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날이 밝았다. 오빠가 오래간만에 잘 잤노라고 기지개를 폈다. 나는 앞으로 후퇴한 정부가 수복됐을 때 생각만 하고, 당장 당면한 또 바뀐 세상엔 어떻게 대처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선 대책 없는 식구들이 답답하고 짐스러웠다. 오빠를 손수레에서 내려놨다고 해서 내 짐이 가벼워진 건 아니었다. 나는 바뀐 세상의 눈치를 보려고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나갔다.
    지대가 높아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혁명가들을 해방시키고 숙부를 사형시킨 형무소도 곧장 바라다보였다. 천지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확 끼쳤다. 그건 천지에 사람 없음에 대한 공포감이었고 세상에 나서 처음 느껴보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독립문까지 환히 보이는 한길에도 골목길에도 집집마다에도 아무도 없었다. 연기가 오르는 집이 어쩌면 한 집도 없단 말인가. 형무소에 인공기라도 꽂혀 있다면 오히려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 혼자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뿐이라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차라리 우리도 감쪽같이 소멸할 방법이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세계사, 2012, 282~283쪽)

    박완서는 1992년 한 권의 장편소설을 세상에 내놓는다. ‘자화상을 그리듯이 쓴 글’이라는 제목의 작가 서문은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써보았다.”라는 두 문장으로 시작한다. 윤색과 미화 없이 “있는 재료만 가지고” 써내려갔다는 작가는 그럼에도 기억의 불확실성 앞에서 “기억이라는 것도 각자의 상상력일 따름”이라며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장편소설은 3년 후, 또 한 편의 장편소설로 이어지면서 2부작의 구성을 갖추게 된다. 소실된 시간을 재현하는 작업의 난망함은 두 소설의 제목에서부터 뚜렷하다. 작가 스스로 “흔하디흔한 개인사”라 일컫기도 했던 자전소설 두 권은 그러나, 한 시대를 가늠케 하는 희귀한 사회사적 자료이자 망각의 힘과 싸우는 인간 기억의 전장이 된다.

    바로 그 소설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는 작가 생애의 일부를 ―박적골에서의 평화로운 유년에서부터 한국 전쟁기를 관통해 나간 젊은 시절까지, 그리고 읽기에 따라서는 시간의 축을 연장하여 『그 남자네 집』(2004)의 신혼시절까지― 충실하게 담고 있다. 알다시피, 여성의 생애 이야기(life story)의 역사는 서사무가 <바리데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최근의 ‘82년생 김지영’ 현상은 여성의 생애 이야기가 시대적 (무)의식과 만났을 때의 대중적 파괴력을 다시금 확인케 하는 사례이기도 할 터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여성의 생애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가. 구술사(oral history)라는 방법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폭넓게 다룬 『여성주의 역사쓰기』의 저자들에 따르면, 여성의 생애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여성 자아를 인식과 해석의 주체로 정립하여, 역사적 진실을 다층화하고자 하는 욕망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1)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권력의 작용 속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역사 기술의 지형도에서 누락되어온 여성의 경험을 가시화하고, 구조적 문제의식 속에서 그 경험을 맥락화하는 작업은 여전히 긴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에 영감을 주는 많은 장면들 중 한 장면으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마지막 장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장면에서 박완서는 전쟁의 한 가운데서 텅빈 서울을 내려다보는데, 여기서는 네 가지 측면에서 이를 간단히 짚어두려 한다.

