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새를 다룬 글 중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발칙하여 앞으로도 오래 사랑하게 될 것이라 예감하는 산문이 하나 있다. 비밀로 하고 싶지만 어차피 좋은 건 금세 소문이 나니 밝혀보겠다. 그건 바로 메리 루플의 「눈」이다. 이 글의 첫 문장은 이렇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나는 섹스를 하고 싶다.”1) 그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이 삶을 표현하고 있었든, 심지어 강의실에 있더라도 눈이 내리니 섹스를 하러 가야겠다고 선언하고 밖으로 걸어나갈 것이라 말한다. 언제 그칠지 모르는 눈, 짧은 순간 무한정 주어지지만 소중히 보관할 수는 없는 눈, 온 세상을 뒤덮었다가 제멋대로 사라지는 눈. 이런 눈을 감각하는 일은 사랑하는 이의 부드러운 몸을 자유롭게 여러 번 투과하는 방식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리 루플은 폭설로 꼼짝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덧붙인다. 이럴 때라면, 인간도 잠시 새가 된다. 눈이 내리는 동안 나무들 사이로 깊숙이 몸을 숨긴 채, 자신의 무력함을 절실히 받아들이는 새.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새들에 대한 묘사 끝에는 무덤 위로 내리는 눈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죽은 자 위로 눈이 덮여가는 풍경은 한없이 평온하다.
  우리는 이 짧은 산문 전체를 서두르지 않는 어른의 섹스로 읽을 수도 있다. 눈 내리는 리듬은 침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랑의 향연에 겹쳐 들리며, 나무 사이에 숨은 작은 새들의 숨소리는 격정이 지나간 이후의 조용한 나른함이며, 이후 죽음과 같은 깊은 잠이 덮쳐온다. 이 장면들은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격렬하게 횡단한다기보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 전체가 잠시 눈이 내리는 찰나(刹那)에 지나갈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 산문에서 삶과 죽음을 잇는 연약한 연결고리가 바로 새다. 이 새는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대신, 깊숙이 몸을 숨긴 채 타고난 나름의 용감함으로 눈을 견딘다. 하지만 이 견디는 수동태의 상태로 인해 새는 생명체의 나약함을 정확하게 응시하고 있기도 하다. 새의 눈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동굴 사이로 스며드는 빛처럼 얇을 것이다. 세계에는 약할 때에만 비로소 알게 되는 놀라운 비밀들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 대해서도 힘찬 욕망으로 생동할 때가 아닌 수동태의 나약한 상태, 혹은 무기물에 가장 가까워지는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면 어떨까. 인간의 고통과 죽음이라는 사태를 비인간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바라본다면, 그 취약함과 소멸이 주는 감각은 기존의 익숙한 휴머니즘적 비극성을 떠나 다르게 흘러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최근에 내 머리를 휘젓고 떠나지 않던 새들을 스케치하듯 그려보려고 한다.


1.

잠시 담론을 경유해본다. 비인간을 사유하는 데 있어서 최근 많은 비평의 지향점은 인간의 관점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나아가보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SF 소설들은 자주 요긴하게 채택되었는데, 인간종을 넘어선 존재들을 중심에 두고 적극적인 사유의 모험을 감행해온 장르로서 이 방향성에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이 서사들에 기대어 비평이 가장 많이 시도한 것은 여러 동식물과 곰팡이, 로봇, 외계인 등이 ‘되기’의 포착이었다. 여러 동화나 신화를 떠올려보면 인간이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것이 그리 낯선 상상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 주목의 대상이 된 서사들은 인간의 욕망과 필요에 따라 일시적으로 다른 외형을 취하는 대신, 침투당하듯 불가역적으로 물리적 변형이 이루어지는 쪽이었다. 헤라의 눈을 피해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기 위해 백조가 되는 욕망의 제우스가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인간의 몸에 들어와 뒤엉켜 진화하는 바이러스의 양상이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비인간을 동등하게 두는 새로운 존재론에 대한 의심과 비판 역시 꾸준히 제출되는 중이다. 그 맥락을 살펴보면 크게 둘로 나뉘는 듯하다. 먼저, 온갖 비인간과 사물 등 물자체를 지니는 객체에 대해 우리가 여전히 인간의 언어와 지식으로 환원해 사유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간과하고 있지 않냐는 비판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에게 부여되었던 과도한 특권을 반성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자리까지 쉽게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다.
  전자의 비판에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이 깔려있으나, 그 언어를 통해 감각과 상상력의 세계로 쉽게 갈 수 없으리라는 깊은 불신이 보인다.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겠지만, 신유물론 이론 안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언어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너무 빨리 규정지을 필요는 없다. 언어가 언제나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수단이기도 했음을 떠올려본다면, 언어로 포섭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직관과 감각에도 언어로 가닿을 수 있는 방식은 언제나 열려 있다. 후자의 비판에는 새롭게 탈중심화되는 흐름에서 인간의 의미와 낯익은 가치를 찾을 수 없다는 데 대한 불안이 자리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두 비판에는 여전히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엄격한 구분선이 드리워져 있지 않은가. 인간 신체 내부의 박테리아들과 온갖 세포들이 비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인간은 이미 비인간과 공생중이지 않은가? 인간의 언어와 침묵과 무의식적 선택들까지 모두 자본이 되는 정보로 환원하는 플랫폼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뇌와 마음은 이미 인공지능과 뒤섞여 있는 셈이 아닌가? 그러니 인간을 물질적 차원에서 다시 사고하며 그 위상을 재조정하는 것이 그리 단순히 인간의 자리를 지우는 일로 읽힐 수만은 없다. 인간을 사유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제대로 사유하려면 비인간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리를 피라미드 꼭대기가 아닌 곳에 놓아보자는 것이다. 아침엔 네 발로 걷다가 낮에는 두 발로 걷고, 저녁이 되면 세 발로 걷는 존재를 묻는 스핑크스의 질문에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라 답하면서도, ‘네 발과 세 발로 걷는 인간성’에 대해 다시 질문해볼 수 있다.


