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
모어 안의 이방인
그는 다중언어 사용자다. 나와는 한국어로, 그의 아빠와는 프랑스어를 쓰고, 어린이집에서는 독일어를 쓴다. 그의 최초의 언어는 한국어였지만, 지금은 주로 나와만 사용하는 사적인 언어가 되었고, 독일어와 프랑스어는 그의 개인적인 언어인 동시에 사회적 언어로 자리잡았다(물론 이 관계는 결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나를 지칭하며 ‘엄마’가 아니라 ‘너’라는 단어를 쓴다는 사실에서 프랑스어의 ‘tu’와 독일어의 ‘du’가 느껴진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번역을 하고 있다. 그 장면을 다른 한국어 사용자가 봤다면 엄마에게는 너라고 할 수 없다고 교정해줬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신에게, 선생님에게 ‘너’라고 할 수 없듯이.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고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실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엄마’라는 무겁고 복잡한 단어에서 ‘너’라는 인칭대명사로의 이동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나는 가끔, 아니 자주, ‘엄마’라는 역할과 무게에서 빠져나와 그저 ‘나’ 옆에 있는 ‘너’로 존재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가 되었지만 엄마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닌 ‘너’로 호명되는 순간 나는 좀 더 가볍고 열려있는 정체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중언어 사용자의 뇌를 분석해보면, 한 언어를 쓸 때 사용하는 언어뿐만 아니라 동시에 모든 언어가 활성화된다고 한다. 그래서 화자는 이 활성화된 언어 중에서 사용하지 않는 언어를 제어해야 한다. 즉 하나의 언어가 적극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언어의 스위치가 켜진 상태에서 사용하지 않는 언어를 ‘적극적’으로 제어하는 데 가까운 것이다.
나는 이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걸 좋아한다. 내 머릿속 주머니에는 한국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가 함께 들어 있고, 한국어로 말할 때 나는 나머지 세 언어의 단어와 문법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손으로 꼭 붙잡고 있다. 가끔 그 단어들의 힘이 너무 세서 손아귀를 빠져나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언어들이 서로 섞여버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내가 첫 책과, 내년에 출간될 두번째 책을 뒤늦게 배운 프랑스어로 쓰면서 이 언어 주머니 속에서 내 모어인 한국어를 나오지 못하게 꽉 붙들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얘기하기 위해 낸시 휴스턴의 책 Nord Perdu에 등장하는 한 스코틀랜드인 이야기를 인용해보려고 한다.
이 스코틀랜드인이 느꼈던 ‘무감각’은 바로 외국어와 자신을 구성하는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아득한 거리에서 연유한 것일 테다. 그는 프랑스어로 충분히 자신을 구성할 만한 원초적인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로는 이 언어를 명징하게 이해하고 자유자재로 구사함에도 불구하고, 몸으로는 그 언어를 차마 감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최근 아작시오에서 열린 망명과 언어를 바꾸는 것에 관한 토론이 끝난 후, 한 스코틀랜드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코르시카 남자와 결혼해서 여기서 산 지 20년이 넘었어요. 아이가 넷이고, 프랑스어를 쓰는 데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뭐랄까... 이 언어는 저를 건드리지 못해요. 그게 절망스러워요.” 그녀의 눈에는 거의 눈물이 맺혀 있었다. “bracken, leaves, fog라는 말을 들으면, 저는 그게 뭔지 눈에 보이고 느낄 수 있어요. 황토색, 갈색, 가을 냄새, 습기마저... 그런데 ‘fougère, feuilles, brouillard’라는 단어들은 저에게 아무런 느낌이 없어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인이면서 코르시카인이 된, 혹은 스코틀랜드 출신 코르시카인이 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 모국어로는 저는 아주 조심스러운 사람이라, 화가 많이 날 때조차 ‘God’이라고 겨우 속삭이는 정도인데, 프랑스어로는 노골적인 욕설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밖으로 나와요. ‘putain, salope, enculé de ta mère’ 같은 말을 해도, 저한테는 아무 감흥이 없어요.”
―낸시 휴스턴, Nord Perdu 부분
첫 책을 내고, 만약 이 책을 한국어로 쓰려 했다면 가능했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가 떠오른다. 나는 망설임 없이 “한국어로는 감히 써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돌이켜보면 그 고백 자체가 내 내면의 거대한 두려움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언처럼 느껴진다. 왜 나는 나의 모어로부터 도망쳐야 했을까. 왜 한국어로는 쓸 수 없었을까.
