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당신의 지난 시간을 회고해보라는 말을 건넸을 때,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하고 그는 운을 뗐다. 우리가 함께 어딘가로 떠났고 폭설이 왔던 어떤 새벽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어디를 갔는지 왜 갔는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기억이 나지만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건드림으로써 겨우 기억나는 삽화 하나를 그는 자신의 중요한 장면으로 꺼내고 있었다. 그에게도 그 장면이 중요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대화가 중요해진다면 그 삽화 역시 조금쯤 중요해질 수는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꿈이 아주 방대해서 그걸 실행한다기보다는 실행할 뜻이 얼비치는 몸짓으로만 살게 된다. 그는 그걸 실행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그가 실행한 것보다는 실행하고자 하는 걸 보는 걸로 만족한다. 그걸 해낸다면 정말 대단할 거야! 상상해보는 일은 어쨌거나 근사하니까.

  누군가는 그러나 아무 꿈이 없고 실행하고자 할 것이 없는 채로 살아간다. 꿈 없는 그라고 해서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심코, 불현듯,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날마다 무언가를 한다. 그 무언가는 심지어 훌륭하다. 사람들에겐 그가 실행해온 그 훌륭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가 아무 꿈도 없다는 것이, 텅 빈 욕망의 한 인간이라는 것이 그저 낯설고 반갑다. 그런 인간을 어딘가에서 꼭 한 번은 목격해보고 싶었으니까.

  누군가는 오로지 꿈으로 산다. 꿈의 안팎이 구분되지 않는다. 지도중독자처럼 꿈을 꾸느라 현실의 지형은 꿈을 누락하거나 오염시킨, 용납할 수 없는 비세계 같다. 꿈의 오만으로 현실의 남루에 결계를 만들어두는 때가 있는가 하면, 꿈의 이빨로 무미한 현실을 먹어치우려 드는 때가 있다. 운무로 덮인 호숫가처럼 꿈으로 현실을 덮는다. 꿈을 지시하는 그의 손가락은 아름답고 흔들림이 없다. 현실에 지친 사람들은 쉽게 그의 꿈을 대여해서 그의 손가락을 바라본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이 허구일지라도, 별처럼 멀리 있어 그 누구도 도구 없이는 확인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누군가는 꿈의 유무를 떠나 하루하루의 핍진함에 몸서리가 쳐진다. 너무 자세한 빈곤이 누수된 벽지처럼 얼룩진다. 벽지를 매일매일 바라보고 견디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벽지부터 노려보는 일이다. 벽지를 껴안고 해체하고 벽지를 벽지를 찢어발긴다. 벽지를 덮고 자다 어느새 벽지에 쓴 시들을 모아 세상으로 나간다. 벽지를 둘둘 말고 갤러리로 걸어들어간다.

  그리고 우리들. 우리들은 술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고 바깥은 추웠다. 아무도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사람이 바다라도 보러 가면 좋겠다고 웅얼거렸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나는 운전을 하겠다고 했고 승용차 가득 사람들을 싣고 동해 바다를 향해 달렸다. 절반도 가지 못했을 때에 폭설이 내렸고 우리는 국도의 갓길에 차를 세웠다. 폭설 속에서 헤드라이트 속에서 사람들은 눈을 맞으면서 춤을 췄다. 나는 차 안에서 음악을 틀었고 음악이 바깥으로 흘러나가도록 차창을 내렸다. 히터의 온도를 올렸다. 사람들의 춤은 음악이 가닿자 조금 덜 우스꽝스러워졌지만 조금 더 슬퍼졌다. 눈이 너무 내려 사람들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김소연

1993년 계간 《현대시사상》 겨울호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촉진하는 밤』이 있다.

불과 몇 년 전의 어느 날에 조금쯤 과장된 마음으로 내가 비로소 나를 시인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은 얼마 가지 않았다. 시를 쓰면서 살고 싶지만 시인이라는 상태를 좋아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고 늘상 생각해왔다. 요즘은 그래서 나는 시인이라는 이상하고도 덧없는 네이밍을 포기한 채로 지내는데, 그래서 시를 쓰겠다는 생각도 그다지 열렬하지가 않은데, 그래서 쓰게 되는 시들이 있다.

2024/07/03
6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