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M이 부자가 아니며 유한계급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기억을 헤매고 있다. 그것은 M을 특별한 존재로 분명히 각인시키며 M과 나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이며 M과 나의 관계가 단지 선택의 여지를 가진 한 인간에 의해서 저질러진 우연한 사건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요아힘의 생각과는 달리, M은 부자가 아니었고 아니어야만 했다. M이 나에게 눈길을 보낸 것은 M이 부자이고, M이 선택의 여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M이 새로운 것에 흥미가 많은 언어학 학위 소유자이고, 지나치게 많은 책을 읽어 아시아 신비주의에 무의식적으로 물들어 있는 문화 수집광이므로, 그래서 조용하고 말수와 움직임이 적으며 사교 범위가 넓지 않고 그러면서도 지속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지적 토양을 가진 파트너를 갖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모든 의미의 함축을 요아힘은 단지 한마디의 표현에 실어버리고는 했다.
   “네가, 뭘 했느냐 하면 말이지, 단지 네가 한 것은 M이 부자이기 때문에 좋아한 것, 그것뿐이잖아.”
   (…)
   에리히는 우리들에게 다가와서 두 팔을 우리의 어깨 위에 걸치고 우리 얼굴을 번갈아서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경련하듯이, 경멸감을 안고 씰룩거렸다. 그가 말하고 싶어했던 것을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에리히가 술을 마신 것은 사실이지만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술을 마신다 할지라도 취할 정도로 마시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무엇인가 말하려고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나, 마음이 바뀌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M에게 고개를 돌리고 나의 마지막 작문이 훌륭했다고 말했다.
(『에세이스트의 책상』, 122~123쪽)

    최근 한국문학 안에 레즈비언 서사가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그런데 그 서사가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지적이 종종 들려온다. 젊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이성애적 사랑이 부재하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재현되는 대신 여성 간의 낭만적 사랑이 등장하고 있음을 짚으며, 이것을 남자와의 사랑을 공포로 받아들이는 시대의 징후로 보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이미 2000년대 한국소설에서도 이성 간의 에로티즘은 강력하게 추구되는 가치가 아니었다. 1997년 IMF 이후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땅 위에는 청년 백수들이 배회하고 있었고 그 사이를 뚫고 달을 겨냥하는 무중력의 상상력이 튀어올랐다. 백수들에게는 사랑하기엔 녹록치 않은 현실이 있었고, 몽상가들에게 사랑은 현실을 망각할 수 있는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 가운데 2000년대 소설 담론에서 가장 많이 말해졌던 단어가 ‘타자’였다는 것, 그 타자라는 단어에 성차에 대한 인식은 이미 소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타자와 마주하는 ‘사건’(바디우)의 정치성과 ‘무조건적 환대’(데리다)의 윤리성의 대상은 소수자, 외국인, 이방인, 디아스포라 등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추상화된 단어 속에 여성이라는 항은 지워져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 배수아의 『에세이스트 책상』(문학동네, 2003)인가. 물론 이 작품은 2000년대 한국에서 나온 가장 아름다운 연애소설 중 하나일 것이다. 겨울의 강한 추위 속에서 화자가 M과 나눴던 사랑을 기억 속에서 하나씩 길어올리고, 그 여리고 연약했던 사랑이 어떻게 의심과 불안 속에서 파괴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잔인할 만큼 섬세하게 그려나갈 때마다 전율을 멈출 수 없다. 하지만 위에서 인용한 장면이 이 소설에서 특별히 더 공들여 직조된 문장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인용문 사이에 생략된 짧은 부분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일 텐데, 거기에는 M과 내밀한 사랑을 나누던 순간이 담겨 있다. 그 장면에서 ‘나’는 M의 맨몸의 촉감을 더없이 감미롭게 음미한 뒤, 무언가 직감하며 비통에 젖는다. “연약하고도 연약한 M. 나는 견디나 너는 견디지 못하리라, 그리하여서 마침내는 너는 견디나 나는 견디지 못하게 되리라.”(123쪽) 이 문장에는 의도적으로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 무엇을 견디지 못하는가. 이 미묘한 생략으로 인해 화자의 ‘견딜 수 없음’은 우리가 인생에서 필연적인 파멸과 파국을 예감하는 모든 순간으로 확장되며 깊은 비애를 끌어온다. 어째서 인생의 가장 황홀한 순간은 가장 치명적인 비극의 직감과 맞닿아 있는 걸까. 이 감각의 불멸성에, 보편성에 집중한다면 덧붙일 말은 무한해지겠지만, 꼭 지금 이 소설을 말해야 할 이유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보편에 집중하는 동안 무언가 빠져나가고 있지는 않는가. 무언가 잃어버린 기분으로 다시 이 소설을 읽는다. 이미 많은 독자들이 알고 있듯이, 이 소설에서 ‘나’와 ‘M’의 성별은 모두 여성이다.
