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세주2
세주가 세계의 끝을 보고 돌아오는데 걸린 시간은 여섯 달이었다. 무더운 여름에 떠났다 한겨울에 돌아왔지만, 그 시간 내내 몸과 마음은 추워서 지금의 겨울이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열흘 전부터 폭설이 계속 내리고 있어서 그 눈이 살에 닿아 녹을 때마다 겨울이 새삼스레 추웠다. 눈만 아니었다면 떠나기 전 살림살이를 나눠주었던 친구 집을 차례로 방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세주는 열흘 동안 여덟 명의 친구를 찾아가 하루 정도 머물며 따뜻한 잠자리와 식사를 신세 졌다. 지내면서 세주는 자신이 주고 떠났던 살림살이를 친구가 요긴하게 잘 사용하는지 살폈고,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밤새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었다.
여덟 번 집을 옮겨다니다보니 친구가 많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지만 개중에는 허물없이 지낸 친구가 있는가 하면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서먹해진 친구도 있었다. 그럼에도 친구들 대부분은 세주를 잘 챙겨주었다. 날도 추운데 며칠 더 지내다 가라고 말하는 친구를 뿌리치며 하룻밤만 보내고 집을 나온 건 화분 때문이었다. 세주가 살림살이를 주면서 함께 부탁했던 식물은 모두 죽어서 화분째 이미 버려졌거나 병든 상태로 어두운 곳에 방치되고 있었다. 아무리 친구가 잘 대해주어도 세주는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한 집이나 식물을 잘 돌보지 않은 친구 집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는 않았다. 그저 죽어버린 식물의 꽃말에 대해서만 생각했고 그러자 친구 이름은 잊히고 대신 꽃말로 친구의 이미지가 새롭게 각인되었다.
어떤 날보다 눈이 많이 쏟아진 오늘, 세주는 여덟 번 집을 옮긴 끝에 아홉 번째 집 앞에 서 있었다. 마지막 집이었고, 그것은 세주가 여기 말고는 갈 데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래전 헤어진 남자친구의 집이라 동성처럼 스스럼없이 재워달라고 하기엔 주저되는 면이 있었지만, 냉장고와 화분을 부탁하던 날과 같은 다급함을 폭설과 추위가 부추겨서 세주는 곧바로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여전히 번호를 바꾸지 않았는지 놀랍게 이번에도 현관문이 열렸다. 세주는 그날처럼 삐리릭,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를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세주는 동하의 집으로 첫발을 내디디며 다른 친구들처럼 화분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냥 나오기로 마음먹었다. 들어가자마자 세주는 화분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집이 작아서가 아니라 문샤인 산세베리아가 동하 침대 사이드 테이블 위에서 너무도 튼튼하고 아름답게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없는 화분을 보자 세주는 모든 긴장이 풀려 몸이 녹아내린 듯 툭, 하고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것은 마치 여기 조금 더 머물러도 된다는 두 번째 허락 같았다.
세주는 잠을 자고 일어난 듯 눈을 감았다가 뜨고 화분의 흙을 손으로 만져봤다. 퍼석한 게 물을 줄 때가 된 것 같아서 컵에 수돗물을 받아 부어주고 돌아섰다. 그러다 세주는 자신의 놓고 갔던 빨간 냉장고를 그제야 알아보게 되었다. 세주는 냉장고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그때는 몰랐는데 방과 너무 잘 어울려서 처음부터 여기 붙박여 있던 가구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냉장고 상단 오른쪽에 투명 테이프로 붙여놓은 분홍색 포스트잇이 세주의 눈에 들어왔다. ‘동하씨, 냉장고를 부탁해. 화분도.’ 세주가 냉장고와 화분을 동하한테 맡기면서 급하게 써놓고 갔던 메시지였다. 보관하듯 그 쪽지를 여태 버리지 않고 냉장고에 붙여놓은 것도 의외인데, 그보다 메시지 옆에 세주의 기억에 없는 문장이, 세주의 것이 아닌 글씨체로 적혀 있어서 더 의외였다. 그것은 ‘화분도’ 옆에 볼펜으로 쓰다만 ‘ㅁ’자를 연필로 이어 쓴 문장이었다. 세주는 무슨 말을 하려고 ‘ㅁ’자를 쓰다 말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ㅁ’자에 이어 쓴 문장은 이러했다.
몹시 보고 싶어.
그것은 동하의 글씨체였다.
세주는 창밖으로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몹시 보고 싶어, 라고 소리 내어 말해봤다. 그러자 그 문장이 세주가 동하한테 해주길 바라는 말인지, 동하가 세주한테 전하고 싶은 마음인지 궁금해졌다. 생각해보니 그것은 동하와 사귀는 동안 소식 없이 훌쩍 사라지곤 했던 세주에게 동하가 자주 문자로 남긴 말이기도 했다. 그 말의 진짜 의미는 사라진 이유가 무엇인지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동하 입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세주가 자신의 방에 냉장고와 화분을 놓고 간 이유가 ‘몹시’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세주는 뒤돌아 빨간 냉장고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묵직하게 풍겼다. 그 냄새를 맡으니 봄날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계의 끝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한 뒤 낡고 쓸모없는 물건을 미리 처분했던 세주는 버리기 아까운 물건을 친구들한테 택배로 부쳤다. 용량이 큰 건 용달차에 싣고 돌아다니며 친구 집 앞에 메모와 함께 두고 나왔다. 그러다 마지막에 남은 물건이 세주가 가장 아끼던 책이었고, 그때 마침 떠오른 사람이 동하였을 뿐이었다. 그때는 다시 돌아올 리 없을 거라 확신했던 터라 동하가 옛 남자친구였다는 사실도 별 상관없었다. 어쩌면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이 동하를 생각나게 한 이유였는지도 모르고, 과연 그 번호를 눌렀을 때 문이 열릴지 궁금해서 한번 들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동하에게 책과 냉장고를 준 건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의미는 오히려 숨을 쉬고 보살핌이 필요한 화분에 있었다. 생명을 책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그런데 동하가 이토록 훌륭하게 화분을 돌봐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자주 투덜거리던 사람이라 화분을 귀찮게 여길 줄로만 알았다. 토기 화분의 크기가 달라진 걸 보면 최근에 분갈이까지 해준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동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꽃말이 아닌 이름으로 기억되었고 동하, 동하, 동하라고 소리 내어 이름을 불러보자 자신과 헤어진 뒤로 동하가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가 궁금해졌다.
