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그녀의 몸이 좌우로 흔들리고 분명 입으로는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좌우의 흔들림이 점점 격렬해졌다. (…) 남자의 귀를 때리는 소리는 점점 배가되어 묘지 전체를 누르고 있던 침묵을 몰아내고 함성이 되어 거대한 가상의 벽 안에 갇힌 채 쩡쩡 울렸다. 묘석들이 제각기 흔들거리는 듯했고 이제 그 함성은 벽에 금을 내고 그 틈으로 홍수처럼 사방으로 터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남자는 모로 쓰러져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었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268쪽)

   목적서사와 여성에게 할당된 이미지들

    최윤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문학과사회》 1988년 여름호1); 위의 인용은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학과지성사, 1993.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할 경우 본문에 쪽수만을 표기한다.)는 5월 광주를 직접 지시하는 것을 한사코 피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5월 광주’ 소설로서 의미를 확보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학대받는 ‘소녀’와 그녀에게 폭력을 행하는 남자의 대비 구도다. 여기에서 시민/군부, 수동/능동, 피해/가해 구도가 읽히는 것은 자연스럽고, 그녀가 ‘광주’라는 아픔을 체현하는 인물인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설 속 중심 내레이터인 ‘우리’가 소녀를 호명하고 의미부여할 때, 이 소설은 명확히 5월 광주의 알레고리이자 역사에의 진혼곡으로 위치된다.
    그런데 근대 목적서사의 측면에서 이 점을 다시 생각해본다. 여성이 역사의 주체로 등재되는 경우는 대개 숭고한 어머니 혹은 순결한 누이로서였다. 단적으로 항쟁 중 광주에서의 여성의 이미지란 무엇일까. 내게는 주먹밥을 지어 나르던 어머니들의 이미지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이것은 목적서사의 익숙한 재현 이미지이기도 하다. 또한 사실적시의 문제와는 별개로, 역사 재현물 속에서 그들이 피해자, 희생자가 아닌 경우는 드물다. 그렇기에 그때의 여성 이야기는 ‘수난사’의 형식을 띠기 마련이었고, 훼손된 누이와 어머니들 옆에는 종종 훼손되기 이전의 고향이나 모성의 이미지가 나란히 암시되곤 했다. 호모소셜한 형제애로 구축되는 근대, 근대의 목적서사에서는 숭고한 어머니, 순결한 누이가 그 성스러움을 보조하는 것이었다.
    이 소설도 그런 재현의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보인다. 주인공 소녀는, 지속적 폭력에 노출되지만 그 폭력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속수무책 피학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오빠는 부재하는 아버지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호명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소녀에 대해 “사회적 제관계의 결들이 지워진 순수한 혹은 신비한 실체”이자 “자연으로 수렴될 가능성”이 있다고 비판하고, ‘꽃잎=소녀=순수성의 표상=텅 빈 텍스트’ 도식을 지적한 논의도2)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 소녀는 더럽고 무섭고 끔찍하다

    그런데 소녀로부터 피해자 개인의 인격을 지우고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본다면 어떨까. 잠시 이런 대목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를 섬뜩하게 하는 웃음을 흘렸다. 예쁘다거나 추하다거나 느낌조차를 무화시키는 다른 어떤 것이 무어라고 말로는 되어 나오지 않지만 이 작은 몸뚱어리가 머물러 있는 세상은 남자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곳이리라는 결정적인 느낌이 그의 본능적인 방어적 근육들을 수축시켰다. (…) 설령 녹초가 되게 두들겨놓아도 다시금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누웠던 풀잎처럼 스스로 일어나 앉을 일이 무서워 오히려 그 자신이 기진맥진할 때까지 으르렁거렸다. 한동안 남자는 그녀를 건드리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더러웠고 무서웠고 끔찍했다.”(209~212쪽)
    여기에는 이 소녀에 대한 통념적 이미지를 배반하는 무언가가 있다. 남자에게 소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다. 소녀는 남자가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해도 꿈쩍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남자의 즉각적 반응은, 본능적 방어 근육이 수축되는 몸의 감각을 통해 먼저 나타난다. 이것이 남자의 두려움을 의미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소설 전체를 정색하고 다시 읽어보자. 특히 남자가 초점화자로 등장하는 1, 5, 8절은, 소녀의 기괴스러움을 묘사하는데 대부분 할애되어 있다. 이 소설은 프롤로그를 포함 총 10절로 구성되어 있다. ①우리(프롤로그, 3, 6, 10절), ②남자(1, 5, 8절), ③소녀(2, 4, 7, 9절)의 시선에 의해 세 층위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여기에서 오랫동안 주목되어 읽힌 것은 ①과 ③이었다. ③은 피해자 소녀의 고통과 슬픔을 절절하게 전달한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피해자의 고통이 두드러진다. ①의 ‘우리’는 그것을 언어화하고 5월 광주의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남자 시점의 ②는 앞서 인용한 소녀의 기괴함, 섬뜩함과 관련되는 내용이고 그간 진지하게 읽혀지지 않았다. ②의 이야기 층위에서 말하자면, 남자는 소녀를 학대할수록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고 무기력해진다. 남자에게 그녀는 악몽 같고, 위험한 전염병 같고, 관속의 해골 같은 존재다. 지독하게 학대해도 무반응이고, 알 수 없는 웃음과 몸짓, 그리고 침묵을 오가는 이 존재 앞에서 남자는 공포스럽다.
    즉, ②의 서사는, 남자가 소녀에 의해 동화되며 변해가는 과정이라고만 독해되어 왔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는 소녀로 인한 공포에 미쳐간 것이다. 남자의 폭력은 공포에 질린 아비규환의 몸짓이다. 남자가 소녀에게 호의를 베풀어도 “매번 남자가 대가로 되돌려 받은 것은 한참 동안이나 그의 등골이 오싹 진저리치게끔 했던 붉은 빛깔이라고밖에 달리는 표현할 수 없는 웃음”(245쪽)이었다. 이 이질적인 소녀의 모습은, 단지 한 인격체의 광기로만 여겨졌기에 묵과되었는지 모른다. 광기는 언어적 구조 너머의 사건이고, 해독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소녀 개인의 광기만을 의미했던 것일까. 광기라고 여겨진 그 기괴함, 나아가 광기를 재전유한 ‘광주’ 자체가 인물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5월 광주’라는 절대적 배경을 잠시 괄호쳐둔다면, 이 소녀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산송장(undead)에 가까운 존재다. 소설 속 누군가는 “그녀와 동일한 인간인 것이 수치스러웠고 무서웠다.”(249쪽)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적어도 ②의 서사에서 소녀는 무서워하는 희생자, 피해자가 아니다.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오히려 남자를 ‘무섭게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 명백한 설정이 거의 주목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소녀의 ‘힘’은 어떻게 발현되는가

