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에서는 문학과 타 장르의 필자가 하나의 주제를 각각 비평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문학비평가 소유정과 미술비평가 이연숙이 각각 문학과 미술의 대표 행사인 ‘서울국제도서전’과 ‘서울아트위크’에 대해 비평합니다. 두 필자는 각 행사에 대한 일회성 비판이나 맹목적 찬사가 아닌, 각 장르의 구조와 성격을 비평적으로 바라보는 쉽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소유정은 도서전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애정어린 조언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이연숙은 서울아트위크의 풍경을 되짚어보며 미술이 시장에 잠식되어가는 현실을 비판합니다.


1.

웹진 비유로부터 서울아트위크에 대한 청탁을 받은 것은 지난 1월이다. 이처럼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까닭은 2023년 12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 집담회 덕분이다. 남웅 비평가, 이진실 비평가와 함께한 이 집담회는 ‘장애 예술과 접근성’, (백래시의) ‘반복과 귀환’, ‘퍼포먼스’(의 유행), ‘서울아트위크’라는 화두 아래 2023년 한해 미술계 안팎에서 본 것들에 대해 대화, 아니 거의 성토하는 자리였다. ‘서울아트위크’는 집담회 맨 마지막 순서로 배치된 주제였고, 국공립 레지던시는 “미술시장의 비즈니스랑 어느 정도는 구분하는 게 상도”1)가 아니냐고 지적한 남웅 비평가에 이어 나는 다음과 같이 ‘급발진’했다. 이하 인용문에서 나는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믿어 달라. 현장에서는 더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일단 프리즈가 5년 계약이잖아요. 그럼 계약이 끝난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항상 작가인 지인들은 “네가 왜 예술가들 걱정을 하냐?” “걱정하지 마라. 네 걱정이나 해라” 또는 “어차피 작가들은 네 말 안 듣는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절대 걱정하지 말라고 해요. 그런데 제가 걱정하는 것은 이게 5년 계약인 만큼 젊은 예술가들이 프리즈를 ‘목표’로 삼거나, 그와 근접한 어떤 종류의 상업적인 성공 등등 이런 종류의 욕망들을 키울 수 있는데, 그 이후에는 ‘없다’는 거거든요. 다시 계약 연장해야 된다는 말이 전혀 아니라요. 이런 종류의 욕망들에 길들여졌을 때 우리가 대안이라든지, 다른 상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굉장히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들은 다 우리를 길들이는 것이에요. 가속주의와 같은 아이디어들이 주는 교훈이 있다면 욕망이 한번 커지고 난 뒤에는 계속 커진다는 거죠. 이런 것 때문에 우리가 감속주의 같은 이야기를 하고는 하지만 쉬운 길은 아니라는 거죠. 예를 들어서 내가 엄청 큰 기관에서 전시를 하는데 그걸 다 포기하고,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다 포기하고 갑자기 칩거한다거나, 어디 다른 지역으로 간다거나 이렇게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때때로 커리어를 쌓아 가고 있는 작가들이 프리즈 기간 중에 어렵게 전시를 계획하거나, 혹은 프리즈의 비공식적인 부대 프로그램처럼 여러 기획을 준비하는 것을 보는데, 이런 것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래요. “왜 굳이 프리즈에 의존해, 혹은 그것에 반해 다른 종류의 액션을 해야 할까?” “왜 프리즈를 중심으로 1년을 편성해야 할까?” 제가 농담으로 계속 “9월을 없애야 한다” 또는 “9월에 모두가 파업을 해야 된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데,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어요. 일단 많은 이들에게 프리즈란 기회거든요. 잠재적인 기회라고 생각하니까 사람들이 많은 프로그램을 그 시기에 배치하고, 그러면 해당 시기에 전시가 몰려 굉장히 밀집도가 높아져요. 같은 인력들이 해당 시기에 집중적으로 섭외되고 그만큼 소진됩니다. 개개인마다 이걸 느끼는 방식이 다르고 또 누군가는 바쁘면 좋은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정말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 사람들이 다 예술계 동료거든요. 지쳐 나가 떨어지지 않고 어떻게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할 수 있는가, 거기서 나아가 어떻게 다 같이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 이렇게 해야 할까?” 아트위크 기간 내내 저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2)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인가? 이 글은 이날 이뤄진 내 ‘급발진’에 달린 긴 각주가 될 예정이다.


