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한 서점이나 북카페를 연상케 하는 공간에서 진행되는 북토크 장면을 그린 일러스트다. 중앙 무대 위에는 두 사람이 붉은색 1인용 소파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며, 그 위로는 ‘BOOK TALK’라고 적힌 간판이, 그 앞뒤에는 푸른색 커튼을 비롯한 크고 작은 식물들이 놓여 있다. 이미지 아래쪽에는 여러 관객이 무대를 바라보며 경청하고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무대의 측면에는 열린 문들이 있고, 그 문 사이로 사람들이 들어와 북토크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북토크’가 범람하는 시대이지만, 정작 북토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습니다. 북토크는 출판 이후 다른 활동으로 확장하기 위한 교두보일까요? 팬덤 구축을 위한 마중물일까요? 아니면 텍스트를 깊게 사유하기 위한 비평의 장일까요? 같은 이름 아래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북토크를 꺼내어 이야기하고자 이번 글을 기획했습니다.



나는 북토크를 좋아하는 독자였다. 스물두세 살 무렵부터 가곤 했던 북토크는 주로 서점이나 북카페에서 열렸고, 노래를 들려주거나 영상을 보여주기보다는 두세 사람 정도가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가만히 앉아 그걸 바라보고 듣는 게 좋았다. 듣기만 해도 되어서 좋았고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 크기가 내가 듣기에 적당해서 좋았다. 어느 자리에 가든 긴장하고 떠는 내 성격은 지금보다 과거에 더 심했는데, 그래도 북토크 시작 전 느꼈던 떨림은 불안보다는 설렘에 가까웠다. 늘 떨어왔지만 긍정적으로 떨렸던 것이다…… 사람에겐 신기하게도 자기에게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북토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경험, 그러니까 극장에 가는 일과 공연장에 가는 일을 비교해보면 내게는 늘 북토크 쪽이 편안하다고 느껴진다.
  소설과 시 읽기가 좋았지만 편집자도 작가도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때, 구체적으로 내가 뭘 원하는지 원해도 되긴 하는 건지 자신이 없었던 때, 그러나 내가 읽은 것을 쓴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은 어쩌지 못하던 때 나는 북토크가 내게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런 곳에서만 그들을 볼 수 있으니까…… 작가들이 사는 얘기나 쓰는 얘기 둘 중 하나만 들려줘도 좋았다. 기꺼운 마음으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살아오는 동안 이런 경험도 했다고 내놓을 만한 일들이 크게 없는데, 문학은 내가 좋아하기 시작한 이래로 계속 어떤 경험들을 주었다. 그것에는 책과 함께 혼자 잘 있는 일, 모르는 사람들에게 같이 읽자고 말하는 일, 읽은 책에 대해 열을 올려 말하는 일에 더해 난생처음 들어 보는 서점이나 카페로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는 일도 포함한다.
  안양에 살던 시절부터 서울에 살게 된 어느 시기까지 나는 늘 북토크를 들으러 가는 날이면 서울에 간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살지만 서울에 산다는 느낌이 들지 않다가도 북토크에 가면 서울이군, 다시 깨달았다. 나는 늘 서울에 가고 싶었다. 산골에서 혼자 과거 시험 준비하는 외로운 선비처럼…… 처음 안양에서 벗어나 서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는 그 생각에 이유가 없는 게 이상하고 신기했는데, 문학을 좋아하게 된 이후로 그런 생각에 대한 이유를 하나 발견했다면 그건 내게 서울이 곧 문학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서울에는 곳곳에 문학이 있다. 특히 작가가 직접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는 북토크가. 그때 내게는 그것이 가장 기쁜 부자유였다. 아무데서나 혼자서 읽으면 되는 문학의 자유가 도처에 있지만 꼭 그곳에서 여럿이 문학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선택하는 부자유.