한번은 라디오에서 어떤 작가가 “엄마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엄마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했다”고 고백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은 내 안에서 여러 층위로 들렸다. 그것은 살아 숨 쉬는 엄마라는 존재의 무게가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감히 문장으로 담아낼 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고, 동시에 생존해 있는 엄마가 언젠가 내 글을 읽고 상처받거나 나를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글쓰기를 가로막았다는 고백이기도 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나의 엄마가 단 한 줄도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언어’라는 망명지를 택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프랑스어라는 낯선 영토 안에는 나의 엄마가 살고 있지 않다. 그 세계의 ‘mère’ 혹은 ‘maman’이라는 단어는, 내가 태어나 자라며 온몸으로 부딪쳐온 나의 실제 엄마와는 아득히 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의 엄마는 프랑스어를 읽지 못하므로, 나는 그 철저한 단절 덕분에 역설적으로 가장 내밀한 엄마의 이야기를 비로소 써내려갈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그렇게 이방의 언어로 소환된 엄마는 더 이상 내 경험 속의 존재가 아니고, 현실에서 비켜선 존재, 오직 ‘문학이라는 세계’에서만 숨을 쉬는 다른 엄마다.
나의 책이 엄마에 관한 책은 아니었지만, 나는 단어에서 느끼는 감정적, 경험적 거리를 의도적으로 벌려놓고, 그 서늘하고 안전한 빈 공간 사이에 나만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구축하고자 했다.
일본어와 독일어로 글을 쓰는 다와다 요코는 외국어를 쓰는 경험을 위와 같이 묘사하며, 너무 단단히 엮인 것들을 조금 느슨하게 떼어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프랑스어로 글을 쓰면서 한 경험도 이와 비슷했는데, 이는 심지어 느슨하게 떼어진 정도가 아니라 가파르게 미끄러지는, 그래서 속이 메슥거리고 멀미가 나는 경험이었다. 그 미끄러짐은 나를 구성하던 ‘한국어’라는 뿌리가 뽑히면서 연유한 것일 테다. 그 미끄러짐은 또한 나에게는 낯선 프랑스어의 단어로부터 미끄러지는 것이기도 해서, 그것은 이중적인 미끄러움을 경험하는 것 같았다. 한쪽에서는 내가 잘 알고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모어로부터 벗어나 미끄러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에게는 아직 낯설고 추상적인 프랑스어 단어들이 내 혀 위에서,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졌다. 두 미끄러짐 사이에서, 나는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채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상태에 놓였다.집게이빨이 네 개 있는 뱀 머리를 연상시키는 이 작은 물건은 문방구 그룹에 속해 있긴 하지만 그 자신은 문맹이다. 연필이나 타자기와 달리 스테이플러 심 제거기는 글자를 하나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스테이플러 심을 제거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물건을 특별히 좋아하는데, 서로 붙어있는 종이들을 분리해내는 것이 거의 마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모어에서는 단어들이 사람과 꼭 붙어 있어서 도대체 언어에 대한 유희를 하는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모어에서는 생각이 단어에 너무 꼭 들러붙어 있어서 단어나 생각이나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닐 수가 없다. 외국어를 쓸 때는 스테이플러 심 제거기 같은 것을 갖게 된다. 이 제거기는 서로 바짝 붙어 있는 것과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을 모두 떼어놓는다.―다와다 요코, 『영혼 없는 작가』 부분
나의 한 친구는 프랑스어를 배울 때 자주 두통에 시달렸고 이에 대해 그의 정신분석가에게 상담했다. 그의 정신분석가는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모어’ 뿐만이 아니라 ‘모성’의 세계, 즉 그를 지지하고 있던 세계가 붕괴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고 하며, 그 두통의 원인을 외국어 학습에 돌렸다.
