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가 정말 합격하는 건 아닐까.
   가슴속에 불편한 무게가 들어차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을 옹졸한 사내자식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이제 와선 별로 소용이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는 아내가 좀더 오래 면허 따위를 갖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 걸까. 아내가 말한 것처럼 오직 차 때문에?
   ―나 오늘 주행까지 다 패스해버리면 어떻게 할래?
   짓궂게 반짝이던 아내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는 그 눈빛을 모르는 체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경우 표정 연기를 수월히 하는 것은 언제나 아내 쪽이었다. 아내는 자신의 진지한 요구를 짓궂은 눈빛 속에 감출 줄도 알았다. 언제부터 아내가 그렇게 능수능란한 여자가 되어 있었던 것일까.


   「양수리 가는 길」은 삼십대 중반에 들어선 부부의 이야기를 남편의 입장에서 들려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해서 이제 대리라는 직함을 달고 있지만 그럴 듯한 삶의 목표나 도전의식 같은 것을 상실한 채 그럭저럭 일상을 유지하는 데에만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은 언제나 여지없이 ‘양수리’다. 대학 시절 충동적으로 떠나게 된 여행길에서 버스를 타고 가며 우연히 마주하게 된 양수리의 물안개는 그의 의식 속에 어떤 미지로 남는다. 양수리는 바닥까지 다 보아버린 것만 같은 인간관계나 끝을 알 것만 같은 지리멸렬한 삶과는 달리 한 꺼풀 벗겨내면 생전 본 적 없는 무엇을―그게 다소 실망스러운 것일지라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곳, 혹은 그런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는 아내에게 자주 양수리에 가자는 말을 하지만 정작 한 번도 그곳을 찾아가보지 못한다. 그곳에 집착하는 그에게 예전 연인과의 추억이라도 있는 곳이냐고 농담처럼 묻는 아내의 눈치를 보는 것도 그렇고, 출장길에 그곳을 지나가면서 동석한 동료에게 다음에 가족사진을 찍으러 다시 와보고 싶다는 말을 해놓고 스스로 내심 놀라는 것도 그렇고 양수리는 그에게 자기도 모르는 자기가 고여 있는 곳처럼 보인다.
   양수리라는 미지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은 또 있다. 이국으로 “3년간의 파견”을 앞두고 그는 그 결정을 아내에게 쉽사리 말하지 못한다. 운전면허 시험장의 뙤약볕 아래에서 시험을 치루는 아내를 기다리며 회사에 반차를 낸 김에 양수리로 드라이브를 하자는 말을 할지 말지 망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 인생뿐만 아니라 부부의 삶에 중차대한 일일 게 뻔한 파견 근무에 대한 이야기를 그는 내내 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떠나지 못하는 자’의 이야기, 혹은 주저함에 관한 이야기라고 달리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홀가분하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 내내 망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두 개의 ‘떠남’을 앞두고 자신의 인생을 반추한다. 한편으로는 열정적이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비겁하게 도망친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는 대학 시절과 그게 어느 정도는 허풍인지 서로가 알아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말을 아내에게 내지를 수 있었던 신혼 시절은 지금의 그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 한낱 부끄러움처럼 보인다. 때문에 그에게 떠남이란 일종의 도피처럼 여겨질지도 모를 일이다. 보장된 것은 없으나 마지막인 양 힘을 내어 회사에서 인정받아 자신과 아내의 안정된 미래를 꿈꿔보겠다는 그의 책임감은 그 자신에 의해서 이도저도 안되는 자의 치졸한 궁여지책으로 치부된다. 그러므로 떠남을 곱씹을수록 그는 스스로 수치심과 자괴감의 구덩이로 더욱 깊이 빠져들고야 마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그의 돌림노래 같은 고민의 가운데에 그의 아내가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떠나지 못하고 망설이는 이유가 꼭 아내에게 있는 것처럼 군다. 