2.

휘파람 불듯 처음 불러올 새는 루리의 그림책 『긴긴밤』에 나오는 펭귄이다. 이 그림책은 멸종 위기로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이 함께하게 된 펭귄들에 대한 이야기다. 너무 다른 종인 그들이 처음 만나는 건 전쟁이 터지면서 파라다이스 동물원이 불에 휩싸이자, 각자 탈출을 감행해야 했던 다급하고도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그럼 동물원 안에서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었나.
  노든은 아프리카 초원에서 아내와 딸을 잃고 동물원으로 끌려왔지만, 동물원 안에서조차 또다시 뿔 사냥꾼으로부터 친구를 잃는다. 혼자 살아남은 노든은 뿔 사냥 예방 차원에서 뿔을 반쯤 잘린 채,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로 소개된다. 이런 노든의 외로움과 비참에 조응하듯, 펭귄 ‘치쿠’와 ‘웜보’는 아무도 품지 않는 알을 발견한다. 어려서부터 단짝이었고 커서도 각별한 사이인 두 펭귄은 버려진 알을 품기로 마음먹고 아빠가 될 준비를 한다. 사고로 오른쪽 눈이 잘 안 보이게 된 치쿠를 돕기 위해 웜보는 언제나 습관처럼 치쿠의 오른쪽에 서서 중심 잡기를 도와주었기에, 그들에게 장애는 생활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두려운 것은 오히려 아빠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동물원이 폭격을 맞으며 웜보가 철봉에 깔리는 사고를 당하자, 치쿠는 알을 양동이에 넣고 서둘러 그곳을 탈출한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노든과 치쿠는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다는 상실감을 공유하며 서로의 긴긴밤을 지켜주는 새로운 길동무가 된다.
  이 그림책의 사랑스러움은 코뿔소 노든과 펭귄 치쿠가 ‘우리’라는 대명사로 어울리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험난한 야생을 헤쳐나갈 동무인 둘 사이에서 종적인 차이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치쿠가 가진 한쪽 눈의 장애나 동물원에서 태어나 야생의 원리를 잘 모르는 상태는 취약하거나 의존적인 존재 방식이 아닌, 다른 돌봄에 기여하는 능동적 존재로 그려진다. 치쿠에게 먹을 만한 것들을 구해주고 독성이 있는 것들을 알려주는 것은 노든이지만, 이야기를 좋아하는 치쿠의 성정은 노든이 악몽을 꾸지 않게 만들어준다. 무엇보다 치쿠가 옮기는 알을 함께 지켜야 된다는 목적이 노든에게는 삶의 활력이 된다.
  그러니 치쿠가 죽은 뒤 그 알에서 깨어난 어린 펭귄에게 노든이 기꺼이 보호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은 단순한 호혜나 책임만이 아니라 그의 생을 잘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다. 서사는 이렇게 돌봄 대상의 혜택이 아닌, 돌보는 자의 기쁨을 다시 발견한다. 알의 상태에서부터 깨어난 후에 이르기까지 어린 펭귄을 돌보는 존재가 모두 남성이지만 이들이 혈연으로 일절 묶이지 않는다는 점도, 부계 혈통주의에 기댄 전통적인 재생산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관계 양상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치쿠와 웜보의 퀴어적 관계나 치쿠가 가진 눈의 장애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돌봄 역할과 대안 가족 상상력은 비인간 동물이기에 자연스러운 것으로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이 서사에서 특별히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름과 관련해 인간적인 사회화를 멈추는 지점에 있다. 어린 펭귄은 노든에게 어디서든 자신을 부를 수 있게 이름을 줄 것을 요청하지만, 노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날 믿어. 이름을 가져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나도 이름이 없었을 때가 훨씬 행복했어. 