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 포세는 말했다고요. 줄곧 바다를 바라보고 자랐기 때문에 오랫동안 바다를 보지 못하면,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요.1) 욘 포세의 바다는 하르당게르표르 동쪽에 위치한 해변이라고요. 나도 그런 면이 있어요. 줄곧 무덤을 바라보고 자랐기 때문에 오랫동안 무덤을 보지 못하면,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기보다 우연히 무덤을 발견하면 목적지를 찾은 기분을 느낍니다. 당신이 적어주신 저의 숙소를 지도에 입력했을 때 바로 옆에 아주 커다란 공동묘지가 있더군요. 나는 그 묘지공원을 얼마나 자주 찾아가게 될지 이미 알게 됩니다. 나는 누군가의 묘비 앞에 서 있겠지요. 만나본 적도 없고 만나게 될 가능성도 없는 한 사람의 이름을 읽고 생몰 연도를 살펴보겠지요. 생기 있는 발걸음으로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등진 채로 죽은 한 사람을 궁금해하겠지요. 그중에는 유독 눈길을 끄는 묘비도 있을 거고요. 지도앱의 리뷰를 살펴보면, 뮌헨에서 가장 오래된 녹지 중 하나라고 지역 가이드가 소개하고 있군요. 아주 멋진 새 무덤과 오래된 무덤. 많은 나무가 있다고. 나의 숙소에서는 불과 백 미터의 거리에 그곳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사과와 토마토와 삶은 달걀과 커피 한 잔을 싸들고 바깥으로 나가 동네 공원에 마련된 원형 썬빔 안에 들어가서 아침을 먹듯, 그곳으로 날마다 아침식사를 하러 나갈 수도 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정육점을 지나고, 복권 가게를 지나고, 건널목을 건너서 맥주바를 지나면 벌써 담벼락이 보이기 시작하는군요. 어마어마하게 키가 큰 나무들이 담벼락 위로 우람하게 뻗어 있군요. 어린 시절의 내가 줄곧 바라보던 무덤을 이따금 티브이에서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무덤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사진을 찍곤 한답니다. 바로 그 건너편 내가 살던 적산가옥은 헐렸고 신라 왕조의 무덤에 관한 자그마한 박물관이 생겼습니다. 나는 내가 살던 그 동네를 지도앱에서 찾아볼 때에 청기와다방이라는 명칭을 입력한답니다. 길 건너에 아버지가 단골로 찾아가던 그 다방이 어째선지 그 동네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답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당신이 내게 인사하겠지요.
  그러게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다니, 나는 말을 잊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당신은 내가 지낼 숙소의 열쇠를 손에 들고서, 나 대신 현관문을 열어주시겠지요.
  내가 지내게 될 방을 보여주고, 이것저것 사용법을 알려주고, 거친 마룻바닥을 또각또각 걸어다니며
  낯선 장소를 당신의 소리들로 채워주시겠지요. 당신이 돌아가고 나면 텅 빈 그 집에서
  나는 의자에 내 카디건을 걸어놓게 될 겁니다. 낯선 숙소에 도착하면 제가 늘 하는 행동이니까요.

  어느 도시에 늦은 밤 도착했을 때에 바다가 어느 방향이냐고 길 가던 사람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모든 곳이 바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아침이 되어서야 그 말이 은유 같은 표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아주 가느다랗게 생긴 작은 섬이어서, 어느 쪽으로든 조금만 걸어가면 바다가 보였으니까요. 나는 바다 앞에 서 있을 때 내가 바다를 보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바다에게 나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요. 나를 봐, 나를 봐, 나를 봐, 나를 봐, 나는 파도가 한 번 내 발등을 훑을 때마다 그 리듬에 맞춰 혼잣말을 한답니다. 무덤을 바라보며 쪽마루에 걸터앉아 있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내가 보여? 내가 보여? 내가 보여? 내가? 그 공동묘지의 어느 묘비 앞에서 나도 모르게 내가 그 말을 하고 있겠군요. 열세 시간의 비행으로 찾아갈 수 있는 도시인데 나는 이미 그곳에 다녀오고 있습니다. 바다는 어디에나 있고 무덤 역시 어디에나 있군요. 어디에나 있는데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군요. 곧 다시 만나겠군요.

김소연

1993년 계간 《현대시사상》 겨울호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촉진하는 밤』이 있다.

불과 몇 년 전의 어느 날에 조금쯤 과장된 마음으로 내가 비로소 나를 시인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은 얼마 가지 않았다. 시를 쓰면서 살고 싶지만 시인이라는 상태를 좋아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고 늘상 생각해왔다. 요즘은 그래서 나는 시인이라는 이상하고도 덧없는 네이밍을 포기한 채로 지내는데, 그래서 시를 쓰겠다는 생각도 그다지 열렬하지가 않은데, 그래서 쓰게 되는 시들이 있다.

2024/07/03
68호

1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박경희 옮김, 문학동네, 2019), 옮긴이의 말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