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에 꽂는 첫땀. 나는 이 순간을 가장 사랑한다. 숨을 죽이고 살갗에 첫땀을 뜨면 순간적으로 그 틈에 피가 맺힌다. 우리는 그것을 첫이슬이라고 부른다. 첫이슬이 맺힘과 동시에 명주실이 품고 있던 잉크가 바늘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려온다. 붉은색 잉크는 바늘 끝에 이르러 살갗에 난 작은 틈 속으로 빠르게 스며든다. 마치 머릿속에서 맴돌던 말들이 입밖으로 시원하게 나와주는 듯한 기분. 바늘땀을 뜰 때 나는 더이상 말더듬이가 아니다.
   거즈로 피를 찍어내고 잉크의 농도를 확인한다. 일단 첫땀이 성공적으로 떠지는 것을 확인하면 그때부터 내 손은 빨라지기 시작한다. 속도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고른 색을 내는 데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명주실에 묻은 잉크 양을 조절하며 거미에게 살을 심어준다. 거미는 어느새 붉은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살을 뼈로 감쌀 차례다. 거미는 인간과 달리 뼈가 밖으로 나와 있는 셈이다. 그것을 외골격이라 하지만 나는 단단한 피부라고 생각한다. 인디아 잉크와 징크 옥사이드로 외피를 완성한다. 크롬 그린이 합류되면서 거미는 이제 완벽한 외골격을 갖춘다.
   살갗에 묻은 잉크와 피를 닦아내자 문신의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골리앗거미는 풍요로운 식사를 마치고 밀림 속에서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듯하다. 나는 어느새 밀림 속에 숨은 한 마리 거미가 된다. 가느다란 여덟 개의 다리로 아침햇살을 반사하는 투명한 거미줄에 미끄러지듯 걷는 거미. 발끝에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부주의한 청색 나비 한 마리가 내 거미줄에 걸려 파닥거린다. 청색 나비의 아름다운 날개가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나는 조용히 기다린다. 그리고 다리에 난 섬세한 털로 먹잇감을 부드럽게 감싼다. 남자의 몸을 애무하듯, 여린 과일을 만지듯 부드럽게. 그리고 주삿바늘을 꽂듯 나비의 몸통에 촉수를 박는 그 순간.
   “기집년들이 보면 환장하겠는걸?”
   남자가 내 어깨를 치며 말한다.
   문신을 끝낼 때마다 격렬한 섹스를 하고 난 듯한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 내 몸의 모든 기운이 거미의 촉수로 빨려들어간 것 같다. 나는 담배를 피워문다. 남자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암홍색 골리앗거미를 들여다보고 있다. 남자는 이제 손바닥만한 외피를 얻었다. 남자가 손바닥만큼 더 강인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바늘」, 『바늘』, 14~15쪽)

