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들의 얼굴만 본다
한소범(한국일보 기자)


불특정 다수의 읽는 사람들이 늘 궁금했다. 읽는 행위가 고독한 행위만은 아니라고, 실은 우리도 서로 연결되고 싶은 감각으로 똘똘 뭉쳐 있다고, 늘 말하고 싶었다.
  2019년부터 2022년까지 문학 담당 기자로 일했다. 문학 담당의 가장 큰 연례행사 중 하나가 서울국제도서전이다. 거기에 가면 온갖 취재 거리가 넘쳤다. 평소에는 만나기 힘든 작가 강연에 출판사가 도서전에 맞춰 선보이는 신간, 출판계 최신 기획을 한 눈에 만나볼 수 있으니까. 게다가 평소엔 외근이 일상인 타 부서 기자들과 달리 늘 발목을 잡고 있는 책들 때문에 좀처럼 회사 바깥을 벗어날 일 없는 나도 도서전 기간만큼은 자유였다! ‘합법적 취재 활동’을 위해 날 좋은 계절 이른 오후 2호선을 타고 한강을 건너 코엑스로 향할 때, 그 순간만큼 내 직업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졌다. 2020년 도서전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점 행사로 대체됐고 2021년엔 코엑스에서 성수동으로 자리를 옮겨 평년의 ⅕ 규모로 열렸다.
  2022년, 3년 만에 코엑스에서 행사가 재개됐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가며 내가 가장 기다렸던 건 사람들, 사람들이었다. 미래의 열혈 독자가 될 어린이들, 데이트 나온 커플들, 팔짱을 꼭 낀 친구들. 그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동안 도대체 어디에 꼭꼭 숨어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게 만드는, 얼굴에 들뜬 그 화색을 관찰했다. ‘책들 너네 두고 봐라, 내가 진짜 다 사버린다!’하는 이글이글한 결기로 가득 찬 독자들 사이에 있으니 내 일이 더이상 외롭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주류 문화’에서 일하는 사람 같다는 황홀한 착각마저 들었다. 기사에 쓸 멘트를 구하기 위해 지나가던 십대 소녀들을 잡아끌고 물었다. “도서전 와보니 어때요?” “너무 재밌어요! 꺄르르”
  문학 출판 담당 기자로 일하면 비극적 전망에 대해 쓸 일이 많다. 성인독서율은 매년 추락하고…… 출판계는 늘 불황이고…… 그런데 도서전에 가면 이런 우울이 한번에 날아간다. 그해 도서전엔 13만 명이 방문했다. 13만 명. 그게 우리 숫자다. 읽는 사람, 쓰는 사람. 그러니까 나는 정말로, 하나도 외롭지가 않다.






진창을 바라보는 마음
정지연(독자)


나는 책이 왜 좋을까. 문학을 왜 사랑하게 되었을까. 도서전에 관한 나의 경험을 떠올리기 전에 문득 그런 질문들이 떠올랐다. 소설을 읽다 처음으로 엉엉 운 순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책이라는 물성을 사랑하고 늘 지니고 다니면서도 그리워한다. 인아영 평론가의 글처럼 문학을 읽는 행위는 누추한 진창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되묻는 작업이라 생각한다.1) 작업은 평생을 걸쳐도 미완일 것이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일. 그렇기에 끊임없이 바라보고 바라보는 일.