물을 데가 없어서 세주는 친구 집을 방문하고 나올 때마다 자신이 주었던 살림살이 일부를 기념사진으로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린 것처럼 빨간 냉장고의 둥그런 모서리 부분을 휴대폰으로 찍었다. 너무 일부분이라 살림살이 주인만이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해시태그는 잊어버린 친구의 이름 대신 꽃말로 붙여왔는데, 동하만은 이름을 잊지 않아서 예외로 할까 하다 그냥 문샤인 꽃말인 관용으로 입력했다.
오후가 되자 눈이 그치고 창 안으로 햇볕이 살그머니 비쳐들었다. 세주는 볕이 들어 따뜻해진 곳에 웅크리고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 몸이 으슬으슬해서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어느새 깜깜해져 있었다. 세주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하가 퇴근해 돌아올 시간이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문샤인까지 건강하게 잘 자란 걸 허락으로 해석했지만 동화와 통화가 이루어진 건 아니라서 세주는 방을 신세 질 수 없었다. 세주는 가방을 챙겨 방을 나가려다 말고 냉장고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지우개 달린 연필을 꺼내 ‘몹시 보고 싶어’를 문질러 지웠다. 오랜 고민 끝에 세주는 ‘ㅁ’자만 덩그러니 남은 자리에 ‘멀리 떠나도 다른 건 없더라’라고 쓰고 동하의 집을 나왔다.
막상 나왔지만 갈 데가 없어서 세주는 가까운 찜질방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찜질방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대부분 가족이나 연인끼리 온 사람들이었다. 세주는 수건으로 양 머리를 만들어 쓰고 따뜻한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추위는 금방 가셨지만 잠들만 하면 사람들이 머리 위와 발밑으로 지나가고,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와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세주는 잠이 저절로 들 때까지 생각에 잠겼다.
역시 생각의 시작은 식물 상점이었다. 십 년 동안 학습지 교사로 일해 번 돈을 꿈이었던 식물 상점에 몽땅 투자했지만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잘 안 되자 세주는 꿈마저 헛되게 꾸며 살았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그것이 세주로 하여금 끝까지 가보게 했다. 끝까지 가기 위해서 세주는 상점과 집, 살림살이를 모두 처분해야 했고, 지금도 그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세계의 끝을 찾으면 거기서 아주 오래 머물거나 아예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결정한 일이었으니까. 그 끝에서는 더이상 실패하지 않고 작은 꿈이라도 이룰 수 있을 거로 생각해서였다. 결국 꿈이란 어디를 가든, 그 크기가 어떻든 살아가는 한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그러나 막상 그 끝에 도착해 몇 달 살아보니 떠나왔나 싶을 정도로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세주는 늘 세계의 끝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떠나지 않았다면 자신이 머무는 곳이 끝이란 걸 몰랐을 테니 언제든 한번은 떠나야 했다. 그러니 찾아 떠났던 그 험한 길과 시간이 세주에게 전혀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걸 잃고, 그것도 모자라 일부러 버리고도 후회하지 않는 건 그 때문이었다. 아니 세주뿐만 아니라 누구든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누군가한테는 세계의 반대쪽 끝에 해당되었다. 세주는 그들이 찾아 헤매는 세계의 끝에 미리 와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편안해졌다. 시간과 길을 벌고, 번 만큼 마음을 비웠으니까.
생각에 잠긴 사이 몸은 노곤해졌는데도 어수선한 분위기 탓인지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세주는 휴대폰을 켜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제자리로 돌아온 뒤 올렸던 살림살이 피드들을 한 장 한 장 살폈다. 친구 이름 대신 꽃말로 해시태그를 붙여서인지 그들 대부분은 그것이 세주가 주고 갔던 살림살이란 걸 알아보지 못했다. 세주의 짐작이나 바람과 달리 친구에게 요긴한 물건이 아니었다면 사실 눈여겨볼 일도 없는 것이다. 어떤 친구는 몰라보고 댓글로 뭘 찍은 사진이냐고 묻기도 했다. 어쩌면 그들에게 세주의 살림살이는 화분처럼 쓸모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우정이란 해시태그를 붙여서 올린 사진, 옷이 담긴 캐리어를 가졌던 친구는 단번에 알아봤다. 그러자 물을 너무 많이 줘서 마란타를 죽게 한 친구가 처음만큼은 밉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장, 관용이란 해시태그를 붙인 빨간 냉장고에도 댓글이 하나 달려 있었다.
#멀리떠나도다른건없다.
동하였다. 빨간 냉장고 앞에 서서 포스트잇을 들여다봤을 동하의 모습을 떠올리자 세주는 이상하게 무거운 잠이 쏟아졌다.
세주는 찜질방 구석 자리에 앉아 브런치로 찐 달걀과 사이다를 먹으며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멀리떠나도다른건없다. 세주는 그 말을 달걀과 함께 씹어 먹고 사이다와 함께 꿀꺽 삼켰다. 다 먹고 났을 때 세주한테 그 말은 현관문과 화분에 이은 세 번째 허락처럼 느껴졌다. 찜질방의 어수선함이 싫기도 해서 세주는 오늘 한 번만 더 동하 집에 가보자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동하 집은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었다.
눈보라를 맞으며 동하 집에 도착한 세주는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 사이드 테이블 위 문샤인을 살핀 뒤 냉장고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들여다봤다. ‘멀리 떠나도 다른 건 없더라’라는 문장은 지워지고 없고 ‘ㅁ’으로 시작하는 다른 문장이 연필로 단정하게 적혀 있었다.
