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
빈곤 클리셰 부수기
미디어가 재생산하고 있는 빈곤 청년의 모습에 대하여
소설 : 「복 있는 자들」 (길란, 2025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영화 : 〈기생충〉 (봉준호, 2019)
영화 : 〈소공녀〉 (전고운, 2018)
영화 : 〈여름이 지나가면〉 (장병기, 2025)
드라마 : 〈작은 아씨들〉 (정서경 극본, 2022)
글 : 김폴짝, 「어떻게 나는 100만 원도 없는 35살이 되었나」 (포스타입, 2025)
안온 : 반갑습니다, 혜원 님. 초면에 세속적인 말을 하자면 저는 늘 등단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웃음) 신춘문예가 발표되자마자 읽었어요. 공교롭게도 그 작품이 발표되던 시기는 제가 자취방에서 혼자 살다가 엄마와 둘이 집을 옮기기로 결정이 나고, 월세 아파트로 들어왔던 때예요. 지금도 살고 있는 이 집이 월세 아파트거든요. 그래서 빌라살이를 하다가 신축 아파트로 들어온 주인공의 삶과 저의 삶이 맞아떨어졌어요. ‘수급권이냐 비수급권이냐’의 기준만 달랐던 거죠. 다만 저는 수급자였다가 수급권 안의 삶을 자발적 탈피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주인공의 삶의 궤적과 많이 겹친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았던 부분은 수급자가 수영을 다닌다는 설정을 정확하게 넣어준 부분이었어요.
연혜원 : 저도 그 부분이 좋았어요. 문화적 인프라를 누리는 데에는 상대적 빈곤만 존재하거든요.
안온 : 그래서 ‘가난한데 왜 치즈 돈가스를 먹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가난한 사람은 일반 돈가스 먹기에도 벅차다’는 사회의 뭇시선은, 결국 취미나 건강 관리 영역에도 적용이 돼요. ‘가난한 사람이 감히 용품이 비싼 수영을 다녀’와 같은 맥락이 생성되거든요. 특히 수영은 가난했던 사람과 가난하지 않아 봤던 사람이 티가 많이 나는 운동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왜냐하면 아직까지 저 또한 수영을 할 줄 모르거든요. 지금이야 초등학교 때 생존 수영을 가르치지만 그러지 않았던 세대에서 수영이란 결국 수영장에 갈 수 있는 사람들만 배울 수 있는 특권 계급층 스포츠예요. 하지만 수영은 그와 동시에 생존과 깊은 관련성을 가지잖아요. 가난한 청년에게 부족한 지점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빈곤 청년은 생존의 문제마저 사치의 영역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시선에 자주 노출되고 이를 알면서도 바로잡을 기회를 얻지 못해요.
한편으로 해당 소설이 다소 아쉽다고 느낀 점은 소설 자체의 문제라기보단, 이 소설을 받아들일 여러 계층 간의 의견 교류가 납작해질 것이라고 염려되는 부분이었어요. 1인칭 주인공 시점이지만 주인공의 삶에 결코 공감할 수 없는 독자와 주인공 사이의 거리가 영원히 좁힐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도 생각했거든요. 누군가가 봤을 때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가난과 염세주의에 찌들어 히스테릭한 사람으로 읽히고 끝이 날 지점들이 너무 아쉬웠달까…… 모든 사람이 소설의 면면을 다층적으로 읽지는 않잖아요. 그러면 결국 이 소설을 읽고 가장 납작하게 읽었을 때의 독후감은 역시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은 뒤틀려 있다’ 같은 결론이지 않을까 하는 지점들도 있었고요. 그런 부분은 조금 더 주인공의 속내를 얘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현실을 반영하는 소설이 어디까지 세부적으로 묘사해야 여러 환경에 놓인 소수자성을 가진 당사자들이 덜 상처 받을까 고민이 많이 되었습니다.
연혜원 : 저도 처음 읽었을 때, 되게 재미있게 읽었어요. 제가 주목한 부분은 빈곤 청년에게 있어 삶이란 복잡한 서류를 떼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이었는데요. 그런 지점에서 저 또한 주인공의 삶에 이입이 많이 되었어요. 제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청년인지를 증명하고 고민하는 데에 너무 많은 세월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늘 컸거든요. 말하자면 위기에 있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을 증명하는 일, 위기에 있지만 이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서류를 만들고 떼는 일들이 현재 우리 사회의 빈곤 청년을 규정화하고 있잖아요.