  그리고 그때 내가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북토크가 열리는 곳으로 가며 느꼈던 감각 중 하나가 성취감이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나는 북토크 신청을 하고 난 뒤 받는 ‘북토크에 당첨되셨습니다.’ 메시지가 좋았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북토크에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신청을 한 것뿐인데, 그 결과가 낙첨이 아니라 당첨이고 그로 인해 내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좋았다. 당시의 나에게는 좋은 일이 별로 없었고 되는 일이 별로 없었으므로 그것은 내가 받을 수 있는 소식 중 가장 좋은 일이자 되는 일이었다. 나는 문학이 언제나 내게 문을 열어준다고 느낀다. 문학 출판사에 입사한 것도, 신춘문예에 등단한 것도 늘 내가 바라마지않던, 깊이 바라는 마음으로 두드리던 문이 열린 느낌이었는데 그보다 앞서 북토크가 내게 문을 열어줬던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가뿐한 마음으로 두드린 것이었는데 그때마다 활짝 활짝.

많은 독자가 그러하듯 나도 북토크에 참석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참석 경험이 늘면서 북토크가 끝난 뒤 작가의 서명을 받기 위해 그의 앞에 설 때 “정말…… 좋아해요……” 정도는 하게 되었지만. 북토크에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고 돌아와도 내 안에는 뭔가 너무 많이 말한 것 같은,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 같은 느낌이 차올랐다. 그 느낌은 들썩이고 부글거리는 느낌에 가까워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나 지하철에 앉아서도 나는 쉬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돌아보면 북토크에 독자로 참석했던 나의 욕망은 뭔가 말하고 싶다기보다는 그 작가가 어떻게 말하는지 보고 싶다, 그가 어떤 말을 하든 듣고 싶다, 에 가까웠던 것 같다.
  북토크에서 뭘 말하고 싶던 적이 있나? 말하고 싶다는 마음은 편집자가 된 뒤, 북토크 진행자가 되어본 뒤에야 느낀 감정이다. 차차 그 역할이 익숙해졌을 즈음 뭔가 더 말하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작가에게 뭔가를 묻는 위치에 설 때면 그런 마음이 이는 것 같다. 그런 탓에 진행자일 때 내가 준비하는 질문의 반은 사실 걷어내도 되는 문장들이다. 대체로 내가 어떻게 읽었는지, 어떻게 느꼈는지를 말하는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경우이고, 북토크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독자들을 목격하기도 한다. 북토크 도중 마련된 시간에 손을 들고 발언하는 경우도 있고, 그런 것은 싫지만 작가와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말하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다. 궁금함에 질문을 계속하는 독자도 있고, 궁금한 것은 없고 오로지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할 뿐인 독자도 있다.
  내가 참석하고 진행해온 북토크에만 의지하여 셈해보자면 마련된 전체의 시간 중 독자의 이야기를 넉넉히 들을 시간은 매우 적었던 것 같고, 전형적인 짜임새로 진행되는 북토크에서 독자에게 마이크를 건네는 시간이 와도 내가 둘러본 앞뒤양옆의 독자들의 얼굴에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지금 이대로가 좋은데…… 같은 표정이 떠오르는 것도 목격한 적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독자가 적극적으로 말하고 싶어하고 말하는 그런 자리에 작가가 있는 것도 별로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그것이 북토크와 북클럽의 차이이겠지…… 하는 생각도. 그러나 북토크가 그렇게 엄격한 형식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므로, 주최 측에서 이런 것도 가능해요, 라고 마음만 먹어준다면 북클럽 같은 북토크, 합평 스터디 같은 북토크도 물론 가능하다. 독자 시절의 나는 그런 또 다른 형식의 북토크에는 가본 일이 없지만, 작가가 되어 종종 경험하곤 한다.
  최근 내가 참여한 앤솔러지 『겨울 연습』을 출간한 출판사 스위밍꿀에서는 이 책의 출간 전후에 우리가 친숙해하는 북토크와는 조금 다른, 아주 약간이라도 전형적이지 않은 북토크를 원했고 주최했다. 책이 출간되기 전 스위밍꿀 출판사는 ‘미완의 감상회’라는 제목으로 앤솔러지에 글을 실은 네 명의 필자에게 각각 북토크를 열어주었는데, 저마다의 형식은 모두 달랐다. 정기현의 북토크에서는 발제를, 김화진의 북토크에서는 묵독을, 정지혜의 북토크에서는 영화를, 황은주의 북토크에서는 클래식을 시간의 한가운데에 놓아본 것이다. 이야기는 그런 키워드를 통과하며 이리저리 흘러갔을 것이다. 각각의 북토크마다 말하기의 주인이, 말하기의 총량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다. 혹은 상상해본다. 작가가 더 많이 말하는, 독자가 더 많이 말하는, 작가와 독자가 엇비슷한 비율로 말하는, 작가와 독자 모두 거의 말을 하지 않는 북토크가 모두 가능한 네 번의 자리를.
