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희영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난 네가 글 쓰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희영은 웃으려다 실패한 표정으로 당신을 봤다.
   네 재능을 살리는 쪽으로 사회운동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잘 모르겠어……
   희영은 거기까지 말하고 안경을 고쳐 썼다.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 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내게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희영은 열어놓은 창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불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희영은 거기까지 말하고 당신을 부드럽게 바라봤다.
   정윤 언니가 그랬지. 나는 이 문제로 글을 쓸 수 없다고. 어쩌면 그 말이 맞았는지도 몰라. 가끔씩 언니들의 마음이 너무 가깝게 다가와서 내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정윤 언니의 말을 생각해.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모른다고. 착각하지 말자고.
   그 집에서 한밤을 자고 집으로 가는 길에 당신은 희영의 여린 얼굴을 떠올렸다. 그건 사랑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외로운 사랑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1)


   최은영의 근작 「몫」은 대학의 교지 편집부에서 활동했던 90년대 중후반 학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같은 해 단둘이 교지 편집부에 신입 회원으로 가입해 대학 시절을 거의 함께 보내다시피 한 희영과 해진, 그리고 그녀들의 한 학년 선배인 정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대학 졸업 후 기지촌 활동가의 삶을 선택했던 희영이 병으로 죽고 난 이후의 어느 날, 해진과 정윤이 학교 캠퍼스에서 우연히 조우하는 장면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언닌 그대로다” “너도 그래”(99쪽)라는 말을 멋쩍게 주고받는 그녀들은 이 우연한 만남과 더불어 과거의 어떤 장면들을 각각 환기하게 될까.
   2인칭 ‘당신’으로 호명되는 해진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대학 시절의 희영에 대한 해진의 회고이다. 이제는 죽고 없는 친구이기에 그녀에 대한 회상이 어느 정도 미화된 기억임을 감안하더라도, 그 시절의 그녀, 그러니까 이십대 초반의 희영은 어느 누가 보기에도 특별히 반짝거리는 존재였다. 편집회의와 정세 토론, 사회과학 서적 세미나 등으로 이어지는 편집부의 활동 속에서 언제나 머뭇거림 없이 자신의 의견을 또렷하게 말하고 쓸 줄 알았던 희영은 해진에게 동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날카롭고 유려”(102쪽)하며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개성”(102쪽)이 드러나던 희영의 글들을 접하며, 해진은 “차마 질투조차 하지 못한 채로, 영원히 희영과 같은 글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을 느”(102쪽)끼곤 했다. 여러 모로 희영과 서로 닮아 있던 선배 정윤 역시 희영에 대한 넘치는 호감과 애정을 철저히 숨기지 못해 상대적으로 해진을 외롭게 하기도 했다. 희영이 써온 긴 글을 처음 읽었던 날의 충격을 회상하는 부분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압도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은 아직도 그날 밤을 기억한다. 희영이 써온 긴 글을 처음으로 읽고 들었던 순간의 충격을. 그곳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차갑게 언 발의 감각을 느끼며, 그녀의 글을 읽고 있던 스물에서 스물하나가 되어가던 당신의 모습을 기억한다.
   희영이 자신이 써온 글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편집실은 고요했다. 글이 끝났는데도 편집실의 공기를 채운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마 편집실 안의 열 명 모두 알고 있었으리라고 지금의 당신은 생각한다. 희영에게는 타고난 관찰력, 자기 생각을 끝까지 끌어가는 용기,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지력이 있었다.
   희영이 지녔던 장점들의 상당수는 노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몇 가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한 깊은 수준의 공감을 했고, 상처의 조건과 가능성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2)


   희영의 글은, 뛰어난 관찰력과 옳고 그름에 대한 명확한 판단력, 자신의 판단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용기와 이 모든 것들을 뒷받침해주는 지적 능력까지 갖춘 완벽한 글이었다. 그 글이 읽히던 시간 발끝에서 느껴지던 감각과 그 공간 속 공기의 흐름마저 생생히 기억될 정도로 희영의 글이 해진에게 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윤리적으로 사려 깊고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논리 전개에는 전혀 빈틈이 없는 완벽한 글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질투를 넘어선 일종의 쾌감 같은 것을 해진은 그 순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나에게도 물론 이 같은 식의 독서 체험이 없지 않다. 아니, 불행하게도 꽤 많다. “정말로 글을 써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쓸 줄 모르는 당신만 남아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던 날들이 있었다.”(106쪽)라는 해진의 고백이 꼭 내 얘기처럼 읽히기도 했다.
   희영은 이 같은 남다른 능력을 자신의 ‘몫’으로 여기고 살 수도 있었겠지만, 해진의 말처럼 글쓰기 재능을 살리는 쪽으로 사회운동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대학 졸업 후 글 쓰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해진이 기자가 되어 사회부, 문화부, 정치부로 이동하며 글을 쓰고 있을 때, 희영은 기지촌의 활동가로, 식품회사 총무과 직원으로 오랫동안 일을 하다 자신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을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122쪽) “불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122쪽)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고 희영은 언젠가 해진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최은영이 그려내는 희영은 그녀의 이른 죽음이라는 설정과 더불어 여러모로 신화화되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희영과 같은 삶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를 충격에 빠뜨릴 만큼의 흠잡을 데 없는 글을 써내는 능력을 타고나지도 못했으며,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거절하고 자신이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결단력과 용기를 지니지도 못한 우리는, 그저 자기 합리화와 세상 탓을 반복하며 어느 정도는 위선적으로, 대체로는 무력하게 살아갈 뿐이다. 기지촌 여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뤄보겠다는 희영에게 “같은 여자랍시고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117쪽)라며 인신 공격적 말을 감정적으로 내뱉었던 정윤도, 언제나 완벽한 희영의 글과 말이,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행동으로 옮기려는 그녀의 태도가 조금은 버거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희영은 해진과 정윤에게 동경과 질투의 대상이자, 어느 정도 피하고 싶은 존재이기도 했다. 희영을 통해 그녀들은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은 자에 대한 ‘살아남은 자’들의 질투와 수치를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 최은영의 「몫」은 후일담 서사의 전형이 된다.