저는 실제로 되게 많은 빚이 학자금 대출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대학원에 다니고 있고 뭔가 문화예술을 계속하는 데 돈을 사용하고 있고…… 그런 것들을 한없이 헤아려보면 내가 과연 제도권 안의 가난에 속한다고 어디서 말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며 삶을 검열하게 돼요. 분수에 맞지 않게 허영심을 부리는 삶으로 비난받기 쉽다는 생각을 자주 하죠. 그런데 이 소설이 그런 모습을 주목하는 작품이었기에 참 좋았어요. 물론 소설 「복 있는 자들」을 두고 왈가왈부한 여러 의견에도 흥미가 갑니다. 누군가는 또 빈곤을 팔아서 등단했다고 평하기도 하고요. 어떤 빈곤이나 결핍을 자신의 자원으로 삼는 것이 정당하냐며 도덕적 잣대를 엄중히 들먹이는 것이 순문학의 관습이기도 하니, 어느 정도 이해는 됐어요.
안온 : 그런 측면에서 저는 이 삶이 누군가에게는 진짜 삶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가난이라는 측면에서는 기존에 속아온 지점들이 워낙 많다 보니 더욱 엄격해진다고도 생각이 드는데요.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 중에 성실한 사람들에게만 복지의 혜택을 주어야 한다’ ‘부정 수급을 검열하는 것이 복지 차원의 제도를 늘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식의 발언들이 자꾸 우리 사회에서 더 앞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연혜원 : 맞아요. 필담 전에 제가 드렸던 포스타입 글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해당 글의 글쓴이는 35세에 100만 원밖에 모으지 않은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죠. 저는 그걸 읽었을 때 제 부채까지 합쳐 100만 원도 못 모은 35살이었는데요. 말하자면 그저 부채밖에 없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사회적으로 엄청난 문제가 있고 이것이 굉장히 비정상적이며, 심지어는 한심하다고 평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안온 : 어떤 맥락인지 잘 알 것 같아요. 저도 혜원 님의 생각과 동일하거든요. 왜냐하면 모든 상황은 다르고, 모든 가난은 다르며 그렇기에 그 가난한 상황에서 선택하는 개인의 판단을 다소 좁은 스펙트럼 안에 밀어넣는 것이 저 또한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저는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빈곤 상황에 처했을 때 극한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으며 부채를 갚는 식으로 삶을 영위해왔던 사람이기에, 제 선택을 저의 에세이에 집어넣는 것도 조심스럽기도 했어요. 자칫 잘못하면 저의 삶이 일반화되어 능력주의의 일환으로 보일까봐 걱정스러웠거든요. 물론, 그런 걱정이 지나친 자아 비대라고 생각해서……(웃음) 하지만 실제로 책을 낸 이후 몇몇 반응이 ‘안온 작가처럼 부지런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제도적 혜택을 더 줘야 한다’라는 식으로 제기되는 것을 보고 엄청 속상했어요. 제 뜻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그저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그 선택에 따른 결과와, 이를 토대로 만들어지는 사회적 논의가 조금 더 세상 밖으로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특히 빚이라는 것에 대해 사회가 다분히 이중적 시선을 가지고 있어요. 부자들은 빚을 갚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빚이 생겨도 재산이라고 하고, 부자가 아닌 사람은 빚을 갚을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경우가 많잖아요. 행여나 빚을 갚는 기간이 30년씩 걸린다고 말하면, 그건 너무 비효율적인 행위라고 치부해버리고. 사실 주택담보대출이 다 3-40년씩 상환하는 것이고 매우 많은 인구가 해당 대출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주거 현실인데도 불구하고요. 가난을 ‘극복’하고 ‘탈출’하기 위해 개인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기본 전제라고 보는 시선이 때로는 얼마나 폭력적인지 이야기하고 싶은데,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며 실제 사례를 들면 대부분은 ‘그래 그렇게 안타까운 사연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 게을러서 그래’라고 일갈해버리는 부분들이 저는 너무 답답해요. 왜 어떤 이들은 현실을 반영한 허구의 소설 속 인물인 「복 있는 자들」의 주인공에게까지 그런 시선을 적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스스로 타인의 가난을 재단하고 있는 자신부터 성찰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라는 생각을 이 작품을 읽으며 끊임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저는 소설 속에 나오는 샬레 마켓이 최소 배송료가 4만 원 이상인 현실의 고급 식료품 몰을 은유하고 있다고 봤고요, 그랬을 때 고급 식료품 인터넷몰 박스가 현관에 있는 사람이랑 대중적 식자재 배송몰 박스가 현관에 있는 사람으로 계층을 나누는 우리 사회의 흔한 시선을 이 소설이 역전해준 점도 좋았어요. 식자재라는 것이 가장 일차원적인 가난의 모습인 동시에 가장 다층적인 면모를 품을 수도 있거든요. 가난하다고 해서 말랑하고 달콤한 제철 복숭아를 절대 못 사먹어야 하냐, 라는 질문을 이 소설이 던지고 있죠.
