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의 「몬순」(《문학과사회》 2016년 가을호, 181~192쪽; 이하 본문에서 「몬순」에 대한 인용은 쪽수만을 표기한다.)은 첫 문장에서 시작해 첫 문장으로 돌아오는 소설이다. “그녀는 발레리나였다.”(181쪽) 한때 발레리나였던 그녀는 출국하기 전에 속했던 친구들의 무리로 돌아온다. 그녀는 쉬는 날에도 외모 꾸미기 노동에 헌신하는 친구들의 삶을 “현대 여성”(181쪽)이라고 지칭하며, “현대 여성”의 의무인 양 지속되는 다이어트를 거부한다. ‘가짜 고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다이어트는 ‘날씬한 여성’이라는, 지극히 타인의 시선과 판단에 따른 ‘자기 관리’로 통용된다. 그녀의 완벽한 발레 안무를 위한 신체 단련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그들이 “진짜 삶”(182쪽)을 모른다고 단언한다. 선 자리에서 만난 남자에게 발레리나를 그만두었다고 고백하는 순간, 그녀는 수치심을 느낀다. “진짜 삶”을 상실했다는 고백 후 잇따를 동정이나 위로가 그녀의 실패를 명백한 사실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동정하거나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무슨 상관이냐.’고 대답한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간극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그의 대답은 그녀에게 기적의 희미한 전조와 같았다. 굴욕적인 실패자로 살아가야 할 ‘가짜 삶’을 벗어나게 해줄 기적을 믿고 그녀는 사랑이라는 정념에 기꺼이 투신한다. 과연 사랑이 그녀를 ‘가짜 삶’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을까? 맞지 않는 청혼 반지를 교환하러 간 그녀가 그의 실수를 대신 변명해줄 때, 백화점 직원은 ‘남자들이 다 그렇다.’고 말한다.
   그녀는 직원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반지가 조금 크더라도 그녀가 기꺼이 청혼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단지 그가 반지 사이즈를 모를 수밖에 없는 무관심한 보통 남자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며 체념한 게 아니었다. ‘위대한 사랑’에서나 가능하다고 믿는 무한한 관용 덕분이었다. ‘위대한 사랑’은 실수했다고 해서 강등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상승할 뿐이다.
   사회적 관계는 연속적인 인정 투쟁을 견뎌내야 하나, 사랑이라는 관계는 그런 투쟁 없이도 서로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정 투쟁은 인정을 이끌어낼 합당한 근거의 기준을 소속 사회에 두지만, 사랑은 지극히 우연적인 발생이기 때문에 근거가 있더라도 지극히 개인적이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다. 결혼은 사랑이라는 우연한 기적을 현실로 만드는 혁명적인 시도이자 ‘위대한 사랑’을 선언하는 행위다. 그러나 현대 한국사회에서 ‘위대한 사랑’이라는 신화는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기존 가부장제의 토대를 묵인하고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자진해 희생할 것을 강요한다. 실패는 오직 네 탓 아니면 내 탓이 될 뿐, 새롭지 않은 관계를 새로운 관계인 양 계속 시도하면서 사랑이라는 그 고질적인 신화에 눈이 머는 걸 자처하게 되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에게 사랑이란 알면서도 마시는 독약이고 자처해서 걸리는 덫과 다를 바 없었다. 사랑이라는 정념에 모든 희망을 걸고 투신한 이상, 그녀의 파국은 당연해 보인다.