   무섭게 하는 것에는 어떤 힘이 있다. 단, 유의할 것은, 무섭게 하는 존재 자체가 무서운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정서가 그러하듯 공포는 어떤 ‘대상’의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과 주체를 가로질러 발생한다. 나(주체)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익숙한 것이 낯설어지고, 자명했던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에서 공포가 시작한다. 예기치 않은 것,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들이닥칠 때, 그 한계체험으로서 몸이 먼저 반응하고 전율하는 것이 공포다.
    이 소설에서도 소녀 자체가 폭력적이고 강하기 때문에 남자가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그녀와의 첫 대면에서 “예쁘다거나 추하다거나 느낌조차를 무화시키는 다른 어떤 것”을 토로했다. 즉, 그녀는 기존의 언어로 구조화된 현실 속 의미로 파악되지 않는 존재다. 그녀의 말이 실성한 이의 웅얼거림, 침묵, 고함 등에 머물 뿐, 언어화될 수 없는 ‘소리’에 불과했던 것도 이와 관련된다. 또한 소녀는 “쪼글거리는 살점이 녹아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흐물”거린다고 묘사된다. 남자는 “손을 뻗어 여자애의 턱을 받”친다. 그녀는 겨우 ‘윤곽’만 알아 볼 정도로 망가진다. 그녀의 몸은 악취가 심하고 멍으로 뒤덮인 것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스스로를 “검고 쭈글쭈글 오므라들고 뺨이 다시 팬 괴물”로 여기고 있고, 여러 대목에서 소녀의 ‘몸’은 액상화된 이미지로 묘사된다.
    이런 소녀의 형상뿐 아니라, 폭력이 자기의 강함을 확인시키지 않고 복종을 가져오지도 않는 사실 앞에서 남자는 당황하고 허둥지둥한다. 그리고 남자는 종국에 소녀처럼 스스로 정신을 놓아버린다. 여기에서 이미 가학/피학 구분은 무화되어버린다. 당연히 소녀의 실제 몸 역시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게 강간, 학대당하기만 하는 몸이 아니다. 적어도 ②의 서사(1, 5, 8절)에서 그녀는 폭력, 가학을 ‘장악’해버리고 있다. 소녀가 강간당하면서 “파랑새가 비집고 들어”왔다고 표현하는 대목은 “자연으로 수렴될 가능성”(이혜령, 같은 글)을 넘어 다시 읽혀야 한다. 소녀의 발화는 정확히 이렇다. “파랑새가 비집고 들어올 때 많이 아팠지만 소리 지르지 않았어. 그 정도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수천 마리가 덤벼보라지. 나는 절대 소리를 지르고 무릎을 꿇거나 빌거나 하지 않을 거야.”(237쪽)
    즉, 소녀가 광주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지우고 생각하면, 그녀는 수동적 피해자의 자리에 있기를 몸으로 거부하는 존재다. 그녀는 더이상 능동/수동, 가해/피해, 주체/대상의 도식에 따라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그 도식과 이미지를 중지시키는 괴물이다. 그러므로 소녀는 5월 광주를 고발하고 증언하는 휴머니즘적 존재의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 속 그녀는, 5월 광주의 의미 역시도 과감히 재구축한다. ‘광주’를 피해, 희생의 자리로부터 이탈시키고 그것에 강력하고 폭발적인 힘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남자가 어느 날 (광주를 상징하는)묘비들 사이에서 목격하는 소녀의 다음과 같은 모습이 그 절정을 보여준다. “남자의 귀를 때리는 소리는 점점 배가되어 묘지 전체를 누르고 있던 침묵을 몰아내고 함성이 되어 거대한 가상의 벽 안에 갇힌 채 쩡쩡 울렸다. 묘석들이 제각기 흔들거리는 듯했고 이제 그 함성은 벽에 금을 내고 그 틈으로 홍수처럼 사방으로 터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남자는 모로 쓰러져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었다.”(268쪽)
    항쟁 당시의 현장을 환유하기도 할 이 강력한 폭발력=소녀의 힘은, 진정 이 소설의 압권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이 장면을 목격한 이후 남자의 붕괴는 가속화한다. 소녀=광주는 더이상 진혼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해한 상대를 무섭게 하고 그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게끔 마구 난입하는 광폭한 존재다. 또한 그녀가 치료를 거부하며 병원을 나서고, 소문으로만 존재할 것을 암시하는 소설 결말은, 소녀=광주가 영원히 누구/무엇에도 포섭되지 않고 일상을 불안케 하는 존재로만 남을 것임을 추측케 한다. 즉, 소문으로만 떠도는 이 소녀=광주는, 시간이 지나도 되풀이되곤 하는 비극적 역사의 시간 뿐 아니라, 안온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믿어지는 우리의 세계와 일상 역시 계속 불편케 할 것이다. 이 소설이 이분법 도식에 근거하는 여성성이나 여성수난서사로서만 읽어서는 안 될 이유가 바로 이러한 소녀=광주의 ‘힘’에 있는 것이다.