연혜원 : 복숭아, 하니까 생각난 건데 영화 〈기생충〉 혹시 보셨나요?
안온 : 네, 봤지만 〈기생충〉이 가난을 다루는 방식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연혜원 : 사실 저도 되게 안 좋아하는데요. 보고 나서 엄청 화를 냈었던 기억이 있어요. 안온 님은 어떤 부분이 불쾌하셨나요?
안온 : 제가 「복 있는 자들」을 긍정적으로 평하고, 〈기생충〉을 부정적으로 느끼는 까닭의 최우선 지점은 두 작품의 시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자들」은 당사자성을 드러낼 수 있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우리가 납득을 해야 되는 지점이 훨씬 친절하게 다가오고, 어떻게든 독자와 거리를 좁히고 있어요.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택하면 독자는 필연적으로 주인공의 생각과 삶에 이입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기생충〉은 3인칭 시점처럼 느껴져요. 오히려 1인칭 시점을 쓴 마지막 부분에서 관객들은 그동안 재단한 자신의 시선을 토대로 기택네 가족의 몰락을 자업자득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만큼요. 영화의 플롯 구조상 우리는 기택(송강호 배역)의 집안보다 동익(이선균 배역)의 집안에 감정을 의탁하게 됩니다. 그들은 멀쩡히 잘 살고 있는 부잣집인데 ‘피해자’가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는 계급을 철저히 선악 구도의 서사적 수단으로 쓰고 있어요. 그렇기에 가난은 항상 불유쾌한 것으로 취급돼요. 이를테면 빈곤의 계층이 ‘체취’로 치환되는 부분이 그렇죠.
동익은 기택과 기택 가족에게서 나는 냄새를 지하철 냄새에 비유하는데요. 지하철이야말로 모든 서민의 대중교통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지하철을 타본 경험이 훨씬 많을 관객들이 동익네의 상황에 더 연민을 느끼는지 의아했어요. 영화를 돌려보며 여러 의문이 들었습니다. 결국 이 영화를 소비하는, 지하철을 타는 모든 시민을 순식간에 빈민층으로 낙인찍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렇게 말하면 상을 받은 작품에 대해 지나치게 ‘진지충’ 모드로 비평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렇다면 엄밀히 서사적 장치로서 해당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빈민층이 범죄 현장과 연결되게끔 짜여 있는 것도 그냥 영화가 주는 플롯의 재미로 치환될 수 있는가. 마음이 복잡했어요. 그리하여 기택네 집안에 결국은 ‘쌤통이다’ 같은 감정이 생기고 ‘제일 불쌍한 건 다송이네’ 같은 말로 이 영화가 마무리되는 것이 과연 해당 영화의 결말로 적합한지도 잘 모르겠고요. 전 세계적으로 호응을 받았기에, 큰 상을 받았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 영화로서 성공을 했기에, 이런 불편한 지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자칫 이 정도 서사도 짤 줄 모르는 일개 작가의 지나치게 삐딱한 시선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웃음) 유명한 감독의 유명한 영화라고 해서 빈곤을 전형적으로 정당화해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
연혜원 : 저도 너무나도 동의합니다. 저는 빈곤과 부유층의 대칭 구조를 정말 안 좋아해요. 특히 소설, 영화처럼 대중적 접근이 쉬운 문학에서 그런 구조가 남용되는 것이 피로해요. 가난한 자를 뺏는 자로 치환한다거나,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은 늘 부자의 것을 부러워하는 자로 만드는 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부자들의 기호가 솔직한 마음으로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 저는 굳이 따지자면 단 한 번도 강남의 무엇이, 부자들이 사랑하는 옷과 문화적 아비투스가 끌린 적이 없어요. 이를테면 저는 누구나 식별가능한 명품 브랜드가 개인의 개별성을 무미건조하게 만들어버리는 몰개성의 상징처럼 느껴지고, 그러한 상품 하나를 수백만 원 이상 주고 산다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지거든요. 그런 상품을 소유함으로써 진입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있고, 그 커뮤니티만 누리는 특권이 있을 텐데, 그러한 커뮤니티의 존재가 전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달까요. 이런 저의 모습과 마음은 아직까지 미디어에 등장하지 않은 것만 같고, 특히 미디어가 부자의 것을 탐내지 않는 가난한 자를 ‘캔디형’ 인물로 그리는 클리셰를 고수하는 것이 더욱 안타까워요.