*

   물론, 「몫」은 노골적으로 여성주의적인 소설이다. 90년대 중후반의 대학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이미 잊힌 그 시절의 여러 사건들을 재소환한다. 90년대 초에 일어난 미군의 기지촌 여성 살해 사건과 서울대 교수의 조교 성희롱 사건을 비롯하여 96년 이대 학생들을 상대로 고대 남학생들이 벌인 집단 폭행 사건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사건들을 다루는 가운데 민족주의에 억압당한 여성주의의 문제,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계급성의 충돌 등, 여성주의에 관한, 진부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논점들이 환기된다. 여성문제에 관해 별다른 관심을 갖지 못했던 해진이 정윤과 희영을 거울삼아 의식화되는 과정도 익숙한 여성 서사의 흐름을 따른다. 그러나 이 소설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읽어낼 때 우리가 좀더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젊은 여성 인물들에게서 보이는 어떤 공통된 ‘태도’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엄격한 ‘자기 검열’의 자세 같은 것.
   활동가의 삶을 선택했다가 식품회사 총무과의 직원으로 글쓰기와 무관한 삶을 살았던 희영이나, 신문사의 기자가 되어 고통 속에서 많은 글을 써냈던 해진이나, (심지어 자신의 학업을 포기하고 남편의 유학길에 따라나섰던 정윤까지) 그녀들의 삶 중 어떤 것이 더 값진 것이었다고 누구도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처음 글쓰기를 같이 시작한 희영과 해진이 이처럼 서로 다른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은 어쩌면 같은 이유 때문인지 모른다. 희영의 재능 앞에서 언제나 절망감을 느껴온 해진은 물론이거니와, 희영조차도 자신의 재능에 대해 “한 번도 확신한 적이 없었다”(109~110쪽)는 점이 그것이다.
   쓰려고 하는 글 속의 여성들과는 “죽었다 깨어나도”(123쪽) 같은 처지가 될 수 없다는 정윤의 공격적인 말에 응답하기 위해 희영은 활동가의 삶을 선택했을지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읽고 쓰는 일’의 위선을 참을 수 없어 그녀는 결국 ‘읽고 쓰는 일’을 포기했을 것이다. 반면 해진은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제대로 쓰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을 일”(119쪽)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십 대 초반의 빛나던 그녀들이 이후의 삶을 어떤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냈을지,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그녀들의 ‘안간힘’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이 같은 철저한 자기 검열의 태도가 꼭 여성적인 것이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영이 삶 쪽으로, 해진이 글쓰기 쪽으로 치열한 자기 검열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그녀들이 여성에게 절대 관대하지 않은 세상 속에 외롭게 놓여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글 쓰는 일이 또다른 자아를 가능하게 하고 오히려 그것을 더 인정해주는 그런 상황이 대체로 남성들에게 더 잦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고 싶다. 윤리적인 내용의 글이 글쓴이의 윤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윤리적인 글이 글쓴이의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면죄부로 기능하기도 하는 상황이 남성들에게 더 흔한 것 같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억측이고 망상일까. “불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들”(122쪽)을 그렇게 살도록 용인해주는 세상이, 이제껏 여성보다는 남성의 편이었다는 점이 크게 잘못된 지적은 아닐 것이다. 가까운 문학사를 되짚어보아도 많은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세상을 걱정하는 글을 쓰며 주변을 기만한 수많은 사례들을.
   여성의 문제에 대해 분노하거나 절망할 때 왜 우리는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민감한 자기 검열자가 되어 그 절망과 분노를 조절할 필요를 느껴야 하는 것인지, 각자의 위치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다양한 차별과 억압에 시달려왔다는 사실이 분명함에도 왜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언제나 망설여야 하는 것인지, 그러니까 사회적 약자라고 주장하는 것조차도 철저한 자기 검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 결국 자기 확신에 이르지 못하는 소설 속 여성 인물들을 보며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96학번인 나와 동갑내기였을 그 시절의 희영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의 관찰력과 지력, 그리고 공감 능력이 빚어낸 완벽한 글이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그리고 해진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으로 확장될 필요는 절대 없다고. 그러니까 언제나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살아온 우리들은 스스로의 빛남을 충분히 알아챌 필요가 있다고. 그 빛남을 불필요한 자학으로 퇴색시키지 말자고. 어느 곳에서 어떤 거대한 장벽에 부딪쳐 울고 싶은 심정이 돼있더라도 지은 죄 없이 ‘벌 받는 듯’한 심정은 되지 말자고. 희영과 해진처럼 96년도의 겨울에 스물에서 스물하나가 되어갔던 그때의 나에게도, 외부의 시선에 필요 이상으로 주눅 들어 매사에 줄곧 주저하게 되던 그 이후의 나에게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있는 힘껏 무언가를 견뎌내고 있을 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말해보고 싶다. 우리가 애써온 그만큼 우리는 충분히 빛나는 존재들이라고.


조연정

정직하게 쓰고싶다.

2018/10/30
11호

1
최은영, 「몫」, 『몫』, 미메시스, 2018, 122~123쪽; 이하 본문에서 「몫」에 대한 인용은 쪽수만을 표기한다.
2
같은 책, 105~1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