2.

우선 웹진 《비유》가 주로 문학을 다루는 매체인 관계로, 이 글을 우연히든 일부러든 클릭한 독자 중 서울아트위크와 프리즈가 대체 뭐 하는 건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일 거라 짐작한다. 당연하게도, 예술계 바깥에서 보기엔 다 똑같아 보일지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술계와 문학계가 처한 각각의 상황과 조건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비교적 젊고, 서울에 살고, 기금 제도에 밝은) 예술인 대다수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예술 지원금이 대폭 감액되었다는 일반적인 주장에 끄덕거릴 수 있지만, 그 안에서도 미술인과 문학인이 체감하는 ‘대폭 삭감’의 장소와 규모는 다를 수 있다. 대다수의 미술인은 아마도 지난 몇 년간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할지라도) 지자체 레지던시가 연쇄적으로 문을 닫고 있는 상황,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약칭 ‘아르코’)가 주관하는 문예진흥기금, 서울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예술창작활동지원의 지원 분야도 금액도 축소된 상황을 익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일단 전년에 비해 지원 금액을 적게 받거나 혹은 지원 대상에조차 포함되지 못한 미술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편된, 그러니까 삭감된 문예진흥기금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전년에 비해 시각과 공연 분야는 오히려 그 규모가 증가했고 문학 분야는 감소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3) 물론 ‘코로나’ 특수로 신설된 분야, 창작 기금 내에서의 세부 분류, 창작 기금이 아닌 다른 모든 분야가 대폭 축소되거나 사라졌다는 사실 역시 지적해야겠지만, 어쨌든 전체 비율을 놓고 보자면 미술인들은 문학인들에 비해 형편이 낫거나 낫다고 느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날 수밖에 없을까? 아주 단순한 사실로부터 출발해보자면 우선 미술은 문학에 비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돈의 상당 비율을 기금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보통 ‘기금 의존도가 높다’고 표현하는데, 미술계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반복해서 지적되어 왔다. 이번 글의 주제가 기금은 아니니까 이 이상 길게 쓸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다른 모든 문제처럼 기금 또한 단순히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식으로 칼로 무 자르듯 그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다. 일단 기금은 미술계라는 생태계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프리즈 또한 어쩌면 기금과 같은 관점에서 봐야 할지도 모른다. 1988년 영국 런던의 한 임대 창고에서 열린, 이제는 YBA(Young British Artists)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젊은 작가들의 전시 제목이자 1991년 창간된 동명의 미술 잡지 이름이기도 한 프리즈는, 스위스를 거점으로 둔 유서 깊은 ‘아트 바젤’에 비견되는 규모의 국제 아트 페어다. 프리즈가 비록 ‘프리즈 마스터스’와 같은 위성 행사에서 고대 유물부터 주로 2000년 이전에 제작된 현대 거장의 작품까지를 다룬다고는 하지만, 프리즈의 정체성은 작품이라는 상품을 사고파는 미술 시장에서 출발했다.
  프리즈 서울이 최초 개막한 2022년 한해 전 세계 미술 시장 규모는 ‘코로나 특수’라는 거품이 꺼지고 난 뒤인데도 불구하고 거의 90조 원에 육박했다.4) 급격히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국내 미술 시장이 차지하는 지분은 약 1%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2003년 영국에서 개막한 이래 약 20년에 걸쳐 뉴욕, 로스앤젤레스로 거점을 확장한 프리즈가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고른 첫 도시가 바로 서울이라는 사실은, 개막 전부터 많은 미술인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아트 바젤이 열리는 홍콩, 동북아시아의 예술 허브로 불리며 ‘ART021’과 ‘웨스트번드 아트 앤 디자인’ 페어가 열리는 상하이, 국제도시로 잘 알려진 싱가포르와 현대미술의 유행을 선도했던 도쿄를 제치고 왜 하필 서울인가?
  한 홍보 책자는 그 이유로 “세계적 수준의 미술관, 편리한 인프라, 문화 유산, 유행 선도 도시, 정치/경제적 상황, 국내 미술시장 규모, 지리적 위치”5)를 꼽고는 있지만 글쎄, 아마도 프리즈가 서울의 ‘성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을 확률이 크다. 지난 2016년 페로탕, 2017년 리만 머핀과 페이스와 같은 해외 대형 갤러리가 비교적 먼저 서울로 ‘입점’한 이후 2019년 배리어스 스몰 파이어스, 2021년 쾨닉과 타데우스 로팍 역시 줄지어 개관전을 치렀다. 케이팝 때문인지, 아니면 홍콩 아트 바젤 등에서 한국에서 온 수집가들의 구매력을 확인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서울은 그저 시작일 뿐 아시아 미술 시장 전체를 ‘선점’하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정황을 따져 봤을 때 해외 대형 갤러리나 프리즈와 같은 아트 페어가 한국의 시장성에 주목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장사를 해볼 만한 잠재력을 갖춘 ‘목’이라는 이야기다.

