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은 누군가에게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단어지만, 또 누군가는 유령처럼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단어여서 진저리를 친다. 어느 쪽을 먼저 생각하든 대부분의 사람은 두 생명이 만나 교감하고, 그 사이에서 잉태된 존재이기 때문에 핏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녀)와 함께한다. 피를 나눈 사람들의 네트워크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깊으며, 뿌리 깊은 나무처럼 연결된 핏줄 사이에서 피를 나눠준 사람과 피를 이어받은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가장이라는 권좌를 상징하는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의 삶에 침투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장의 권좌는 무너지고, 나약한 아버지 또는 가장이라는 타이틀을 박탈당한 아버지는 문학적 흐름과 관련 없이 많은 소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김인숙의 『안녕, 엘레나』(창비, 2009;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할 경우 본문에 쪽수를 표기한다.)에서도 다양한 아버지를 찾을 수 있다. 돈 앞에서 비굴해지는 아버지,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가족을 등한시하는 아버지, 가족 내에서 찾을 수 없는 아버지 등등. 그리고 이러한 아버지를 지켜보는 아내와 자식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남편 또는 아버지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그 안에서 발생하는 환멸과 무심함, 그리고 상처 또한 지켜본다. 『안녕, 엘레나』의 표제작인 「안녕, 엘레나」 속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원항어선을 타야 했고, 그로 인해 며칠이고 바다에 머물다 집으로 귀환한다. 자신이 가족 안에 자리 잡지 못하여 “자신이 부재한 동안의 아내의 행실을 의심”(15쪽)했고, 평생 구경도 해보지 못한 돈을 아내 때문에 잃었을 때는 폭력을 행사한 뒤 집 밖으로 쫓아냈다.
   「안녕, 엘레나」의 화자인 윤소망은 어려서부터 이어진 아버지의 영향력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휘두르는 아버지의 폭력을 지켜보았다. 돈 때문에 궁핍해지는 경제적 상황에서도 변변한 직장을 갖지 않는 아버지를 그저 응시한다. 결국 집안의 남아 있는 규율이라곤 귀가 시간 하나밖에 없을 때, 윤소망은 자신보다 늦게 들어온 아버지에게 성을 낸다. 그런데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네 인생의 오분을 생각하라”(11쪽)는 말 같지도 않는 농담을 건넨다. 화자는 고작 5분 정도 늦었을 뿐이고, 아버지는 2시간이나 늦었을 때 화자의 아버지가 딸에게 건넨 말이다.
   결국 귀가 시간이라는 규율조차 무너진 집에서 윤소망은 여전히 할일이 없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도 딱히 저항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밖에 나가서 일을 하라고 성을 낸 적은 있으나 그건 저항이 아니다. 하지만 저항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녀에게 환멸과 상처가 없는 건 아니다. 문제는 자신에 대한 환멸과 상처는 있으나 이것을 함께 풀어줄 이도 부재한다.
   무기력한 삶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남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농담이다. 상황을 무마시킬 수 있는 작은 저항인 농담은 아버지의 말과 기억에 조소를 날리고, 자신의 상황을 가볍게 넘기는 역할을 한다. 원항어선을 타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던 아버지가 수많은 ‘엘레나’를 만났고, 또한 ‘엘레나’를 낳았다고 말하는데도 화자는 그것을 우습게 생각한다. 그러나 어쩌면 존재할 수도 있는 엘레나를 찾기 위해 화자는 몇 달 동안 여행을 떠나는 친구에게 자신의 동생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이 엘레나를 찾아달라는 말도 친구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만난 술자리에서 건넨 “농담에 가까운 말”(13쪽)이었다.
   농담은 거짓과 진실이 적절히 섞여 있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화자가 친구에게 농담처럼 건넨 ‘엘레나 찾기’는, 지리멸렬하고 더러운 삶 저편에 남아 있는 환상 속 존재 찾기다. 아버지가 수많은 엘레나를 만났듯이 화자는 “나와는 피부색이 다른 자매와 함께 있는 꿈”(14쪽)을 오랫동안 꿈꾸었다. 화자는 처음부터 엘레나를 트로이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나에서 파생된 여자 이름이 아니라 “여인을 소망한 연인의 환상”(18쪽)으로 판단한다. 헬레네, 헬렌, 엘렌, 헬레나 등등 엘레나는 이름만 조금씩 다를 뿐 그 원형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윤소망은 친구가 보내주는 수많은 ‘엘레나’ 속에서도 엘레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애당초 그녀의 삶이 “소망하는 것조차 없어지는 초라한 생”(27쪽)이기에 환상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친구가 여행에 돌아오기도 전에 아버지는 지병으로 쓰러져 생을 마감한다. 자신의 부재를 누구보다 싫어했던 아버지가 부재하자 화자에게 남은 건 아버지가 남기고 간 집문서와 카메라를 보며 수줍게 웃고 있는 ‘엘레나’의 사진이다. 아무것도 없는 환멸의 공간 속에서, 윤소망은 ‘엘레나’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아버지를 응시하던 시선은 이제 고스란히 자신에게 투영한다.