  나는 전형적인 형식의 북토크(진행자-작가 중심으로 말하고 독자가 듣는)도, 전형적이지 않고자 하는 북토크도 모두 좋아한다. 각각의 시간에서 기대하는 것과 얻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형적이지 않음을 기대하는 사례를 하나 더 말해보고 싶다. 그것이 북토크는 아니지만…… 영화를 본 뒤 이야기를 나누는, 말하자면 씨네토크 자리였다. 이종수 감독의 영화 〈인서트〉 상영 후였고 이 영화는 개봉부터 전형적이지는 않았다. 개봉 지원을 받고 정식 개봉을 하는 방식이 아닌 ‘비개봉 상영회’라는 기획전의 방식으로 관객을 만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영화 개봉이 전형적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 영화의 모든 GV가 전형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참여한 자리는 그랬다. 진행자와 감독과 배급사의 공감 아래 기획된 그 자리를 소개하기 위해 GV를 진행한 평론가의 글을 옮겨 본다.
영화 토크, 강연, 대담, GV, 마스터 클래스…… 영화를 둘러싸고 발화되는 말이 어느 때보다 넘쳐나는 시기다, 왓챠피디아, 인스타그램, 블로그, 트위터, 팟캐스트 그리고 감독과의 만남에 이르기까지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장소와 언어도 넘쳐흐르고 있다. 다만 나는 어느 때보다 영화에 대해 말하고 대화하는 방법을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이 정해진 장소와 조건들은 정해진 절차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상영 뒤에 벌어지는 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관객의 ‘질문’과 감독의 ‘답변’으로 한정되고 영화에 담기는 ‘의미’와 ‘해석’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 규칙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최근 부산영화제를 매개로 다시 떠오른 용어이지만 현장의 ‘빌런’이 되기 쉽다.

왜 규칙을 어기고 끼어들면 안 될까? (……) 영화 속 (……) GV가 끝난 뒤 이어진 술자리에서 진주석은 그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만나면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면서 무슨 토론을 좋아하냐고 따진다. 우리가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현장에서 잃어버린 건 진주석이 꺼내는 이야기인 것 같다. 무의미하고 무용하고 영화에 대한 생각에 어떤 진전도 주지 않는 시답잖은 말. 영화를 둘러싼 말의 행렬에 시답잖은 농담과 잡담은 어디에 끼어들 수 있을까? 오늘 2시 아트하우스 모모 〈인서트〉 상영이 끝난 후 ‘끼어들기 토크’라는 행사에 참여한다. 무슨 얘기가 나올진 하나도 모르겠다. 감독과 배우가 참여하지만 무대 위가 아니라 객석에 함께 앉을 예정이다. 우아하고 정제된 예술영화 극장에 서로를 기분 좋게 존중하는 토론이 아니라 시답잖게 웅얼거리는 헛소리들을 채울 수 있다면……
―영화평론가 김병규 인스타그램(@about_cemetery) 게시글 부분1)
나는 행사 전 소개글을 읽으며 이게…… 가능할까? 라고 반신반의했으며 영화가 상영된 뒤 다시 한번 이 행사의 취지를 소개하는 진행자의 말을 들으면서도 줄곧 누가 끼어들까…… 영화의 관객들은 끼어드는 데 익숙한 걸까…… 그리고 그게 정말 괜찮을까, 미심쩍어했다. 친분이 있던 진행자와 감독이 내게 좀 끼어들어, 하고 기회를 주었지만 하나 마나 한 말을 하고 말았던 것 같다. 나는……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끼어들어도 된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리도 낯설고…… 다른 관객들 눈치도 보이고…… 그렇다. 우리에게는 헛소리나 객쩍은 소리를 하고 싶은 욕망과 상당히 비슷한 강도로 필요한 말, 괜찮은 말, 그리고 정리된 말을 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우리로 묶는 게 신경 쓰인다면 정정한다. 나에게만 있다…… 결과적으로 그 자리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객석의 말은 이것이었다. “영화가 기네요. 절반으로 줄여도 될 듯……”