‘만약 갈 데가 없으면 내일까지 지내. 지방 출장이 있거든.’
출장이 있다는 건 왠지 거짓말 같았다. 그래도 방을 내준 게 고맙고 미안해서 세주는 동하가 남긴 인스타그램 댓글에 답글을 달았다.
‘#머물게해줘서고마워.’
세주는 추워서 보일러부터 튼 뒤 샤워를 하고 나와 뜨겁게 탄 커피를 마시며 빨간 냉장고를 열었다. 커피 냄새를 덮어버릴 정도로 책 냄새가 진하게 퍼져 나왔다. 동하는 이 책을 다 읽었을까. 세주는 책을 한 권 꺼내 펼쳤다. 읽었는지 간간이 동하가 그어놓은 밑줄이 보였다. 세주는 자리를 고쳐 앉아 밑줄 친 부분만 따라서 읽어나갔다. 세주는 책을 공유하니 이런 재미가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던 무미한 글에 어떤 이는 이토록 진지하게 공감하고 별 표시를 해둘 정도로 가슴에서 반짝거렸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렇게 생각도 감성도 다른 남녀가 만나 연애를 했으니 결과는 이별일 수밖에 없었다.
세주는 동하가 밑줄 친 문장만 계속 찾아서 읽었더니 마치 새 책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해서 여러 번 읽은 책인데도 이런 문장이 있었나 할 정도로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세주는 다른 책도 꺼내 동하의 흔적이 있는지 샅샅이 살폈다. 거의 다 읽은 듯 책마다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동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화분에 이어 세주가 주고 간 물건까지 요긴하게 잘 사용한 듯했다. 세주는 자신이 평소 가장 아꼈던 물건이 외면받지 않아서 안도했다. 이젠 자신이 아끼지 않아도 되어서였다. 아낀다는 건 아직도 미련을 둔다는 의미였다. 미련을 남기면 어디를 가든 돌아오고 싶어졌다. 그래서 세주는 대신 아껴줄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주는 책을 제자리에 넣어두고 불이 들어오지 않는 냉장고 문을 천천히 닫았다. 그러자 자신의 한 시절에 해당하는 문을 봉인한 느낌이 들었다.
세주는 저녁으로 동하가 아침에 끓여놓고 간 미역국에 냉장고를 뒤져서 나온 재료로 야채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그러고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귤을 해치우듯 까먹으며 영화를 두 편 보고 났더니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세주는 침대에 눕기 전 인스타그램에 잠깐 들어갔다. ‘#머물게해줘서고마워’에 동하의 답글이 달려 있었다. 역시 ㅁ으로 시작하는 문장이었다.
#문득세계의끝을보고온너의눈이궁금해졌어.
세계의 끝. 동하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 끝에 다녀왔다는 건 또. 세주는 동하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했다. 했다면 아마 술 마시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마음속 깊이 심어둔 이야기는 술김에 튀어나왔으니까. 그렇게라도 꺼내놓아야 마음에 다른 걸 보관해 둘 공간이 한 틈이라도 생겼다. 세주가 술을 좋아하고 자주 마시는 이유이기도 했다.
세주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찜질방과 달리 바닥은 푹신하고 지나가는 사람이나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하지만 세주는 여러 번 몸을 뒤척였다. 가로등 불빛이 창으로 스며든 탓일까. 아니면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며 유리창을 자꾸 건드려서일까. 반대 방향으로 돌아눕자 사이드 테이블 위 문샤인이 어둠 속에서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잘 자란 문샤인은 키가 커서 꼭 누군가 옆을 지키고 앉아 있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불안감은 천천히 잦아들었고, 천장을 보고 누운 세주는 더이상 뒤척이지 않았다.
동하가 생각하는 세계의 끝은 어디일까. 그것은 꼭 지리적인 끝만을 가리키는 건 아닐 것이다. 심리적인 끝도 누군가에게는 세계의 끝이었다. 그리고 끝이란 행복을 의미할 수도 절망을 뜻할 수도 있었다. 세주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한쪽 눈을 만져봤다. 이 눈이 보고 온 세계의 끝. 이 눈동자에 담아온 세계의 모습. 세주는 어릴 때부터 어딘가에 다른 삶,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곳이 자신이 도착해야 할 세계의 끝이라고. 할아버지가 항상 ‘세주야, 세주야, 넌 말이다’로 시작하는 이야기 속 삶은 세주의 귀에 평범하게 들리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커다란 배를 모는 사내였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하는 일을 여행이라 표현했고, 육지에 도착하면 여행하고 돌아왔다고 말하며 다녀온 곳에 관한 이야기를 동화책처럼 알아듣기 쉬운 문장으로 풀어냈다. 할아버지는 세주를 무릎에 앉혀놓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얘기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세주는 배를 탄 것처럼 멀미를 느꼈다. 얘기를 듣다 눈을 감고 졸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꿈으로 생생하게 이어졌다. 꿈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들은 마치 작은 엽서 같았다. 할아버지가 배를 정박한 곳에서 그 나라의 풍경이 그려진 엽서에 글을 써서 보내준 것 같은. 물론 할아버지는 엽서를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세주는 상상 속 엽서를 차곡차곡 모으며 언젠가 엽서에 나오는 삶을 찾아 떠나기로 다짐했다.
세주는 손으로 눈을 다시 한번 만져봤다. 여섯 달 동안 이 눈에 담아온 수십 장의 엽서들. 평생 배를 몰고 살았던 할아버지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다 냄새 나는 할아버지의 여행 이야기를 재밌게 들어주는 사람은 세주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세주는 할아버지가 외롭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의 끝을 보고 온 눈이 궁금하다는 동하의 말 때문이었다. 세주도 할아버지가 돌아오면 무슨 이야기를 꺼내놓을지 몹시 궁금했었으니까. 세주는 떠나야만 만날 수 있는 먼 곳의 이야기를 할아버지가 왜 해주었고 왜 떠나라고 했는지 돌아와서야 비로소 알았다. 다른 삶과 미래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먼 곳에서 돌아와 본래 자리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멀리 떠나도 다른 건 없지만 달라지는 것은 있다는 뜻이란 걸 말이다.
