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토리얼 시차증과 문학

김신식

안녕하세요.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던 김신식입니다. 임기 종료를 맞이한 가운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에디토리얼을 씁니다. 몇 달 전, 박정혜라는 화가의 전시를 다녀왔습니다. 전시명은 ‘jetlag’. 한국어로 ‘시차증’을 뜻했습니다. 작가는 그림을 통해,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다녀온 뒤 생긴 후유증만 시차증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같은 나라, 같은 도시,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더라도 서로 마주 보지 않은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어느새 달라진 인생의 방향과 격차를 마주하며 우울감을 느끼는 것도 시차증이라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학도 이러한 시차증을 섬세하게 다룬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에선 특히 어느 분야에 비해 ‘모처럼’이란 상태에서 비롯된 인간의 하루하루를 잘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모처럼이란 부사를 통해 우리는 등장인물이 행하는 일이 처음이 아니라, 한때 천착했던 일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그 일을 중단하게 되었을지 궁금증을 품습니다. 모처럼이란 부사는 한때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이 왜 연락이 뜸했는지, 그 속사정에 관심을 두도록 도모합니다. 그랬을 때 모처럼 닿은 연락은 오랜만에 타인을 향한 추억에 젖도록 길을 열어주거나, 예상치 못한 슬픔과 불안의 전조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어느새 다른 현실을 살아가는 ‘나’와 ‘타인’의 삶 속 시차를 체험합니다.
  68호에 실린 소설 속 등장인물은 각자의 삶에서 시차증을 앓고 있습니다. 이는 화자가 모처럼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만나거나, 일상적인 외출인데도 모처럼 시도하듯 어려움을 느끼는 데서 비롯됩니다. 화자는 불편함 없이 그저 보는 사람과 눈에 찾아온 제약으로 인해 ‘보려는’ 사람의 마음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차에 대해 고찰합니다(김숨, 「무지개 눈(目)」). 화자는 못 본 사이에 무당이 된 친구의 인생을 통해, 이 사회가 강요하는 정상적인 행복과 불운의 기준에서 촉발된 시차를 고민하기도 합니다(홍기라, 「상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의 자살 이후, 화자는 매우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시차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 바를 후회하거나, 가까운 사이여도 좁힐 수 없는 타인의 인생과 태도에서 느낀 시차증을 고백하게 됩니다(성혜령, 「운석」).
  ‘판도’와 ‘비평 교환’에선 도서전과 아트 페어에서 느껴지는 ‘시차’에 대해 성찰하고자 했습니다. 한국에서 열린 도서전이나 아트 페어에 대한 주요 관계자와 언론의 반응에서는 ‘한국 출판 콘텐츠의 저력’ ‘한국 미술시장의 쾌거’ 같은 관점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저력과 쾌거의 담론은 국가나 사회가 꾀하는 목표가 구성원 모두가 품어온 열망인 듯 포장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동료들과 국내에서 열린 책 행사 및 미술 페어에 대해 논하면서, 그 열기에 내재한 의미를 현장에 참여한 모두의 동일한 열망으로 읽어내는 시도가 옳은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고로 ‘판도’에선 페어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동의받지 못한 열망을 다루기보단, 도서전을 찾아갈 때마다 꽂히는 소소한 포인트는 무엇인지 작가·독자·마케터·편집자·디자이너·기자 각자의 단상을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를 통해 페어를 둘러싼 저력과 쾌거의 담론, 그 담론에 예속되지 않는 관점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차를 《비유》의 독자들이 곱씹어주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분야를 막론하고 문화예술 페어 같은 행사에 갔을 때, 내가 뭔가에 끌리고 관심을 가지며 좋아함을 표하는 실천이 사뭇 촌스럽고 뒤떨어져 보이지 않을까, 하며 시차증에 시달리는 분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잡지 재정비 이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비평 교환’에선, 도서전이나 아트페어에 개입된 시장 및 제도의 논리로 인해 제지받는 목소리는 무엇인지 돌아보고자 했습니다. 페어의 성공적 개최라는 맥락 아래, 우리는 특정한 ‘문화 공동체’의 일원으로 쉽사리 소환되곤 하는데요. 페어를 통해 우리 개개인을 ‘K-콘텐츠 공동체’로 묶으려는 정부·기관·산업의 시도와 그 시도에 아랑곳하지 않을 권리를 지닌 수용자 사이의 시차를 독자들이 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 담아, 문학평론가·미술평론가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알랭 드 보통이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밝힌 견해를 떠올리게 됩니다. 요약한즉슨 이렇습니다. ‘훌륭한 공동체가 되려면,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에게 공동체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 요소가 많음을 수긍해야 한다.’ 그 역설은 우리가 거쳐왔고, 우리를 기다리는 문학·출판·예술 페어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맥락 읽기를 실천하는 비평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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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을 쓰는 지금, 11일 만에 집 밖으로 나와 모처럼 공원 한 바퀴를 돌고 왔습니다. 그렇다고 방 안에 누워만 있는 생활이 내내 침울하진 않았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허구의 측면이든 아니든 각자의 발품이 아로새겨진 글을 한 편씩 읽으면서, 내가 생각보다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걸, 얼른 귀가할지라도 페어 속 사람의 북적거림을 마냥 경계하진 않음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내리쬐는 햇볕에 적응이 안 되었는지 약간 어지럼증이 생긴 동안, 늘 내딛어온 공간인데도 다른 세계에 온 듯한 시차를 잠시나마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이 싫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차증은 꼭 치유받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제게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를 묘사해달라고 하면, 방금 밝힌 제 고백으로 대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