게다가 코뿔소가 키운 펭귄인데, 내가 너를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지. 이름이 없어도 네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너를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걱정 마.”2) 이 장면이 인상적인 건 인간이 알고 있는 자유와 사랑이 겹쳐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말을 초과하는 것, 그러니까 상대방의 냄새와 말투와 걸음걸이를 알아차리고 기억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적 조건도 없이 사랑한다는 건 환상이겠지만, 긴 시간 속에 많은 것들이 여과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상대가 지닌 특유의 리듬이다. 이건 머리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감각되고 익혀지고 알아차리게 되는 것들이며, 언어 너머로 흘러내려 질기고 이상한 애착을 형성한다. 그런데 『긴긴밤』의 이 대사에서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그간 동물을 가두거나 길들여온 오랜 방식에서 벗어나도록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는 인간 언어의 특권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동물을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 동물마다 어울리는 자연의 공간이 정해져 있다는 핵심적인 전제가 읽히기도 한다. 동물원은 기본적으로 의식주가 제공되는 안온한 돌봄의 공간이지만, 이 안에서 인간의 배려는 노든의 뿔을 사전 제거하는 것처럼 어떤 식으로든 야생 동물을 가축화하는 폭력을 수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야생에서의 삶은 시시때때로 굶게 되거나 독성 물질과 포식자로부터의 위험에 노출되더라도, 거의 절대적인 자유와 등치되며 긍정적으로 의미화된다. 흥미롭게도 동물원에서 태어나 단 한번도 바깥세상을 접해본 적 없는 치쿠에게도 바다는 중요한 목적지가 되며, 이 목적지는 초원에서 깨어나 코뿔소 노든에게서 길러지는 어린 펭귄에게도 자연스럽게 주입된다. 실제로 이 그림책의 끝은 거친 모험 끝에 홀로 바다에 이른 어린 펭귄의 성취에 대한 뿌듯함과 함께, 많은 펭귄들 사이에 뒤섞여 사라지는 그림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에는 서구 철학자들이 이상화해왔던 자립적인 주체에 가까운 야생동물에 대한 낭만화가 자리한다. 이 반대편에는 동물원 안에서 반강제적으로 가축화된 동물과 그 의존적 삶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은근하게 깔려있다. 해방되었을 때 되돌아갈 자연 상태라는 게 존재하며, 자연의 서식지에서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동물이 되는 것이 어엿한 성장으로 여겨지는 마지막에 이르러, 이 서사는 자연과 인공을 다소 단순하게 가르며 돌봄과 연대의 의미를 좁혀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긴긴밤』은 삶에서 가장 가까웠던 이를 상실하는 슬픔에 대해, 그럼에도 계속 이어지는 삶을 만들어내는 관계와 돌봄에 대해 말한다. 출생 전후로 우리가 어떻게 다른 몸에 의존하는지, 그리고 그 돌봄이 어떻게 젠더나 종을 자유롭게 횡단하며 수행될 수 있는지 강조한다. 그러나 이상적인 동물의 상태를 인간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연의 서식지에서 자립하는 것으로 보는 방식은, 앨리슨 케이퍼가 말한 대로 환경운동과 자연에 관한 서사에 끈질기게 따라붙는 비장애중심주의적인 것일 수 있다. 앨리슨 케이퍼는 “자연에 관한 서사가 어떻게 ‘자연적인 것’을 매개 없이 경험할 수 있는 자에게만 열려 있는 것으로 끈질기게 제시되는지”3) 밝혔다. 인간에게 자립을 요구해온 방식이 부지불식간에 비인간에게도 적용될 때, 취약성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삶의 질은 단순하게 평가될 수 있다.


3.