만월이었다. 깨끗하게 닦아놓은 듯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밤하늘에 둥근 달이 오롯이 떠 있었다. 도시가 밝아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만월이 된 달을 돋보이게 하려고 별들이 모두 뒤로 숨어버린 것 같았다. 창문을 연 세주는 팔꿈치로 창틀을 짚고 서서 달을 바라봤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달빛이 환하게 빛나서 몸이 노릇노릇 달궈지는 기분이었다. 내일이면 동하 집을 떠나야 한다. 아직은 어디로 갈 것인지, 가서 무얼 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흘러가듯 발길을 따라가면 어디든 닿을 것이고, 걸음이 멈추는 곳에서 무엇이든 시작하게 될 거라고 세주는 생각했다. 별다른 건 없지만 세계의 끝을 보고와 달라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 살 거라고. 달빛을 흠뻑 맞았더니 세주는 문샤인처럼 키가 훌쩍 자란 느낌이 들었다.
세주는 창문을 닫고 부엌으로 갔다. 일부러 거짓말까지 해가며 이틀 동안 방을 빌려준 동하에게 식사 한 끼라도 대접하고 싶어서 세주는 보온 밥솥에 밥을 안치고 된장국을 끓였다. 그리고 있는 재료로 반찬 몇 가지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동하와 만나면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면 함께 대관람차를 탄 일이었다. 세주는 열 살이 되던 생일날 가족과 놀이동산으로 놀러갔다 해 질 무렵 마지막 놀이기구로 대관람차를 탔던 이야기를 동하한테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세주는 술에 취한 상태라 자기가 그런 말을 한 걸 기억하지는 못했다. 동하와 관람차를 탄 날도 세주의 생일이었다. 동하는 레스토랑에서 생일파티를 해준 뒤 말도 없이 세주를 놀이동산으로 데리고 갔다. 파장 시간이 다 된 데다 길이 막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놀이기구는 모두 운행을 멈춘 상태였다. 하지만 동하는 오늘이 여자친구 생일이라며 간곡한 목소리로 직원에게 관람차를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 손을 붙잡고 한 가지를 더 귓속말로 부탁했다.
세주와 동하만 태운 관람차는 허공으로 올라갔고 한 바퀴를 돈 뒤 다시 허공으로 올라가다 가장 높은 지점에서 멈추었다. 도시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운데 서쪽 하늘로 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 세주는 붉은 노을을 말없이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동하 또한 아름다운 광경이 행여라도 흩어질까봐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세주를 뒤에서 가만히 지켜만 봤다. 그렇게 약속됐던 십 분이 지나고 관람차가 덜컹, 움직이기 시작하자 세주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세주는 자기 인생에 생일은 그 두 번뿐이었다고 생각했고, 그것만으로도 생일에 대한 추억은 충분해서 이후로는 날짜조차 잊고 지냈다.
그날의 대관람차 안에서 일몰을 보고 있던 세주를 흔들어 깨운 건 밥이 다 됐다는 보온 밥솥 안내음이었다. 정신이 든 세주는 눈을 깜빡거리며 고무장갑을 벗어 수도꼭지 위에 올려놓고 일찍 자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잠이 들 때까지 세주를 태운 대관람차는 공중을 돌다 꼭대기에서 멈추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모처럼 푹 자고 일어난 세주는 침대를 정리한 뒤 짐을 챙겼다. 가방을 메고 동하의 방을 한 번 둘러보던 세주는 불을 끄려다 말고 빨간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밑줄까지 그어가며 열심히 읽어서 가장 아끼는 물건이 됐던 책. 그마저 버리고 떠난 건 누구한테라도 마음을 들키고 싶어서가 아닐까, 라고 세주는 문득 생각했다. 들키고 싶은데 마침 떠오른 사람이 동하였던 것은 다시 만날 리 없는 헤어진 사람이라 들켜도 창피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고. 그리고 한 사람한테라도 지난 시간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싶었다고.
세주는 허리를 수그려 냉장고 안을 자세히 살폈다. 그래도 아끼던 책인데 동하한테 들켜버린 마음 중 딱 한 권만 챙겨가고 싶어졌다. 고르는 게 쉽지 않았지만 세주는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책을 꺼내 들어 책장을 넘겼다. 그때 갈피 사이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와 세주의 발등으로 떨어졌다. 뒷면에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적혀 있는 생일파티 사진이었다. 여기에 넣어뒀었구나. 세주는 낡은 사진 속 가족들의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 지금 보니 세주뿐만 아니라 모두가 가장 예뻤던 시절이었다. 잊고 지냈던 시간이 갑자기 되살아나자 세주는 오래된 기억을 보관하기에 가장 안전한 장소는 책장 사이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세주는 사진을 책장 사이에 도로 끼워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연필을 꺼내 동하가 포스트잇에 적어놓은 ‘만약 갈 데가 없으면 내일까지 지내. 지방 출장이 있거든.’을 지우고 ㅁ자가 남은 자리에 이렇게 적었다.
‘문샤인 앞으로도 잘 부탁해, 동하씨. 노란 달빛 꽃도 언젠가 꼭 피우고.’
세주는 마지막으로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을 업로드하며 빨간 냉장고에서 돌아섰다. 사진은 자신의 얼굴 한쪽을 셀카로 찍은 것이었다. 반쪽이긴 하지만 세주가 처음으로 올리는 얼굴 사진이었다. 세계의 끝을 보고 온 눈동자에는 물기가 잔잔하게 스며 있었고, 입술 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를 얼굴이었다.