그리해서 2022년 9월, 2002년 한국화랑협회의 주최로 처음 열린 키아프와 프리즈는 서울 코엑스에서 공동으로 개막했다. 한 기사에 따르면 그해 프리즈와 키아프에는 각각 7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다녀갔으며, 추측건대 프리즈는 6천억에서 8천억 대의 매출을, 키아프는 그에 10분의 1에 해당하는 매출을 냈다고 한다.6) 2009년에 미술대학에 입학한 내가 기억하는 한, 키아프는 단 한 번도 현재 프리즈만큼의 영향력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반면 프리즈는 상륙한 지 2년 만에 미술인들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갤러리들과 국공립 기관을 포함한 미술관들, 심지어 서울시의 생체 리듬까지 9월을 중심으로 개편해 놓았다. 모두가 프리즈에 빠르게 적응한 것 같았다. 한 미술계 종사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서 키아프 & 프리즈 동시 개최의 가장 큰 성과는 한국 미술시장의 핫 시즌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는 겁니다. 작년 키아프만 예를 들게요. 핫 시즌은 키아프 기간 딱 4~5일밖에 안 돼요. 그런데 이번에 키아프 & 프리즈가 열리면서 주요 갤러리는 이미 8월 중순부터 여기에 타깃을 두고 전시를 오픈했어요. 이건 어마어마한 변화입니다. 아트페어가 끝나고도 운송, 금융 결산하는 데 굉장한 시간이 걸려요. 한 주 안에 끝나버릴 국내 아트페어의 선을 넘어서요. 길게 얘기하면 8~9월 두 달 내내 핫 시즌입니다.”7)
  말 그대로다. 예를 들어 2024년 올해 서울시는 ‘조각도시서울’을 표방하며 제1회 ‘서울조각상’ 공모를 열었고, 서울아트위크 기간에 맞춰 수상자들의 작품이 놓일 ‘서울조각페스티벌’을 준비중이다.8) 이건 작년부터, 아니 재작년부터 이미 예고된 상황이다. 작년 기사를 살펴보자. “프리즈는 영국 런던 리젠트 파크에서 해마다 10월 열고 있는 ‘프리즈 런던’에서 행사장 밖 야외에 조각 작품을 별도의 섹션으로 꾸린 ‘프리즈 조각’(Frieze Sculpture)을 운영하고 있다. ‘프리즈 서울’에서도 ‘프리즈 조각’처럼 야외 조각품 전시·판매 행사를 추진 중이라는 의미다. 지난해 서울시는 종로구 송현동의 옛 미대사관저 부지의 활용 등을 놓고 프리즈 측과 다양한 협의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9)
  잠깐,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 이런 식으로 아트 페어가 서울시와 몇 년간 ‘협의’를 할 수 있다는 게? 그리고 결국에는 (물론 명시적으로 프리즈가 개입하고 있다는 단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지만) ‘프리즈 조각’과 비슷한 컨셉의 ‘서울조각페스티벌’이 열린송현 녹지광장에서 열리게 된 게? 국내 미술계의 질적 성장과 미술시장의 양적 팽창은 분명 상관관계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동일 선상에 놓을 수도 없다고 보는 입장인 나는 이런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프리즈 기간에 맞춰 우후죽순 열리는 대형 전시들은 또 어떤가. “동기간 서울의 주요 미술관에서는 놓쳐서는 안 될 각종 전시가 개최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말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는 엘름그린 & 드라그셋(Elmgreen & Dragset)의 개인전을, 아트선재센터는 서도호의 개인전을, 리움 미술관에서는 아니카 이(Anicka Yi)의 개인전과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가 기획한 아트 스펙트럼 2024(Art spectrum 2024)를, 호암 미술관에서는 니콜라스 파티(Nicolas Party)의 첫 한국 개인전, 그리고 송은에서는 피노 컬렉션(Pinault Collection) 소장품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10) 이건 프리즈 서울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정보다.
  서울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이런 대형 전시들이 9월부터 개최된다니 물론 미술인으로서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까지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이 서울아트위크라는 특정 기간에 집중 투입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서울아트위크는 프리즈, 키아프가 낀 9월 1일부터 10일까지의 기간으로, 작년에 처음으로 서울시의 주관으로 그 이름이 홍보된 바 있다. 이 기간 동안 프리즈, 키아프와 연계된 서울시 내 국공립 미술관과 국내, 해외 갤러리에서 주최하는 전시가 밀도 높게 몰려 있고, 그에 더해 ‘한남나잇’, ‘청담나잇’과 같은 네트워킹을 중심으로 한 부대 행사 역시 예정되어 있다. 서울아트위크의 공식적인 ‘리스트’에 올라 있지 않은 작은 미술 공간들, 국공립 미술관이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 작가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해당 기간에 맞춰 전시와 행사를 준비한다. 때로 이 과정은 “잠재력을 지닌 예술가들[을 위한] (…) 해외진출의 기회”11)라는 명목으로 전시를 여는 작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빠르고 급하게 이뤄지기도 한다. 어쨌든 다른 기간에 비해 전시의 노출도나 주목도가 높으리라고 예상되기 때문이다.
  물론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을 수밖에 없다는 것, 또 한 번 노를 젓기 시작하면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빨리 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물이 들어오는 속도를 따라잡으려고 애를 쓰다 보면 그만큼 뭔가가—체력이든, ‘가능성’이든—소진되고 말 것이다. 불길하게 초를 치는 게 아니라, 어쨌든 우린 자본과는 달리 물리적 한계가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모두가 그 사실을 잠시 잊은 듯이 9월을 목표로 ‘가속 노 젓기’를 하고 있다. 잘 되고 싶으니까, 살아남고 싶으니까 어쩔 수 없을 것이고, 이런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은 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자. 프리즈와 서울아트위크는 미술계가 단지 수동적으로 적응해야 할 유일한 현실일까? 아니면 비판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현실을 이루는 조건 중 하나일 따름일까?


