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그녀가 애써 피하려고 했던 진실을 눈앞에서 목도한 것 같았다. 피해자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누군가의 도움을 조건 없이 무제한적으로 요청할 수 있었다. 피해자는 기본적으로 억울한 자이므로, 행한 자가 아니라 당한 자이므로, 비판이 아니라 동정을 받아야 하는 자이므로, 거리끼거나 머뭇거릴 필요가 없으며, 심지어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피해자는 빚진 것이 없으므로 책임질 것이 없고 추궁 받지도 않으며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부담으로부터도 제외된다. 피해자는 기본적으로 요구를 받는 자가 아니라 요구하는 자, 요구할 권리를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자비를 구하는 눈빛과 간청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외국인 노동자의 출현으로 야기된 내부의 혼란이, 책임질 것이 없고 어떤 선택도 요구받지 않으며 다만 요구할 권리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정된) 그 익숙한 자리가 흔들리는 데 대한 불안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비교적 선명하게 인식했다.
(「넘어가지 않습니다」, 『모르는 사람들』, 184쪽)

    여기 두려움에 가득찬 한 여자가 있다. 서른여섯 살의 수학 학원 강사인 그녀는 애인이었던 한 남자와의 ‘안전 이별’에 실패한 채 지금 친구 B 소유의 전원주택에 은신해 있는 중이다. 나이트클럽과 술집을 운영하며 폭력 전과까지 있는 마흔세 살의 ‘건달’과 잘못 엮였던 그녀는 남자의 집착과 폭력을 이기지 못해 친구의 도움을 얻어 도망쳤지만 그 남자가 사람을 시켜 자신을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언제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다.
    그런 그녀에게 언젠가부터 수상한 낌새가 포착되기 시작한다. 그녀가 은신하고 있는 전원주택 주위에 낯선 남자가 기웃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알 수 없는 남자의 침입으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이 극에 달한 그녀는 이를 경찰에 신고하는데 경찰의 조사 결과 그 남자는 이웃 농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틴 카우로 밝혀진다.
    틴 카우가 그녀의 집 주변을 서성인 이유는 와이파이 신호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 집 벽에 몸을 붙이고 인터넷을 하고 전화를 썼어요…… 근처에 무선 인터넷이 가능한 데가 여기밖에 없었답니다……” 경찰은 그녀에게 남자의 딱한 사정을 봐주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그런 경찰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다. 거기에 더해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안 통하는 스물 몇 살짜리 낯선 남자라니, 무슨 짓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 짐승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친구 B의 충고를 받아들여 무선 인터넷에 비밀번호를 걸어놓은 뒤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한다.
    하지만 이후로도 틴 카우는 그녀의 집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무슨 할말이 있는 사람처럼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열리지 않는 문 밖을 서성이다 방울토마토가 담긴 비닐봉지를 문 앞에 걸어두고 돌아가는가 하면 며칠 뒤엔 자신보다 한국말을 잘하는 네팔 출신 친구를 대동하고 그녀를 찾아가기까지 한다. 틴 카우보다 한국말이 조금 더 유창한 그 친구는 열리지 않는 문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말한다. “틴 카우는 나쁜 사람 아닙니다, 도둑질 안 합니다.” “틴 카우는 가족 소식 들어야 합니다, 자주 전화 걸어야 합니다.” “집 안으로 넘어 들어가지 않습니다. 밖에서 핸드폰만 쓸 것입니다. 도움을 베풀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문을 열어주지는 않는다. 그녀를 잠식한 거대한 두려움이 그들을 향해 내밀 법한 그녀의 손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하려고 한 말은, 당신들이 아니라 당신들을 두려워하도록 만드는 무엇인가가 두렵다는 것이었다. 그 무엇인가가 당신들뿐 아니라 세상에 대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한다는 것이었다. 내 안의 두려움이 내 밖의 모든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한다, 그래서 문을 열지 못하게 한다, 그것이 문제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데 이는 낯선 타자이자 “짐승”으로 표상되는 그들과의 소통 가능성 자체를 불신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충분히 잘 말한다고 해도 그들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지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녀의 완강한 밀어냄에도 불구하고 틴 카우는 그녀의 집 근처를 계속 맴돈다. 차단된 와이파이 신호를 잡아보려 부질없이 애쓰기도 하고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굳게 닫힌 그녀의 집을 애처롭게 바라보기도 한다. 창밖으로 그런 틴 카우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점차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녀는 친구 B에게 자신이 마치 인질범이 된 것 같다고 털어놓지만 B에게선 “쓸데없는 감상주의”라고 핀잔이 되돌아올 뿐이다. 집에 갇힌 네가 인질이고 피해자인데 누가 누굴 동정하는 거냐는 것이다. 그런 친구의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왠지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 같은 거북한 기분에 젖는다.