불을 끄고 동하의 집을 나온 세주는 등 뒤에서 현관문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 모든 허락이 끝난 듯 계단을 내려갔다. 하루 사이 날씨가 많이 풀려서 바깥은 그렇게 춥지 않았다. 세주는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디로 갈까 방향을 찾는 나침반 바늘처럼 제자리에서 여러 바퀴 돌다 멈췄다. 그러고 천천히 한 바퀴를 더 돈 뒤 눈부신 태양을 따라 거침없이 걷기 시작했다. 거기에 무엇이 있을지 세주는 확신하고 있었다.
여덟 번 집을 옮겨다니다보니 친구가 많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지만 개중에는 허물없이 지낸 친구가 있는가 하면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 서먹해진 친구도 있었다. 그럼에도 친구들 대부분은 세주를 잘 챙겨주었다. 날도 추운데 며칠 더 지내다 가라고 말하는 친구를 뿌리치며 하룻밤만 보내고 집을 나온 건 화분 때문이었다. 세주가 살림살이를 주면서 함께 부탁했던 식물은 모두 죽어서 화분째 이미 버려졌거나 병든 상태로 어두운 곳에 방치되고 있었다. 아무리 친구가 잘 대해주어도 세주는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한 집이나 식물을 잘 돌보지 않은 친구 집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는 않았다. 그저 죽어버린 식물의 꽃말에 대해서만 생각했고 그러자 친구 이름은 잊히고 대신 꽃말로 친구의 이미지가 새롭게 각인되었다.
어떤 날보다 눈이 많이 쏟아진 오늘, 세주는 여덟 번 집을 옮긴 끝에 아홉 번째 집 앞에 서 있었다. 마지막 집이었고, 그것은 세주가 여기 말고는 갈 데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래전 헤어진 남자친구의 집이라 동성처럼 스스럼없이 재워달라고 하기엔 주저되는 면이 있었지만, 냉장고와 화분을 부탁하던 날과 같은 다급함을 폭설과 추위가 부추겨서 세주는 곧바로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여전히 번호를 바꾸지 않았는지 놀랍게 이번에도 현관문이 열렸다. 세주는 그날처럼 삐리릭,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를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세주는 동하의 집으로 첫발을 내디디며 다른 친구들처럼 화분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냥 나오기로 마음먹었다. 들어가자마자 세주는 화분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집이 작아서가 아니라 문샤인 산세베리아가 동하 침대 사이드 테이블 위에서 너무도 튼튼하고 아름답게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없는 화분을 보자 세주는 모든 긴장이 풀려 몸이 녹아내린 듯 툭, 하고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것은 마치 여기 조금 더 머물러도 된다는 두 번째 허락 같았다.
세주는 잠을 자고 일어난 듯 눈을 감았다가 뜨고 화분의 흙을 손으로 만져봤다. 퍼석한 게 물을 줄 때가 된 것 같아서 컵에 수돗물을 받아 부어주고 돌아섰다. 그러다 세주는 자신의 놓고 갔던 빨간 냉장고를 그제야 알아보게 되었다. 세주는 냉장고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그때는 몰랐는데 방과 너무 잘 어울려서 처음부터 여기 붙박여 있던 가구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냉장고 상단 오른쪽에 투명 테이프로 붙여놓은 분홍색 포스트잇이 세주의 눈에 들어왔다. ‘동하씨, 냉장고를 부탁해. 화분도.’ 세주가 냉장고와 화분을 동하한테 맡기면서 급하게 써놓고 갔던 메시지였다. 보관하듯 그 쪽지를 여태 버리지 않고 냉장고에 붙여놓은 것도 의외인데, 그보다 메시지 옆에 세주의 기억에 없는 문장이, 세주의 것이 아닌 글씨체로 적혀 있어서 더 의외였다. 그것은 ‘화분도’ 옆에 볼펜으로 쓰다만 ‘ㅁ’자를 연필로 이어 쓴 문장이었다. 세주는 무슨 말을 하려고 ‘ㅁ’자를 쓰다 말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ㅁ’자에 이어 쓴 문장은 이러했다.
몹시 보고 싶어.
그것은 동하의 글씨체였다.
세주는 창밖으로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몹시 보고 싶어, 라고 소리 내어 말해봤다. 그러자 그 문장이 세주가 동하한테 해주길 바라는 말인지, 동하가 세주한테 전하고 싶은 마음인지 궁금해졌다. 생각해보니 그것은 동하와 사귀는 동안 소식 없이 훌쩍 사라지곤 했던 세주에게 동하가 자주 문자로 남긴 말이기도 했다. 그 말의 진짜 의미는 사라진 이유가 무엇인지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동하 입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세주가 자신의 방에 냉장고와 화분을 놓고 간 이유가 ‘몹시’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세주는 뒤돌아 빨간 냉장고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묵직하게 풍겼다. 그 냄새를 맡으니 봄날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계의 끝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한 뒤 낡고 쓸모없는 물건을 미리 처분했던 세주는 버리기 아까운 물건을 친구들한테 택배로 부쳤다. 용량이 큰 건 용달차에 싣고 돌아다니며 친구 집 앞에 메모와 함께 두고 나왔다. 그러다 마지막에 남은 물건이 세주가 가장 아끼던 책이었고, 그때 마침 떠오른 사람이 동하였을 뿐이었다. 그때는 다시 돌아올 리 없을 거라 확신했던 터라 동하가 옛 남자친구였다는 사실도 별 상관없었다. 어쩌면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이 동하를 생각나게 한 이유였는지도 모르고, 과연 그 번호를 눌렀을 때 문이 열릴지 궁금해서 한번 들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동하에게 책과 냉장고를 준 건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의미는 오히려 숨을 쉬고 보살핌이 필요한 화분에 있었다. 생명을 책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그런데 동하가 이토록 훌륭하게 화분을 돌봐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자주 투덜거리던 사람이라 화분을 귀찮게 여길 줄로만 알았다. 토기 화분의 크기가 달라진 걸 보면 최근에 분갈이까지 해준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동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꽃말이 아닌 이름으로 기억되었고 동하, 동하, 동하라고 소리 내어 이름을 불러보자 자신과 헤어진 뒤로 동하가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가 궁금해졌다.