  그 피드백, 혹은 끼어드는 말을 듣고 감독은 어땠을까? 나는 그 말을 한 관객이 가장 행사 취지에 맞는 사람 같다고 느꼈다. 그게 헛소리든 아니든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렇다면 나는? 나는 오히려 전형적인 북토크에서 좀 자유로운 편이다. 북토크에 참여하는 시간 동안 나는 긴장한 채 자유로운, 모순인 것 같기도 하고 충분히 양립 가능한 것 같기도 한 상태 속에 있다. 주로 질문하는 역할인 진행자일 때도, 주로 답변하는 위치일 때도 그렇다. 내가 경험한 가장 자유로운 북토크 역시 최근에 있었는데, 그것은 잘 짜인 진행자의 질문지 아래에서 가능했다. 산문집 『나만 아는 단어』 출간 기념 북토크였다. 함께한 임선우 작가는 내게 좋은 친구이기도 해서, 내가 어떤 말을 하든 어떻게든 대답을 해주거나 질문을 되돌려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보면 믿음이 참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디에서나 중요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북토크에서도 중요한 것이다……
  내가 꾸준히 머물러온, 시기마다의 북토크들을 떠올리며 훑어간 마음의 경로가 대부분 말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 놀라운 동시에 놀랍지 않기도 하다. 우리가 참석하는 북토크는 언제나 말로 채워져 있으니까. 누가 말하는지,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누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독자 시절부터 작가가 된 지금까지 북토크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나의 마음 혹은 내가 지켜본 누군가의 마음 역시 주로 말에 대한 것이다. 말할 수 없음, 말하고 싶지 않음, 말해도 될지 모르겠음, 말하지 않아도 충분함, 말하고 싶음, 더 말하고 싶음, 헛소리도 하고 싶음…… 미처 꺼내지 못한 말에 대한 마음도 있다. 나는 아무 말이나 들어도 좋다고 생각한 독자였으면서 왜 말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는 어떤 말도 충분치 못하다고, 듣는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같은 것들.
  하지만 못다 한 말이 있음, 상태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다음에 할 말을 찾는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도. 북토크에 대한 토크는 처음이니까…… 누군가가 이렇게 마음을 펼쳐 보이면 그 사이사이로 또 마음들이 끼어들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니까. 나는 처음으로 북토크에 대한 말을 긴장한 채 자유롭게 늘어놓아보았고 다른 경험과 마음들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진 참이다. 내가 가보지 못한 다른 북토크에선 어떤 말들이 들렸을까? 씨네토크 진행자가 듣고 싶었던 웅얼거림, 헛소리, 끼어들기도 가능했었을까? 혹은 내가 가보았던 북토크에 함께 있던 다른 사람의 또 다른 마음은 어떨까? 나는 깊이 만족한 뒤 벗어났던 그 자리를 무척이나 불만족스러웠고 불쾌했던 경험이라고 기억하는 누군가도 있을까?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자리는 생각보다 순식간에 바뀌고, 나는 이제 바뀐 자리에 가 앉으면 되는 것 같다. 북토크에 대해 말하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에.

김화진

소설가. 202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펴낸 책으로 소설집 『나주에 대하여』, 연작소설 『공룡의 이동 경로』, 장편소설 『동경』 등이 있다. 제47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너무 많은 말들에 둘러싸여 살지만 내 마음에 드는 말을 듣는 일은 무척 적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의 말이 문제가 아니라 제가 하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저는 무척 시무룩해집니다. 북토크 때에도 그렇게 될까 봐 시작 전 매번 걱정하고 긴장하지만,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면 소설 얘기하는 건 언제나 좋구나 하고 처음인 것처럼 깨닫고 맙니다.

2026/06/17
7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