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은 오히려 개성적인 스타일로 여겨지는 듯도 하지만, 20년 저쪽에 사오십대 여성이 새치를 그대로 드러내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 싶다. 내가 알던 그이는 그 무렵 사십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로 남들보다 일찍 머리가 세기 시작해서 희끗희끗한 정도 이상이었는데 염색을 하지 않은 단발의 생머리 차림이었다. 그 잿빛 머릿결이 처음부터 인상적이었다. 커다랗고 맑고 형형한 눈, 작은 체구에 동안의 선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독문학 전공인데도 영어 번역을 더 많이 하게 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전혜린 이후로 구축된 어떤 이미지 같은 게 그이에게는 있었다. 편집자와 역자로 띄엄띄엄 연락을 주고받다가 내가 한동안의 실업 시기를 거쳐 옮긴 직장에서 다시 만났다. 진행 중인 번역서가 있었고, 이번에는 그이의 전공인 독일 소설이었다. 집이 같은 신도시여서 그랬을 테지만, 어쩌다 한번 그이의 집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다. 신도시의 가장 작은 평수대의 아파트였다. 자그마한 거실에서 본 것은 벽 한쪽 구석에 여러 줄로 쌓여 있는 책과 오디오 세트, 그리고 시디와 엘피판 정도였던 것 같다. 두꺼운 사각 종이 케이스에 담긴 미샤 마이스키 엘피판 전집을 구경하고 음악을 들었다. 엘피판을 싸는 얇은 미농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게 기억난다. 술을 몇 잔 하고 나왔던 것 같은데 많이 조심스러웠다면 내 쪽이 그래서였을 것이고, 그이는 언제나 그렇듯 담담한 평정 같은 걸 유지하고 있었을 테다. 그러다 언젠가 병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차일피일 연락을 못하고 있다가 퇴근길 지하철역 근처에서 우연히 만났다. 설렁탕을 먹으러 나온 길이라고 했는데 쇠약한 모습도 그랬지만 어깨가 많이 구부정했다. 아파서 몸을 계속 웅크리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잿빛 머리는 이제 반백쯤으로 가고 있었다. 같이 일하던 편집자와 함께 긴 둑길 다리를 건너 병원을 찾았을 때는 상체가 거의 접힌 듯한 자세로 침상에 기대어 있었고 얼마 뒤 부음을 들었다.
   권여선의 단편 「이모」(『안녕 주정뱅이』, 창비, 2016)는 생의 마지막 2년간 모든 관계를 끊고 홀로 살다 췌장암에 걸려 57세로 세상을 뜬 윤경호라는 여성의 이야기다. 스스로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한 ‘불가촉천민’으로 요약하는 이 여성이 마지막 두어 달간 일주일에 한 번 안산 외곽의 오래된 소형 아파트로 초대한 유일한 인물이 자신의 여동생 며느리인 소설의 화자 ‘나’고, 소설은 ‘나’가 그렇게 시이모로부터 들은 마지막 이야기들을 전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작품의 이런 설정은 소설이 쓰이는 자리를 지시하고 전경화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막하고 불가촉한 거리를 환기하는 효과에도 도달한다. 아마도 대개의 삶은 이런 특별한 화자를 갖지 못한 채 시작되고 종결되는 것이리라. 그거야 어쨌든 나는 이모 윤경호의 모욕과 분노, 고독과 평정 사이로 또다른 어떤 여성의 힘겨운 자세와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던 것 같다. 물론 나는 그이의 이야기를, 서사를 알지 못한다.
   소설은 이모 윤경호의 삶을 뒤틀고 잠식해 들어온 것들의 정체를 비교적 명료하게 알려준다. 대학 1학년 때 부친의 객사 후 가장의 역할을 떠맡게 된 집안의 맏딸. 대기업에 입사해 4, 5년 동안은 가족의 생활비와 동생들의 학비를 댔다. 그러고도 남동생의 도박 빚을 갚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퇴직금과 저축이 그렇게 사라졌다. 어머니가 몰래 남동생의 보증을 서게 만든 탓에 서른아홉 살에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빚을 다 갚는 데 10년 가까이 걸렸다. 대기업 다닐 때 사귀던 남자는 공부하던 사람인데 회사를 그만둘 무렵 헤어진 것으로 짐작되고(이 경우도 둘 사이 경제적 후원은 이모의 몫이었으리라) 계속 어머니를 모시고 혼자 살았다. 이런 가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가족에 대한 있을 수 있는 헌신으로 이야기되던 시절이 있었다. 차별과 폭력의 구조는 덮어둔 채 여성 수난사라는 가짜 서사, 가짜 보편 속으로 해소되던 때가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가장 낡은 이데올로기의 지대로 그 잔재 역시 상당한 정도로 여전하다. 진전되고 각성된 인간 이해,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보면 논의의 여지조차 없는 영역이라 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이념적이거나 사회적인 진단/분석의 차원을 벗어나면 문제는 그리 단순할 수 없다. 시대적 역사적 제약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그 제약에 대한 수용과 저항의 측면을 포함하면서 인간 각자는 언제나 일종의 무지(無知) 상태에서 세상과 대면한다. ‘아는 자’의 시선은 잠정적이고 실패나 공백과 함께 있다. 사회나 집단의 차원에서도 그러하지만, 개인의 자리에서는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다.