물을 데가 없어서 세주는 친구 집을 방문하고 나올 때마다 자신이 주었던 살림살이 일부를 기념사진으로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린 것처럼 빨간 냉장고의 둥그런 모서리 부분을 휴대폰으로 찍었다. 너무 일부분이라 살림살이 주인만이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해시태그는 잊어버린 친구의 이름 대신 꽃말로 붙여왔는데, 동하만은 이름을 잊지 않아서 예외로 할까 하다 그냥 문샤인 꽃말인 관용으로 입력했다.
오후가 되자 눈이 그치고 창 안으로 햇볕이 살그머니 비쳐들었다. 세주는 볕이 들어 따뜻해진 곳에 웅크리고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 몸이 으슬으슬해서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어느새 깜깜해져 있었다. 세주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하가 퇴근해 돌아올 시간이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문샤인까지 건강하게 잘 자란 걸 허락으로 해석했지만 동화와 통화가 이루어진 건 아니라서 세주는 방을 신세 질 수 없었다. 세주는 가방을 챙겨 방을 나가려다 말고 냉장고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지우개 달린 연필을 꺼내 ‘몹시 보고 싶어’를 문질러 지웠다. 오랜 고민 끝에 세주는 ‘ㅁ’자만 덩그러니 남은 자리에 ‘멀리 떠나도 다른 건 없더라’라고 쓰고 동하의 집을 나왔다.
막상 나왔지만 갈 데가 없어서 세주는 가까운 찜질방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찜질방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대부분 가족이나 연인끼리 온 사람들이었다. 세주는 수건으로 양 머리를 만들어 쓰고 따뜻한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추위는 금방 가셨지만 잠들만 하면 사람들이 머리 위와 발밑으로 지나가고,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와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세주는 잠이 저절로 들 때까지 생각에 잠겼다.
역시 생각의 시작은 식물 상점이었다. 십 년 동안 학습지 교사로 일해 번 돈을 꿈이었던 식물 상점에 몽땅 투자했지만 기대만큼 잘되지 않았다. 잘 안 되자 세주는 꿈마저 헛되게 꾸며 살았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그것이 세주로 하여금 끝까지 가보게 했다. 끝까지 가기 위해서 세주는 상점과 집, 살림살이를 모두 처분해야 했고, 지금도 그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세계의 끝을 찾으면 거기서 아주 오래 머물거나 아예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결정한 일이었으니까. 그 끝에서는 더이상 실패하지 않고 작은 꿈이라도 이룰 수 있을 거로 생각해서였다. 결국 꿈이란 어디를 가든, 그 크기가 어떻든 살아가는 한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그러나 막상 그 끝에 도착해 몇 달 살아보니 떠나왔나 싶을 정도로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세주는 늘 세계의 끝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떠나지 않았다면 자신이 머무는 곳이 끝이란 걸 몰랐을 테니 언제든 한번은 떠나야 했다. 그러니 찾아 떠났던 그 험한 길과 시간이 세주에게 전혀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걸 잃고, 그것도 모자라 일부러 버리고도 후회하지 않는 건 그 때문이었다. 아니 세주뿐만 아니라 누구든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누군가한테는 세계의 반대쪽 끝에 해당되었다. 세주는 그들이 찾아 헤매는 세계의 끝에 미리 와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편안해졌다. 시간과 길을 벌고, 번 만큼 마음을 비웠으니까.
생각에 잠긴 사이 몸은 노곤해졌는데도 어수선한 분위기 탓인지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세주는 휴대폰을 켜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제자리로 돌아온 뒤 올렸던 살림살이 피드들을 한 장 한 장 살폈다. 친구 이름 대신 꽃말로 해시태그를 붙여서인지 그들 대부분은 그것이 세주가 주고 갔던 살림살이란 걸 알아보지 못했다. 세주의 짐작이나 바람과 달리 친구에게 요긴한 물건이 아니었다면 사실 눈여겨볼 일도 없는 것이다. 어떤 친구는 몰라보고 댓글로 뭘 찍은 사진이냐고 묻기도 했다. 어쩌면 그들에게 세주의 살림살이는 화분처럼 쓸모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우정이란 해시태그를 붙여서 올린 사진, 옷이 담긴 캐리어를 가졌던 친구는 단번에 알아봤다. 그러자 물을 너무 많이 줘서 마란타를 죽게 한 친구가 처음만큼은 밉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장, 관용이란 해시태그를 붙인 빨간 냉장고에도 댓글이 하나 달려 있었다.
#멀리떠나도다른건없다.
동하였다. 빨간 냉장고 앞에 서서 포스트잇을 들여다봤을 동하의 모습을 떠올리자 세주는 이상하게 무거운 잠이 쏟아졌다.
세주는 찜질방 구석 자리에 앉아 브런치로 찐 달걀과 사이다를 먹으며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멀리떠나도다른건없다. 세주는 그 말을 달걀과 함께 씹어 먹고 사이다와 함께 꿀꺽 삼켰다. 다 먹고 났을 때 세주한테 그 말은 현관문과 화분에 이은 세 번째 허락처럼 느껴졌다. 찜질방의 어수선함이 싫기도 해서 세주는 오늘 한 번만 더 동하 집에 가보자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동하 집은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었다.
눈보라를 맞으며 동하 집에 도착한 세주는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 사이드 테이블 위 문샤인을 살핀 뒤 냉장고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들여다봤다. ‘멀리 떠나도 다른 건 없더라’라는 문장은 지워지고 없고 ‘ㅁ’으로 시작하는 다른 문장이 연필로 단정하게 적혀 있었다.
‘만약 갈 데가 없으면 내일까지 지내. 지방 출장이 있거든.’
출장이 있다는 건 왠지 거짓말 같았다. 그래도 방을 내준 게 고맙고 미안해서 세주는 동하가 남긴 인스타그램 댓글에 답글을 달았다.
‘#머물게해줘서고마워.’