   두 사람의 성별을 인지하고서 다시 위의 인용문을 읽는다면, 나와 M의 사랑은 여러 사회적 창살 속에 갇혀 있음이 드러난다. 인용문의 초반부에 정신적 빈곤과 경박함의 상징처럼 등장하는 ‘요아힘’은 돈에 연연하는 성정과 과시욕을 숨기기 위해서인 듯, M과의 사랑을 돈과 특이한 문화적 취향의 결합으로만 평가절하한다. 이 앞에서 나는 ‘빈곤’한 경제적 계급과 ‘동양인’이라는 인종적 정체성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며, 그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보편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야만 한다. 인용문 후반부에 나타난 ‘에리히’ 역시 “경멸감을 안고 씰룩거”리는 입술로 나와 M에게 다가오고, 곧이어 ‘요코 타와다’와 ‘슈베르트’를 언급한다. ‘동양인 여성’이자 ‘동성애자’라는 주인공의 정체성과 그의 사랑은 보편의 위치로 도약하지 못하고 모욕감과 함께 떨어져내린다. M이 언어의 ‘정신성’과 ‘보편성’을 반박하듯 말하다 에리히에 의해 말이 잘리는 장면은, 마치 나와 M의 사랑이 지극히 ‘육체적’이며 ‘특수성’을 가진 것임을 인정하도록 추궁받는 순간처럼 보인다.
   화자가 M으로부터 에리히와 잠자리를 한 적이 있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들의 사랑은 강렬한 수치심과 함께 파국으로 흘러간다. 소설은 이때부터 다시 외부의 현실을 지우고, 이 사랑이 남겨놓은 짙은 수치심과 그것마저 옅어지면서 M과의 기억이 서서히 추상화되는 과정을 그려간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서두에 자리한 압도적인 문장들이 음악과 죽음의 절대성에 대한 것임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가장 추상화된 예술인 ‘음악’과 가장 추상화된 형태의 삶인 ‘죽음’은 너무나 간절히 갈망했지만 끝내 가닿는데 실패한 M과의 사랑에 대한 완벽한 환유로 남는다. 그 사랑의 불가능과 고통스러운 고독을 정확하게 직시하며 화자는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더 많은 음악”(5쪽).
   그러니 이 소설의 공식적인 첫 독해라고 할 수 있는 해설에서 “M에 대한 사랑은 예술적·정신적 삶, 그 안에서 살아가는 내면적인 단독자로서의 삶에 대한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외화하는 것”(김영찬)으로 말해진 것은 작가의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정확한 독법이었을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후 펼쳐진 리얼리즘 독법에 대한 논쟁들이다. 이 소설 속 화자의 정신주의가 “영·육(靈肉)이 쌍전(雙全)하는 삶에 대한 얼마만큼의 무지를 드러내는 주장인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며 비판한 백낙청의 리얼리즘적 독법은 이후에 김영찬과 김형중 등에 의해 효과적으로 반박된다. 그리고 이 글들은 모더니즘적 실험을 감행하는 소설들에 대한 새로운 독해의 필요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섬세한 독해들 끝에 배수아는 일반적인 ‘페미니스트’ 내지 ‘여성 작가’와는 다른 자리에 위치한다. 배수아 소설의 급진적 실험은 “문장 단위에서 용인되는 관습적 성차의 해소 시도”를 행하며(김형중), 동성애자를 성적 소수자이기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관습적 성차가 삭제된 탈젠더적 존재”로 그려내는데 성공한다(심진경). 그리고 그 결과 배수아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김형중), “여성주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은 것은 분명하지만 여성주의 문학이라고 보기 어려”워지는(심진경) 것이다. 이후에 이 소설과 관련해 전개된 중요한 논의들도 “생물학적 성별과는 무관한 욕망과 충동의 성별, 혹은 주체가 향유하는 방식의 성별”을 분별해 들어가 “사랑을 지향하지만 늘 욕망으로 균열되고 마는 삶에 대한 통찰”(신형철)을 읽어내게 된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성(性)의 관점에서 들여다볼 필요를 말하며, 이 소설이 “동성애적 텍스트임을 논증하는” 작업을 펼쳤던(차미령) 한 평론을 제외하고는 이 텍스트는 탈성화(脫性化)된 방식으로 읽혀왔다.