그에게는 ‘두통’으로 발현되던 증상이 나에게는 미끄러짐 사이에서 ‘멀미’로 나타났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의 멀미는 짜릿한 놀이기구를 탈 때 나타나는 것처럼 유쾌한 측면도 있었다. 그리고 그 멀미가 조금 진정되자 나는 내 뿌리를 감싸고 있던 흙이 좀 성겨진 것을 발견했다. 나는 헐거워진 틈으로 손을 넣어보았다. 그러자 이전에는 만질 수 없던 뿌리의 표면을, 그것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 체류하는 일 년여의 시간 동안 한국어로 시를 썼던 시인 사이토 마리코는 ‘나무’라는 단어가 자신에게 온전히 도착하는 경이로운 순간을 이처럼 그려낸다. 흥미롭게도 이 순간에도 역시 ‘뿌리’라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이는 그가 ‘나무’라는 기호를 머리로 식별하게 된 순간이 아니라, 현실에 실재하는 저 나무가,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나무’라는 단어와 비로소 공명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 경탄의 찰나는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순간의 바깥에는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들여 간신히 푸른 잎을 틔워낸 인고의 시간이 버티고 있었다.나무를 일본말로 KI라고 하며 한국말로는 NAMU라고 한다. 십 년 전에 처음 한국말을 배웠을 때 ‘나무’란 낱말이 나의 가슴속으로 뿌리를 내렸다. 한국에 온 지 두 달 동안 줄곧 아래만 보면서 돌아다녔는데 유월이 되고 처음으로 눈을 들어 봤더니 그들이 잎사귀를 살랑거리며 서 있었다. 그들을 ‘나무’라고 부르면 내 속에서 ‘나무’가 답례했다. 십 년 공들여 간신히 푸르게 자란 잎사귀들이 눈부시게 펄럭이면서.
―사이토 마리코, 「광합성」 부분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이 눈부신 순간이 말을 처음 배우는 유아기가 아니라, 이미 모어가 굳어진 성인이 되고 나서야 겪는 순간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모어가 아닌 외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들의 작품들—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나 아글라야 페터라니의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등— 속에서 유독 ‘아이들’이 화자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이것은 외국어로 문학을 한다는 것이 단순히 사전적 단어를 치환하는 ‘번역’의 차원이 아님을 말해준다. 사이토 마리코가 포착한 순간처럼, 하나의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고 열리는 과정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행위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 세계가 너무도 새롭고 낯설기에 외국의 언어를 빌려 말하는 이들은 ‘아이처럼’ 자주 넘어지고 문장에 부딪힌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편리한 이름을 선뜻 기억해내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이름이 붙기 전, 대상이 가진 가공되지 않은 실재 그대로를 뚫어지게 ‘보려고’ 분투한다. 이처럼 기성 언어의 ‘이름’을 의심하고 기의를 해체하여 날것의 사물을 응시하는 행위는 다와다 요코의 작품 세계에서도 빈번하게 변주된다. 그것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이미 완고하게 구축된 모어의 세계를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단호하게 탈출함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지난한 문학적 영토일 것이다.
사이토 마리코는 또 시집 『단 하나의 눈송이』 중 ‘시인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는 2022년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최돈미 시인이 밝힌 바와도 공명한다. 열아홉 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간 최 시인은 “이민 간 뒤 오랫동안 나의 언어가 점점 사라져서 오랫동안 말도 못 하고 글도 못 썼는데 김혜순 선생의 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내 목소리를 찾아나갔다”고 말했다. 최 시인은 “선생님과 함께 수다를 떨며 번역을 해가는 과정에서 내 혀가 떠돌이, 망명자의 혀라는 걸 깨닫게 됐고 그 혀로 글을 쓰게 됐다. 번역은 내가 언어를 되찾는 작업이기 때문에 하늘을 봐도, 새를 봐도, 번역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내 한국어 실력은 높지 않았다. 만약 한국말이 유창했더라면 오히려 시를 안 썼을 것이다. 눈으로 본 것, 마음에 떠오른 것을 말하고 싶어도 제대로 못했던 답답함이 시를 쓰게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사이토 마리코, ‘시인의 말’ 부분
다양한 이유로 이주한 사람들, 모어와 바깥 언어가 일치하지 않는 경험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말이 즉각적으로 나오지 않는 상태, 말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상태, 즉 ‘답답한 상태’에 익숙할 것이다. 또한 외국에 살며 다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은 0개 국어를 한다고 농담한다. 외국어는 모어처럼 자연스럽지 않고, 서툴고, 더듬고, 느린데, 동시에 모어를 쓸 일이 줄어들면서 모어에 대한 능력치까지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0개 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말을 잃어버린 경험을, 입술이 떨어지지 않고 혀가 얼어붙은 경험을 하고 나서는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프랑스어로 시를 썼던 루마니아 시인 게라심 루카의 시 ‘Passionnément’1)에서 그는 ‘pas’라는, ‘발걸음’이라는 단어와 부정형을 분리해낸다. 그리고 그 분리된 단어들은 저마다의 발걸음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지나간다(passe). 그것은 아빠(papa), 교황(pape)의 발걸음이 되었다가 아빠와 교황에게 오줌을 누기도(pissez) 하고, 그러다 열정(passion)이 생기는 순간(passion-né)을 증언하기도 한다. 그렇게 지난한 해체의 소리로 가득 찬 여정을 마치고 그는 최후의 문장, ‘je t'aime passionnément’(나는 너를 열렬히 사랑해)에 도착한다.
