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드문드문 찾아왔다. 마치 유정의 마지막 일기에서 바통 터치를 한 것처럼, 선우는 계속 편집장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현실에서 편집장을 볼 때는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느낌도 들지 않았다. 방어기제였다. 감각이 스스로를 불에 지져 없애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긴 것 같았다.
   꿈에서는 달랐다. 모든 것이 아주 구체적으로 보이고 생생하게 들렸다. 만져졌고 느껴졌다. 얼굴이 뜨거웠고 맥이 빠르게 뛰었고 머릿속은 얼음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손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목이 말랐다. 꿈속에서, 선우는 가끔 소리를 질렀다.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말투를 썼다. 욕설을 내뱉고 테이블을 꽝 내리치고 말리려고 다가온 누군지 모를 남자와 멱살잡이를 하기도 했다.
   꿈이 거듭될수록 선우는 조금씩 더 올바르고 용기 있고 타협하지 않는 인간으로 변해갔다. 정확히 말하면 그 이상이었다. 유정의 블로그는 선우가 어떻게 편집장에게서 사과를 받아낼지 모색만 하는 데서 멈췄지만, 꿈에서 선우는 사과를 받아냈다. 편집장의 사과문은 길고 두서가 없었다. 공개 사과문을 회사 SNS에 게시한 그는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났다.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유정에게 합의금을 지불했다.
   언제부턴가 유정도 꿈에 나오기 시작했다. 오래전과 똑같이 건강하고 눈치 없이 발랄한 모습으로, 선우의 팔을 꼭 붙잡고 서서 웃고 있었다. 꿈속의 선우는 썰어낸 지 얼마 안 된 오이처럼 하얗고 새파랗게 살아 있었다. 물들기 전에, 시큼해지기 전에, 익거나 상해버리기 전에, 피클 단지의 뚜껑을 비틀어 열고 밖으로 뛰어나온 것 같았다.

(「피클」, 《Axt》 2017년 9 ·10월호, 147쪽)