3.

몇몇 미술 매체는 프리즈를 일컬어 키아프라는 ‘토종’ 미술 시장을 파괴하는 외래종 ‘황소개구리’에 비유하기도, 또는 생태계 다양성에 도움을 주는 ‘메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사태를 국산과 수입산의 대결로 단순화하는 비유가 아닌가 싶지만 그런 비유를 동원해야 하는 심정은 이해가 간다.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을 화랑들의 이해관계의 총체인 키아프와 달리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야말로 체급이 다른 아트 페어 프리즈가 2년 만에 이뤄낸 실적은 깜짝 놀랄 정도니까. 그런데 그 어느 미술 매체를 봐도 키아프가 아닌 작가, 그중에서도 막 작가로서 성장하기 시작한 젊은 작가, 그리고 서울의 미술 현장을 걱정하는 기사를 찾기는 어려웠다. 아니 사실 그런 기사를 거의 찾지 못했다.12)
  물론 재작년과 작년 9월과 10월 사이 ‘프리즈 특집’을 내세우며 발행된 미술 매체들이 프리즈에 대해 비판적일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굳이 프리즈를 대상 삼지 않더라도, 어차피 미술 매체들이 비판적인 기능을 상실한 지는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태여 작가를, 로컬씬을 왜 걱정해야 하는가? 앞서 이 글이 기금을 미술 생태계의 조건으로 간주한 것처럼, 프리즈 역시 작가가 충분히 선택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일 수 있다. 애초에 시장은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오히려 시장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예술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가정하는 이항대립적인 사고 방식 자체가 (예술에서도, 우리의 삶에서도) ‘나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론가 미셸 페어는 『피투자자의 시간』과 같은 책에서 한때 좌파의 주적이었던 금융 자본을 좌파의 전장으로 전유하자고 주장한다.13) 그가 보기에는 현재의 좌파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라는) ‘대안 상실’의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략 중 하나는, 오늘날 금융 자본이 의존하는 가치평가체계인 ‘신용도’를 역으로 이용하는 ‘피투자자’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액티비즘을 고안하는 것이다. 요컨대 금융이라는 이름의 투기 혹은 내기 게임을 단지 ‘관전’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적극 참여할 ‘플레이어’로서 자신의 ‘능력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사용하는 것이 좌파의 유효한 비판적 ‘전술’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좌파 이론뿐만 아니라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예술 이론에서도 ‘중심’을 전유하는(혹은 내파하는) ‘주변’이 되자는 액티비즘의 강령은—비록 주류는 아닐지라도—영향력을 발휘해 왔기에 이런 이야기는 아주 새롭지조차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반자본주의적 ‘대항 투기’로서 프리즈 서울 참여(물론, 이조차 ‘신용도’에 기반해 평가되기에 쉽지는 않다)라는 전술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몇몇 뛰어난 ‘플레이어’들은 스파이로서 시장에 잠입하여 시장으로 하여금 시장의 모순을 폭로하게 만드는 그런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걸로 정말 충분할까? 나는 지금 ‘대항 투기’가 일종의 정신 승리술 내지는 위안술로만 유용할 뿐 ‘실제로’는 상황을 구태의연하게 악화시킬 뿐이라는 정통 좌파의 입장을 취하려는 것도 아니고, 또한 ‘대항 투기’는 결국 어느 시점에서는 ‘진심 투기’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상황에 대한 비판적 개입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런 건 아직 해보지 않아서 모른다. 다만 ‘대항 투기’가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러기 위해 시장의 논리를 내면화할 수밖에 없을 작가와 로컬씬은 고스란히 남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시장의 논리를 내면화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알다시피 급진적 거부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필경사 바틀비’는 굶어 죽었다). 