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코. 그것은 그들만의 암호였다. 한 여자를 지칭하기 위한 그들 사이의 암호.
   한 여자가 있었다. 물론 그 여자에게도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은 그들의 도시적 감성에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때문에 암호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하나코 앞에서 그녀를 별명으로 부른 적도 없다. 그들끼리만 모였을 때, 지루하고 전망 없는 하루 저녁 술자리에서 그녀를 지칭하느라 우연히 튀어나온 농담조의 이 별명이 암호가 되었다. 그들은 암호를 만들기를 좋아하는 삶의 그리 밝지 못한 단계를 지나고 있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은 대충 스물너덧 정도의 나이를 먹고 있었고 모두들 대학 졸업을 앞둔 상태였다.
   (「하나코는 없다」, 『열세 가지 이름의 꽃향기』, 12~13쪽)

   최윤의 「하나코는 없다」(제18회 이상문학상 수상(1994); 위의 인용은 『열세 가지 이름의 꽃향기』, 문학과지성사, 1999.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할 경우 본문에 쪽수만을 표기한다.)는 장진자라는 여성이 장진자가 아니라 어째서 하나코로 불리게 되었는지 묻는 소설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여성이 이름을 잃는가에 관한 소설. 물론, 에두르지 않고 말하자면, 여성의 이름은 장진자/하나코의 경우처럼 남성들에 의해 빼앗긴 것이다. 이 소설을 비롯하여 장편 『오릭맨스티』(자음과모음, 2011)처럼 최윤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현대인의 익명성과 타자성은 서늘하거나 건조한 문체와 더불어 자주 표현되곤 했다. 「하나코는 없다」에서 장진자/하나코뿐만 아니라 그녀를 하나코로 부르는 다른 (남성) 인물들 역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부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서 하나코의 이름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소외시키는 현대성만으로 오롯이 설명하기는 어렵다.
   먼저, 하나코라는 이름은 남성들의 집단 문화가 빚어낸 산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고등학교 때부터의 동창으로, 취직을 앞둔 때에는 매일같이 만나 취직 공부를 했고, 사회 초년생 시절에도 분주하게 자주 모였던 친구들이었다. 그들이 특별히 가부장적이거나 폭력적이거나 무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남성들만의 집단 문화 속에서 별다른 성찰 없이 편안해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하나코가 “그들만의 암호”였다는 말은 이렇게 이해된다. 남성들만의 문화 속에서 여성은 그 자체로 온전히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양방향의 대화 없이 그저 남성들의 일방적인 시선과 언어 속에서 암호화되거나 별명처럼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이른바 “그들끼리”의 문화는 여성을 철저하게 타자로 만든다.
   실제로 많은 남성들이 여성이 부재할 때 여성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즐거워하지 않는가. 물론 여성들 역시 남성들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남성만이든 여성만이든, 하나의 성이 다른 성을 배제하고 만들어내는 “그들끼리”의 문화는 얼마나 “밝지 못한”가. 더욱이 사회에서 권위적이거나 주류적인 집단에서 소속될 가능성이 높은 남성들의 끼리의 문화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무엇이든 잡스럽게 섞인 집단과 문화는,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건강하고 아름답다. 그 집단의 구성원이 그저 다채로운 색깔로 무지갯빛을 이루어서가 아니다. 그 안에서는 편리한 동일성에 안주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수많은 타자들을 향해 대화하도록 눈과 입을 열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친구들이 장진자를 하나코로 부르면서 언제나 모임에 부르고 가까이 지냈던 이유는 무엇일까. 비록 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 속에서 그려진 것이긴 하지만 (장진자가 아니라) 하나코의 넉넉한 포용력 때문이었다. 하나코는 “마치 공기나 혹은 적당한 온기처럼”(16쪽) 그들 모임 속에서 존재했다. 그녀는 그들과의 만남을 언제나 흔쾌히 수락했으며 언제나 진지한 태도로 그들과의 모임에 임했다. 때때로 따로 만날 때에는 그녀는 그들의 마음 상태에 잘 맞는 편안하고 기분 좋은 장소로 안내했다. 그가 이상한 힘에 이끌려 그녀에게 내밀한 고백을 쏟아낼 때 끊는 법 없이 진지하게 들어주곤 했다. 그것뿐이던가. “어쩌면 그녀는 세상의 모든 편지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것도 이유를 알 수 없게 가슴을 찡하게 하는 편지를 보내곤 했다.”(28쪽)
   이런 하나코의 이미지는 양면적이다. 우선, 그것이 그와 그들이 재구성해낸 것으로, 남성적 판타지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필요에 의해 그녀를 대했고 그들의 원하는 방식으로만 그녀를 만나곤 했으니까. 우정의 관계에서 그들은 진지한 태도로 그녀를 친구로서 대하지 않았다. 한편 실제로 그녀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 수용하고 공감한다는 점에서는, “현실로서 관계를 생각하고 실현한 듯한 하나코적인 세계관, 하나코가 대변하는 여성성의 세계관”1)을 의미한다. 여남 관계에서든, 친구 관계에서든, 하나코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보듬어나갈 줄 알았으니까.