    정체성 너머를 향하는 여성적 글쓰기

   작가 최윤이 훗날 회고하듯, 이 소설은 1980년대 당시 암묵적으로 “여성에게 ‘할당’된 주제” “문학적 관행”3) 등이 존재하던 것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작가가, 당시의 문학적 관행, 요구와 타협하면서 동시에 과감히 일탈한 것이 바로 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그 요구를 안전하게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힐 수 있을 ‘트릭’으로서 이 소녀의 이질적 형상을 그려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것이 작가의 진짜 의도인지 아닌지는 부차적이다. 글쓰기란 종종, 주어진 제도뿐 아니라, 쓰는 이의 (자)의식, 의도를 넘어서거나 가로질러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창조 행위인한, 그것은 “개인적 주체를 뛰어넘어 움직이는 하나의 무인칭적인 요소와 이에 끈질기게 저항하는 개인적인 요소 사이의 복잡한 변증법”4)이다. 최윤 역시 ‘여성적 글쓰기’란 “자의식을 늘 뛰어넘는 어느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때의 여성적 글쓰기란, 제도는 물론이거니와 생물학적, 규범적 몸에 갇힌 뚜렷한 정체성을 기입하는 글쓰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여성이라는 정체성도 언어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 인공물로서의 여성을 강요한 세계와, 그 세계의 언어가 먼저 있다. 성별의 수행과 그것에만 근거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자주 실패한다. 우리를 구속한 세계의 언어를 가지고 그대로 돌려주는 방식의 문학은 안타깝게도, 기존 질서와 세계를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승인하고 그 구조를 강화시켜버리는 한계에 부딪히기도 한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겨냥해야 할 것은, 나를 규정시키고 이 세계를 만든 그 언어(사고)인 것이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어떤 전형을 강요하는 언어들, 그것에 의한 정체성의 도식과 그에 근거해 세워진 세계를 자기모순에 빠지게 만들기, 그 구조의 주박(呪縛)에서 우선은 풀려나기. 그리하여 다른 언어, 다른 세계에의 상상력을 더 밀어붙이기. 이것이 지금 다시 읽은 ‘소녀’에게서 발견한 힘이다. 그리고 이 힘이, 30여년이 지나서도 계속 이어지고 펼쳐지고 있는 지금의 여성적 글쓰기에 더 풍부한 상상력과 방법을 제공하리라고 확신한다.

김미정

세기말 어느 겨울, 처음 문학평론이란 것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P선생님의 평론집 이외에 한국어로 출간된 여성평론가의 단행본을 발견하지 못해 잠시 절망했던 일이 있다. 지금의 내 글이 깊은 역사성에 발 딛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된다. 지금은 정체성주의적 문학을 넘어선 문학에 대해 고민하며, 유물론적 조건들과 연동되는 오늘날의 감수성, 말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2018/01/30
2호

1
이 소설은 《문학과사회》 1988년 여름호에 처음 발표되었다. 참고로 1988년은 《문학과사회》 《창작과비평》이 신군부에 의해 폐간된 후 9년 만에 복간된 해다.
2
이혜령, 「쓰여진 혹은 유예된 광기 : 최윤론」, 『한국소설과 골상학적 타자들』, 소명출판, 2007, 283~285쪽.
3
최윤 인터뷰, 「땅에 밀착한 파충류처럼 혹은 전장의 뮤즈처럼」, 《문예중앙》 2006년 봄호.
4
조르조 아감벤, 『불과 글』, 윤병언 옮김, 책세상, 2016, 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