    세찬 비바람이 불던 날, 그녀는 문득 여전히 자신의 집 주변을 서성이고 있을지 모르는 틴 카우를 떠올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처마 밑에서 옷이 다 젖은 채 오들오들 떨고 서 있는 왜소한 체격의 그를 발견한다. 글을 시작하는 자리에 옮긴 인용문은 틴 카우를 발견한 뒤 그녀가 내뱉는 독백이다. 그녀는 자기가 이제까지 피해자라는 고정된 자리에 그저 머물러 있었음을, 더 나아가 그 자리를 은밀하게 즐겼음을 실토한다. 그녀에 따르면 피해자의 자리는 책임과 부담으로부터 면책된 자리이며 그렇기에 온전하게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할 수 있는 자리이다. 하지만 작가는 바로 그 피해자의 자리를 문제 삼으며 자신의 상처와 두려움을 무릅쓸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윤리적 결단의 장면을 생성해낸다.
    사실 이 작품 「넘어가지 않습니다」(『모르는 사람들』, 문학동네, 2017)는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 여성이 각종 물리적, 사회적 폭력의 피해자라는 것에 대한 광범위 한 합의가 채 이루어지지 않은 작금의 현실을 돌이켜볼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피해자의 윤리가 아니라 여성의 피해자성을 더욱 날카롭게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작업이라는 반론도 가능할 법하다. 하지만 여성들을 사회구조적인 피해자로 규정하는 것이 여성주의의 궁극적 이상일 수는 없을 터,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그 고통과 피해 위에서 어떻게 타자와의 만남이 가능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이며 이 작품은 바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문제 삼고 있다. 이 작품의 백미는 이렇듯 피해자성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면책되지 않는 개인의 또다른 윤리적 책무를 상상하게 하는 데 있다.
    권김현영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고통은 연대의 약속과 실천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매개일 뿐이”며 “고통 자체에 연대하라고 하면, 남는 건 서로 경쟁적으로 ‘상처받았다’고 하는 말들뿐일 것이다.”라고 말한다.1) 김주희 역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갑과 을, 가해자와 피해자만 감별”하는 ‘속도의 페미니즘’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2) 나는 이들의 주장을 한 사람의 정체성을 고정적인 자리에 붙박아두고 그 자리에서 발화되는 도덕과 당위의 언어로 윤리와 정치를 대체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으로 읽는다. 하지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하듯 우리는 우리가 선 자리를 끊임없이 흔들리는 동요의 지점으로 거듭 번역내야 한다. 틴 카우를 만난 뒤 해소될 수 없는 불편한 마음을 가졌던 이 소설 속 그녀처럼 말이다.
    그러나 소설의 결말은 그녀의 윤리적 선택을 추인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그녀는 틴 카우에게 제발 집으로 들어오라고 사정하지만 그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넘어가면 나, 죄인 됩니다, 안 합니다.”라며 완강하게 버틸 뿐이다. 세차게 퍼붓는 비를 맞으며 서로 옥신각신하는 마지막 장면은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기를 그치고 또다른 타자의 고통에 접속하는 일이 생각처럼 간단치 않음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이런 결말은 윤리적 환대에 대한 모종의 통념을 배반한다. 안전한 구획선 내에 머무는 존재가 그 경계 밖의 타자에게 손을 내밀고 그 타자가 자신에게 내민 손을 뜨겁게 잡음으로써 이룩되는 윤리적 환대의 장면에서 손쉽게 감동을 이끌어 낼 준비가 되어 있는 여느 사람들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말이다. 이 황망한 결말 앞에서 매끈한 마음을 간직하기란 그 누구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한영인

새내기 시절 노래방에서 드렁큰타이거의 <남자기 때문에>를 신나게 부르다 선배 누나에 의해 강제 종료 당한 사건을 계기로 여성주의를 접하게 됐다. 그것이 남긴 원초적 상흔 때문이었을까. 선배들의 혹독한 가르침에도 끝내 여성주의자가 되지는 못했다. 그때 사람들은 나를 ‘마초’라고 불렀고 지금 사람들은 나를 ‘한남’이라 부른다. 부끄럼 많은 생을 지금도 살고 있다.

2018/01/30
2호

1
권김현영,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 허핑턴포스트, 2017년 3월 14일자. www.huffingtonpost.kr/hyunyoung-kwonkim/story_b_15352452.html
2
김주희, 「속도의 페미니즘과 관성의 정치」,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6년 겨울호, 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