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에, 그래서 나는 마침내 영국식 뒷마당으로 가는 길을 찾아낸 거야, 하고 그날 경희는 나에게 말했다.
   내 생각에, 나는 영국식 뒷마당에서 그네를 타고 놀았어.
   뭐라구요? 나는 이해하지 못하면서 물었다.
   거긴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있었단다…… 담장 안쪽과 담장 바깥쪽에…… 그네와 앵두나무와 꽃들이……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걸 깜빡 잊었지.
   뭐라구요?
   내 생각에, 너도 그렇게 될 거야.
   뭐라구요?
   내 생각에, 너는 영국식 뒷마당에서 그네를 타고 놀았어.
   (…)
   경희의 목소리는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수많은 작은 종처럼 끊임없는 화음의 파도를 이루며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고, 부드럽게 상승했다가 다시 고요히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참으로 아름다운 음악 같았다.
   (…)
   내 생각에, 지루하지도 쓸쓸하지도 않았어. 왜냐하면…… 그곳은 아주 조용하고, 그곳은 소리가 없었으니까. 그곳에서 내 마음은 소리 없이 두근거렸으니까. 소리 없이 너울너울 파도쳤으니까. 그곳에 있으면 나는 벅차고 행복했어. 그때 나는 생애 최초로, 다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은 것들을 발견한 거야. 오직 나만을 위해서 거기 있는 듯한 앵두나무, 그네, 그리고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영국식 뒷마당을.
   (…)
   그리하여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한 사람이 내게로 몸을 돌리고,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매혹적인 이야기를 좀 들려줘요, 하고 말했을 때, 일생 동안 오직 고요히 침묵만 하고 있던 수백 수천의 작은 종들이 비로소 내 안에서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의 은빛 투명한 나방들이 날갯짓을 시작했다. 은은한 울림이 밀려가고 밀려왔다. 격한 파도가 되어 부풀었다가 부드러운 거품처럼 아래로 꺼지기를 반복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나에게 매혹적인 이야기를 좀 들려줘요. 내 안에서 영국식 뒷마당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며 오랜 물 위로 떠올랐다.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영국식 뒷마당으로 들어갔다.
(「영국식 뒷마당」,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67~85쪽)