이 최후의 문장은 꼭 그 문장이 아니어도 되었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의미를 찾기보다는 그 의미가 분절되고 해체되면서 다른 음성적인 가능성으로 변모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그는 이 떠돌이, 망명자, 0개 국어의 혀로 더듬더듬거리며 엇나간다. 그 엇나감을 통한 유희와 부딪힘이 이 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전복적 시도를 임유영의 시 「호로고루」에서도 흥미롭게 목격한 바 있다. 시인은 첫 연에서 자신이 이제 한국어를 꽤 유창하게 구사한다며 능청스러운 자신감을 내비치지만, 곧이어 ‘호로고루’라는 기이한 단어와 맞닥뜨린다. 한국어 원어민에게도, 웬만큼 언어에 능통한 이에게도 낯설기만 한 이 단어는 본래 경기도 연천군에 위치한 삼국시대 고구려의 성곽 이름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역사적 성곽이 가진 지시적이고 의미론적인 접근법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고정된 의미로부터 과감히 등을 돌린 채 멀어지기를 택한다.이젠 한국어가 꽤 유창하다고 자신했는데. 호로고루가 왔다. 호로고루에 부딪혔는지도. 호로고루와 만났다. 호로고루를 들었다. 호로고루를 보았다. 호놀룰루 아니라 호로고루. 호로자식 아니라 호로고루. 호록호록 호로록 호로고루. 전속력으로 헤엄치던 중이었는지도.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호로고루. 호로에 있던 오래된 보루가 있던 호로고루. 잊어버린 게 아니라 호로고루. 친구들에게 물어보려고, 호로고루 알아? 호로고로? 아니, 호로고루. 호루고루? 아니, 호로고루.
―임유영, 「호로고루」 부분
그 결과 고구려의 성곽이었던 단어는 언어적 미끄러짐을 통해 ‘호놀룰루’를 지나고, ‘호로자식’이라는 비속어를 통과하여, 급기야 아무런 기표적 의미도 남지 않은 의성어 ‘호록호록’에까지 당도한다. 이 여정을 거치며 ‘호로고루’는 견고한 역사적 유적지가 아니라, 소리의 질감과 리듬을 타고 유희할 수 있는 순수한 감각의 단어로 새롭게 갱신된다.
이처럼 언어가 관습적으로 쓰이는 방식을 배반하고, 그 사이에 낯선 균열을 내어 거리를 두는 태도야말로 질 들뢰즈가 『비평과 진단』에서 강조한 위대한 작가의 조건이 아닐까? 즉, ‘자신의 고유한 언어 안에서 이방인이 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이 쓰는 모국어 내부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언어를 조각해내는 일’ 말이다.
‘K-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문학이 세계 곳곳에 번역되는 시대, 이제 한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들은 그가 단일어 화자일지라도 끊임없이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 외부란 다른 언어들의 존재일 수도 있고, 혹은 번역 가능성일 수도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번역된 외국문학이 한국문학에 영향을 끼쳤다면, 이제는 그 화살표가 바깥으로,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것을 우리가 어느새 집단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한국어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으며, 번역할 때 난제가 되기도 하는 주어 생략, 인칭대명사, 문맥적 독해 등의 문제가 최근 발표된 작품들 사이에서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나의 오독일까? (아니면 인공지능의 영향일까?) 이렇게 매끄럽게 이식되는 유려하고 정확한 한국어는 한국 문학을 진정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까?
그 반대의 시도를 해본다면 어떨까? 한국어를 끊임없이 낯설게 보는 시도를 한다면? 한국어를 외국어처럼 사용한다면? 단어마다 시비를 걸고, 말의 울퉁불퉁한 결에 주목하며, 더듬고 헤맨다면? 그리하여 다른 언어로 결코 쉽게 옮겨지지 않는 문학의 영토를 구축하고, 모국어라는 안온한 성벽을 해체하여 거칠게 갱신한다면? 이방인도, 이방인의 시선을 가진 자도 한국어로 쓰며 한국어를 흔들어재낀다면? 번역이라는 매끄러운 통로를 배반한다면?
그렇다면 한국 문학에는, 그리고 한국어라는 언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