그리고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돈이 많은 쪽이 사기와 갈취와 탈취와 착취에 더 연루되어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뭔가를 빼앗지 않으면 부자가 될 수 없는 세상이잖아요. 그것이 타인의 기회가 되었든 시간적 여유가 되었든, 사기를 치지 않고,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으면 부자가 될 수 없는 세상인데 왜 항상 빈곤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살만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정신승리가 되고, 부자가 자신의 삶을 살만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것은 오직 개인의 능력으로 일구어낸 성공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무엇보다 〈기생충〉에 ‘구조로서의 사회’가 빠져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빈곤과 부유층은 각자의 노력 여부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엄연히 부유층이 빈곤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노동보다 자산이 더 큰 자산을 만들 수 있는 아주 근원적인 불평등한 ‘구조’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구조는 쏙 빠지고 기택의 가족과 동익의 가족이 우연하게 만나게 되고, 기택의 가족은 그런 동익의 가족을 기회로 삼음으로써 결국 빈곤한 가족이 비극을 추동한다는 서사가 굉장히 사회학적이지 않게 느껴지는 동시에 악랄하게까지 느껴져요.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사회학을 전공했죠. 모든 감독의 전공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그가 사회학을 공부한 것을 그의 작품과 연결 지어 많이 언급하더라고요.
왜 자꾸 가난한 이들은 ‘빌런’이 되나요? 그리고 왜 자꾸 미디어는 그런 장르로서만 가난한 이들을 단편적으로 소비하고 있나요? 진짜 세상에서 악독한 이들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미디어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나요? 애초에 누군가를 부자로 만든 사회 구조 자체가 완전히 소거되어 있다는 점에서 저는 〈기생충〉이 이룩한 영화사적 업적과는 별개로 해당 작품이 미디어가 축적해온 가난 서사의 지나친 전형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안온 : 그렇죠. 이는 단순히 〈기생충〉만의 문제가 아니라고도 생각되는데요. 특히 미디어에서 부를 가진 사람들은 늘 우아하고 정적이고 사유를 깊게 하고. (웃음)
연혜원 : 가만히 있고. (웃음) 심지어 해당 캐릭터에게 ‘부’라는 것은 되게 자연적이고.
안온 : 때론 선험적이죠.
연혜원 : 그러니 더더욱 빈곤이라는 건 굉장히 능동적으로 능력을 만들지 않아서 얻게 된 후천적인 것이 되고. 그러고 보면 「복 있는 자들」 역시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가난한 이들과 다른 가난한 이들, 그리고 또 어떤 가난한 이들이 익명의 감시 관계로 그려져 있는 것이 아쉬운 지점이기도 한 것 같아요.
안온 : 그 말에 깊이 공감해요. 생존을 위해 서로를 가장 먼저 밀어내거나 감시해야만 하는 구조적 비극이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더욱 단절시키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잠깐 다른 개념을 빌리자면, 국어학적 개념에서 반의어는 상보 반의어, 방향 반의어, 정도 반의어로 나뉘거든요. 방향 반의어는 ‘앞뒤’ ‘좌우’ 이런 거고. 상보 반의어는 ‘좋아하다’ 아니면 ‘싫어하다’이지 중간에 ‘덜 좋아하다’, ‘조금 좋아하다’를 뜻하는 하나의 단어가 없는 것을 뜻해요. 한편 정도 반의어는 ‘차갑다’와 ‘뜨겁다’ 사이에 ‘미지근하다’가 있듯이 중간 스펙트럼이 있는 반의어를 말하는데요. 현재 우리 미디어 문학의 빈곤과 부는 상보 반의어처럼 보입니다만, 궁극적으로는 정도 반의어적 성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빈곤과 부 사이에도 풍부한 중간 스펙트럼이 미디어화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몇몇 작품들에 등장하는 빈곤 청년들을 이런 스펙트럼으로 나눠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떠오르시는 다른 작품이 있나요?