현호정의 단편 「한 방울의 내가」(《릿터》 2022년 10/11월호)는 의인화된 감정의 세계와 객체지향적인 세계를 오간다. 이 소설의 ‘나’는 여러 번의 생을 거듭하는 한 방울의 존재다. “우리 물들에게 너라는 말은 지난 생의 나 혹은 다음 생의 나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라는 소설 서두는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단독적인 내면과 개체성을 상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한 방울로서도 완전하지만 쉽게 뒤섞이기 좋은 물이 주인공이 될 때 ‘우리’라는 대명사는 꽤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소설의 중력은 인간 여성 ‘메이’로부터 한 방울의 눈물로 태어난 내가 가진 고유한 그리움에 몰려 있다. 모든 물방울이 하나의 탄성을 내지르며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춤의 절정에서도 나는 메이를 떠올리고, 그 그리움은 물방울들을 원심력에서 튀어나오게 만든다. 이번 생은 메이의 눈물로 태어났으니 끝까지 메이의 눈물로 살겠다는 요동치는 감정을 바람은 ‘이기’라고 알려주지만, 이는 아마 인간이 근대 이후 사랑으로 규정해온 것과 가장 유사한,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마음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날 메이에 대한 짝사랑에 깊이 빠진 물방울에게 하나의 미스터리가 생겨난다. 전생을 이렇게나 생생하게 기억하는 데도 이상하게 끊긴 부분이 있는 것이다. 검둥오리 ‘비비’가 먹을 게 너무 없다며 고통스러워하다가, 자기가 낳은 첫 번째 알을 먹는 중에 ‘나’는 뭔가를 깨닫는다. 저와 같은 일이 오래전 비비와 자신에게도 일어났음을 깨달아버린 것이다. 그 과거에 ‘나’는 비비의 엄마가 낳은 알 속 흰자의 일부였다. 흰자로서 ‘나’는 알 깊은 곳에서 만들어지는 중인 아기 오리를 안전하게 지켰지만, 알이 깨어날 가능성이 없어보이자 어미 오리는 그 알을 깨트려 먹었다. 그리고 더 건강한 두 번째 알을 낳았고 그게 바로 비비다. 비비는 엄마의 사랑 속에서 자라났지만, 새로운 탄생 이전에 엄마의 먹잇감이기도 했다는 것이 이 장면이 주는 서늘함의 기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먹고 먹히는 이 장면은 잔혹한 약육강식의 맥락에서 그려지지 않는다. 이것은 그저 모든 생에 불가피한 의존성의 문제다. 우리가 무엇을 음식으로 여기는지는 젠더와 인종과 계급과 계층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진다. 그런데 종의 차원을 넘어서서 음식을 생각해본다면? 이 장면은 인간이었을 때는 상정하기 어려운 ‘먹히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상상하게 한다. 한 방울의 ‘나’는 사랑이 넘치는 감정과 의지의 자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먹이 자아’이기도 한 것이다.
  먹고 먹히는 인간, 식인(食人)에 대해 인류학은 우리에게 사유의 단초를 제공해두었다. 식인은 단순히 본능과 야만의 산물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정교하게 제련해온 문화에 가깝다. 추가적인 보충물을 통해 필요한 영양소를 충족시킬 필요가 있었던 부족은 자신들이 먹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경이와 존경을 느끼며, 정교한 의례, 신화적 설화, 그리고 연민적 영성까지 발달시켰다. 랄프 아캄포라는 성공적인 사냥꾼에 대해 “마음에 잔혹함이 없고 최소한의 아픔이나 고통을 가하면서 살해를 완수하는 사람”이라 설명하며, “희생된 생물을 향한 용서와 감사의 기도”를 지닌 ‘배려하는 식인자(caring cannibal)’ 개념을 고안해냈다. 배려하는 식인자는 인간 피식자에 대한 억압적인 착취자이지만, 동시에 “분명 자신들이 먹는 사람들을 인간 이하의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동등한 혹은 대등한 존재로 이해”한다.4) 이 동등한 관점은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가 접근한 아마존의 원시사회에서도 드러난다. 투피남바 족에게 식인은 복수의 부가 장치였다. 포로는 그들의 포획자와 식사와 축제와 전쟁을 함께했고, 무엇보다 포획자의 누이를 아내로 얻기까지 했기에 역설적으로 온전한 인간만이 포로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그 포로를 죽이고 먹는 행위란 “사교성의 과잉”이자 “‘타자’를 통한 자기규정”5)으로, 타자에게 열려있다는 증표였다.
