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도 번역이 되나요?
오은(시인)


2023년 10월, 독일과 일본에 다녀왔다. 데뷔하고 나서 내 시집이 번역된다는 상상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나는 모국어인 한국어로 시를 쓰고, 어쩌다 보니 한국어 고유의 말맛을 살리는 것을 중시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라고 했지만, 실은 그것이 내가 시를 쓰는 중요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언어유희를 시작했고, 무수한 동음이의어가 행과 연을 수놓게 되었다. 그간에는 이 시들이 한국어로 낭독할/될 기회뿐이었으니, 행사 때 이는 웃음을 부르고 뒤통수를 치는 순기능을 발휘하곤 했다.
  서울국제도서전 등에서 진행되는 행사뿐 아니라 동네 책방에서 열리는 소규모 낭독회에서 운 좋게 시 읽을 기회가 많았다. 쭈뼛거리기 일쑤였던 나 자신이 제법 능숙하게 마이크를 다룬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그럼에도 무대 위에 오를 때면 주먹을 꼭 쥔다. 평소에도 말이 빨라서 행사 때 가능하면 찬찬히 발음하자고 다짐하는 것이다. 머릿속에 섬광처럼 떠오른 것을, 곧장 내뱉지 말자고 마음먹기도 한다. 그 무대는 사석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그시 누르는 마음으로 뚜벅뚜벅 발을 뗀다.
  서울국제작가축제 등에서 외국 작가들과도 낭독회를 했지만, 작년 가을 독일과 일본에서의 경험만큼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개중 독일 베를린에서의 경험을 나누고 싶다. 여러 명의 작가가 무대 위에 올라가면 집중이 분산되지만, 작년 행사에는 나와 김소연 시인 단둘이었다. 한국에서 진행되는 행사가 아니라는 점도, 그 행사가 유서 깊은 ‘시의 집’(Haus für Poesie)에서 열린다는 점도 부담감을 가중했다. 암전 상태의 긴장감이 스포트라이트가 되어 쏟아졌다.
  인사 뒤 처음 던진 말은 유머였는데, 관객 중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눈앞이 하얘졌다. 사회자의 요청대로 시집 『없음의 대명사』에 실린 「그것」을 읽을 차례였다. 또박또박 읽어야겠다는 생각만 하다가 그만 다른 시를 읽어버렸다. 시집에는 「그것」이란 제목의 시가 열 여섯 편이나 실려 있다. 그때 그만 긴장이 풀렸다. “그것(das)이 너무 많아서요. 제가 제 발목을 잡았네요.” 통역가가 그 말을 전달하자 좌중이 일순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때 깨달았다. 번역보다 중요한 것은 빈틈이라는 사실을. 그 빈틈이 사람에게는 여유를 갖게 하고, 장소에는 온기를 흐르게 한다는 사실을.
  빈틈은 번역되지 않고 즉각적으로 전달된다. 닫혀 있던 사람의 문을 활짝 열어 유대감이라는 등불을 그 안에 켜둔다.






도서전에 가기 위하여
김동신(디자이너)


기억이 맞다면 나는 도서전에 네 번 가봤다. 세 번은 서울국제도서전이었는데 그중 두 번은 참가사 직원으로 부스를 설치하러 간 것이었다. 나머지 한 번은 201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으로 당시 근무하던 출판사에서 연수 차원에서 보내준 것이었다. 즉 온전히 자의로 도서전에 간 것은 딱 한 번인데, 그나마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나는 바는 전혀 없다. 아무래도 나는 북디자이너로서 도서전이라는 행사에 대해 생산적인 제언을 하기에는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서 대신 도서전에 잘 가지 않는 사람 시점의 단상을 써보려고 한다.


한마당

MBTI가 E로 시작하는 사람이었다면 도서전에 자주 갔을까? 서울국제도서전 공식 홈페이지에는 도서전을 “책을 만드는 사람과 (…) 독자가 한자리에 모여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즐거운 마당”이라고 소개한다. 도서전이 지닌 매력의 핵심이지만, 바로 이 점이 문제다. 사람이 너무 많고, 언제 어디서 아는 사람을 마주칠지 모른다는 사실이 회장에 있는 내내 내면의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그나마 MBTI의 유행 덕분에 이 상황이 싫은 게 아니라 지치는 거라는 걸 알아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생겼다는 점이 다행스럽다.