앞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집담회 중 내 발언의 한 대목처럼, 그러니까 나는 남 걱정은 그만하고 내 걱정이나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만나고, 또 알고 지내는 많은 젊은 작가들이 프리즈라는 미술 시장을 마치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여기고, 그곳에서 ‘팔리기’ 위해 자신을 갈아 넣거나 혹은 그럴 만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분투하고, 어느샌가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시장 논리의 상품성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과 마주할 때, 나는 작가들 또한 ‘예술가’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불리기는 하나 결국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뿐인 시장 속 취약한 개인임을 실감한다. 스스로를 보호할 안전망도 없이 ‘기회’라고 던져진 리스크에 한정된 자원 전부를 걸어야 하는 시장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 작가는 물론이고 미술계 안팎의 모두가 의지할 곳 없이 각개전투를 펼치고 있다. 프리즈 서울이 철수하고 난 뒤 (그러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우세하긴 하지만) 5년 후, 나아가 10년, 20년 후를 상상해 보자면, 우리는 어쩌면 시장 안이 아니고서는 모이는 법조차 잊게 될지 모른다.
  본성상 모든 차이를 흡수하고 이를 식별 가능한 기호로 줄 세우는 방식으로 가치를 생산하는 시장은 작가뿐만 아니라 시장에 연루된 모든 개인의 삶에 관심이 없다. 이건 어쩌면 불평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조건일 수 있다. 문제는 우리에게는 마치 시장 외에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한편에 프리즈와 키아프, 서울아트위크가 시장으로서 존재하고, 다른 한편에 그런 시장에 동참하지 않기를 택하거나 단순히 관심이 없는 ‘다른’ 로컬씬도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진 건 그냥 시장이 전부다.14)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저자 마크 피셔는 이러한 ‘대안 없음’의 감각을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으로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란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 경제 체계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이다.15) 지금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게 있는 건 딱히 아니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자포자기식의 “반성적 무기력”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결과인 동시에 이를 영속화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우리의 생활 세계뿐만 아니라 내면에도 이처럼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는 그의 진단은 유용하지만, 이러한 진단 자체는 대안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진단이 불러일으키는 욕망, ‘자본주의 리얼리즘’ 이후를 상상하려는 욕망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아주 잠깐이라도,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구체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못한 대안을 상상해보자. ‘상상하기’는 대항 투기만큼 빠른 효과를 보는 전술은 아닐지라도 분명 저항의 한 방식이다. 우리가 프리즈 서울과 서울아트위크가 있는 9월에 파업한다면 어떨까? 모두가 휴식하면서 내년에 할 작업에 대해 구상해본다면 어떨까? 마치 시장이 전부인 양 굴지 않아 본다면 어떨까? 이런 유치하고, 바보 같은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면 어떨까?……

이연숙

리타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며,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소수(자)적인 것들의 존재 양식에 관심 있다. 시각 문화와 퀴어 부정성을 다루는 책 『진격하는 저급들』, 일기를 모은 책 『여기서는 여기서만 가능한』을 썼다. 공저로 『당신은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 『크래시 – 기술·속도·미술시장을 읽는 열 시간』 『미친, 사랑의 노래』가 있다.