   그녀는 점차 또렷해지는 비극적 전조를 외면한다. 이미 그녀의 파국을 예감한 독자들에게 그녀의 필사적인 외면은 오만과 무지로 보일 뿐이다. 비극의 관객은 시련을 겪는 인물과 함께 울지만, 희극의 관객은 시련을 겪는 인물을 보면서 웃는다. ‘가짜 삶’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믿는 그녀를 맞이한 건 몬순이었다. ‘멀미가 날 때는 먼 곳을 바라봐라.’(184쪽)는 말대로, 그녀는 그를 돌아본다. 그는 ‘위대한 사랑’이라는 영원한 미래를 가능케 할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보지 않은 채 인상을 찌푸린 채 있거나 바다에서 수영할 수 있는지 궁금해할 뿐이다. 그녀가 겪은 멀미의 고통은 연민이나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그는 수영을 좋아했지만 그녀는 수영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라고 참견했지만 그는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무관심을 배려로, 그의 무시를 관용으로 받아들여 무마하려 한다. 물리적 거리만 가깝다 뿐이지 그들의 심리적 거리는 타인들의 관계와 다를 바 없다. 그래도 그녀는 “진짜 삶”을 위해서 ‘위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신혼여행 마지막 날, 그녀는 함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186쪽)에 가보자고 말한다.
   그는 “20분이나 걸리는 곳”(186쪽)이라도 괜찮겠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이를 승낙이자 배려로 받아들이고 “함께”(186쪽)라는 말의 가치를 재차 강조한다. 그들이 다다른 빈 건물에서 그가 “목이 마르지 않냐”(188쪽)고 묻는 것 역시 하나의 배려이자 사랑의 표현처럼 들린다. 그가 와인잔에 물을 따르는 순간, 둘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백인 남자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외친다. “노!”(189쪽) 그들은 순식간에 관람의 대상으로,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그는 이 모험이 실패로 돌아갈 걸 알았다는 양 그녀에게 화를 낸다. “내가 여기에 오지 말자고 했잖아요.”(189쪽) 앞서 그가 한 말들은 우회적인 거절이 되고, 배려라고 생각했던 건 순전한 착각에 불과했다는 게 밝혀진 순간 그녀는 그가 “이제 그만 돌아가자.”(189쪽)고 말하길 기다린다. 그녀는 낙심했지만, 완전히 체념한 건 아니었다. ‘위대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모험은 실패했지만, 호텔로 돌아간 그녀는 다음 시도를 위해 비가 그치길 기다린다. 극적으로 비가 그쳤지만 이는 잠시일 뿐, 다시 큰 비가 내릴 기미와 함께 이번 시도도 실패할 것이라는 전망이 명백해진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그만 들어가자고 말하려고 했을 때,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거센 바람과 파도 소리 때문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소리를 질러야 했다. “당신, 그랑 주테가 뭔지 알아요?” “아니요!” 그도 소리 지르듯이 대답했다. “내 그랑 주테는 정말 훌륭했어요. 공중에서 남들보다 훨씬 오래 머무르곤 했거든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되물었다. “뭐라고요?” (「몬순」, 《문학과사회》 2016년 가을호, 190~191쪽)