연혜원 : 안온 님의 말씀처럼 미디어가 생산하는 빈곤의 장면을 스펙트럼화할 때는 안타깝게도 〈기생충〉 류가 대다수인 것 같아요. 안온 님께서 이번 필담을 위해 미리 보고 올 미디어로 추천해주신 〈작은 아씨들〉도 그러했습니다. 처음에는 되게 흥미진진했거든요. 그래서 되게 즐겁게 봤고요. 중반부부터는 반전 만들기 혹은 쫓고 쫓기는 서사에 치중하는 부분이 다소 한국 드라마의 전형 같았습니다. 특히 결말 부분이 정말 아쉬웠어요. 그래서 결국 이 이야기의 인주(김고은 역)에게 떨어진 보상이라는 것은 한 거대한 그룹의 비자금 700억이라는 거니까. 결국 돈만이 보상인가.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는 인물이 아니라, 가난을 극복하려는 일반인이 상상조차 어려운 어마무시한 액수의 그 돈이 곧 해피엔딩의 조건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드라마를 보면서 가난했다가 700억 정도는 점프해야 그 차이에서 쾌락을 느끼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안온 : 저도 이번 기회에 다시 보면서, 결말부가 참 아쉬웠어요. 권선징악과 신데렐라형이 버무려진 해피엔딩이 정말 최선이었을까. 도입부에서 인주 캐릭터가 좋았거든요. 왜냐하면 보기 드문, 가난하지만 나름 자신의 자기의 줏대가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해서, 기대감이 잔뜩 있었는데 갈수록 〈작은 아씨들〉의 여성 캐릭터는 다분히 남성 캐릭터들에게 의존적인 행태를 보이고, 다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 만능주의에 편승하려고 하는 거예요.
연혜원 : 맞아요(웃음). 상당히 성별 이분법적인 구도가 나와서 의아했어요. 그 과정에서 가난은 결국 이 사람의 인격 형성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고, 그리고 그것들이 너무나도 동화적인 결말—하필이면 권선징악이라는 동화적인 결말—로 다가가는 바람에 0원에서 700억이 되는 삶이 시사하는 바는 결국 가난해도 부자가 되면 된다, 가난했지만 부자가 되면서 심지어 이성애적 사랑의 완성형을 찾으면 인생이 행복해진다, 로 귀결된다는 점이 안타까웠어요. 결국 미디어는 아주 거대한 대중적 선호와 지금까지 불려온 정상성이라는 맥락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지점이 있는 걸까요. 뭐랄까, 특정 소재만 정상성에서 벗어나 특별한 척을 하며 소재에서 신선함을 추구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이 사회의 정상성 신화를 다시 구축하기 위한 소비재로만 전락하는 거죠.
안온 : 맞아요. 그런 측면에서 〈작은 아씨들〉과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 나오지만 전혀 다른 결을 보여주는 2018년의 영화 〈소공녀〉 속 미소(이솜 역)는 빈곤 클리셰를 부수기 위해 우리의 영상 문학에서 꼭 필요한 캐릭터라고도 생각됩니다. 함께 추천해드린 〈소공녀〉는 어떠셨나요?
연혜원 : 〈소공녀〉 너무 좋았어요.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는 표를 하나 만들어 봤는데요. (그림 참조)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작품 「복 있는 자들」의 주인공, 〈기생충〉의 동익과 기택네, 〈작은 아씨들〉의 인주네, 〈소공녀〉의 미소를 표에 배치하면 이렇게 됩니다. 물론 「복 있는 자들」은 미디어 영상 문학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안온 : 가족 제도와 능력주의가 정상성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에서 지금까지 다룬 작품들을 깔끔하게 넣어 주셨군요. (웃음) 십분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작품의 수가 모자란 칸과, 비어 있는 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혜원 님께서 추천해주신 〈여름이 지나가면〉이 저는 〈소공녀〉와 비슷한 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여름이 지나가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완전히 비어있는 칸을 제가 원래 알고 있던 작품들로 채워봐도 괜찮을까요?
연혜원 : 좋습니다.