   소설의 화자 ‘나’가 윤경호를 마지막 방문한 날, 그이는 몹시 쇠약해서 한 번에 몇 마디씩밖에 하지 못한다. 다음은 그 끊어지는 말들이다.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 거고.”
   (「이모」, 『안녕 주정뱅이』, 106쪽)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겠다. 10년에 걸쳐 남동생이 진 빚을 갚고 신용을 회복한 뒤, 윤경호는 아동물 출판사에 취직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이제는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돈을 내어주지 않는다. 어머니도 식당 일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러고는 목표한 돈이 모인 뒤 자신을 찾지 마라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잠적해서 혼자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게 세상을 뜨기 두 해 전의 일인데 그 철저히 혼자인 생활에서도 나름의 질서와 자유를 찾는 계기가 된 하루가 있었다. 밤새 눈이 내리고 한파로 수도관이 얼어버린 겨울날의 이야기다. 평생을 걸쳐 간신히 찾아낸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을 함부로 침범하는 이웃과 타인들. 그날 하루 부조리극처럼 무심하게 펼쳐지는 무례와 모독의 연쇄는 잊고 있던 인간에 대한 혐오를 끌어올리고 윤경호는 견딜 수 없는 증오에 휩싸인다. “당장이라도 과도를 움켜쥐고 무엇을 찌를 듯이, 장갑 속의 언 손가락들을 바르르 떨게 만드는 이 붉고 어두컴컴한 증오는 무엇인가.” 그런데 그날 밤 혼자 술을 마시던 윤경호를 습격하듯 찾아든 기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대학 1학년 때 자신에게 사랑을 갈구하던 같은 과 동기 남학생의 왼손 손바닥에 담배를 눌러 끈 기억. 전생처럼 오래된 기억의 급습. 그날 이후 윤경호는 집과 도서관을 오가는 최소한의 삶의 루트를 찾아냈고, 하루 5천원으로 살아가는 극도의 자발적 가난 속에서 자유의 시간을 얻는다. 그 고독과 자유가 병마로 중단되기까지 얼마간.
   자,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할 것 같다.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라니? 바로 앞에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라고 했으니 자신이 ‘불가촉천민’의 인생을 살게 된 ‘탓’이 없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건 당신 탓이 아닙니다. 당신의 삶을 갉아먹은 것은 지옥 같은 가족, 철저히 남성 중심으로 작동하는 그 고약하고 글러먹은 세상 탓이라고. 그런 세상에서는 애초부터 당신의 자유가 행사될 자리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죽음 직전의 쇠약한 육신이 내뱉는 말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세상에 대한 윤경호의 관용은 이상하다. 우리는 두번째 질문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 거고.” 죽음의 권위, 마지막 말의 권위는 다시 이상한 비논리 속에서 도착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우리는 다시 겨울날의 그 밤으로 돌아가야 한다. 윤경호는 오래전 술집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문했다. “자신에 대한 호감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에게 왜? 잡아주기를 바라고 내민 무력한 손바닥에 왜?” 윤경호는 자신의 왼손 손바닥 가장 깊은 곳에 피우던 담배를 눌러 끄고는 답했다. “그애를 지진 이유는 단순했어. 성가시고 귀찮았던 거지. 단지 그뿐이었어.” 이 혐오와 증오의 뿌리는 무엇인가. 모르겠다. 윤경호도 끝내 다 알지는 못했으리라. 다만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윤경호의 저 마지막 말은 끝내 용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이는 세상도,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이 소설이 윤경호의 이야기를 들은 ‘나’에 의해 다시 ‘불가촉한 거리’를 만들며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있다면, 이게 희망을 말하는 방법이리라.

정홍수

작품에 기대 생각과 느낌을 얻고 거기에 덧대 생각과 느낌을 이어볼 뿐이다.

2018/05/29
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