나의 첫 도서전은 2022년 서울국제도서전이었다. 아직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초여름이라기에는 무더운 날씨였다. 대학생일 때에는 돈이 없다는 핑계로 못 갔고 졸업하게 되니 코로나로 인해 세상이 멈춰버렸다. 2022년에 나는 작은 출판사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있었다. 편집자님의 도움으로 외근이라는 명목으로 비교적 덜 복잡한 평일에 도서전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매번 갈 때마다 길을 잃게 되는 코엑스에 도착해 들어간 도서전에는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책으로 가득했다.
  사람과 책뿐인 이곳에서 다양한 출판사 부스를 드나들며 정신없이 활자를 읽었다. 책 읽는 사람이 없다더니 이곳에는 온통 읽는 사람뿐이고 모두가 나처럼 정신없이 책에 파묻혀 있었다. 자꾸만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이 출판사 매대 큐레이션 짱이지 않아요? 이 책카피 너무 좋다, 그렇죠. 이런 기획 너무 천재적이다…… 같은 말들.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책을 좋아해서 이곳에 모였으며 곧바로 스쳐 지나간다. 조금은 외로웠는데 그 외로움은 자꾸만 나의 좋아함을 말로 내뱉고 싶어 생긴 외로움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말로 내뱉고 싶은 마음. 나는 첫 도서전에서 그런 마음으로 책과 책 사이를 걸어 다녔다.
  그렇게 걷고 걷다가 어디선가 사회를 보는 조대한 평론가의 목소리가 들려 그 음성을 따라 쫓아갔다. 김복희 시인, 서이제 소설가 그리고 시인이자 소설가인 임솔아 작가가 연사로 참여한 ‘동물이라는 존재와 새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서’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출판계에서 활발히 나오는 주제인 비인간과 인간에 관한 대담이었다. 인간중심적인 서사에서 벗어나 새로운 좌표로 향해야 한다는 이야기. 그 대담을 들으며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노트에 끄적였다.
  “내가 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나야 더 나은 인간, 새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인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인간이 아닌 새 인간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며 문학을 읽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나는 인간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더라도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어 책을 읽는다. 어떤 문장을 읽으면 닳고 닳아 썩어 버린 진창 같은 마음이 잊히고, 다정한 슬픔이 명치에서부터 저릿하게 올라온다. 그 감각을 붙들어 문학 종이를 넘기고 넘기면 혐오와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언젠가는 진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문학은 그런 마음의 관성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
  이번 여름에는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아 책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도서전에 간다. 책을 만드는 사람, 책을 쓰는 사람, 책을 파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책만을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다니며 그들에게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은 여전할 것 같다. 우리가 마음껏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곳에서 차마 내뱉지는 못할 말들을 계속 마음속에서 내뱉을 테지. ‘이 책 너무 좋지 않아요?’






생애 첫 도서전 참가기
이지은(유유히 대표)


“도서전에 나가보면 어때요?”
  평소 맥주 친구로 만나는 수신지 작가님이 맥주잔 앞에서 던진 제안에 심장이 뛰었다. 지난 16년간 출판사 다섯 곳을 다녔지만 서울국제도서전에 참가하지 않았거나 코로나 때문에 경험할 수 없었다. 귤프레스를 운영하고 있는 수신지 작가님은 페어를 놓치지 않고 독자들과 직접 만나왔다. 유유히가 옆에 있으면 의지가 될 거라고 재밌을 거라고 덧붙였다.
  그간 왜 도서전에 시큰둥했을까. 멀기도 멀고, 가봤자 사람만 많고, 대형 출판사들이나 북적북적 요란하겠지…… 머릿속에 딱 그려지는 그림. 거기에 새로운 색을 덧붙일 자리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독립출판 쪽의 축제 ‘언리미티드 에디션’이 매년 더 흥미로웠다. 내가 알지 못하는 작가를 발견할 수 있을 거란 기대, 정형화되지 않은 책의 꼴을 보는 즐거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에너지까지…… 그런데 도서전 책마을이라면? 독립출판뿐 아니라 작은 출판사들이 테이블을 빌려 나오는 자리. 부스비가 많이 올랐다던데 책마을 자리는 66만 원(VAT 포함), 도전할 만했다. 부스와 달리, 별도의 인테리어도 필요 없어서 가볍게 참여할 수 있겠다. 맥주잔을 마주 부딪치며 “도전해볼게요”라고 외쳤다. 그리고 1월 말, 책마을 참가가 확정되었다.
  5개월이나 남았지만 할 일은 많았다. 우선 도서전에서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는 신간을 준비했다. 책을 만들고 파는 일상적인 업무 틈틈이 유유히 테이블을 어떻게 꾸밀지 생각하고 실행하고 제작해나갔다. 유유히의 책 7종에 각각 증정할 굿즈도 모두 준비했다. 먼저 참여했던 동료들의 조언도 구했다. 무료로 나눠줄 굿즈가 필요하다는 말에, 도대체 캐릭터 부채 500개와 창작 플랫폼 투비컨티뉴드의 협찬으로 『엄마만의 방』 김그래 부채도 250개 정도 준비했다. 우리 테이블을 포토존으로 만들고 싶어 160cm 높이의 김그래 등신대를 만들었다. 책보다 굿즈가 잘 팔린다더라는 말에 마그넷 5종을 준비했다. 임진아 작가님의 책갈피 2종과 엽서 2종도 받아왔다. 얼추 판매할 상품들의 구색이 갖춰졌다.
  도서전이니까 독자와 작가가 직접 만나는 행사도 필요했다. 마침 도서전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유유히의 작가님들을 무사히 초대할 수 있었다. 5일간 총 10명의 작가님들이 작은 테이블에 앉아 독자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한편, 원활한 진행을 위한 긴장감도 덤으로 어깨에 실렸다. 도서전 행사로 북토크도 확정했다. 1인 출판사치고 이렇게까지 대형급으로 행사를 하는 곳은 없었다.