안온 : 여러 사람들의 ‘인생 드라마’라고 꼽히는 것들로 추려봤어요. 이렇게 놓고 보니 정말이지 미디어가 그리는 빈곤 청년의 서사는 결국 성공 신화를 선망하는 현세대의 욕망과 기성세대가 안정형이라고 추구하는 정상 가족 제도를 결말로 상정하고 있어요. 결국 해당 결말로 편승하기까지의 과도기적 인간으로만 빈곤 청년이 그려지고 있었다는 우리의 의견 역시 일반화가 가능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왜 혜원 님께서 〈여름이 지나가면〉을 추천해주셨는지 알 것도 같아요.
보는 내내 저는 그냥 계속 가슴이 저리는 거예요. 이 애들 나도 살아오면서 봤던 애들인데, 얘는 몇 학년 몇 반 누군데, 하며 자꾸 제 주변 인물들이 하염없이 지나가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소년인 기준이가 특히 영문의 삶을 동경하는 데에 있어서 어떤 지점은 가난을 동경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 같아 처음 느껴보는 신선함도 있었어요. 왜냐하면 가난을 동경하는 부잣집 아이를 저는 이 영화에서 처음 봤거든요. 가난한 가족의 ‘화목한 가정 분위기’ 같은 걸 동경하는 부잣집 캐릭터는 흔하지만, 그건 또 정상 가족 프레임화라는 다른 문제니까요. 다만 사회적 맥락을 배제하고 개인적 상황에만 치중해서 서사를 읽어내려본다면 남성 청소년의 사춘기라는 측면으로 다소 좀 비좁게 읽힐 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들었는데요. 하지만 혜원 님께서 설명해주신 ‘빈곤 청년 및 청소년 미디어 이미지에 수평적 구도가 더 필요하다’는 측면에서는 아주 충분한 예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연혜원 : 맞아요. 제가 이 영화를 추천한 가장 큰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사실 남성 감독이 그려내는 남성 청소년들의 이미지는 자칫 누아르나 영웅 서사가 되기 쉬운데 이 작품에서는 남성 청소년들 간의 애착 관계와 계층을 되게 미묘하고 섬세하게 구분해서 좋았어요. 그러니까 사실은 어떤 빈곤 남성 청소년들 사이에서의 애착 관계는 되게 구체적일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그들이 어떻게 유대감을 쌓고 나아가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이 작품이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어요. 그것들이야말로 비단 탈가족 형태에서 얻을 수 있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뢰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수평적 관계는 단지 청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른들에 의해 수직적으로 재구조화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사회적 틀—빈곤은 나쁘고 게으른 것이고 부는 착하고 부지런한 것—을 체화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말로의 과정도 좋았고요.
왜 미디어에서는 부자 청소년끼리의 연대에서 질투나 적대감과 같은 더욱 구도적이고 세분화된 심리에 주목하며 이들 장면을 치열하게 그릴까요? 그것은 결국 빈곤 청소년 사이의 연대 속에서 공유되는 핵심인 ‘생존에 대한 절박함’을 그들이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요? 생존에 대한 절박함은 때론 돈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연대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걸 미디어에서는 잘 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사실 많은 사회운동 단체들의 연대는 그러한 절박함에서 시작되곤 하죠. 부족한 사람들이 모이면 더 부족해진다는 농담이 있지만, 부족한 사람들끼리 모여야만 무엇이 부족한지 논의하고 이름을 붙이고 의제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져요. 부족한 사람들끼리 모여보니 사회에서 개개인에게 결핍되었다고 호통쳐왔던 것들이 사실은 만들어진 결핍인 경우를 알게 되어 담론을 전환시키게 되는 경우도 많고요. 미디어는 이와 같은 빈곤한 자들 사이의 연대를 그리는 상상력이 부족하다 보니 빈곤을 갈등 구조로만 그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늘 미디어에서 청소년 간의 관계는 마치 서열이나, ‘누구의 적은 누구’의 프레임으로 비춰지기도 하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자극적인 소재로서 매력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빈곤 청소년끼리의 연대나 갈등을 보여줄 희박한 자리마저 빼앗고 있는 것만 같기도 합니다. 부와 정상성이 온갖 스펙터클을 창조할수록 빈곤과 소수자성은 특수성과 구체성을 잃는 상황이죠.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소공녀〉의 미소는 정말 예외적이죠. 극 중에서 밴드를 같이 했던 친구들의 대부분은 이성애적 사랑의 완성처럼 보이는 결혼이라는 결과물을 통해서 빈곤 상태를 돌파하고자 하잖아요. 보통의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그들이 신데렐라가 되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끝인 데 비해, 해당 영화에서는 그러한 선택을 한 이들이 겪는 고충과 불행을 보여줘서 좋았어요. 