    천운영의 단편 「바늘」(『바늘』, 창비, 2001)의 여주인공은 하늘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곱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둥그렇게 붙은 목과 등의 살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목소리, 뭉뚝한 발가락……” 그녀는 어떤 남자의 마음도 끌지 못할 정도라고 스스로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용모가 추하다. 게다가 그녀의 가족적, 사회적 배경은 빈곤하다. 과거에 그녀는 사실상 버려진 아이였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떤 이유에선가 헤어져 한복집을 운영하며 그녀를 길러온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간질에 걸리자 치료를 목적으로 미륵암이라는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거처를 옮겼다. 그녀가 병이 나아 그녀와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녀는 어머니 곁에서 한복 만드는 법을 배워 엄마처럼 뛰어난 한복 제조기술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꿈은 금방 깨졌다. 한복집으로 돌아온 후 며칠 동안 어머니는 암자의 주지 스님을 위해 옷을 짓더니 그녀에게 한 뭉치의 돈을 넘겨준 다음 그 옷을 챙겨 들고 암자로 떠나버렸다. 그녀가 고아의 처지에서 벗어나는 계기는 김사장이라는 남자를 만나 서울로 이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철공소 사장은 “쇳덩어리 같은 팔뚝”에 새겨 가진 아름다운 “칼” 문신으로 그녀에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야릇한 기분”이 들게 했고 동시에 문신술을 배우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했다.
   이 불우한 여자는 이야기상 현재 문신을 생업으로 삼고 있지만 그에게 바늘은 경제활동의 도구 이상이다. 그녀가 고아이고, 여자이고, 또한 추녀임을 고려하면 바늘에 매혹된 그녀의 감정은 보다 깊은 욕망과 결부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자아를 규정하고 있는 열등한 동일성의 조합이 그녀의 마음속에 자라나게 만든 결핍 의식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바늘에 대한 그녀의 끌림은 그녀를 열등성의 나락으로부터 구제해줄 힘에 대한 욕망과 다를 바 없다. 바늘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노동인 봉제 생산의 도구라는 점에서 여성적인 것이지만, 자신의 물리적 힘을 확대시켜주는, 칼이나 창과 동일한, 철물이라는 점에서는 남성적인 것이다. 한복제조 기술에서 문신 기술로 그녀가 배우고자 하는 바가 바뀐 것은 그녀가 어머니처럼 여성답게 살아가기를 거절하고 자기 내부의 남성적인 욕망에 따르기를 택했다는 증거다.
   평소에 그녀는 스스로를 “말더듬이” 같다고 느낄 만큼 어눌하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자기 내부의 남성성이 드러날까 두려워 억누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신술은 그녀의 남성성이 억압의 덮개를 밀쳐내고 표출되게 해준다. 문신 시술 중의 어느 순간 그녀는 자기 내부에 갇혀 “맴돌던 말들이 입밖으로 시원하게” 분출되어 나온다고 느낀다. 위에 인용한 묘사 문장을 보면, 문신 시술 중의 그녀는 남자와 다를 바가 없다. 그녀는 마치 성교를 주도하는 듯한 위치에서 남자 고객의 허벅지 위에 털 많은 골리앗거미를 그려넣고 있으며, 그 모양이 완성된 다음에는 잠시 동안 그 밀림 속의 거미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상상에 빠진다. 에로틱하고도 잔인하게 먹이를 사냥하는 거미의 동작 속에서 그녀 자신의 공격성과 포식성의 생생한 표상을 관찰한다.
   20세기 전반 프로이트 밑에서 정신분석 경험을 했고 프로이트의 텍스트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던 영국 여성 조앤 리비에르는 1929년에 발표된 에세이에서 여성다움이란 여성의 본질이 아니라 위장이라는 유명한 주장을 폈다. 부기(浮氣)와 교태에서부터 가정에 대한 헌신에 이르는 여성다움은 여성이 남성 및 다른 여성과 경쟁하는 상황에 처한 까닭에, 그리고 경쟁에서 이긴 결과로 자신에게 닥쳐올지 모를 보복을 피하게 위해 여성이 쓰는 가면이다. 리비에르의 주장을 밀고 나가면 여성다움이란 여성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보다 우월한 존재이고자 하는,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아버지의 남근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가리고 있는 베일이다. 요컨대 그것은 여성이 자신의 사디즘(sadism)적인 거세 욕망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 여성의 거세 욕망이 어떤 것인가를 예시하는 이야기가 「바늘」의 문신사가 회상하는 어머니의 일 중에 있다. 어머니는 미륵암에 체류하던 시절에 무릎을 꿇고 앉아 스님의 머리를 깎아준 적이 있다. 문신사에게 스님의 머리는 “붉은 살덩이”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녀가 즐겨 먹는 고기를 연상시킨다. 그녀의 의식 속에서 그녀의 어머니가 스님의 머리를 깎는 일은 어떤 여자가 스님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성교를 하는 일과 뒤섞여 있다. 그녀가 스스로 뒤틀렸다고 말하는 상상의 논리에 따르면, 어쩌면 스님과 연인 관계였을지도 모르는 어머니는 서술상 현재, 자신의 딸을 남겨두고 암자로 돌아가 스님 시중을 든 지 여러 해가 지났을 것으로 짐작되는 현재, 스님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문신사는 자살한 어머니의 유품 가운데서 스님의 머리카락과 함께 끝이 잘린 바늘들을 발견하고, 이어 바늘 조각을 먹이면 외상을 남기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했던 어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소설의 종결부에서 문신사는 강한 자가 되기를 원하는 남자에게 바늘 문신을 해준다. 바늘은 여성 내부의 무의식적 남성, 여성이라는 베일 저편에 잔존하고 있는 전(前)오이푸스 단계의 남성적 힘이다. 바늘을 사용하는 문신 행위, 바로 그것 속에서 문신사는 여성을 남성 질서에 복속시키는 가면쓰기와 완전히 대립한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형 발병은 일반 히스테리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유년기에 존재했고 그 시기에 본질적으로 남성적인 성질을 드러냈던 한 성적 활동을 그녀 내부에 재생시킨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바늘」의 여주인공이 남자의 허벅지에 골리앗거미를 그려넣는 장면에서 그 문신 작업은 히스테리적 발작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팔루스적 욕망의 경제에서 이탈한 여성의 형상―남자들에겐 추하고 위험하고 불가해한, 그러나 여자들에겐 그들의 주체화를 고무하는 형상이 있다.

황종연

1990년대 전반에 평론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4년 겨울 창간으로부터 20년 동안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저술 중에는 한국근대문학 전공자로서 발표한 논문을 제외하면 동시대 소설과 비평에 대한 평론이 많은 편이고, 평론 대상 중에는 여성작가의 소설이 적지 않다. 신경숙, 이혜경, 은희경, 전경린, 한강, 배수아, 하성란, 윤성희, 천운영, 편혜영 등의 작품에 대해 길고 짧은 글을 썼다. 현재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에서 가르치고 있다.

2018/02/27
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