세주는 추워서 보일러부터 튼 뒤 샤워를 하고 나와 뜨겁게 탄 커피를 마시며 빨간 냉장고를 열었다. 커피 냄새를 덮어버릴 정도로 책 냄새가 진하게 퍼져 나왔다. 동하는 이 책을 다 읽었을까. 세주는 책을 한 권 꺼내 펼쳤다. 읽었는지 간간이 동하가 그어놓은 밑줄이 보였다. 세주는 자리를 고쳐 앉아 밑줄 친 부분만 따라서 읽어나갔다. 세주는 책을 공유하니 이런 재미가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던 무미한 글에 어떤 이는 이토록 진지하게 공감하고 별 표시를 해둘 정도로 가슴에서 반짝거렸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렇게 생각도 감성도 다른 남녀가 만나 연애를 했으니 결과는 이별일 수밖에 없었다.
세주는 동하가 밑줄 친 문장만 계속 찾아서 읽었더니 마치 새 책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해서 여러 번 읽은 책인데도 이런 문장이 있었나 할 정도로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세주는 다른 책도 꺼내 동하의 흔적이 있는지 샅샅이 살폈다. 거의 다 읽은 듯 책마다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동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화분에 이어 세주가 주고 간 물건까지 요긴하게 잘 사용한 듯했다. 세주는 자신이 평소 가장 아꼈던 물건이 외면받지 않아서 안도했다. 이젠 자신이 아끼지 않아도 되어서였다. 아낀다는 건 아직도 미련을 둔다는 의미였다. 미련을 남기면 어디를 가든 돌아오고 싶어졌다. 그래서 세주는 대신 아껴줄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주는 책을 제자리에 넣어두고 불이 들어오지 않는 냉장고 문을 천천히 닫았다. 그러자 자신의 한 시절에 해당하는 문을 봉인한 느낌이 들었다.
세주는 저녁으로 동하가 아침에 끓여놓고 간 미역국에 냉장고를 뒤져서 나온 재료로 야채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그러고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귤을 해치우듯 까먹으며 영화를 두 편 보고 났더니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세주는 침대에 눕기 전 인스타그램에 잠깐 들어갔다. ‘#머물게해줘서고마워’에 동하의 답글이 달려 있었다. 역시 ㅁ으로 시작하는 문장이었다.
#문득세계의끝을보고온너의눈이궁금해졌어.
세계의 끝. 동하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 끝에 다녀왔다는 건 또. 세주는 동하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했다. 했다면 아마 술 마시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마음속 깊이 심어둔 이야기는 술김에 튀어나왔으니까. 그렇게라도 꺼내놓아야 마음에 다른 걸 보관해 둘 공간이 한 틈이라도 생겼다. 세주가 술을 좋아하고 자주 마시는 이유이기도 했다.
세주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찜질방과 달리 바닥은 푹신하고 지나가는 사람이나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하지만 세주는 여러 번 몸을 뒤척였다. 가로등 불빛이 창으로 스며든 탓일까. 아니면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며 유리창을 자꾸 건드려서일까. 반대 방향으로 돌아눕자 사이드 테이블 위 문샤인이 어둠 속에서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잘 자란 문샤인은 키가 커서 꼭 누군가 옆을 지키고 앉아 있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불안감은 천천히 잦아들었고, 천장을 보고 누운 세주는 더이상 뒤척이지 않았다.
동하가 생각하는 세계의 끝은 어디일까. 그것은 꼭 지리적인 끝만을 가리키는 건 아닐 것이다. 심리적인 끝도 누군가에게는 세계의 끝이었다. 그리고 끝이란 행복을 의미할 수도 절망을 뜻할 수도 있었다. 세주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한쪽 눈을 만져봤다. 이 눈이 보고 온 세계의 끝. 이 눈동자에 담아온 세계의 모습. 세주는 어릴 때부터 어딘가에 다른 삶,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곳이 자신이 도착해야 할 세계의 끝이라고. 할아버지가 항상 ‘세주야, 세주야, 넌 말이다’로 시작하는 이야기 속 삶은 세주의 귀에 평범하게 들리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커다란 배를 모는 사내였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하는 일을 여행이라 표현했고, 육지에 도착하면 여행하고 돌아왔다고 말하며 다녀온 곳에 관한 이야기를 동화책처럼 알아듣기 쉬운 문장으로 풀어냈다. 할아버지는 세주를 무릎에 앉혀놓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얘기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세주는 배를 탄 것처럼 멀미를 느꼈다. 얘기를 듣다 눈을 감고 졸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꿈으로 생생하게 이어졌다. 꿈에서 본 아름다운 풍경들은 마치 작은 엽서 같았다. 할아버지가 배를 정박한 곳에서 그 나라의 풍경이 그려진 엽서에 글을 써서 보내준 것 같은. 물론 할아버지는 엽서를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세주는 상상 속 엽서를 차곡차곡 모으며 언젠가 엽서에 나오는 삶을 찾아 떠나기로 다짐했다.
세주는 손으로 눈을 다시 한번 만져봤다. 여섯 달 동안 이 눈에 담아온 수십 장의 엽서들. 평생 배를 몰고 살았던 할아버지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다 냄새 나는 할아버지의 여행 이야기를 재밌게 들어주는 사람은 세주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세주는 할아버지가 외롭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의 끝을 보고 온 눈이 궁금하다는 동하의 말 때문이었다. 세주도 할아버지가 돌아오면 무슨 이야기를 꺼내놓을지 몹시 궁금했었으니까. 세주는 떠나야만 만날 수 있는 먼 곳의 이야기를 할아버지가 왜 해주었고 왜 떠나라고 했는지 돌아와서야 비로소 알았다. 다른 삶과 미래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먼 곳에서 돌아와 본래 자리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멀리 떠나도 다른 건 없지만 달라지는 것은 있다는 뜻이란 걸 말이다.
