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택시기사다. 처음에 나는 어머니가 택시기사를 직업으로 택한 이유가 서울 곳곳을 누비며 나를 감시하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또 어느 날은 어머니가 택시를 모는 진짜 이유는 아버지보다 빨리 달리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나는 달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란히 질주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십수 년의 원망을 안고 엑쎌러레이터를 세게 밟는 어머니의 표정과 거처를 들킨 아버지의 표정이 내 머리 위를 수선스럽게 뛰어다닌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붙잡는 대신, 아버지보다 더 빨리 달리는 것만으로 복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택시운전을 힘들어했다. 박봉, 여자 기사에 대한 불신, 취객의 희롱. 그래도 나는 어머니에게 곧잘 돈을 달라고 졸랐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새끼가 속도 깊고 예의까지 발라버리면 어머니가 더 쓸쓸해질 것만 같아서였다. 어머니 역시 미안함에 내게 돈을 더 준다거나 하는 일 따윈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달라는 만큼만 돈을 줬지만, “벌면 다, 새끼 밑구멍으로 들어가 내가 맨날 씨발, 씨발, 하면서 돈번다”는 생색도 잊지 않았다.
(「달려라, 아비」, 『달려라, 아비』, 19~20쪽)

    택시기사 어머니가 서울 곳곳을 누비며 질주한다. 지금까지 줄곧, 아마 오늘도, 여자 기사는 박봉, 불신, 희롱에 시달리지 않은 날이 없겠으나, 어머니는 언제나 액셀을 힘차게 밟는다. 아버지보다 빠르게 달려나간다. 아버지를 붙잡는 대신, 더 빨리 달리는 것으로, 지난 세월의 원망을 지우려는 것만 같다. ‘원망’이라고? 어디서 뭐하고 사는지 모를, 곁에 없는 아버지에 대한?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사는 여자의 쓸쓸한 인생에 대한? 글쎄…… 그도 그렇겠지만, 더 큰 원망은 따로 있지 않을까? 어머니 눈엔 ‘바보’인 아버지가 남들 눈엔 ‘양반’으로 보이는 세상에 대한, 그런 세상에서 박봉, 불신, 희롱을 견디는 ‘어려운 상황’에 대한 원망이, 어쩌면 더 크지 않았을까? 아버지보다 더 빨리 달리는 것으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복수라면, 아버지에게가 아니라 어머니를 응원하지 않는 세상에게 하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달려라, 아비』, 창비, 2005)가 아버지 없는 가족의 쾌활하고 따뜻한 이야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 이야기가 특별히 사랑받은 까닭이 ‘아버지 없는’ 가족의 쾌활하고 따뜻한 이야기라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이 나왔을 당시 그렇게 생각했던 대로, 「달려라, 아비」는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로 무능해진 가부장-남성의 위상 변화에 의한 근대적 가족 모델의 붕괴를 알리는 이야기일 수 있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며 나타난 건강한 모성가족에서 결핍을 극복하고 성장한 소녀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 없이 성장한 화자(‘나’)가 기록한 이 가족의 이야기에서, 가부장-남성이 몰락했다는 사실이나 그로 인한 ‘결핍(극복)’으로 이들이 상처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가부장-남성으로서 ‘아버지’의 위상 변화는 명백해 보였다. 이전까지 한국 소설사에서 ‘아버지’란 대개, 가족을 넘는 대의를 위해 집이 아닌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거나,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도 집이 아닌 어딘가에서 돈을 벌고 있거나, 아니면 가족을 팽개치고 집이 아닌 어딘가에서 놀고 있거나, 아무튼 집에 없는 사람이었고, 다만 집에는 ‘아버지의 자리’가 있을 뿐이 아니었던가. 오랫동안 그 자리를 보전해준 건 오히려 어머니였고, 그래서 ‘모성(motherhood)’이란 ‘아버지됨’을 대신하여 이른바 ‘가족 로망스’를 간신히 유지시켜온 어머니에게로 옮겨진 ‘아버지의 자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달려라, 아비」의 아버지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는 “전쟁터에 나간 것도, 다른 아내를 원한 것도, 어느 나라 사막에 송유관을 묻으러 간 것도 아니라”, 다만 달리기를 하러 집을 나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 노릇을 대신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자리까지 떠맡은 어미노릇(mothering)을 한다.
   사실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없는 게 아니다. 다만 그는 달리고 있는데, 알다시피 어머니가 해 준 얘기로 인해 생겨난 ‘나’의 상상 속에서 그렇다. 그건 내가 아버지를 증오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단 한 번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였을 때, 내가 기원한 그 순간에, 그는 “세상에 온 힘을 다해 뛴 적이 있었”고, 오직 그 공(功)으로 ‘아버지’는 내게 없는 사람이 아니라 달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 아버지의 뜀박질이 유일한 아버지의 실재였기에 아버지는 내 상상 속에서나마 달리고 있다, 그저 달릴 수는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게 다 어머니의 ‘이야기’로 인해, 그로부터 시작된 나의 상상 속에서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어머니는 나에게 ‘이야기’라는 ‘상징화’의 질서를 주었고, 그 안에서만 아버지(라는 실재)는 겨우 없음을 모면한 것이다.