코엑스

코엑스가 아니었다면 도서전에 자주 갔을까? 살면서 네 번의 이사를 했지만 코엑스가 대중교통 한 시간 이내 거리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삼성역에 내려서도 호텔인지 백화점인지 쇼핑몰인지 엇비슷하게 번들거리는 공간을 따라 한참 더 걸어가야 행사장에 도착할 수 있다는 점은 심리적 거리까지 멀어지게 만든다.


디자인 트렌드 리서치

도서전이 북디자이너에게 의미가 있을 수 있다면 많은 책이 한곳에 모인 만큼 최신 디자인의 흐름을 살필 수 있다는 점이 있겠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갔을 때 대부분의 시간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공모전 전시 부스에서 보냈다. 서울에 외국 서적을 취급하는 서점들이 있다고는 해도 참여작 전체의 실물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고, 한 권 한 권 살펴보다 보니 다른 곳을 구경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국내서라면 필요할 때마다 서점에 가는 것으로 충분해서 트렌드 조사의 장소가 꼭 도서전이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크레이프와 케이크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대한 가장 선명한 기억은 열심히 봤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 아니라 행사장 근처 트럭에서 팔던 크레이프다. 내가 바나나 누텔라 크레이프라는 지극히 보수적인 선택을 하는 동안 미식에 일가견이 있던 동료는 에그노그 맛을 골랐다. 그런 맛 크레이프가 있을 거라는 상상은커녕 에그노그를 마셔본 적도 없었던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둘 다 맛있었다!) 잡지 모노클(Monocle)의 팝업 카페에서 카페라테를 마신 것도 좋은 기억이다. 도서전에서는 계속 걷고 서서 책 보느라 쉽게 지치는데 그럴 때 먹는 커피 한 잔 디저트 하나는 각별하다. 얼마 전 X에서 결코 서울에서 빵을 팔지 않는 성심당의 빵을 서울에서 살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가 2019년 서울국제도서전이었다는 이야기를 봤다. 인기절정의 케이크, 성심당 망고시루를 도서전에서 판다면 갈 마음이 생기려나 상상하다가, 성심당 본점의 끝없는 대기 줄을 떠올리며 조용히 마음을 접었다.






그곳에서 나를 확인한다
김윤정(그림책 작가, 윤에디션 대표)


올해로 11년이다. 2013년에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매해 그곳에 가게 될 줄 몰랐다. 그림책 작가들의 모임을 이끌고, 직접 출판사를 운영하는 지금까지 그곳은 나를 확인하는 장소다.
  현재 나는 그림책 작가이자 출판사 윤에디션의 대표이다. 2017년에 시작한 윤에디션은 현재 열 권가량의 도서를 출간했으며, 그중 여섯 권이 여섯 나라에 수출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볼로냐아동도서전이 있다. 올해로 61회를 맞이하는 볼로냐아동도서전은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리는 세계 4대 도서전 중 하나이다. 4대 도서전 중 유일하게 아동도서전이며, 매해 3월 중순에서 4월 초 사이에 개최된다. 세간에도 많이 알려진 볼로냐 라가치상이 이 도서전에서 수여하는 상이다. 윤에디션은 2021년에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상했다.
  내가 처음으로 볼로냐아동도서전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림책 작가였다. 그 당시 나는 국내의 여러 출판사에서 거절당하며, 계속 그림책 작업을 지속해야 하나, 라는 고민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지가 볼로냐아동도서전이었다. 지인과 번역기를 통해, 어설프게 준비한 더미북 세 권이 나의 첫 볼로냐행에 동행해주었다.
  더미북을 들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부스를 방문했던 당시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저 더미북을 펼쳐서 보여주려는 행동만으로 그들은 이미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었다. 국내 출판사에 투고하며 이런 그림으로는 그림책 작가를 할 수 없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던 터라, 주눅 들어 있던 내게 해외 출판사들은 친절했다. 그들은 내 그림책을 이해하려 애썼고, 여러 질문을 던졌다. 물론 나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렇게 첫 볼로냐행에서 여러 출판사의 관심을 받으며 나는 다시 작업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작업의 용기는 출판의 용기로 이어졌고, 매해 볼로냐아동도서전에 참가하며 나는 현재의 나를 확인한다. 내가 지금 어디까지 와있는지,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인지.
  살아가며 누구에게나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때는 바다에 뛰어들어라. 망망대해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크게 느껴졌던 한 걸음이 작은 한 걸음으로 변하고 이미 나는 그 한 걸음을 내딛고 있을 테니.