*

   그와 그의 친구들이 장진자를 장진자가 아닌 일본 여성의 이름인 하나코로 불렀던 것처럼 장진자가 한국이 아니라 외국 땅인 이탈리아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는다는 점 역시 사소해 보여도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한국에서 “왜색이 도는 그런 별명”(34쪽)으로 불렸고, 한국을 벗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의욕이고 주체적인 이미지를 얻는다. (그렇다, 이것 또한 외부에서 부여한 그녀의 ‘이미지’라고 해야겠다.) 그저 성공한 한국 여성 엘리트의 해외 성공담이라고 해도 좋을까?
   물론, 외국에서 그녀가 얻은 사회적 성공은 오리엔탈리즘의 프리즘을 통과한 것이다. 이탈리아 상공회의소의 영어판 상업 정보지에 실린 기사는 이렇다. ‘동양의 매력을 의자에 담는 한 상의 한국인 디자이너, 귀국 전야의 인터뷰.’(42쪽) 이탈리아인의 눈에는 변형된 하나코의 이름이 어른거린다. 동양-여성-매력은 타자의 신비하고 수동적인 아름다움을 지칭하는 표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코가 하나코라는 이름을 벗고 장진자로서, 아니 외국에서 성공한 한국의 디자이너 장진자의 이름을 비로소 쟁취할 때, 독자들은 통쾌하다. 과거에 그들의 모임에 하나코와 함께 오곤 했던 여자 친구는 “동업자”이자 “동반자”(43쪽)으로 소개됐으니, 아마도 그녀는 그들의 일방적이고 무심한 생각과 대조적으로 남성을 이성애적 관계 안에서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통쾌함의 이면에는 씁쓸함이 남는다. 장진자가 성공한 디자이너가 아니었더라면? 사회적 성공을 힘입어 그녀의 코가 오똑하게 부각되지 못했더라면? 그때 하나코는 기어이 장진자가 될 수 있을까? 기꺼이 따뜻하게 타인을 받아들일 줄 아는 그녀의 미묘한 수동적 수용성과 국제적 디자이너의 화려한 성공은 어딘가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합이 그녀 장진자의 실제에 더 가깝다면?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질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하나코를 편안해했지만 진정한 친구로서 그녀에 관해 궁금해해본 적이 없었다. 하나코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은 하나코에 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들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 가끔 그녀가 밝힌 사항들은 그들에게 매우 막연하게 들렸다.”(15쪽)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던 이런 그녀의 일상사는 어쩌면 한 번도 그들의 궁금증을 자극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이 하나코에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 궁금증을 표현하기가 멋쩍어졌다고나 할까.”(16쪽)

   “그들은 하나코의 신상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18쪽)

   이쯤하면 그들과 하나코의 관계는 피상적이며 깊이가 없다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들의 일방적인 태도가 관계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어느덧 베네치아로 출장 여행 중인 그에게 하나코는 그가 여행하고 있는 이국의 낯선 도시처럼 느껴진다. 이국 도시에 깔린 안개와 미로의 이미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하나코와의 흐린 추억과 포개어진다. (범속한 한 사내의 여로와 안개 속의 방황은, 이 소설을 「무진기행」의 여성주의적 버전으로 읽도록 한다.) 그러한 타자성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이 소설에서는 타인의 근본적인 타자성을 따져 묻기보다는 그 자신이,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그녀를 대했던 방식에서 찾아야할 마땅하리라.
   오래 전, 여행지 술자리에서 그들이 술병을 벽에 던지고 고함을 내지르며 하나코에게 노래를 강요하던 일은, 그들에겐 그저 잊혀질 “작은 실수”(14쪽)로 무심하게 기억된다. 관계의 파탄은 쉽게 이루어지지만 그들은 관계에 무성의했던 것처럼, 관계를 복구할 능력이 없다. 그리하여 그녀, 장진자는 장진자가 아니라 하나코라는 암호로 지칭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국땅에서 하나코에게 “지금 애가 몇이냐”고 묻는 그에게 그녀는 “나를 그렇게 몰라요?”라고 반문한다. “그렇게 날 몰라요? 그렇게도?”(35쪽)라며 묻는 하나코의 질문은 소설의 배음으로 반복해서 들려온다. 그러나 그는 그런 종류의 질문에는 결코 답할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코는 없다. 그에게 하나코를 장진자로, 진지한 관계 안에 받아들일 그런 자리는 없다. 남성들이 만든 일방적이고 왜곡된 여성의 그림자. 그런 ‘하나코’는 없다.

노대원

세상사와 인간사가 궁금해서 책을 들여다봤습니다. 그중엔 문학 책이 꽤 많았습니다. 그러다 문학평론을 쓰게 되었습니다. 문학을 통해 세상살이와 삶을 말하는 방식이 맘에 들었나봅니다. 지금은 제주대에서 국어 선생님이 될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2018/05/29
6호

1
최윤, 「인간관계의 출구-「하나코는 없다」」, 『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 문학동네, 1994, 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