   어떻게 해도 만들어내지 못한 첫 문장을 기다리며, 시작도 끝도 없이 알 수 없는 중간 어디쯤에 덩그러니 놓일 글을 시작한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한국소설의 한 장면을 ‘캡처’해야 한다면. 그 질문을 떠올리자마자 윤이형 소설의 한 대목이 되어야 한다고 마음으로 정해두고 있었다. 답답하고 막막한 질문들 앞에서 이 시대 작가들의 문학적 고민이 깊어지고 있지만 소설로서 그 질문들이 온전히 다루어질 수 있는지 일말의 의구심이 없지 않았다. 윤이형의 「피클」(《Axt》 2017년 9 ·10월호)은 그런 의구심을 가볍게 밀어내고 성큼 전진하는 소설이다.
    윤이형은 삶 자체로 육박해오는 페미니즘 이슈를 문학적으로 탐색하면서 소설의 길을 반걸음씩 내딛는 중이다. 「피클」에서는 성폭력 사건을 다룬 담론들이 사건 바깥인 일상에서 어떤 질문들과 만나고 있는지 탐색한다. 그 질문들에 대한 소설적 답안을 만들어간다. 「5월 이야기」(2016), 「작은 마음 동호회」(2017)를 거쳐 「피클」에 이른 작가의 고민의 깊이가 미덥고, 「피클」을 지나 가닿을 어딘가가 기대된다.
    그런데 막상 「피클」에 대해 뭔가를 쓰려고 하자 첫 문장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봉착한 난관은 (여성으로서 사람으로서) 비평하는 나 자신이었다. ‘왜 「피클」인가’라는 질문이 당연한 수순처럼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이끌었지만, 알다시피 우리 시대에 그건 비평을 시작하기 위한 이들 모두가 통과해야 할 공통 문항 같은 것이다. 난관이랄 것도 없다. 그보다는 문학과 그 바깥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며 그것은 문학에 대한 비판적 읽기와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요령 있게 정리할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삶의 텍스트화와 재현 같은 말로는 부족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갖가지 폭력이 공적인 문제로 다루어질 수 없는 현실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갖가지 폭력을 공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하게 하는가. 그 현실을 배제한 채로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왜 「피클」인가가 「피클」만으로 논의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지만, 이 당연한 사실을 굳이 언급해야 한다는 기이한 부담이 나를 움켜쥐고 있었다. 문학과 현실의 거리나 문학의 현실 개입을 둘러싼 논의를 돌파하지 않고는 첫 문장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떨쳐지지 않았다.
    문학과 그 바깥은 한없이 멀어지기도 닿을 듯 밀착하기도 한다. 그 거리는 의식적이고 인지적이기보다는 우연적이고 유동적으로 만들어진다. 변동하는 거리가 그려내는 그래프는 자체로 이미 문학과 그 바깥에 관한 많은 의미를 전한다. 촘촘한 논리들을 좀 생략하고 말해보자면, 따라서, 문학과 그 바깥의 거리가 문학의 의미나 가치를 결정할 수는 없다. 이 당연한 말은 대개는 삭제해도 무방하다. 혹시라도 뭔가가 덧붙어야 한다면 거리가 아니라 거리들이 만들어내는 그래프에 관해서일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불필요한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아야 한다는 강박을 떨쳐내지 못한다.
    조바심에 쫓기게 되는 것은, 왜 「피클」인가에 대한 논의인 이 글이 거리들의 그래프가 아니라 거리 문제로만 환원되어버릴 수 있는 위험이 몹시 위협적으로 느껴져서이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그런 위협적 상황을 짚어내는 게 비평이기도 하다. 그 자명한 사실을 모를 리 있는가. 상시적이거나 반복적일 그 상황 자체를 첫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는 사정에 대한 알리바이로 내세우려는 것도 아니다. 조바심의 밑바닥을 들여다보자면, 몸에 익은 비평적 감각만으로는 「피클」의 반걸음의 의미를 뭉개버리거나 디테일을 제거한 패턴만을 발라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웅크리고 있다.
    새로운 인식에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페미니즘과 문학은 경계가 뚜렷한 서로 다른 영역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문학의 하위 범주가 아니며, 그 반대도 아니다. 페미니즘과 문학의 관계가 어떠하든, 한국소설이 문학사의 새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 글이 불러와 늘어놓는 단어들과 문장들은 「피클」을 문학이라는 ‘커다란 원’이 아니라 문학과 페미니즘을 겹쳐두는 동안 한없이 좁아진 원의 일부 그러니까 ‘좁은 부채꼴’ 조각 위에 올려놓고 마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를 피하기 어렵게 한다.
    「피클」은 성폭력 사건이나 피해자·가해자 담론, 피해자의 연대라거나 트라우마의 치유와 같은 상투어구로 한정되지 않는다. 여성이 공적 존재가 된다는 것, 여성에 대한 폭력이 공적인 문제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젠더와 나이, 지위와 세대라는 하위 조건들의 교차 속에서 다채롭게 짚는다. 「피클」의 문학적 풍요로움에는 여성의 사회적 삶의 실상, 침묵을 강요하는 힘이나 억눌렸던 분노와 환멸의 분출, 혹은 목소리를 찾은 피해자의 말의 질감과 온도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런 말 속에서 남는 건 「피클」 바깥의 패턴뿐이지 않은가라는 자괴감에 빠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문학 바깥의 문제를 그것 그대로 다루는 것이라면, 아니 결국 그렇게만 읽어내게 된다면, 그것은 문학인가 문학 바깥인가.