가령 먼저 파견 근무를 간 회사 동료 부부의 사례를 떠올리며 자신의 파견이 아내에게 줄 이득을 헤아리는 동시에 그것이 자신의 파견 근무를 찬성하는 이유가 될까봐 미리 염려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자신의 어려운 결정을 매몰차게 거절함으로써 가장의 자존심을 다칠까봐 주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가 계산해 보았듯 아내도 “파견 근무 뒤의 과장 자리”와 “파견 근무 수당” 같은 현실적인 보상들을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할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 와중에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삶의 목표와 실천을 강건하게 가져가는 품위 있는 삶은 물 건너 간 것처럼 여겨지고, 그 원인에 부부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부부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은 꽤 많다. 각 시대별로 부부에 관한 소설을 뽑아 시대상을 대별해볼 수 있을 정도로 부부는 언제나 소설의 중요한 소재가 되어 왔다. 부부라는 관계가 인간의 공존과 사랑이라는 감정처럼 우리 삶의 본질에 닿아 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장난 같지만, 부부(夫婦)라는 호명에는 두 번의 부정[不]이 들어 있다. 부부라는 결속은 그들이 서로의 삶에 전에 ‘없던’ 상대라는 확인이기도 하고, 또한 이 결정은 자신의 삶을 일정 부분 상대의 삶에 귀속시켜 이후 제 존재의 고유함(이름 대신 통상적인 호칭으로 불리며)을 조금은 ‘지우는’ 방식으로 유지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이것이 이 가장 현실적인 관계에 대한 천착과 탐구가 어느 시절에서든 간에 어렵고도 귀한 결실처럼 보이는 이유다.
   명문 여대를 졸업했지만 지금은 모교 앞에 작은 이미테이션 액세서리 가게를 하는, 막차를 놓치면 목숨이 위협을 느낄 법한 총알택시를 타고 가까스로 집에 돌아오는, 자정에 들어와서도 집안일을 해야만 하는…… 그는 아내가 그런 처지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파견 근무를 겉으로는 말려도 속으로는 반색할지도 모른다고 지레 짐작하면서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고 제 삶을 스스로 아내―표정이 보일 만큼―가까이에 둔다. 쓰인 지 20년도 더 된 이 소설의 중핵을 이루는 이 같은 그의 짐작은 이제와 읽어보아도 지극히 시대착오적인 동시에 너무나 현실적이다. 삼십대 중반,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있는 맞벌이 부부의 처지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반은 맞고 반은 틀릴 수밖에 없는, 한쪽에서만 쓰인 부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아내의 입장에서 다시 쓰일 때 완성된다. 사실 아내의 입장은 남편의 입장으로 적힌 이 소설의 여백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아내의 목소리는 남편의 진술 속에 지워진 채로 이미 들어 있기도 하고, 그의 진술로 인해 쓰일 자리가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소설은 남편의 목소리를 성실히 탐문하고 그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런 사연과 연유로 인해 한 줄도 제대로 적히지 못하는 아내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서 쓰였을지도 모른다. 증언할 수 없다기보단 구구절절 증언하기 어려운 그녀의 삶, 아내의 생활, 시어머니와 남편의 기준과 처지에 제 인생을 맞추어 꾸려야 했던 그 시대 여성의 이야기를 이 같은 방식으로밖에는 쓸 수 없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지 않으면서 힘주어 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첫 장면이 한 번에 몇 단계의 시험을 통과하여 면허를 따는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의 이중고(하지 못한 말을 속에 품고 있기도 하거니와 뙤약볕에 덥고 불편한 옷을 입고 있는)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무엇을 견디고 있었을까. 아니, 무엇을 견디지 못해 자신의 물음과 아내의 물음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을까. 소설은 이처럼 끝내 만나지 못하는 두 줄기의 이야기를 하나로 매만져가는 도중에 있기를 자처한다. 어느 도중에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바로 우리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거듭 짐작하고자 하나 끝내 속단하지 않는, 그리하여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 말이다.


김나영

좋은 책 한 권을 쓰고,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꿈을 꿉니다.

2019/02/26
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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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의 「양수리 가는 길」은 《현대문학》 455호(1992년 11월)에 처음 발표되었고, 이후 『칼날과 사랑』(창비, 1993) 수록되었다. 위의 인용은 『20세기 한국소설 44』, 창비, 2006, 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