  단편 「한 방울의 내가」가 수없이 많은 전생을 거듭하는 동안에, 그 속에서 먹고 먹히며 시간 속에서 나와 타인의 경계를 지웠다면, 최근 발표된 단편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악스트》 2024년 5/6월호)에서는 ‘기생 쌍둥이’(Parasitic Twin)라 불리는 현상을 통해 나와 타자에 전제된 위계를 무너뜨린다. 지구 전체가 물에 잠긴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새로 태어난 유기물들, 그러니까 기생 쌍둥이 현상은 쌍둥이 중 한쪽이 다른 한쪽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신체로 결합해 태어난 경우를 일컫는다. 둘 중 더 크고 더 정상에 가까운 몸을 가진 아기는 ‘자생체’로, 더 작고 비정상적인 몸을 가진 아기는 ‘기생체’로 불리며, 대부분의 경우 분리 수술이 이루어진다. 자생체에서 기생체를 떼어내지 않으면, 자생체의 수명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은 그 분리가 어떻게 불가능한지 말하는 데 집중한다. 아기처럼 낳을 필요 없이 매달린 채 계속 자라는 기생체는 평생 나를 떠날 수 없는 영원한 애인처럼 달콤한 동시에, 자생체를 완전히 흡수해버리는 잔인함과 파괴성으로 둘 모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기생은 사랑과 구분되지 않고, 사랑은 죽음과 구분되지 않는다.
  이 기생 쌍둥이들의 이야기로 진입하기 전 끼어들어 있는 ‘이란성 쌍태아였던 K의 사례’는 중요하다. 산모 배 속에서 K의 쌍둥이는 17주차에 혼자 심장이 멈추었고, K는 무사히 자라나 제왕절개를 통해 세상에 태어난다. 그리고 K가 태어나던 그날은 쌍둥이 동생의 공식적인 사망일이 된다. 이 이야기는 기생하는 삶과 자생하는 삶이 유별하게 따로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가 다른 존재나 죽음과 뒤엉켜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그래서 자생체와 기생체가 엎치락뒤치락하는 긴 소용돌이 끝에 다음과 같은 지구와의 대화가 가능해진다. 기생체로서는 유일하게 심장을 가진 ‘나’가 지구에게 엄마라고 불러도 되는지 묻자, 지구는 이렇게 말한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아직도 몰라? 너는 내 안의 쌍둥이야. 내가 기른 나의 분신이야. 아름다운 기생체야. 심장을 가진 조그만 머리통이야.”6)
  심지어 지구조차도 엄마가 아닌, 뒤엉킨 채 기생하는 쌍둥이로 놓인다고 말하는 소설은 여러 번 ‘아름다운 것’과 ‘살아있는 것’을 구별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단순한 생에 대한 찬가가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 속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지닌 이상한 파토스는 ‘아름다운 기생체’를 전제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 같다. 인간과 비인간, 모든 생물체와 지구와의 관계에는 이렇게 자생과 기생이, 삶과 죽음이 나눠질 수 없이 맞붙어있을 것이다. 현호정의 「한 방울의 내가」에서 ‘먹이 자아’로서의 정체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과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에서 기생자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닮아있다. 이 두 정체성은 포식자를 악마화해왔던 단순한 시선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나르시시즘에서 해방되도록 이끈다. 이는 단순히 자신을 억누르며 시혜성을 발휘하는 것과는 결을 달리한다. 상호간의 의존성과 삶의 위태로움과 취약성이 삶에 대한 충동과 제각기 뒤엉켜있음을 이해할 때, 목소리 없는 존재라고 느꼈던 비인간과의 관계는 동등하게 열릴 수 있다. 비인간에 함부로 인간중심주의적인 해석을 투사하지 않는 것, 인간의 실천이 반드시 더 심오하거나 의미가 있다고 착각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동물성을 직시하는 것은 모두 의존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나약한 우리의 얼굴을 마주하는 용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강지희

문학평론가. 평론집 『파토스의 그림자』를 냈다.

2024/08/21
68호

1
메리 루플, 『가장 별난 것』, 민승남 옮김, 카라칼, 2024, 13쪽.
2
루리, 『긴긴밤』, 문학동네, 2021, 99쪽.
3
수나우라 테일러, 「상호의존적인 동물」, 캐럴 J. 애덤스, 로리 그루언 엮음, 『에코페미니즘』, 김보경, 백종륜 옮김, 에디투스, 2024, 273쪽.
4
랄프 아캄포라, 「배려하는 식인자와 인간/인도적 축산업」, 캐럴 J. 애덤스, 로리 그루언 엮음, 『에코페미니즘』, 김보경, 백종륜 옮김, 에디투스, 2024, 375-379쪽.
5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존재론의 자루 옮김, 포도밭, 2011, 139쪽.
6
현호정,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 《악스트》 2024년 5/6월호, 1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