    여성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에는 극복하기 어려운 모순이 뒤따른다.
   만일 우리가 여성적인 것을 남성적인 것의 대립항으로 설정하려 한다면, 사회구조 및 사고체계가 남성중심적인 한에서, 여성적인 것이 어떤 내용으로 이해되든 간에 그것은 남성지배의 현실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여성적인 것은 관계지향적이고 남성적인 것은 권력지향적이다. 그러므로 여성적인 것은 찬미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사회적 현실과 사고체계는 유감스럽게도 권력지향적으로 작동하거나 권력지향적인 경우에만 유효하다. 그러므로 남성들이 더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성적인 것에 대한 찬미는 남성지배의 현실과 대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서 더욱 편안하게 음미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여성적인 것을 남성적인 것과 완전히 동등할 뿐 아니라 무차별적인 것으로 생각하려 한다면 여성을 남성화하며 여성적인 것을 더욱 은밀하게 억압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여성도 남성과 대등하게 능동적이고 주체적이며 이성적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와 책임이 부여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해지지 않는 점은 이런 것이다. 이 권리와 책임이 귀속되는 사회구조 및 사고체계는 이미 남성적이다. 이 경우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이 무차별적이 된다는 것은 여성적인 것을 지우고 남성적인 것만을 남겨두는 방식으로 남성지배의 현실을 남성화된 여성의 지배 참여로 강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을 무차별적인 것으로 사유할 수도 없고 대립적인 것으로 사유할 수 없다는 바로 이 모순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는 출발점이 된다. 이 출발점이 모순을 정직하게 반영한다면 이 출발점에서부터 어떤 엇갈림을 피할 수 없다. 우리의 출발점은 이 엇갈림에서 비롯된 두 갈래의 갈림길로 되어 있다. 하나는 성차(性差)의 모순을 낳는 남성지배 현실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중심적 사회구조 및 사고체계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근본적으로 낯선 차원의 고통과 쾌락을 예감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후자에 대해 덧붙이자면, 그것은 ‘삶’이라는 훼손된 약속의 상처이자 동시에 왜곡된 방식으로만 기억해낼 수 있는 망각된 꿈이며, 그것은 통념적인 여성성에도 낯선 것으로 등장한다. 내가 볼 때 이 두 노선은 동시에 채택할 수 없으면서도, 둘 중의 하나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갈림길의 어느 한쪽을 주파한 뒤에야 비로소 다른 한쪽으로 연결된 샛길을 발견하는 것이 아마도 모순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며 여성적인 것에 대한 사유의 유일하게 가능한 경로일 것이다.
   배수아의 소설은 두번째의 길에서 출발하는 데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준다.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영국식 뒷마당」(『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테오리아, 2016)의 내용을 짧게 정리하자면 이렇게 된다. 어린 시절 나의 집 골방에는 이모할머니가 잠시 숨어지내듯 머문 적이 있다. 그녀, 경희는 정신이 온전치 못해 오랫동안 의료 시설에 갇혀 있었고 혼외자였던 탓에 집안의 골칫덩이로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며 친척집을 전전하는 중이었다. 나의 집에서는 경희에게 말을 거는 것은 물론 경희를 언급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어 나는 경희가 한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경희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경희의 목소리에 매혹된 나는 금기를 어기고 경희에게 말을 걸고, 경희는 책을 읽는 것인지 나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인지 모를 이야기를 한다. 경희는 어렸을 때 영국식 뒷마당에 이르는 길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머무는 것이 벅차고 행복했으므로 매일 거기서 하루 종일 놀았다. 경희는 거기서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누군가와 조우했는데 목소리는 앵두나무 아래를 조금 파보라고 말했고 그대로 했더니 거기에 책이 있었다. 책에는 목소리가 하는 말이 들어 있었는데 경희는 지금 그 책을 내 앞에서 읽으며 “나는 마침내 영국식 뒷마당으로 가는 길을 찾아낸 거야.”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반복. 왜냐하면 영국식 뒷마당 이야기에는 그다음의 사건이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벅찬 행복에 전율하는 길을 찾아내는 사건만이 언제나 반복되기 때문이다. 나는 경희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경희의 이야기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렇게 생각하기에 이른다. 경희는 평생을 그 이야기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폐쇄 병동에 있을 때에도 매일밤 탈출하여 영국식 뒷마당에 이르러 벅찬 행복 속에서 목소리와 조우하여 그네를 타고 놀며 춤을 췄다고. 그러나 아래층에서 가정부가 올라오는 기척을 듣고는 현실감이 돌아온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경희는 평생 혼자였고 폐쇄 병동을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렇기 때문에 설사 그런 곳이 실제로 있다고 할지라도 영국식 뒷마당에 갈 수도 없다고. 그리고 사실은 경희가 바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영국식 뒷마당」이 얼마나 매혹적인 체험을 제공하는지, 소설 속 화자가 경희에게 매혹되었던 것을 우리가 어떻게 반복해서 체험할 수 있는지를 천천히 음미하기에는 주어진 지면이 너무 짧다. 성급하게 간추린 결론을 내리기로 하자. 「영국식 뒷마당」은 화자와 경희의 문답이 교차하는 리듬, 경희가 묘사하는 영국식 뒷마당의 환상적인 이미지, 그리고 그것을 묘사하고 있는 경희의 목소리의 환상적인 이미지로 화자와 독자를 매혹시킨다. 벅찬 행복으로 가득한 이 매혹은 망각된 삶의 꿈을 우리가 다시 기억해내도록 강요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현실에서는 금지되거나 바보의 망상으로 취급되거나 폐쇄 병동에 갇혀야만 하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럼에도 ‘목소리’는 경희에게 빠져나올 수 없는 기쁨의 미로를 선물했고, 그 미로는 경희의 목소리로 재생되어 다시 화자의 내부 어딘가에 미로를 새겨두었고,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화자에게 매혹적인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하자 그 미로가 다시 꿈틀거리며 「영국식 뒷마당」이라는 텍스트로 표현되었다. 반복의 반복의 반복. 이것은 “나는 마침내 영국식 뒷마당으로 가는 길을 찾아낸 거야, (…) 내 생각에, 너도 그렇게 될 거야.”라는 경희의 예언의 실현이면서 동시에 그 예언을 우리 독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반복하는 말이지만, 이것은 우리가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남성적 사회구조 및 사고체계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근본적으로 낯선 차원의 고통과 쾌락을 예감하고 표현하는 것이고 ‘삶’이라는 훼손된 약속의 상처이자 동시에 왜곡된 방식으로만 기억해낼 수 있는 망각된 꿈의 표현이다. 「영국식 뒷마당」의 내용이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기보다, 이 텍스트는 상처와 꿈의 너울거림을 재생하는 장치로서 독자들이 그것을 체험하게 하고 독자들 안에서 그 미로가 자라나게 만든다. 배수아의 텍스트는 마침내 영국식 뒷마당으로 가는 길을 찾아낸 것이고,
   내 생각에, 너도 그렇게 될 거야.

권희철

문학평론가. 낯선 것의 낯섦을 훼손하지 않은 채로 체험하기가 예술의 명령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체험은 언제나 분열하고 변이하며 증식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 분열과 변이와 증식을 위축시키는 힘들을 거부하지 않으면 체험 그 자체가 중단되므로 예술의 명령을 정치적이고 실천적으로 수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음미하는 중이다. 분열하고 변이하며 증식하는 체험과 체계화하며 확정하고 배제하는 개념 사이의 불가능한 관계가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 사이의 불가능한 관계와 비례한다고 생각을 발전시킬 계획이다.

2018/03/27
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