한편으로 저는 미소 친구들의 삶이, 한국에서 대기업 취직이나 이성애 결혼이라는 정상성 생애주기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부의 증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준다고도 생각했어요. 저는 한국에서 ‘성장하기’ 혹은 ‘어른 되기’가 ‘부의 증식’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아파트를 사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만이 이 사회에서 정당한 ‘어른’으로 대접받지 않나요? 미소는 그 모든 곳에서 빗겨나 있다는 점에서 ‘철이 없다’는 인상을 풍기죠. 자본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좀 ‘철이 없어’ 보이는 것은 필연적일까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무조건적인 돌봄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미소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어요. 미소는 우정만으로도 조건 없이 요리를 해주고 청소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죠. 미소는 친구들이 자신보다 돈이 많다고 해서 자기보다 위계가 높은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반면 친구들은 미소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본인들보다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요. 그들에게는 이제 우정 또한 계급적인 것이 되어버린 것이고, 저는 그러한 문화가 전형적으로 구별 짓는 데 집착하는 중산층적 문화라고 생각해요.
안온 : 맞아요. 〈소공녀〉의 미소처럼 빈곤을 전형적이지 않게 그리는 작품이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 귀하지 않나요? 누군가는 미디어에서조차 피곤한 현실을 그대로 봐야 하는가, 미디어에서조차 빈곤 청년의 아픔에 눈물 흘려야 하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오히려 반대거든요. 미디어니까 더욱 그런 측면을 극적으로 조명할 수도 있습니다. 드라마니까, 영화니까! 우리 현실에서 다소 은폐되고 축소된 ‘빈곤 청소년 및 청년 간의 연대’를 뚜렷하게 그릴 수도 있잖아요. 이것은 비단 청소년이나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기도 하므로 더욱 다양한 생애주기를 그려야 하는 것 역시 우리가 당면한 과제입니다. 물론 제가 지금까지 접한 미디어 작품의 개수가 한정적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당장 우리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가난한 노인 여성끼리의 즐거운 삶에 대해 어떤 시혜적인 시선을 배제하고 따뜻하고 아름답게 그린 작품이 있나요? 그런 질문 앞에 서면 저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게 현재 영상 문학의 주류 서사라고 봅니다.
가난을 학술 자료로서만 접하는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가난에 대한 아주 각박한 시선을 좀 풀어줄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것이 영상 문학이거든요. 소설에서는 이미 그런 시도가 「복 있는 자들」을 비롯해서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고도 생각해요. 예를 들면 백온유 작가의 「반의 반의 반」이나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에서 역시 빈곤한 현대의 단상을 사실적으로, 하지만 모두가 끄덕일 수 있는 구조로 잘 그리고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요즘 유행하는 타인의 부를 관찰하는 관찰형 예능이나 부와 가난의 대비 구조의 작품들을 이제는 좀 안 보고 싶어요. 그것들을 누군가가 열광하며 소비한다고 했을 때 약간의 편견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이 때로는 저 자신을 피곤하게 만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와 같은 마음을 나누는 문화 소비자들이 많다고도 자신할 수 있어요. ‘그들의 부’를 다양하게 보고 싶지 않아요. ‘우리의 빈곤’을 다채롭게 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것들이 자주 노출되고 아주 많이 거론되며 우리가 빈곤에 대해 느끼는 피로도의 역치를 낮추고 싶어요.
연혜원 : 사실 눈을 조금 돌려보면 해외 작품 중에는 〈소공녀〉나 〈여름이 지나가면〉 류의 작품 중에서 대중적 흥행이나 평단의 호평 등을 이룩한 것도 있는데요.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나의 올드 오크〉라는 작품입니다. 탄광촌에 난민들이 오면서 벌어지는 탄광촌 광부들과 난민들 사이의 어떤 갈등을 그리지만, 결국은 노동조합의 확장을 통해 연대로 나아가는 드라마를 보여줍니다. 빈곤 클리셰를 부수고, 빈곤 계층 사이에서의 수평적 구도를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에요.