만월이었다. 깨끗하게 닦아놓은 듯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밤하늘에 둥근 달이 오롯이 떠 있었다. 도시가 밝아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만월이 된 달을 돋보이게 하려고 별들이 모두 뒤로 숨어버린 것 같았다. 창문을 연 세주는 팔꿈치로 창틀을 짚고 서서 달을 바라봤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달빛이 환하게 빛나서 몸이 노릇노릇 달궈지는 기분이었다. 내일이면 동하 집을 떠나야 한다. 아직은 어디로 갈 것인지, 가서 무얼 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흘러가듯 발길을 따라가면 어디든 닿을 것이고, 걸음이 멈추는 곳에서 무엇이든 시작하게 될 거라고 세주는 생각했다. 별다른 건 없지만 세계의 끝을 보고와 달라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 살 거라고. 달빛을 흠뻑 맞았더니 세주는 문샤인처럼 키가 훌쩍 자란 느낌이 들었다.
세주는 창문을 닫고 부엌으로 갔다. 일부러 거짓말까지 해가며 이틀 동안 방을 빌려준 동하에게 식사 한 끼라도 대접하고 싶어서 세주는 보온 밥솥에 밥을 안치고 된장국을 끓였다. 그리고 있는 재료로 반찬 몇 가지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동하와 만나면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면 함께 대관람차를 탄 일이었다. 세주는 열 살이 되던 생일날 가족과 놀이동산으로 놀러갔다 해 질 무렵 마지막 놀이기구로 대관람차를 탔던 이야기를 동하한테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세주는 술에 취한 상태라 자기가 그런 말을 한 걸 기억하지는 못했다. 동하와 관람차를 탄 날도 세주의 생일이었다. 동하는 레스토랑에서 생일파티를 해준 뒤 말도 없이 세주를 놀이동산으로 데리고 갔다. 파장 시간이 다 된 데다 길이 막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놀이기구는 모두 운행을 멈춘 상태였다. 하지만 동하는 오늘이 여자친구 생일이라며 간곡한 목소리로 직원에게 관람차를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 손을 붙잡고 한 가지를 더 귓속말로 부탁했다.
세주와 동하만 태운 관람차는 허공으로 올라갔고 한 바퀴를 돈 뒤 다시 허공으로 올라가다 가장 높은 지점에서 멈추었다. 도시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운데 서쪽 하늘로 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 세주는 붉은 노을을 말없이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동하 또한 아름다운 광경이 행여라도 흩어질까봐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세주를 뒤에서 가만히 지켜만 봤다. 그렇게 약속됐던 십 분이 지나고 관람차가 덜컹, 움직이기 시작하자 세주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세주는 자기 인생에 생일은 그 두 번뿐이었다고 생각했고, 그것만으로도 생일에 대한 추억은 충분해서 이후로는 날짜조차 잊고 지냈다.
그날의 대관람차 안에서 일몰을 보고 있던 세주를 흔들어 깨운 건 밥이 다 됐다는 보온 밥솥 안내음이었다. 정신이 든 세주는 눈을 깜빡거리며 고무장갑을 벗어 수도꼭지 위에 올려놓고 일찍 자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잠이 들 때까지 세주를 태운 대관람차는 공중을 돌다 꼭대기에서 멈추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모처럼 푹 자고 일어난 세주는 침대를 정리한 뒤 짐을 챙겼다. 가방을 메고 동하의 방을 한 번 둘러보던 세주는 불을 끄려다 말고 빨간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밑줄까지 그어가며 열심히 읽어서 가장 아끼는 물건이 됐던 책. 그마저 버리고 떠난 건 누구한테라도 마음을 들키고 싶어서가 아닐까, 라고 세주는 문득 생각했다. 들키고 싶은데 마침 떠오른 사람이 동하였던 것은 다시 만날 리 없는 헤어진 사람이라 들켜도 창피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고. 그리고 한 사람한테라도 지난 시간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싶었다고.
세주는 허리를 수그려 냉장고 안을 자세히 살폈다. 그래도 아끼던 책인데 동하한테 들켜버린 마음 중 딱 한 권만 챙겨가고 싶어졌다. 고르는 게 쉽지 않았지만 세주는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책을 꺼내 들어 책장을 넘겼다. 그때 갈피 사이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와 세주의 발등으로 떨어졌다. 뒷면에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적혀 있는 생일파티 사진이었다. 여기에 넣어뒀었구나. 세주는 낡은 사진 속 가족들의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 지금 보니 세주뿐만 아니라 모두가 가장 예뻤던 시절이었다. 잊고 지냈던 시간이 갑자기 되살아나자 세주는 오래된 기억을 보관하기에 가장 안전한 장소는 책장 사이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세주는 사진을 책장 사이에 도로 끼워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연필을 꺼내 동하가 포스트잇에 적어놓은 ‘만약 갈 데가 없으면 내일까지 지내. 지방 출장이 있거든.’을 지우고 ㅁ자가 남은 자리에 이렇게 적었다.
‘문샤인 앞으로도 잘 부탁해, 동하씨. 노란 달빛 꽃도 언젠가 꼭 피우고.’
세주는 마지막으로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을 업로드하며 빨간 냉장고에서 돌아섰다. 사진은 자신의 얼굴 한쪽을 셀카로 찍은 것이었다. 반쪽이긴 하지만 세주가 처음으로 올리는 얼굴 사진이었다. 세계의 끝을 보고 온 눈동자에는 물기가 잔잔하게 스며 있었고, 입술 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를 얼굴이었다.
불을 끄고 동하의 집을 나온 세주는 등 뒤에서 현관문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 모든 허락이 끝난 듯 계단을 내려갔다. 하루 사이 날씨가 많이 풀려서 바깥은 그렇게 춥지 않았다. 세주는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디로 갈까 방향을 찾는 나침반 바늘처럼 제자리에서 여러 바퀴 돌다 멈췄다. 그러고 천천히 한 바퀴를 더 돈 뒤 눈부신 태양을 따라 거침없이 걷기 시작했다. 거기에 무엇이 있을지 세주는 확신하고 있었다.
장은진
내 꿈과 교환해도 좋아요. 당신이 봄을 선물해준다면.
2021/12/28
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