국 여성향 동인소설의 가장 유명한 클리셰 문장 중 하나가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십대 여성에게 보편적으로 가해지는 사회적인 억압 속에서 나타난 도착적인 물질문화 현상들에 대해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 시기를 떠나보낸 여성들에게 ‘오빠’를 비롯한, 욕망의 대상에 대한 결코 누그러지지 않을 열정의 기억들은 어떤 식이든지 간에 그들의 인생과 가치관에 녹아들어가 있을 것이다.
   자신을 억압하는 상징적 금제를 폐기할 수도 있는 순간에 엉뚱한 선택으로 그 가능성을 지연하여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도모하는 숙희의 선택은 미래를 염두에 둔 채로 욕망 충족을 지연하는, 십대 여성들이 만들어낸 도착적인 물질문화 현상의 정치적 무의식과 연관된다. 이는 오늘날 한국사회 여성(성)의 문화적 위치(cultural location)를 이해하기 위한 흥미로운 단초이다.

윤재민

짧은 분량에 제법 묵직한 주제인지라 부담이 적지 않았지만 거절이란 있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2018/10/30
11호

1
강신재, 「젊은 느티나무」, 『강신재 소설선: 젊은 느티나무』, 문학과지성사, 2007, 108쪽; 이하 본문에서 「젊은 느티나무」에 대한 인용은 쪽수만을 표기한다.
2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윤재민, 「얄개의 탄생 혹은 냉전문화 텍스트를 구성하는 동아시아 후기식민지적 역사성에 대한 문화분석: 조흔파의 1950년대 초중반 소설 및 번역서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연구』 제 57집,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18, 207~208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