   기껏해야 오분…… 오분만 참으면 되는 것이다. 괜찮아, 아빠. 나는 다시 말했다. 아버지가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지도 않고 죽어버린 것을, 용서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해주었다면, 나 또한 말했을 것이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단 말을 못한다고 해서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죽을 만큼 미안하다고…… 아버지에게 빗대어, 내 인생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안하다, 나의 초라한 삶……집문서가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집문서에게도 미안해하며, 오분 동안 이를 악물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수많은 엘레나들 사이에서 째깍거리며 분주히 움직였다. 오분은 짧은 내 인생처럼 짧았고, 짧지 않았던 내 아버지의 인생처럼 길었다. (「안녕, 엘레나」, 『안녕, 엘레나』, 32~33쪽)

   농담은 말따먹기 장난에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눈물이 핑 돌아야 그게 농담”(25쪽)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말처럼, 농담은 억눌려 있던 불안과 공격 에너지가 웃음으로 해방된 형태1)이다. 아버지가 가끔씩 화자에게 건넸던 농담은 불안한 현실을 무마하려는 ‘엘레나 부르기’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농담은 꽤 어려운 소통 방식이고, 원만하지 않은 관계에서 농담은 맥없이 증발할 수밖에 없다. 윤소망과 아버지의 관계처럼 말이다.
   하지만 농담처럼 떠난 아버지를 통해 윤소망은 자신을 돌아본다. 아버지는 환상의 엘레나를 따라 떠났으나 윤소망에게 남은 건 현실이다. 삶은 부재의 연속이고, 그 안에서 남은 상처는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회피하던 환상을 쫓으려고 했던 화자는 알게 모르게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아버지가 사라지고 나서야 자신의 상처를 보듬는다. 비루한 현실은 화자의 말처럼 환불이나 취소가 되지 않은 “캔슬 불가”(8쪽)의 삶이다. 삶이 어떻게 진행되든지 도로 무를 수 없는 상황에서, 환상을 거두고 각성한 채 현실의 삶으로 진입하여 성찰하는 화자의 모습은 성장소설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의 상처를 보듬는 사람이 부모가 아닌 화자 스스로라는 점에서 특별함을 이룬다.
   농담은 거짓과 진실이 적절히 섞여야만 그 진가가 발휘된다고 앞서 이야기했다. 거짓이 거두어지고 ‘농담’이라고 표현되었던 진실이 화자 앞에 나타난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화자는 세상 속으로 진입하여 자신의 존재를 확립한다. 아버지의 집문서를 윤소망이 넘겨받은 모습은 아버지의 공간(집)을 딸이 세습하는 모습과 다르다. 격렬한 저항 없이 자신의 내면을 확립했다고 하여 그 빛이 바라는 건 아니며, 또한 아버지의 환상을 이해했다고 하여 그것을 어머니의 포용이나 아버지를 이해하는 자식(딸)의 모습으로 연결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수많은 엘레나들은 카메라가 부끄러워 수줍은 미소를 짓지만 윤소망은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스스로 내성을 형성한다. 이렇게 형성된 내성은 엘레나로 남을 수 있는 여지를 없애고 현실의 ‘나’로 거듭나게 한다.
   김인숙 작가가 「안녕, 엘레나」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현실의 환멸과 상처를 직시하면서 다시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건을 재구성하고 기록하고 삭제하지만 결코 기록되지 못한 사건들은 우리의 육체에 각인된 흔적으로 제2의 삶을 살아간다”2)는 말처럼 고통은 삶에서 사라지지 않고 각인되지만 결국 그것을 안고 살아간다. 이것은 성장이면서 동시에 생명의 부활이다. 생명의 부활은 상처가 계속해서 나타나는 삶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핏줄이라는 가지가 부러지고 딸만 남은 게 아니다. 딸은 이제 딸로 남겨지는 게 아니라 하나의 생명력을 가진 존재가 거듭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남은 생명력은 환상의 엘레나가 아닌 삶의 뒷모습을 응시해야 할 존재, 독자들에게 넘어간다.

원승종

소설과 사회가 연결되는 필연적인 지점이 있다고 오랫동안 믿었다. 소설을 좋아하지만 아직 연결고리를 찾지 못해 아쉽다. 언젠가 찾을 수 있겠지, 라는 심정으로 계속 공부하고 있다. 갈 길이 멀다. 오늘도 읽고 쓴다.

2018/06/26
7호

1
프로이트는 농담을 무의식과 관련한 것으로 설정하고 농담은 각성의 순간에 생긴 긴장감을 방출하기 위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드러나지 않은 것을 끌어내기 때문에 무의식과 직결된다고 주장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임인주 옮김, 열린책들, 2004, 182~183쪽.
2
정여울, 「‘입술’이 없는 존재의 상처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안녕, 엘레나』, 창비, 2009, 2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