   친분이 깊다고는 하기 어려운 회사 후배가 퇴사 이후 회사에서 가장 연배 높은 여자 선배에게 상사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다면, 여자 선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폭력에 관한 한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고방식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니 우선 피해자의 편에 서야 하는 것일까. 피해자의 ‘못 믿을 말들’을 의심하며 ‘객관적 진실’의 판단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간결하고 단순하게 정리될 수는 없는 사람의 일임을 알고 정해진 윤리적 잣대로 빈틈없는 판단이 가능하다고는 확신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피클」의 선우처럼 외면하고 싶은 마음과 회피할 수 없는 마음 사이를 오가게 되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삶에 몰려 세상의 ‘문제’ 따위에는 눈감고 지내고 더없이 푸근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룹 속에서도 속내를 쉽게 털어놓지는 못하게 된 좌절과 환멸의 경험이 있지만, 한편에 부당한 폭력에 분노하고 길을 찾지 못한 울분에 공감하는 면모들이 있게 마련이다. ‘매너맨’으로 불리는 편집장이 악의 화신이 아니듯, 편집장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후배 유정 역시 파괴된 순수 자체가 아니다. 성폭력은 사랑과 폭력 사이에 놓여 있기 마련이고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우리의 상상과는 다른 모습이기 십상이다. 폭력 문제란 애매하고 모호하다는 말이 아니다. 여성 문제가 공적 지평 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은 여성 문제를 ‘머뭇거림과 체온과 사각지대’를 품고 있는 “인간의 일”(136쪽)로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성폭력 사건을 “인간의 일”로 다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도 깊고, 말 안 옮기는”(146쪽) 존재로 남아 좋은 게 좋은 채로 여성 혹은 약자에게 가해지는 침묵의 강요에 동참하고 강요된 침묵을 내면화하는 삶에서 피해자의 편에 서서 불의에 저항하는 삶으로 이동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은 어떻게 공적 문제가 될 수 있으며, 그런 전환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유정 혹은 선우는 ‘못 믿을 말들’의 존재라는 자기-금기를 깨뜨리고 성폭력 사건을 공적으로 다룰 힘을 어떻게 마련하는가.
    「피클」의 미덕은 그 힘이 누군가의 일방적인 의지나 자발적인 각성이 아니라 삶의 표층에서는 감지되지 않는 ‘뭔가’의 전염을 통해 증폭되고 있음을 짚는다는 데 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언어 기능으로는 회수되지 않는 ‘뭔가’, 들끓고 흘러넘치며 전해지고 섞이며 증폭되는 그것이 어떻게 망각되고 은폐되어 억눌렸던 ‘뭔가’까지 불러오며, 연이어 어떤 행위로까지 이어지게 되는가를 말한다는 데 있다.
    유정이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일기들, 선우가 편집장을 두고 반복해서 꾸는 꿈들, 유정이 ‘선우 선배’를 대상으로 꾸며내는 원망의 상상들. 거짓말, 꿈, 상상은 반복되면서 좀더 분명한 이야기가 되고 뚜렷한 해결책이 되며, 침묵을 깨뜨릴 힘이 된다. 현실에서 내뱉을 수 없는 원망, 분노로 터뜨려야 했던 울분, “어떻게도 할 수 없어 눌러버렸던 그 옛날의 선연한 기억”(151쪽), 그 유동하는 것들이 증폭을 거듭해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마련해야 했던 장벽들을 뚫고 스스로를 가두는 방어기제를 허물며 범람한다. 그 과정에서 유정과 선우는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결되며 서로의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의 힘이 된다.
    「피클」의 탁월성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폭력에 관한 문제를 전염되고 증폭되는 상상의 힘을 통해 다룬 데 있다. 따지자면 「피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저 꿈을 반복하던 선우가 유정에게 늦은 답메일을 보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개별 사건의 법적 해결 이상의 변화를 「피클」을 통해 꿈꾸게 된다. ‘못 믿을 말들’의 힘에 거대한 기대를 품게 된다.
    「피클」은 스스로에게도 여전히 ‘못 믿을 말들’이 어떻게 목소리가 되고 이야기가 되어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힘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 전한다. 현실 문제에 무력한 듯 보일지라도, 일기와 꿈, 거짓말, “마치 소설을 쓰는 것처럼”(149쪽) 반복되는 상상을 통해 그 상상을 반복하는 소설이 마련한 의미를 소설 자체로서 증명한다. 상상의 힘이 증폭되는 과정 깊숙이 우리를 끌어당긴다.



   20년쯤 흐른 뒤 윤이형의 소설 「피클」을 다시 읽으며 격세지감의 회한에 젖어들 수 있을까. 소설 「피클」이 풍속사의 한 면을 채우는 시대의 기록으로 새겨질 수 있을까. 거대한 피클 단지 같은 세상에서 상하지 않고도 살아남을 방도를 찾는 일 따위는 낡고 촌스러운 추억거리처럼 여길 수 있을까. 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은 꼭 100년 전인 1918년 《여자계》에 실린 소설 「경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부귀와 영화를 약속해주는 마지막 혼처 자리를 거부하고 피클 단지 바깥으로 나서는 일의 두려움에 깊이 몸서리치면서도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깊은 번민 끝에서 경희는 ‘개가 개이고 꽃이 꽃이며 닭이 닭인 것처럼’ 자신이 사람임을, 여자이기에 앞서 사람임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서 확인한다. ‘금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경희의 선언은 지금 이곳에서도 여전한 울림을 갖는다. 지금 이곳의 아이러니하고도 서글픈 풍경이라 할, 경희의 인간 선언이 갖는 현재진행형의 의미를, 소설 「피클」을 두고 쌓은 불필요한 문장들의 더미라 할, 이 글의 곤혹스러움을 위해 짚어둔다.

소영현

문학을 한다. 삶, 사람, 사회를 읽고 쓴다.

2017/12/26
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