   문제가 단순치 않은 이유는 이런 탈성화된 텍스트 읽기가 평론가들의 둔감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섬세한 독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에세이스트의 책상』보다 1년 앞서 발간된 『동물원 킨트』(이가서, 2002)에서 배수아는 서문에서 “주인공의 성별을 규정하지 않겠다”고, “성적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부여하는 모든 정서의 상태를 부정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작가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맥락 속에서라면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 M의 성별을 감춘 이유 역시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정서에 성별과 관련한 편견이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런 독해로 충분한가.
   페미니즘 이론 내부에서 젠더의 규제적 구성을 섹슈얼리티의 규제적 구성으로부터 분리하는 일은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주체화는 주체가 떠맡고 수행하도록 요구되는 여러 정체성의 표식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다시 인용문으로 돌아가, 화자가 느끼게 되는 모욕감이 ‘빈곤한 동양인 여성 동성애자’라는 여러 정체성의 표식들이 불가분으로 얽혀 생성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소설 속에 ‘나’와 ‘M’이 부유한 백인 남성 동성애자였더라도 그들은 동일한 곤란 속에서 보편을 증명해야 했을 것인가. 요아힘과 에리히는 동일하게 모욕과 위협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인가. 2000년대 소설 비평들은 원본이 없는 모방적이고 수행적인 실천의 가능성을 통해, 이분법적 성별에 국한된 것이 아닌 다양하게 성별화된 육체들에 가까이 가고자 했다. 그것은 사실상 버틀러로 대변되는 페미니즘 이론의 최전선에 밀착하는 일이기도 했다. 때로는 라캉을 경유해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해체적으로 더없이 세련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성차라는 헤게모니적 상징계를 전치했다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2018년 지금 한국에서 좋은 여성소설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미국 전역에서 ‘MeToo’ 운동이 계속되고 있고, 한국에서는 한 여검사가 가장 신뢰받는 뉴스 채널에 나와 8년 전에 조직 전체의 방관 속에 벌어졌던 성추행을 고백하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꽃뱀’이란 말이 난무하고 피해자 여성들의 고백을 충분히 주체화되지 못한 ‘개소리’로 치부하는 상황에서, 소설 속 주체들의 성별을 해체한 채 바라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세상이 변한 가운데서도 그것은 여전히 섬세한 미학적 독해이자, 윤리적인 독해일 수 있을까.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리타 펠스키, 이은경 옮김, 여이연, 2010)에서 저자는 루스를 인용하며 여성 작가가 갈 수 있는 대안적 플롯들을 제시한다. 여성 작가는 버지니아 울프가 택한 길을 따라 연대기와 인과론을 벗어나는 서정주의를 선택할 수 있으며, 엄격한 다큐멘터리 리얼리즘 형식에 의존할 수도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전통적인 젠더 역할을 벗어나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는데 가장 좋은 SF라는 장르가 존재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에게 더 놀랍고 새로운 여성 플롯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기존의 독법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더 많은 음악’이 아니라 ‘더 많은 젠더’를 위하여, 우리는 ‘좋은 소설’들을 다시 ‘좋은 여성소설’로서 읽어야만 한다.

강지희

글을 쓴다는 것이 막막하고 울고 싶을 때 여성 평론가들의 글을 붙들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들이 같은 문제로 앞서 고민하며 울었던 흔적들이 나를 평론가로 만들었다.

2018/04/24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