안온 : 한번 꼭 보겠습니다. 해외 영상 문학에 대해 이야기가 나와서 말하는 건데 저는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떠오르네요. 〈플로리다 프로젝트〉 역시 주거지 빈곤이라는 미국의 현실에 대해 문제적 시선을 던지지만, 실제 영화의 서사를 담당하는 것은 아이들의 눈입니다. 수평적 연대를 이룩한 아이들로 하여금 관객이 어떤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넌지시 말하고 있어요. 이런 작품들이 훌륭한 레퍼런스로 작용하여, 앞으로 우리나라에도 〈소공녀〉과 〈여름이 지나가면〉 류의 영상 문학이 많이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물론 미디어가 자본주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끈끈하게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해외의 레퍼런스를 한국화하는 것에서 멈추면 안 된다고도 생각합니다. 결국 이런 이야기들이 더 나오기 위해서는 제도적 지원이 필수적이니까요. 모두가 독립 영화로만 빈곤의 클리셰를 부수는 것 역시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클리셰가 되지 않겠어요? 거대한 상업 영화나 전세계적인 OTT에서 우리의 빈곤을 끝내주게 그려주는 때도 와야 하잖아요. 이 말 역시 다분히 자본주의적이라 할 말은 없지만. (웃음) 현실적으로는 유튜브에 올라갈 수 있는 숏폼형 드라마를 제작하는 데에 있어, 빈곤 청년이나 자립 청년 등을 주제로 한 경연 대회나 경제적 지원이 생긴다면 적은 예산으로도 빈곤 클리셰 재생산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접근성이 높되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이 드는 미디어 문학에서부터 빈곤 클리셰를 부수어나가야 하는 거죠.
연혜원 : 맞아요. 결국 미디어 문학이 현실의 인간에게 판타지를 보여주며 대리만족을 추구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 마냥 이런 서사가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물질적인 어떤 관계망들이 해내는 비물질적 쾌거를 저는 미디어로 보고 싶어요. 혹은 자본주의적 사고로 굳어진 우리의 마음에 균열을 낼 만한 실천들이 장면화되는 것을 조만간 꼭 좀 보고 싶습니다.
안온 : 저 또한 혜원 님의 염원에 깊은 공감을 표합니다. 뻔히 보던 빈곤 청년의 역경 극복 스토리나 ‘부를 성취할 수 없으면 사랑이라도 성취하겠어’ 식의 이성애자끼리의 결혼 엔딩이 아닌, 새로운 연대와 실천이 우리의 문학 장에 폭넓게 가닿길 희망합니다.
연혜원 : 언젠가는 그런 문학을 접할 수 있겠죠?
안온 : 그럼요. 빈곤 클리셰를 찬란하게 부순 미디어 문학을 발견하면 혜원 님도 제게 꼭 알려주세요. 그때 또 우리 같이 나눌 말이 많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연혜원 : 네, 저 또한 아름다운 서사의 빈곤 관련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다시 안온 님과 대화를 나눌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안온, 연혜원
에세이 『일인칭 가난』(2023) 저자. 불온한 지난날들을 세상에 선보인 이후, 우리 사회에서 모두가 한 마디씩 자신의 가난을 큰 목소리로 말하길 희망하는 사람. (안온)
투명가방끈 활동가. 『퀴어돌로지』(2021) 기획 및 공동 저자, 『가장자리를 위한 복수 노트』(2024) 저자. 퀴어예술매거진 《them》 발행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글 쓰고 활동하면서, 퀴어이자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데 늘 곤란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 (연혜원)
가끔은 제가 쓴 문장들이 세상에 나가 엉뚱한 훈장이 되는 것 같아 멈칫하게 됩니다. 가난하지만 부지런히 살아서 결국 무언가를 일궈냈다는 식의 서사가 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능력주의를 찬양하는 증거물로 쓰일 때면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저는 저의 성실함이 타인의 게으름을 증명하는 도구로 전락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난이라는 단어 아래 수많은 삶이 저마다 다른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선택한 각자의 삶의 방식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미디어가 가난에 대한 각박한 시선을 풀어줄 수 있는 영향력을 가졌음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부를 훔쳐보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거두고 우리의 빈곤 속에 숨겨진 다채로운 목소리를 담아내는 작품을 늘, 기대합니다. (안온)
2026/04/01
7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