   그랑 주테는 공중에서 두 다리를 앞뒤로 펼치면서 높이 뛰어오르는 발레 동작이다. 게다가 남들보다 오래 공중에 머물 수 있는 그녀의 그랑 주테는 일상적인 중력을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전하기까지 하므로, “정말 훌륭”(190쪽)하다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그에게 자신의 그랑 주테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말하는 건 단순한 과시가 아니라 그녀가 발레리나로서 “진짜 삶”을 안다는 증언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녀에게 새롭게 “진짜 삶”을 가능하게 해줄 ‘위대한 사랑’에 대한 고백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모든 점프는 중력을 거부하며 뛰어오르지만 끝내 굴복해 착지하게 된다. 그녀는 그가 부모 운이 없으며 왜 자외선을 차단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를 이해해주려고 애쓴다.
   그녀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위대한 사랑’이 시작될 “새로운 시기”(192쪽)를 계속 유예한다. “진짜 결혼생활”(191쪽)이 시작되면 이번 모험은 한 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가짜 삶’이 계속 연장될 뿐이다. 진짜에 대한 약속은 사기나 다름없다는 걸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 그녀의 시도는 현실에 대한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추락을 예감한 이상, 한계에 도전하다가 끝내 추락하고 마는 이들은 영웅이 아니라 어리석어 마땅히 수치와 굴욕을 감내해야 할 세속적 인물들에 지나지 않는다.1) “진짜 삶”이란 불가능하며, 현대인들은 이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대신 묵묵히 관조하는 ‘초연한 태도’2) 로 일관한다. 그녀가 “진짜 삶”을 모른다고 경멸했던 “현대 여성”들 역시 세속적인 추락을 겪거나 겪지 않기 위해 ‘가짜 삶’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홀로 실패한다. 한때 그녀에게 구원의 계시 같았던 그의 ‘무슨 상관이냐’는 말은 포용이 아니라 무심한 태도에 불과했다. 절대적 구원이라고는 없는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불가능하고 연인들은 서로에게 ‘친밀한 이방인’3) 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들 대다수가 이미 체념하고 받아들인 지 오래인 명제다. 그녀는 여성주의 비평이 수두룩하게 포착했던 낙오된 여성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그 와중에도 실패한 여행의 추억을 한 편의 그럴듯한 환상으로 만들면서 실패를 직시하기를 거부한다. 독자들은 그녀의 파국에서 사랑의 불가능성과 타자의 한계를 읽어낼 것이다. 이는 현대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이미 익숙한 명제이기도 하다.
   여성들은 타인의 판단에 기대지 않는 주체적 삶이 가능하다고 믿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그런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인정의 긍정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 인정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적 토대 때문이었다.4) 여성 독자 대다수는 도무지 무너질 기미가 없는 토대 앞에서 실패가 명백해진 이상, 헛된 희망으로 ‘필요 이상의 고통’을 느끼느니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 무관심한 태도로 바라보길 택했다. 누구에게도 어리석다고 조롱당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현명한 방법이었다. 사랑에 대한 불신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그녀는 실패를 인정하고 세속적인 삶으로, 냉소적인 “현대 여성”의 무리로 귀환하는 대신, 이 섬을 휩쓰는 “집채만 한 파도”(191쪽)를 떠올린다. 파도는 그녀가 귀환해야 할 일상의 굳건한 토대마저 휩쓸어버릴 뿐 아니라 더는 그녀가 시도할 수 없게 가로막을 것이다. 그녀가 마주해야 할 수치와 굴욕마저 휩쓸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재앙이 “진짜 삶”에 대한 그녀의 희망을 지켜줄 것이다. 오로지 재앙만이 그녀를 구원할 수 있다. 그 꿋꿋하고 절망적인 희망 앞에서 그녀는 흐느끼다가 소리 내 울기 시작한다. 희극 속 인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오만과 무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영웅의 비극적 투신을 추동하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불가능한 영웅의 서사가 가장 개인적이고 전형적인 상황과 현실의 이치에 무지하고 어리석은 여성을 통해 구현된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연약함에 대한 애잔한 페이소스”5) 와 함께 그 연약한 삶을 강력한 믿음으로 살아내는 인물을 목도한다. ‘진짜’에 대한 희망, 이미 세속에 달관한 채 관조하는 태도에 익숙해져 있던 우리가 한때 믿었던 것이었다. 희망에 잇따른 절망 역시 우리가 경험했던 것이었다. 그 앞에서 우리는 더는 초연해질 수 없고, 그렇게 희극은 비극이 된다.


정지혜

중구난방의 시대에서 즐겁게 글을 읽고 쓰고 듣고 있습니다. 더 많은 목소리가 나오길 바랍니다. 멋있는 말은 못해서 충실하게 듣는 쪽입니다. 최근에는 데라다 도라히코의 『도토리』와 김보영의 『저 이승의 선지자』, 아사다 아키라의 『도주론』을 읽고 있습니다만 아직 도주할 생각은 없습니다.

2018/06/26
7호

1
임옥희, 『젠더 감정 정치』,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6, 193~194쪽.
2
악셀 호네트, 『물화』, 강병호 옮김, 나남출판, 2015, 25~26쪽.
3
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 게른샤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강수영·권기돈·배은경 옮김, 새물결, 1999, 301쪽.
4
낸시 프레이저·악셀 호네트, 『분배냐, 인정이냐?』, 김원식·문성훈 옮김, 사월의책, 2014 참조.
5
남진우, 심사평, 『2012 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