   이른바 ‘가족 로망스’에서 아버지(의 자리)의 역할이란 아이를 상징의 세계로 진입시키는 일, ‘말’과 ‘법’과 ‘관습’을 익히게 하여 성장시키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달려라, 아비」의 화자 ‘나’/소녀를 성장시킨 것은 오로지 어머니다. 아버지를 대신해서가 아니라 어머니로서 한 일로, 어머니의 ‘모성’이 아니라 ‘어미 노릇’을 통해서, ‘나’는 성장한다. 모성이 아닌 어미 노릇이란, 엄부(嚴父)의 자리에 서느라 자기의 여성성은 죄다 잃거나 버린 억척어멈의 계율과는 전혀 다르다(외할아버지도 알아본 어머니의 매력은 씩씩한 여성성이다!). 말하자면, ‘나’는 말/이야기를, 법/칼을, 관습/예의를 오직 어머니에게서 배웠는데, 어머니에게 배운 말, 법, 관습은, 통상 아버지에게 배우는 그것들과는 같지 않아서, ‘나’가 배운 말은 농담이고, 법은 재치이며, 관습은 배려였던 것이다. 결코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한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충분하다. “어머니는 좋은 어미다. 어머니는 좋은 여자다. 어머니는 좋은 칼이다. 어머니는 좋은 말[言]이다.”1)
   따라서 ‘나’는, 통상 ‘아버지(의 자리)’에 동일시하는 상징화를 통한 성장과는 다른 상징화, 다른 성장을 한 셈이다. 그러니 ‘나’는 조금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어머니的'으로(아버지的이 아니라!) 상징화된 ‘나’는 조금 특별한 이야기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그런 것인데, 보통 누군가에 대해 생각할 때는 그가 남긴 몇 가지 사실을 바탕으로 그에 대해 보다 잘 알려고 할 테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것은 몇몇 ‘사실’들뿐이다. 사실만큼 그 사람을 잘 말해주는 것이 없다면, 아버지는 분명 나쁜 사람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버지는 내가 아직 모르는 사람이다.” ‘사실’을 보자면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맞다. 그런데 ‘나’는 공연히 “그게 아니라면”을 붙여보고는, 사실이 그를 말해준다는 통념과 달리 제 식으로 상상하고 말해본다. ‘나’는 ‘사실’이 아니라 ‘상상’을 이야기하는 화자다.
   “상상하건대” 아버지는 미안해하는 사람, 차라리 나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할 만큼 착하지도 않은 사람, 나쁘면서 불쌍하기까지 한 진짜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확실한 건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나’에게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모르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없는’ 게 아니라 아버지를 ‘모른다’는 것, 이것이 핵심 아닐까? 모르는 사람, 있으나 없고 없으나 있는 불가해한 존재,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대상, 언제까지나 잘 알 수도 대면할 수도 없는 상대, 그는 말하자면 ‘타자(他者)’다. 무능한 사람, 나쁜 사람임을 알아서 그를 잊거나 용서했다면 아버지(의 자리)는 없으나 있어야 했던 것으로 ‘나’에게 동일화될 테지만, 모르는 채로 그를 언제까지나 달리게 함으로써 ‘나’는 아버지를 “죽여버리”지 않고 나에게 동일화되지 않은 어딘가에 있게 둔다.
   잘 알 수 없고, 대면할 수 없고, 정확히 말해질 수 없고, 환상처럼만 잡힐락말락하는 그런 존재가 ‘아버지’라는 사실. 이 점을 조금 더 특별하게 여겨봐도 좋겠다.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만 겨우 존재하다 끝내 비가시화된 채 영원히 불가해한 대상으로 사라지는 존재들, 그들은 대개 거리를 맨발로 헤매는 낯선 여인이거나, 다락방에 갇힌 이웃집 딸이거나, 아니면 아버지에게 매맞고 집 나간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늘 집 밖에 있어도 집안에는 꼭 그의 자리가 있(어야 했)던 ‘아버지’가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것, 없거나 있거나 언제나 상징화의 기제로 우리를 성장시킨다고 믿게 했던 아버지가 끝까지 자기 목소리 한번 내지 못했다는 것, 이 점이 바로 이전의 평범한(?) ‘아비 부재 서사’와 구별되는 「달려라, 아비」의 성숙한(!) 변모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 소설의 쾌활하고 신선하고 영리한 매력이 발산된 지점이 여기서 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아버지를 통해 상징화될 수 없는 '결핍'을 어머니가 알려준 상상의 힘으로 ‘극복’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에게는 상징화가 어머니를 통해 행해졌기에, 나의 ‘상상’의 이야기는 ‘사실’의 이야기보다 오히려 상징적이기 때문이다. ‘나’의 상상은 상징화되지 못하는 결핍의 왜곡이나 역전이 아니라 변화된 상징화이거나 새로 나타난 상징화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다르게 상징화된 화자의 이야기는, 「달려라, 아비」가 앞쪽에 놓인 2000년대 소설의 한 스타일을 예고했다고 말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현실의 아버지, 질서, 관습, 이념 등에 동일화되는 상상이 아니라 나의 상상 속에서 아버지, 질서, 관습, 이념 등의 현실이 그림자처럼만 아른거리던 이야기들. ‘사실’을 가지고 앎을 구성하기보다 ‘상상’을 통해 모름을 드러내려 했던, 그때 그 시절의 많은 상상-현실들 말이다.

백지은

읽고 씁니다. 배우기 위해 가르칩니다.
십년 전엔 왜 페미니즘을 고민하지 않았는지 고민 중이에요.

2018/02/27
3호

1
김애란, 「칼자국」,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1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