6월 26일 수요일. 2024 서울국제도서전의 막이 올랐다. 유유히 자리는 메인 행사홀 바로 앞 명당이었다. 주빈국 사우디아라비아 측에서 준비한 전통음악 공연 속 경쾌한 북소리를 시작으로 입장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지난 5개월간 준비한 책과 굿즈들을 보기 좋게 진열하고 테이블 뒤에 섰다. 유유히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걸었다.
  이동시간 왕복 4시간,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식사 시간 외에 내내 자리를 지키다 보니 5일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텅 빈 홀에 입장할 때의 적막과 각자 테이블 재정비하며 하루의 유일한 한가로움을 즐기던 오전 시간도 좋았다. 오픈하자마자 전 직장 동료들부터 유유히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독자님들까지 고마운 얼굴들을 행사 기간 내내 마주했다.
  초심자의 예측은 보기 좋게 틀렸다. 다 팔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책 덩이들을 다시 묵직하게 차에 실었다. 책마을에서는 300~400부 정도 팔면 많이 판 거라던데, 유유히는 500부 이상을 팔았다. 재고 관리에 실패했지만 틀림없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최고치의 목표에 다다랐다.
  그보다 더 좋았던 걸 꼭 기록해야 한다.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책을 만들고 있던 사람들을 도서전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부스에 서 있는 모습 뒤에 버티고 있을 저마다의 힘듦을 짐작했지만, 그 노고로 세상에 내보내는 책들이 독자의 손에 들려 제자리를 찾아가는 풍경을 지켜보는 일은 생각보다 무척 뿌듯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책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모두 정중했다. 창작자와 출판사를 존중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책을 팔고 있구나 하는 보람이 차올랐다. 가만히 책장을 넘겨보다 “이거 주세요”라고 밝게 웃는 사람들. 백팩을 앞으로 메고 책을 소중히 담아가는 사람들. “유유히톡 뉴스레터 구독자예요. 만나고 싶어 왔어요”라고 속삭여준 사람들. 작가님께 팬심을 고백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사람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있다는 감각이 감격스러웠다.
  책을 좋아하는 우리 모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각자의 자리에서 즐거운 독서 생활을 이어 나가기를.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이 소중한 자리에서 또 웃으며 만나게 되기를. 2025 서울국제도서전을, 오늘부터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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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범, 정지연, 이지은

2024/08/21
68호

1
인아영, 『진창과 별』, 문학동네, 2023, 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