   먼저, 실제로 사회사 연구에서 인용되곤 하는바, 소설이 가진 사료적 가치에 대해 지적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이를테면, 전쟁 당시 한강을 건너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전쟁이란 무엇이었을까. 잔류의 과정과 수복 이후의 면면에 대해서 소설은 사학자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창비, 1993) 등과 더불어 소상하게 전달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의 무게를 견인하는 ‘벌레의 시간’이라는 말은, 가장 직접적으로는 부역자로 몰렸던 고역의 시간을 지시하고 있거니와, 박완서는 예외상태 속 박탈의 경험을 ‘벌레와 인간’이라는 통찰적 구도로써 압축해낸다. 둘째, 좀더 질문을 다듬어서 여성에게 전쟁이란 무엇이었을까.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말이 환기해주는 것처럼, 전쟁 이야기는 무수히 있어왔고 지금도 즐겨 생산되지만, 여성에 대한 재현은 종종 상투성을 면치 못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위 장면에서 섬뜩한 공허에 몸서리치는 동시에 “빈집을 털 계획”을 세우고 있는 저 여성이라면, 우리에게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역사를 말할 때, 여성의 인식과 경험을 논외로 하면, 세계의 실상에 온전히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을 소설은 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 장면이 나를 잠시 멈추게 하는 것은 다음의 두 측면에서다. 지나온 삶의 이야기가 모두 증언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법정에서라면, 다른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이 되었던 어떤 참혹한 기억도, 이후의 누군가에게 반드시 말해야만 할 소명의 말들이 된다. 박완서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라고 쓸 때, 작가는 그 사실을 이미 의식하고 있다. ‘정당한 복수’라는 말로써, 작가는 말하자면 숙부를 사형시킨 심판과는 전혀 다른 어떤 심급을 호출하고 있다. 그 국면에 서면 읽는 이 또한 마냥 방청객일 수만은 없는데, 증언의 생명력은 읽는 이의 심안에도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한 인간에게 ‘고약한 우연’일 수밖에 없었던 생의 증거들을 구조적인 시선으로, 다양한 겹과 층위로 거듭 읽어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을 상상력이라 했던 작가의 말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 ‘생애 이야기’란 단어는, 생애(life)와 이야기(story)라는 두 낱말로 이뤄져 있다. 실제 작가 생애의 한 순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작가의 회고에 따르면, 사람들이 모두 떠난 후 동네에는 그와 그의 가족만이 남았다. 살아남는 문제가 너무나 버거운 그에게는, 차라리 소멸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야기에서는 어떤가. 어쩌면 지금 누군가는 저 장면에서 불모의 시간에 스칼렛 오하라(『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최서희(『토지』)가 보여주었던 집과 땅에 대한 집념을 슬쩍 포개 보고 있을지 모른다. 이 모든 장면이 “겁나지 않았다”라는 진술로 끝나서만은 아니다. 다시 돌아온 현저동, 엄마가 말뚝을 내렸던 그곳에서 박완서는 그의 분신으로 하여금 세상을 내려다보게 한다. “세상에 나서 처음 느껴보는 전혀 새로운 느낌”과 함께하는 장면 속 조망의 시점은, 역설적으로 신생의 꿈속에 있다. 이야기라는 상상력, 그 창조적 권능은 가장 참혹한 생의 한때를 소환하면서, 그럼에도 삶의 주인이 되고자하는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기어이 함께 연출해낸다. 알다시피, 모든 생애가 생애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장면에는 한 생애에 육박하는 섬광이 담기기도 한다.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 있다”라는 저 진술만큼 박완서 소설의 명암을, 과감히 말해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 모순을 담고 있는 육성을 나는 그리 많이 알지 못한다.


차미령

한 시대가 다른 한 시대를 읽는다는 생각을 요즘 하게 된다. 내가 종종 나 자신을 오해하고 있듯, 자기 시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이가 언제나 동시대인인 것은 아닐 것이다. 꾸준히 읽어서 묶은 책으로 『버려진 가능성들의 세계』가 있다. 다음 책에는, 재발견한 시대들이 넓고 깊어져 고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쩌면 그것만이 역설적으로, 내가 속한 시대에 대한 내 나름의 증언이기를 바라며.

2018/01/30
2호

1
이와 관련한 내용은 『여성주의 역사쓰기』(이재경 외, 아르케, 2012) 참조. 과민한 탓에 덧붙이자면, 잠깐 환기한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 2016)은 이와 같은 맥락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야기-경험의 의미가 서술의 형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소설의 장치적 측면은 아이러니한 데가 있다. 이야기에 전제되어 있다고 가정/구성된 것은 수(통계)이며, 인식과 해석의 주체는 성별화되어 있다. 그러니 오히려 그 점이 다른 한편으로 여성 독자의 말하기 욕망을 견인해 내었다는 사실에는 생각할 거리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