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긴 어디를 가란 말은? 내가 아무려면 결혼을 할 듯싶소?”
   남자의 말소리는 애소하는 듯이 까부러졌다. 진수는 간혹 이 여자가 떨어져간대도 경옥이와 결혼을 하고 평범은 하나 안온한 생활을 한다면 못할 것도 아니라고 공상도 하여본 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가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듯한 그 말에 자기 마음이 얼마나 아팠던가를 비로소 경험해 본 지금은 그런 생각은 다시는 꿈에도 해서 안 될 것을 알았다. 이 여자에게 대한 자기 애정을 인제야 달아본 듯하고 자기 일이건만 스스로 놀랐다.
   굶어도 같이 굶고 죽어도 같이 죽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을 인제야 깨달은 것 같았다.
   “결혼을 하신대두, 당신이 마음까지 떨어져서 나를 민주를 대구 가시는 것만 아니라면, 그래두 난 원통할 것 없에요. 섭섭한 대로, 그래두 저이가 본마음은 그렇지 않거니 하는 그거 하나를 위로 삼아 나는 나대루 살아갈 수 있죠. 그러하면야 결혼은 고사하구 당신이 이대루 내 앞에서 돌아가신대두 원통치 않을 거요, 당신 앞에서 내가 죽어간대두 마음을 놓고 웃으며 눈을 감겠지요……”
   진수는 외면을 하고 가만히 듣고 앉았다가, 비로소 경희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두 눈이 차츰차츰 타오르며 손목을 끌어당겨 어깻집을 꼭 껴안는다. 경희는 남자가 하는 대로 몸을 실리며 두 눈에서는 눈물이 쭈르르 스며나왔다.
   창밖의 포플러 나무에서 우는 쓰르라미 소리만 선들한 방안을 점령한 듯이, 또드락 소리도 없다.
   “어쩐지 난 요새 죽구 싶은 생각만 들어요. 이러다간 저절루 까부라져 죽을 것 같애.”
   남자에게 안긴 경희는 탄식하듯이 띄엄띄엄하는 소리로 행복한 침묵을 깨뜨렸다.
   “딴소리! 가을의 멜랑콜리 문학소녀의 센티라는 거야.” 하고 진수는 실없이 대꾸를 하다가 어기를 고쳐서, “인제부터 정말 힘있게 살아가야 할 때가 아뇨!” 하고 한마디하며 감격에 떨리는 듯이 경희를 또 한번 꼭 껴안는다.
(『불연속선』, 339~440쪽)