‘출판계의 러쉬’를 아시나요?
박혜신(안전가옥 퍼블리싱 리드)


출판계 동료들로부터 ‘안전가옥, 올해도 나오시죠?’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서울국제도서전에서의 관심을 체감하고, 뜨거웠던 현장 반응이 떠올라 으쓱해지곤 합니다. 출판 경력이 길지 않은 안전가옥이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기대되는 출판사가 되기까지, 어떤 관점으로 부스를 기획하고 준비해왔는지 풀어보려 합니다.

“SF 좋아한다고 했을 뿐인데, 홀린 듯 다섯 권 들고 있더라.” “설명 10초만 들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책 구매함.”

저희 부스 후기 중에 자주 보이는 내용입니다. 매년 안전가옥 멤버들은 다 같이 모여 부스에서 소개할 도서마다 짧은 한 줄 카피를 만드는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현장에서 서로 더 재미있게 설명하려 노력한답니다. 반응이 좋았던 멘트가 있으면 자랑도 하지요. 책 소개가 잘 통해 구매까지 이어지면 정말 뿌듯합니다.
  여기에 더해 부스에 오시는 분들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런 질문들입니다. “장르,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평소에 어떤 책(작가) 좋아하세요?” 저희는 부스 타겟을 ‘고관여 독자’라 설정하고, 안전가옥 작품 중에 그분이 좋아할 것을 추천합니다. 개인 맞춤형으로 추천 도서를 소개하는 거죠. 이렇게 좋아하는 것들을 먼저 물어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가 술술 이어져 저희를 ‘출판계의 러쉬’ 같다고 표현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장르에 컨셉과 컬러를 더하다

보통 안전가옥은 2022년의 ‘장르 카니발’, 2023년의 ‘장르 상점’처럼 부스 컨셉을 먼저 잡습니다. ‘장르 전문 스토리 프로덕션’과 어울리도록 컨셉을 기획하고 부스 컬러부터 굿즈나 이벤트 등을 모두 하나로 맞추고 있어요. 2022년에는 안전가옥을 ‘SF만 많은 곳’으로 아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저희에게 다양한 장르가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카니발, 장르들의 축제였습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컬러를 활용해 부스 무드를 잡았습니다. 바깥에서 보기엔 차분한 남색이지만, 안쪽에는 체크무늬 바닥과 더불어 라임, 민트 등 컬러풀한 색을 써 카니발 느낌을 냈어요. 컨셉이 이어지도록 붉은 융 커튼으로 감싼 거울 포토존 공간과 천막 모양 스티커 등도 만들었고요.
  2023년에는 인기 라인업인 ‘쇼-트’를 케이크처럼 박스에 담아 드리는 컨셉을 잡았습니다. ‘쇼-트’ 라인업은 단편집과 경장편으로 이뤄진 만큼 다양한 매력을 가진 짧은 이야기들을 한 아름 골라가는 무드를 상상했고, 거기서 장르 상점이란 키워드가 나왔죠. 그래서 메인 컬러도 화려한 디저트 상점처럼 빨간색과 핑크색으로 썼고, 부스에서 일하는 운영 멤버들도 모두 핑크색 앞치마를 입고 일했습니다. 쇼-트 다섯 권이 딱 들어가는 박스도 제작했고요.


6월은 서울국제도서전의 계절

지난 6월 도서전에 등장한 ‘장르정원’ 속 안전가옥 멤버들은 이야기를 추천하는 토끼로 변신해 초록빛 부스를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보냈습니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만난 출판계 동료들에게 자주 들었던 질문 중 하나는 “안전가옥은 도서전 준비를 언제부터 시작해요?”입니다. 아마 이에 대한 답은 ‘도서전 끝난 다음 날부터’일 것 같습니다. 실질적인 준비는 연초부터 하지만요.
  올해도 안전가옥이 어떤 컨셉으로 부스를 꾸몄을지 기대하고 왔다는 독자님들을 많이 뵈어서 으쓱해졌던 어깨를 내려야 할 시간입니다.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일주일을 뒤로하고 저희는 또 팝업의 성지, 성수동을 구경하며(안전가옥이 성수동에 자리 잡은 것은 운명……) ‘내년엔 뭘 해볼까?’ ‘이런 멘트 재미있네!’ ‘이런 굿즈를 좋아하실까?’ 등 아이디어를 모으며 지내겠습니다. 내년에도 안전가옥 많이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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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김동신, 김윤정, 박혜신

2024/08/21
6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