2024/08/07
68호

1
남웅, 이연숙, 이진실, 「2023년 한국 현대미술비평 집담회 1부: 송년회: 올해 우리가 본 것들」, 서울시립미술관 《세마 코랄》, 바로가기, 2024년 2월 20일.
2
같은 링크.
3
주예린, 「창작 기금 고갈!」, 《아트인컬처》, 바로가기, 2023년 12월 16일.
4
이영란, 「UBS리포트가 본 세계 미술시장 ‘연 3% 성장...90조원 규모 육박’」, 월간 《ANDA》, 바로가기, 2023년 5월호.
5
한경arte 특별취재팀, 『한경아르떼 프리즈 서울 2022』, 한국경제신문, 2022, E-BOOK 열람.
6
조재연, 「키아프 & 프리즈 리뷰」, 《아트인컬처》 2023년 10월호, 103-110쪽.
7
김복기, 김나형, 김주원, 서진수, 이대형, 이장욱, 주연화, 최혜연, 「프리즈 & 키아프 성과와 과제, 전문가 8인의 심층 진단」, 《아트인컬처》 2022년 10월호, 133쪽.
8
지난 5월, 결선작이 발표되었다. 뉴스와이어, 2024년 5월 13일 기사 〈‘조각도시 서울’ 중심 역할, 제1회 서울조각상 결선 진출작 발표〉 바로가기
9
경향신문, 2023년 9월 7일 기사, 〈서울에서도 조각품 특화한 ‘프리즈 조각’ 신설 추진 중〉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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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 서울 2024: 참여 갤러리 및 세부 프로그램 공개」, FRIEZE, 바로가기, 2024년 6월 18일. 이건 그냥 별 것 아닌 첨언인데, 다른 미술관은 그렇다치고,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해당 전시에 대한 어떤 정보도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는데 프리즈 서울이 최초로 전시 제목을 공표(?)한 상황이 다소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모양’이 빠진다고 해야할까. 아마 이 글이 게시될 때 쯤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측에서도 다음 전시를 발표한 시점이겠지만, 일단 기록해둔다. 그런데 어째서 (국립현대미술관의 홈페이지보다 프리즈의 그것이 빠른) 시차가 생겼을까?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인 윤범모가 작년 키아프에서 기획전을 열기도 했고, 프리즈에 대해서는 덕담을 아끼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관장 자리가 공석으로 남은 국립현대미술관의 한해 계획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프리즈가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제기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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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 안에 서울, 2023년 8월 18일 기사, 〈9월, 세상에 없던 미술 축제 ‘서울아트위크’가 온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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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과 비교해, 글로벌 아트페어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을 경계하자는 취지의 기사를 읽기는 했다.(김소정, 「‘글로벌’의 함정」, 《월간미술》 2023년 9월호, 58쪽) 프리즈가 한국이 세계적인 미술 시장으로 도약하는 계기로 작용할 거라는 기대를 담은 기사, 국가에서 지금처럼 제대로 지원해 주지 않으면 결국 거품으로 끝나고 말 거라는 우려가 섞인 기사만 읽던 와중에 그나마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기사였다. 또한 미술 매체에만 한정 짓지 않는다면 비평가 권시우가 자신의 블로그에 쓴 다음 두 글을 언급할 수 있다. 해당 글들에서 권시우는 비평가이자 목격자로서, 프리즈 서울과 서울아트위크 속 몇몇 장면을 소묘하며 비판적인 감상을 드러낸다. 「파티 이즈 오버」, 바로가기, 2023년 9월 9일, 「가자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바로가기, 2023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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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페어, 『피투자자의 시간』, 조민서 옮김, 리시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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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의존하는 참조점 중 하나인 ‘피투자자’라는 개념은 2023년 9월 뮤지엄헤드의 기획 전시 《더비 매치: 감시자와 스파이》에서도 감시자와 스파이의 형상을 통해 유사하게 제시된 바 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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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9, 전자책 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