   이 대목은 염상섭의 장편 『불연속선』(1936; 위의 인용은 『불연속선』, 프레스21, 1997)의 클라이막스이다. 여기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염상섭이라는 작가에 대해 말해두어야 하겠다. 여성주의자 염상섭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들이 적지 않을 테니까.
   나는 근자에 염상섭이 여성 혐오증자라는 말을 가끔씩 듣곤 했다. 학생들의 글 속에서, 또한 전문 연구자의 글 속에서도 가끔씩 그랬다. 아마도 김윤식의 연구서 『염상섭 연구』(1987)의 한 대목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1920년대에 발표된 염상섭의 「제야」 「해바라기」 「진주는 주었으나」 같은 소설에 대해, 김윤식은 여성혐오증이야말로 이 소설들의 참주제라고 했다. 예술을 하는 신여성들의 허영심에 대해 염상섭은 커다란 경멸을 품고 있었다고.
   이런 진술 자체가 맞는지 자체도 따져볼 문제이지만(나혜석을 모델로 한 소설 「해바라기」에 주인공 여성에 대한 경멸이나 혐오감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오히려 반대로 읽을 수도 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여성 일반에 대한 혐오증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는 좀더 많이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나아가 그것이 반-여성주의로 연결되는 것은 매우 위험해 보인다.
   그의 소설들을 두고 여성 혐오증이라고 한 김윤식의 표현은, 염상섭이 지니고 있던 위악적 기질과 진정성 추구의 강렬성을 강조하기 위해 동원된 수사학적 과장으로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소설은 물론이고, 염상섭의 소설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여성 혐오증이라고 꼬집어 말할 만한 맥락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부분적으로 여성들이 험하게 다뤄진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작가가 써낸 많은 장편소설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내가 보기에 염상섭은 여성 혐오증자이기는커녕, 한국소설 백년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여성주의적 사고를 지닌 작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무려 19세기에 태어난 사람임에도.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는 사람에게는 먼저, 한국전쟁 때 서울 풍경을 다룬 장편 『취우』(1953)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소설은 염상섭이 철두철미 소설가임을 보여준다. 전쟁 상황을 다루고 있음에도 그는 자신의 이념이나 이상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상황 속에 인물들을 던져놓고 그들이 그 속을 통과하게 만든다. 이야기는 그뒤에 만들어진다.
   피난길에 올랐다가 한강 다리가 끊겨 서울에 고립된 무역 회사 사장과 그의 비서 겸 첩실, 그리고 젊고 유망한 청년 사원이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답은 ‘젊은 사람 둘이 연애를 한다’이다. 유망한 청년 사원이 사장의 첩실과 연애를 한다고? 그렇다. 그들은 태연하게 마음을 나누고, 여성에 적대적인 세상에 맞서 지혜롭게 사랑을 지켜나간다. 유망한 청년과 순결한 여성의 배치 같은 것은, 염상섭의 소설에서는 너무나 통속적인 키치일 뿐이다. 염상섭식 연애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두 사람의 진심이다.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의 유대가 만들어진다면 문제는 끝이다.
   해방 후라 시속이 바뀌어서, 혹은 전쟁 통 이야기라서 그런 것이 아니겠냐고? 그렇다면 장편 『불연속선』(1936)을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이 작품은 광복 전, 염상섭이 만주로 떠나기 전에 쓴 마지막 장편이다. 사상 문제나 시대적 아픔 같은 것은 매우 희미한 배경으로만 등장한다. 오로지 두 젊은이의 연애가 소설 전체를 채우고 있다. 그래서 통속소설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너무 단순한 판단이다(통속성은 다루는 대상이 아니라 다루는 방식에 있다. 사랑을 다룬다고 통속이라 한다면, 동서고금의 명작들이 통속이 된다).
   1930년대 후반 서울에서 택시 운전하는 청년과 카페를 운영하는 양장미인의 연애, 여기에서 주목되어야 할 것은 연애의 리얼리즘이다. 여성의 자립성이야말로 제대로 된 연애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질임을 보여준다.
   두 주인공은 맑스걸 맑스보이 출신이다. 이런저런 고단한 사연으로 학업을 잇지 못했고 각자의 생업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의 연애이니 서로가 치우치거나 무언가를 넘보거나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청년의 아버지가 갑자기 부자가 되어 나타나고, 또 맑스걸 시절 실패했던 여성의 첫사랑(이런 경우 여성의 육체적 순결 같은 것이 장애요소가 된다)을 빌미로 삼는 협잡꾼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만들어낸 서로에 대한 이해가 사랑의 코어 근육으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 한, 이들의 연애담 속에는 통속적 갈등의 문법이 끼어들 여지가 크지 않다.
   창졸간에 졸부가 된 남자 집안의 강요로 속물적인 혼처가 나타났을 때에도, 생활력 있는 여주인공은 당당하고 씩씩하게 자기들 애정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학비가 끊긴다고 했지만 그런 정도는 맑스걸 출신의 여성에게는 큰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자기 아버지나 집안과의 신뢰 관계를 무너뜨려야 하는 남자 주인공의 입장은 편할 수가 없다. 씩씩한 여성에게도 그런 사정은 문제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앞의 인용문은, 두 사람 사이에 축적된 그런 갈등과 위기가 정점에 치달았을 때의 장면이다.
   대부분의 염상섭의 소설은 사랑과 성에 대해, 그리고 여성성에 대해 너그럽고 열린 태도를 보인다. 그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여성적인 것’이 아니라 허영과 허위이다. 진정성 없음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는, 남녀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서사는 ‘버린 몸의 이데올로기’ 같은 시대적 통념으로부터도 쉽게 벗어난다. 『불연속선」』이나 『취우』, 그리고 좀더 올라가면 『무화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염상섭의 소설이 들려주는 단 한마디는, 자립적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 속에서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접받는다. 그런 점에서 염상섭은, 그의 문체를 빌려 말하자면, 여성주의자인지는 모르겠으나(여성주의가 뭔지 모르니까.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주의’이다), 진짜 여성주의자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다.

서영채

문학평론가. 서울대 비교문학 협동과정 교수. 《문학동네》를 창간하여 21년간 편집위원을 했다. 한국문학과 동아시아 문학에 관한 글을 주로 쓴다. 근대성과 문학의 윤리를 주요 논점으로 삼고 있다.

2018/04/24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